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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柳城)과 조선(朝鮮), 삼국(三國)왕릉(王陵), 신인(神人) 김유신(金庾信)
낙랑(樂浪)이 평양(平壤)인가, 대(大) 논란(論難) 벌어지다! <제4편>
○ 반도(半島)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역사(歷史)학문(學問)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학계(學界)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近代)에, 식민지(植民地)통치(統治)세력(勢力)들과 야합(野合)하여, 실증사학(實證史學)이란 개념(槪念)을 도입(導入),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으로 얼룩지게 만들었고, 실증사학(實證史學)의 선구자(先驅者)라고 할 수 있는 몇 분들의 친일(親日)행적(行蹟)은, 지탄(指彈)의 대상(對象)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古代)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고조선(古朝鮮)의 단군(檀君)임금을, 전설(傳說)이나, 판타지 정도(程度)로 만들어 놓은 자(者)들이기도 하다. 일부(一部) 종교(宗敎)에서는, 국조(國祖)의 초상화(肖像畵)를 우상(偶像)이라고 하여, 철거(撤去)하는 등의 몰지각(沒知覺)한 행위(行爲)는,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의 대표(代表)임을 자인(自認)하는, 어리석음의 극치(極致)를 보였다.
21세기(世紀)인 작금(昨今)의 시대(時代)에도, 식민지(植民地)시대를 회구(懷舊), 찬양(讚揚)하는 세대(世代)들이 있고, 당시(當時)의 친일(親日)분자(分子)들의 업적(業績)을 높이 사는 자(者)들도 있다. 이러한 자(者)들은, 식민지(植民地)시대에, 일제(日帝)에 협력(協力), 부역(附逆)한 자(者)들, 또는 그 후손(後孫)들로써, 「일제(日帝)로부터 부역(附逆) 대가(對價)로 받은 부(富)와 권력(權力)과 명예(名譽)를 세습(世襲)한 자(者)들인데, 이들은 대개(大槪) 지방(地方)호족(豪族)들」이며, 이들과 함께 하는 무리들이다. 인터넷에서도 이런 몰지각(沒知覺)한 행위(行爲)가 벌어지고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大韓民國)이다.
○ 매국(賣國)행위(行爲)는, 어떠한 이유(理由)와 사유(事由)를 불문(不問)하고, 존경(尊敬)받을 일은, 결코 될 수 없다. 정치인(政治人)·군인(軍人)·관료(官僚)·경제인(經濟人)·학자(學者)등, 예외(例外)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역사학(歷史學)을 이용(利用)하여,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과 야합(野合), 조국(祖國)의 역사(歷史)를 난도질한 자(者)들은, 국민(國民)들의 정신(精神)을 황폐화(荒廢化)시키고, 식민지(植民地)지배(支配)를 공고(鞏固)하게 고착(固着)화하는데, 앞장 선 자(者)들이다.
○ 이들은 시세(時勢)에 편승(便乘)하여, 『매국(賣國)행위(行爲)=친일파(親日派)+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친미파(親美派)+친일파(親日派)』라는 등식(等式)에 예외(例外)가 없을 정도(程度)로, 변신(變身)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래서 식민사학(植民史學)이라면 두드러기부터 나는 것이다.
○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조선(朝鮮)을 격파(擊破)하고, 한사군(漢四郡)을 두었고, 그 중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이, 반도(半島) 평양(平壤)이라고 주장(主張)하는 자(者)들이 누군가? 바로 반도(半島)의 사학자(史學者)들이다. 인간(人間)은 두 발을 땅에 딛고, 한 끼든 두 끼든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동물(動物)이니, 땅(地)이 있어야 하고, 그 땅에는 지형지세(地形地勢)가 있고, 그것에 따른 기후(氣候)와 풍토(風土)와 방향(方向), 특산물(特産物)등이 있는 것이, 바로 자연환경(自然環境)이다. 그렇다면 본인(本人)이 당신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➊ 낙랑(樂浪)이 반도(半島)평양(平壤)이라면 : 그 후에 일어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여러 나라들도 모두 반도(半島)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말이다. 전라도(全羅道) 땅이나 경상도(慶尙道) 땅이나, 역시 반도(半島)에 있었다는 것이 그대들의 주장(主張)인 바,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누구냐? 조선왕조(朝鮮王朝)의 걸출(傑出)한 임금이 아니냐! 이 세종대왕(世宗大王) 때의 왕조실록(王朝實錄) 지리지(地理志)편을 보면 :
➋ 특산물(特産物)로 《공물(貢物)로써, 정향(丁香)·대모(玳瑁)·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금귤(金橘)·청귤(靑橘)·산귤(山橘)등이 있고, 약재(藥材)로써 영릉향(零陵香)·곽향(藿香)·회향(茴香)등이 산출(産出)된다.》고 하였으니 곧,
➌ 나주목(羅州牧)의 귤(橘)생산지(生産地) 보면 :《영암군(靈巖郡)·강진현(康津縣)【백련사(白蓮社) 뜰에도 귤(橘)나무가 있었다.】 순천도호부(順天都護府) 고흥현(高興縣)등에서 귤(橘)이 산출(産出)된다》고 했고,
➍ 제주목(濟州牧)에서는 : 《대모(玳瑁)·감귤(柑橘)·유자(柚子)·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금귤(金橘)·청귤(靑橘)·산귤[山橘]·영릉향(零陵香)등이 산출(産出)되는데, 대정현(大靜縣)에서는, 감귤(柑橘)·유감(乳柑)·동정귤(洞庭橘)·청귤(靑橘)이 나오고, 정의현(旌義縣)에서는, 대모(玳瑁)·감귤(柑橘)·청귤(靑橘)·영릉향(零陵香)등이 나온다.》고 하였다. 수많은 품목(品目)이 있으나 특이(特異)한 것만을 고른 것이다.
➎ 경상도(慶尙道) 땅 역시, 귤(橘)과 자단향(紫檀香)·백단향(白檀香)·사향(麝香) 회향(茴香)·청목향(靑木香)등이 나오는데, 동래현(東萊縣)에서 귤(橘)이, 영산현(靈山縣)에서는 안식향(安息香)이, 영해 도호부(寧海都護府)에서는 자단향(紫檀香)이, 청송군(靑松郡)에서는 백단향(白檀香)이 나온다고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기후(氣候)와 토질(土質)과 관계(關係)가 있어, 토산물(土産物)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공물(貢物)이라고 하며, 또한 약용(藥用)으로 사용(使用)키도 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전(全)세계(世界) 어디에서나 자생(自生)하고 있는가? 이때는 2016년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565년 전(前)의 세종대왕(世宗大王)【서력(西曆) 1418년 ~ 1450년】때의 이야기다.
○ 이런 이야기는 조선사(朝鮮史)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이나, 유학자(儒學者)들의 문집(文集)등에 수없이 등장(登場)하는 대목인데, 어째서, 그대들은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침묵(沈默)만을 지키고 있는 거냐? 발상(發想)전환(轉換)의 계기(契機)로 삼아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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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낙랑제현고(樂浪諸縣考)【저자(著者) 주(注) : 한서(漢書)를 주본(主本)으로, 여러 책을 참고(參考) 인용(引用)하여 자세히 밝힌다.】
㉮《자치통감(資治通鑑) : 진(晋) 함강(咸康) 4년 조의 조선령(朝鮮令)이라 한 그 주(注)에, ‘조선(朝鮮)은 수(隋)의 요서(遼西) 유성현(柳城縣) 지경에 있다.’ 하였으니, 아마 낙랑(樂浪)이 고구려에 흡수(吸收)된 뒤에, 중국(中國)이 요(遼)에 옮겨 설치하고, 또 조선현(朝鮮縣)을 설치하였는가보다.》하였다.
➠ <조선(朝鮮)은, 수(隋)나라의 유성현(柳城縣)지경(地境)에 있다.>고 하였는데, 그대들은 “수(隋)나라의 유성현(柳城縣)이 반도(半島) 땅에 있다고 믿는가?”
유성(柳城)은 : 호(胡)들이 살던 곳으로 소위(所謂) 말하는 “유성호(柳城胡)”라고 칭하는 곳으로, 안록산(安祿山)이나 사사명(史思明)이 모두 이곳 출신(出身)이다. 이들은 6개 번족 언어(言語)에 능통(能通)해 호시랑(互市郞)이라는 관리(官吏)를 했으며, 이곳 주위에 여러 번족(蕃族)종족(種族)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新唐書/列傳 第150上/逆臣 上 / 安祿山,營州柳城胡也,本姓康.母阿史德,為覡,居突厥中,禱子於軋犖山,虜所謂斗戰神者,既而妊.及生,有光照穹廬,野獸盡鳴,望氣者言其祥.中略.通六蕃語,為互市郎 : 안록산(安綠山)은,【소그드인+돌궐인』사이에서 태어난 “잡호(雜胡)”】라고 하는데, 『영주(營州) 유성(柳城) 오랑캐』라고 하며, 그의 아버지(父)는 박수무당(覡)으로, 강(康)씨이며, 어머니(母)는 아사덕(阿史德)으로, 돌궐(突闕) 땅의 알락산(軋犖山)에서, 아들을 달라는 기도(禱)를 드렸는데, 잉태하여 태어났다. 이때 궁려(穹廬)에 광택이 비추고(光照), 야수(野獸)들이 맹렬하게 울어대, 그 기운의 상서로움을 본 자(者)들이 말했다. 그는(安綠山)는 『6 개 번족(蕃族)의 말에 능통하여』, 호시랑(互市郞)이 되었다.》
➠ 또 안록산(安綠山)과 함께 반란(叛亂)을 도모(圖謀)한 사사명(史思明) 역시, 녕이주(寧夷州)출신으로 돌궐(突闕)족이다. 그는 안록산(安綠山)과 동향(同鄕)이며, 하루 차이로 서로 태어났다고 전하며, 그 역시 6 개의 번족 언어(言語)에 능통하여 호시랑(互市郞)이 되었다고 한다.
➠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 『영주(營州)와 유성(柳城)』은 『현 하 북 성(河北省) 북경(北京)의 동(東)쪽 지방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현 하북성(河北省) 동(東)쪽의 인접(隣接) 땅, “영주(營州) 땅과 유성(柳城)지방”은 “소그드인과 돌궐(突厥)인”들이 살았으며, 또 이곳에 “많은 번족(蕃族)들”과 “선비족(鮮卑族)”들이 살았다.』고 해야 하는데, 『이곳은 “한족(漢族)들의 영광(榮光)과 영화(榮華)와 천혜(天惠)를 받은 경사(京師)지방”이니, 이를 어떻게 설명(說明), 이해(理解)시킬 수 있을까?』
➠ 또 이곳은, 고대(古代)로부터 많은 조선(朝鮮)의 나라들이 있었다는 설명(說明)은 또 무엇이며, 글란(契丹)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또 무엇인가? 선비(鮮卑)족들의 본거지(本據地)였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영주(營州)”지방은 『한족(漢族). 조선(朝鮮). 선비족(鮮卑族). 해(奚). 말갈(靺鞨). 실위(室韋). 글란(契丹). 소그드인(우즈베키스탄). 돌궐(突闕)인. 서로 다른 많은 번족(蕃族)등이 혼재(混在)하여 살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역사통설(歷史通說)이나 기록(記錄)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안록산(安綠山)의 "안(安)"이라는 성(姓)은, ‘소그디아나’의 우즈베키스탄의 ‘부카라’를 가리키는 이름에서 유래(由來)했다고 한다. 또한 안록산(安綠山)이란 이름에서 “록산(綠山)은 록 샨”으로 “빛나는”이란 뜻의 소그드 어(語)이며, 그의 반란(叛亂)은 소그드인으로부터 지원(支援)을 받은 소그드인의 반란(叛亂)이며, 안록산(安綠山)의 옥새(玉璽)에, “황제(皇帝)”와 소그드왕의 호칭인 “자묵”이 함께 새겨져 있었다는 것에, 그가 “범양(范陽)절도사”로 있었던 곳은 “현재(現在)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 지방이 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고증(考證)과 증거(證據)가 되고, 그곳은 바로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가르는 곳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곳에 범양군(范陽郡)이 있었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 : (16)의 낙랑제현고(樂浪諸縣考)로 볼 때 : 유성(柳城)은, 하북성(河北省) 내(內)에 있다. 이곳에 『한족(漢族). 조선(朝鮮). 선비족(鮮卑族). 해(奚). 말갈(靺鞨). 실위(室韋). 글란(契丹). 소그드인(우즈베키스탄). 돌궐(突闕) 및 번족(蕃族)등이 살았던 곳이며, 조선(朝鮮)은, 현(現) 하북성(河北省)에 있었다.』는 얘기다. 틀린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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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遂成) : 통전(通典)에 ‘좌갈석산(左碣石山)이 한(漢)의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는데, 진(秦)의 장성(長城)이, 이 산(山)에서 시작했다. 지금 증험(證驗)하니, 장성(長城)이 동(東)쪽으로 요수(遼水)를 가로질러서 고려(高麗)로 들어갔는데, 그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상서(尙書)에 「우갈석(右碣石)을 끼고 바다에 들어간다.」하였는데, 이것이 좌갈석(左碣石)이 된다.’ 하였다. 이 장성(長城)은 전국(戰 國) 말에 연(燕)이 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 좌갈석산(左碣石山)이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 있다고 하였는데, 반도(半島) 평양(平壤) 땅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느냐? 이 갈석산(碣石山)에서 진(秦)나라의 장성(長城)이 시작(始作)되었다고 하면 : 당시(當時) 반도(半島) 평양(平壤) 땅은 진(秦)나라 땅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말이 잘못되었는가?
➠ 장성(長城)이 동(東)쪽으로 이어져, 요수(遼水)를 건너, 고려(高麗)=고구려(高句驪)땅으로 들어왔는데, 그 유지(遺址)가 남아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구려(高句驪)는 요수(遼水) 동쪽에 있었다는 이야기며, 갈석산(碣石山)도 고구려(高句驪) 땅에 있어야 한다.
➠ 도무지 이해(理解)할 수 없는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 이야기가 아니냐? 위 기록대로라면 : 고구려(高句驪)는, 하북성(河北省)일부(一部)로부터, 현 북방(北方)삼성(三省)지방과 한강(漢江)이북(以北)이 영토(領土)였다는 이야기다. 이 영토(領土)안에 갈석산(碣石山)도 있어야 하고, 진(秦)나라가 쌓은 장성(長城)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秦) 본기(本紀)나 열전(列傳)을 보면 : 시황제(始皇帝)의 명(命)으로 태자(太子) 부소(扶蘇)와 몽념(蒙恬)과 4십만(十萬) 대군(大軍)은, 장성(長城)을 쌓다가, 시황(始皇)의 죽음으로 부소(扶蘇)와 몽념(蒙恬)이 죽게 되자, 중단(中斷)되었으며, 역사가(歷史家)들은 말하기를, <진(秦)의 장성(長城)은 양산(陽山) 북(北)쪽으로 뱀처럼 꾸불꾸불 이어지다가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양산(陽山)은 어디에 있는 산이냐? 대륙(大陸) 북방(北方)에도 그런 산(山)은 없다. 고지도(古地圖)에 이름만 있을 뿐, 그 실체(實體)가 없다.
현재(現在)의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보아도, 진(秦)의 장성(長城)은 섬서성(陝西省) 북방(北方) 내몽고(內蒙古)지대를 벗어날 수 없다. 함에, 진(秦)의 장성(長城)이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에서 시작(始作)됐다는 말은 무엇이며, 좌갈석산(左碣石山)이 있다는 얘기는 무엇이냐? 하는 거다.
➠ 이런 이야기는 반도(半島) 땅에, 옛 조선왕조(朝鮮王朝)가 없었다는 것이며, 이는 지형지세(地形地勢)와 방향(方向)등의 가장 중요(重要)한 것들과 부합(符合)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평양(平壤)도, 반도(半島)평양(平壤)이 아니며, 낙랑군(樂浪郡) 역시(亦是) 반도(半島)평양(平壤)에 없었다는 뜻이다.
○ 역사(歷史)연구(硏究)는, 다양(多樣)한 방면(方面)으로, 진실(眞實)을 고증(考證)하고, 증거(證據)해야 하는 학문(學問)이라고 보며, 그것은 발상(發想)전환(轉換)을 필수적(必須的)으로 요구(要求)한다. 반도조선(半島朝鮮)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학계(學界)는, 각성(覺醒)해야 하며, 조선사(朝鮮史)가 이루어진 그 땅은, 동방(東方) 땅이며, 그곳은 총령(葱嶺)의 동(東)쪽을 말하며, 그래서 동국(東國)이며, 동역(東域)이며, 진역(震域)이 되는 것이다.
○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말은, 반도사관(半島史觀)을 말하며, 식민사학(植民史學)에서 주장(主張)하는 영토관(領土觀)이 똑같다. 그 내용(內容) 역시 무엇이, 얼마나 다른가? 그게 그것이다. 그래서 반도사관(半島史觀)과 식민사관(植民史觀)은, 같은 사관(史觀)이라고 하는 것이다. 강단(講壇)계는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몰라도, 역사(歷史)는 인간(人間)과 땅을 떠나서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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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고려(高麗)의 왕릉(王陵)>은 어디에 있어?
《高麗史 : 顯宗 1 : 是月敎:高勾麗新羅百濟王陵廟令所在州縣修治禁樵採過者下馬. : 시월 교시하시기를 :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백제(百濟)의 왕릉(王陵), 묘(廟)가 있는 곳의 주현(州縣)에서는, 고치고 관리하는데, 그곳에서의 땔나무 채취하는 것을 금하고,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리도록 하라. 》고 명(命)을 내렸다는 이야기다.
㉮ 고려(高麗) 현종대왕(顯宗大王)이, 이런 특별명령(特別命令)을 내렸다면,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땅 안에,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와 신라(新羅)의 왕릉(王陵)과 묘(廟)=사당(祠堂)등이 있었으니, 관리(管理)하도록 한 것이 아니겠느냐!
㉯ 특히 땔나무 채취를 엄금(嚴禁)하도록 했다는 말은, 왕릉(王陵)이나 사당(祠堂)주변에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며, 이는 왕릉(王陵)이나 사당(祠堂)이, 우리의 상상(想像)을 초월(超越)하는 큰 면적(面積)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 반도(半島) 땅, 어디에, 누구의, 왕릉(王陵)이 있으며, 신주(神主)를 모셔놓은 사당(祠堂)이 어디에 있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주(慶州)에 있다는 신라(新羅)의 왕릉(王陵)! 그곳에서 신라(新羅)왕(王)이라는 금석문(金石文)이나 묘지석(墓誌石)이라도 발굴(發掘)되었는가? 전혀 없잖은가!
그저 두리 뭉실 누구, 누구 왕(王)일 것이라 추정(推定)할 뿐이 아닌가? 왕관(王冠) 또는 금동관이라는 것도, 해설(解說)하는 분들이 “왕관(王冠)”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일 뿐, 그것이 신라(新羅) 왕(王)의 왕관(王冠)이라는 어떤 증거물(證據物)도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 특히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시대에 많은 유물(遺物)이 대량(大量)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량(大量)이란 말은, 오죽 없으면 그렇게 표현할까?】고려(高慮)를 지나고, 근대(近代)의 조선왕조(朝鮮王朝)까지 무려 일천(一千)년!
㉲ 고구려(高句驪)가 28 대(代)이니 왕릉(王陵)이 28개소(個所)요, 백제(百濟)는 31 대(代)니 31개소(個所)요, 신라(新羅)는 56 대(代)니 56개소(個所)요, 고려(高麗)는 34 대(代)이니, 34개소(個所)요, 근대(近代)조선(朝鮮)은 고종(高宗)까지 26 대(代)니, 26개소(個所)이다. 모두 합(合)하면 무려 : 175 개소(個所)가 존재(存在)하고 있어야 한다.
보장왕(寶藏王)이나 의자왕(義慈王), 경순왕(敬順王), 우왕(禑王) 또는 창왕(昌王), 단종(端宗), 광해군(光海君)등의 왕들은 말왕(末王) 또는 폭군(暴君) 또는 혁명(革命), 반역(叛逆)등으로 인해, 자리를 빼앗긴 왕(王)들의 무덤을 큰 릉(陵)으로 조성(造成)했을 리 없으니, 이들을 빼고라도, 수많은 왕릉(王陵)들이 반도(半島) 땅에 존치(存置)되고 있어야 하며, 그 후손(後孫)들은 해마다 큰 규모(規模)의 제사(祭祀)를 지내야하며, 릉(陵)을 관리(管理)하던 ‘릉(陵)참봉(參奉)’【9품 말직(末職)이다.】이란 벼슬을 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아야 정상(正常)이다.
여기에다가 왕비(王妃)·왕자(王子)·공주(公主)·왕족(王族)등의 묘(墓)까지 생각하면, 반도(半島) 땅에서 토건(土建)을 하려다 보면, 이들 때문에 지장(支障)을 받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여야 정상(正常)일 것이다. 그러나 수십(數十)년, 반도(半島) 땅은 수없이 많은, 토건(土建)사업(事業)으로 인해 파헤쳐졌으나, 어디에서 무엇이 발견(發見)됐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 무령왕(武寧王)릉(陵)을 보자.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서남(西南) 모퉁이에 있어, 어느 날 무령왕릉(武寜王陵)이 발견(發見)되었다고 하면, 분명(分明) 그 나머지 왕(王)들의 릉(陵) 역시(亦是), 어딘가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 의자왕(義慈王)은 끌려가 타향(他鄕)에서 죽었다고 하니, 그를 빼고라도 말이다.
특히 온조왕(溫祚王)의 경우(境遇), 그는 개국시조(開國始祖)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온조왕(溫祚王)의 릉(陵)이나 사당(祠堂)은 어디에 있는 것이냐? 이 같은 예(例)는, 고구려(高句驪)나 신라(新羅), 고려(高麗), 근대(近代)조선(朝鮮)등 모두 같다. 개국시조(開國始祖)는 그 왕조(王朝)가 멸망(滅亡)하기 전(前)까지는, 최고(最高)의 예우(禮遇)를 받았다는 것쯤은, 역사의 기초(基礎)상식(常識)에 속하는 거다.
고구려(高句驪)의 경우(境遇)는 : 장지(葬地)를 보면 :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용산(龍山). 유리명왕(瑠璃明王)은 두곡동원(豆谷東原). 대무신왕(大武神王)은 대수촌(림)원(大獸村(林)原). 모본왕(慕本王)은 모본원(慕本原). 신대왕(新大王)은 고국곡(故國谷). 고국천왕(故國川王)은 고국천원(故國川原). 산상왕(山上王)은 산상릉(山上陵). 동천왕(東川王)은 시원(柴原). 중천왕(中川王)은 중천원(中川原). 서천왕(西川王)은 서천원(西川原). 봉상왕(烽上王)은 봉상원(烽山原). 미천왕(美川王)은 미천원(美川原). 고국원왕(故國原王)은 고국원(故國原). 소수림왕(小獸林王)은 소수림(小獸林). 고국양왕(故國壤王)은 고국양(故國壤)》이라고 하였고, 그 이후(以後) 왕(王)들의 장지(葬地)는 기록(記錄)이 없다.
여기서 원(原)에 장지(葬地)가 있는 분은, 10 왕(王)인데, 바로 《유리명왕(瑠璃明王)은 두곡동원(豆谷東原). 대무신왕(大武神王)은 대수촌(림)원(大獸村(林)原). 모본왕(慕本王)은 모본원(慕本原).고국천왕(故國川王)은 고국천원(故國川原). 동천왕(東川王)은 시원(柴原). 중천왕(中川王)은 중천원(中川原). 서천왕(西川王)은 서천원(西川原). 봉상왕(烽上王)은 봉상원(烽山原). 미천왕(美川王)은 미천원(美川原). 고국원왕(故國原王)은 고국원(故國原)》등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의 가설(假說)을 만들어 보자.
진(秦)때의 구원군(九原郡)은, 전한(前漢)때 오원군(五原郡)【宋白曰五原郡有原五所,故名,謂龍遊原,乞地于原,青嶺原,岢嵐真原,橫槽原也.】으로 개명(改名)되었는데, 그 연유(緣由)가 그곳 땅에 ‘큰 원(原)’이 다섯 개가 있어, 그것을 취(取)해 군(郡)의 이름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니, 진(秦)나라 때는 구원(九原)이었으니, 9개의 큰 원(原)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틀렸는가?
➠ 이것을 고구려(高句驪) 왕(王)들의 장지(葬地)인 『원(原)』과 비교(比較)를 해보라. 물론(勿論), 이것은 가설(假說)에 지나지 않으나, 형편(形便)이 이와 같다는 이야기다.
㉴ 백제(百濟)가 대륙(大陸) 동해안(東海岸) 지방(地方)을 경략(經略)하고, 본조(本朝)는 반도(半島) 서남(西南)에 있었다고 하는 이런 이야기가, 바로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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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반도(半島) 평양(平壤)이 낙랑군(樂浪郡)이다>라는 설(說)에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 : 麟德,二年,高宗遣使梁冬碧.任智高等來聘.兼冊庾信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 : 인덕 2년, 고종(高宗)의 사신 양동벽과 임지고등이 내빙(來聘)하여, 겸하여 김유신(金庾信)에게 ‘봉상정경 평양군(平壤郡) 개국공(開國公)’에 책봉하고, 식읍 2천 호(戶)를 주었다.》고 하였다. 한 번 따져보자.
㉮ 그대들은 “신라(新羅)”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한다. 그런데 말이다. 그 삼국통일(三國統一)의 대업(大業)을 완수(完遂)한 김유신(金庾信)에게, 당(唐)나라의 고종(高宗)이, 지 마음대로 고구려(高句驪) 땅【뒤에 신라(新羅)】 인 평양(平壤)땅을 나누어 평양군(平壤郡)을 두고, 그곳의 백성(百姓)들 2천호(千戶)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느냐 하는 문제(問題)다.
반도(半島) 평양(平壤)의 평양군(平壤郡)의 식읍(食邑) 2천호(千戶)를 받았다는 그곳은 어딘가? 누구도 알 수 없는, 아는 사람이 없잖은가? 이것이 아니라면 “평양군(平壤郡)”은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 김유신(金庾信)이, 통일(統一)과업(課業)을 완수(完遂)한 훌륭한 인물(人物)이었다면, 당연(當然)히 그에게 책봉(冊封)한 것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이었어야 맞는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結局), 신라(新羅)는 삼국통일(三國統一)과는 관계(關係)없는, 당(唐) 황제(皇帝)의 명령(命令)으로, 수만(數萬)의 군대(軍隊)를, 지원병(志願兵)으로 참여(參與)했을 뿐이었다.
김유신(金庾信)! 당황(唐皇)의 입장(立場)에서 보면 : 여러 차례 당군(唐軍)을 위해, 한 목숨 다 바쳐 헌신(獻身)한 인물이다. 소정방(蘇定方)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包圍)하고 있을 때, 날씨는 춥고, 군량(軍糧)은 떨어지고, 오도가고 못해 수만(數萬)의 군사(軍士)와 함께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을 때,【고구려(高句驪)군은 이때를 기다린 것이다.】김유신(金庾信)이 고구려(高句驪) 땅 1천리(千里)를, 수레에 군량미(軍糧米)를 가득 싣고 와, 소정방(蘇定方)을 구원(救援)해줬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칠중성(七重城)【임진강(臨津江)에 있는 성이라고 한다.】이 있는 칠중하(七重河)를 건너, 고구려(高句驪) 땅 일천(一千)리를, 수레에 군량미(軍糧米)를 가득 싣고 행군(行軍)하는데, 고구려(高句驪)의 정예병(精銳兵)이나 지방군(地方軍)은, 김유신(金庾信)을 향해, “어서 오세요”라고 했다는 말과 같다.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적국(敵國)인 고구려(高句驪) 땅, 일천(一千)리를 수레를 끌고, 겨우 수천(數千)의 군사(軍士)로 통과(通過)할 수 있었을까?
【사실은 요 칠중성(七重城)과 칠중하(七重河)도, 큰 문제(問題)가 걸려있다.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생략하는 것이다.】
또 기록(記錄)하기를 :《良 圖 以 兵 八 百 人, 泛 海 還 國. : 양도(良圖)와 병사(兵士) 8백인은, 해로를 통하여 나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병사(兵士)수천(數千)·9명의 장수(將帥)·마부(馬夫)·’등이 수레에 군량미(軍糧米)를 가득 싣고, 육로(陸路)로 고구려(高句驪) 땅 1천리(千里)를 귀신(鬼神)같이 통과(通過)하여, 아사(餓死)와 동사(凍死) 일보직전의 소정방(蘇定方) 군대(軍隊)에 군량미(軍糧米)를 전해주고, 양도(良圖)와 8백의 군사(軍士)는 어디에서 배(舟)를 구해, 어느 바다를 통해 신라(新羅)로 돌아왔다는 얘긴가? 세작(細作)=간첩(間諜)을 미리 보내어, 전함(戰艦)을 훔쳐 대기(待機)라도 하고 있었다는 것이냐?
양도(良圖)이하 8백의 군사를 뺀 나머지 군사(軍士)와 마부(馬夫)와 김유신(金庾信)을 포함(包含)한 장수(將帥)들은, 비상계엄(非常戒嚴)이 선포(宣布)된 고구려(高句驪) 땅, 1천리(千里)를 남하(南下)해야 하는데, 고구려(高句驪) 백성(百姓)들이나, 군사(軍士)들은, “어서 가세요.” 했다는 말과 같다. 이건 아니잖은가!
고구려(高句驪)는 막강(莫强)한 군력(軍力)으로, 수양제(隋煬帝)의 정규군(正規軍) 백만(百萬)명 이상(以上)을 도륙(屠戮)했다. 김유신(金庾信)은, 신(神)의 아들이었던가? 그렇지 않다면, 반도조선사(半島朝鮮史)를 위해, 과장(誇張)된, 포장(包裝)된 인물(人物)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심(疑心)은 역사(歷史)를 공부(工夫), 연구(硏究)하는 분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 삼국통일(三國統一)을 했다고 역사해설(歷史解說)을 하는가! 바로 그대들이 아닌가? 그러면 <백제(百濟) 땅이 발해(渤海)와 말갈(靺鞨)과 신라(新羅)가 적당(適當)히 나눠가졌다>고 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記錄)은 뭐냐는 것이다.
● 이러고도 『반도(半島) 평양(平壤)이 낙랑군(樂浪郡)이다』라고 말하는 그대들은…사학자(史學者)일 수 없다. 주장(主張)이 있으면, 주장(主張)에 걸 맞는 논리(論理)가 필요(必要)한 것이고, 논리를 구성(構成)하는 문헌(文獻)의 고증(考證)이 필요(必要)한 것이며, 필요(必要)하다면 유물유적(遺物遺跡)의 증거(證據)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맞춰, 그곳의 환경적(環境的) 요인(要因)인 지세(地勢)와 방향(方向), 기후(氣候), 토산물(土産物), 특이(特異)지형(地形)등과도 부합(符合)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基本)일 것이다.
무조건(無條件), 막무가내(莫無可奈)로 『반도(半島) 평양(平壤)이 낙랑군(樂浪郡)』이라는 이야기는, 바로 20세기 초(初), 일본(日本)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과 서구(西歐)열강(列强)과 대륙(大陸)의 남방(南方)과 서남방(西南方) 만이(蠻夷)들이 만들어 놓은, 반도사관(半島史觀)인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줄거리라는 것을 인식(認識)해야 한다.<끝>
2016년 03월 19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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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반도사학계!
이 분들도 참 답답할 것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고려사절요등등을 한 번 봐도, 그 속의 내용을 보면, 반도를 벗어나는 일들이 허다하니, 이것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며, 역사해설을 할까? 거기에 두번, 세번, 정독을 하게 되면 역사서 속의 내용이 훤하게 보이는데, 이때쯤이면 "반도"라는 울타리는 벗어 던지지 않고는 역사서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바다물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현재까지로 보면, 진화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선사를 연구, 공부하는 분들은 일단 반도라는 울타리를 벗어 던지고, 역사서 속에서 말하는 자현환경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합니다. 자연환경은 인간이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는 반도사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보면 : 대륙 남부와 인도차이나반도, 인도대륙등지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현재에도 약품이나 식물을 그곳으로부터 수입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런 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반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자랄 수 있는 자연환경이 되려고 하면 : 반도 땅은 열대와 아열대지방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식물들이 수백년 전에 반도에서 자생했다는 흔적도 없으며, 멸종되었다는 어떤 특이한 증거나 흔적도 없습니다. 결국 답은 하나로써, 당시의 조선의 땅은, <반도 땅이 아니다>라는 것이죠. 이게 중요한 것인데, 사고전환이죠.
요즘 인터넷 카페등지에, 세종실록지리지, 여지승람, 유학자들의 문집등에서 제주도 귤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보니 : 향토사학까지 가세하여, 현 제주도에 많은 귤들이 수천년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이러한 것들이 바로 조선사를 스스로 왜곡, 조작하는데 앞장 서고 있다는 것이죠. 무지함을 탓할 수는 없지만, 이런 무지로 인해 조선사는 스스로 작아지고, 조작되어 반도 땅에 빌 붙게 됩니다. 동정귤이라고 하니, 국어사전에서는 맛있는 귤을 말한다고 하는 웃기는 설명을 합니다. 동정귤은 동정호 주변 귤이고, 온주밀감은 온주 주변 귤을 말함인데, 맛있는 귤을 동정귤이란 말은 코메디죠. 거짓과 진실! 분별력이 문제죠.
안녕하세요.... 글 잘 보았읍니다. 정말 불철주야 역사의 진실을 찾아 노력하시는 모습에 숙연한 마음 금할길이 없읍니다.
아래의 답글은 단지 제 생각이니 그냥 편히 보시길 바랍니다.
안록산은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으로 부족 지도자인 카간이 죽자 혼란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고 백과사전에 나오는데 그들이 정착한곳이 유성였던 모양입니다. 유성은 무종(옥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안록산은 연행사들이 갔던 북경 주변에서 활동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소그드나 돌궐에서 북경주변으로 이주해와 그곳에서 정착한 후 세력을 얻어 반란을 도모했던 것이 아닌지요....?
또 ‘755년 평로(平虜)‧범양(范陽)‧하동(河東) 지구를 총괄하는 절도사가 되어 15만 병력을 일으켜’.....라 하여 범양은 북경주변인데 하동은 어디일까요..? 지금의 황하 주변이 아닌지요...
‘많은 조선의 나라들’....이 말은 김정민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조선은 연방국가의 형태로 주로 북방의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젔다고 하며 지금의 카자흐스탄도 그 일부이며 북방의 여러 민족들에 전해오는 유사한 내용의 건국신화(?)들도 같은 맥락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연방국가의 정점에 그야말로 중국(中國)이 있고 그곳은 사방 천리 정도이며 그곳이 조선의 오랜역사의 중심지이자 수많은 정치적 격변장소였던 것이 아닐런지요... 조선이 수나라의 유성현 지경에 있다는 것도 그래야 이해가 되며(조선 ; 조선의 중앙정부인 중국) 이러한 중국에는 많은 민족의 사람들이 함께 살던 그런 곳이 아니었나 합니다.
지금의 서울에 서울 토박이들만이 아닌 충청 경상 전라 제주도 등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처럼요....
6개번족의 언어에 능통했다는 안록산도 그래야 이해됩니다.
진의 장성이 낙랑군 수성현 갈석산에서 시작되었다... 이 말도 사실일 것입니다. 단지 낙랑군(즉 평양)이 반도에 있다는 강단식민사학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고 (이들은 기존 주장을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기에 반도에 어울리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나주의 동정귤, 수성현 갈석산 등등.....)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의문점을 설명하고 해결해 주어야 학자라 할수 있는 것 아닙니까?....그러니 한사군에 관한 논문이 1000편이 넘어도 해결이 안나는 것이고 반도 평양을 고수하는한 결론은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가 좀 빗나갔지만 ‘진의 장성이 양산(陽山)북쪽에 꾸불꾸불.....’ 에서 양산은 수양산을 말하는 것 일 것입니다. 수성현 갈석산도 반도사학에 의하면 수성현을 수안군(황해도)으로 추정(?)한다고도 하지만 이는 수성현과 갈석산 양산(수양산) 평양 낙랑군 진장성 패수등등이 같은 곳에 있어야 함을 모르고 하는 소리로 그야말로 어불성설이죠.....
왜곡자들이 지금의 수안(황해도)과 송림을 평양과 가까이 설정해 놓은것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좀더 폭넓게 보자면 조선사와 이른바 중국사는 분리해서 볼수 없다 생각됩니다.
이 좁은 반도땅이,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의 수많은 왕이 있었고 또 뭍혔을 것인데 국토를 개발하는 과정에 고대(구,신석기 청동기)문화는 가끔 발견되는데 고,백, 신 고려왕들의 무덤은 발굴이 안되니 의아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온 나라의 땅을 개발이라는 이름하에 달달 볶듯 갈아 엎어도 시원스런 왕릉 하나쯤은 나와줘야 함에도 .......
진의 구원군과 전한의 오원군 그리고 고구려왕들의 장지인 원(原)과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며 이 또한 조선사와 이른바 중국사가 서로 별개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런지요...
동북아역사재단 국회특위를 보니 일본 우익세력의 교묘한 역사침략과 조선사편수회의 논리가 지금도 버젓이 그대로 뿌리밖고 있다 하니 지금의 강단사학에 역사의 진실을 기대하기란 진작 물건너 간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 없읍니다.
맑은영혼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참 마음이 씁쓸하네요 ㅠㅠ
국민들을 상대로 역사를 속이고, 선대를 능멸하며, 국민들과 후세의 후학들을 기만하는 하는 것은, 크게 그릇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천하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작금에 일본이 하는 짓들을 보십시요, 그자들이 한국의 모습을 어떠한 모습으로 바라 보겠습니까 ?
반도의 조그만 땅에 대륙의 영웅들을 옮겨 놓는다고, 그 분들의 유적과 능과 묘들이 반도로 날아 올리가 없습니다.
역사의 영웅과 호걸들은 역사의 무대가 있는 것이, 영웅 호걸들의 역사가 있는 것이겠지요.
문무 선생님의 노고에 항상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여러 회원님들의 성원에 힘입어 건강도 괜찮습니다. 조선사의 대략적인 구도가 중요한 것이고, 세부적인 구도는 조금씩 생각함이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은 사소한 문제일 수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조선왕조가 반도에서 일만년 아니면 오천년을 이어왔는가? 아니면 말 그대로 <동역=동국=동방=진단=진역> 땅에서 엉겁의 세월을 유지했는가? 하는 거라고 봅니다. 수천년 영겁의 세월동안 눈을 뜨고, 흥망성쇠를 경험할 수 없는 관계로 역사서의 소중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곳에 빼곡하게 기록해 놓은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암호 해독같은 이야기들을 매일 해보았자, 증거도 고증도 되지 않지요.
또 핵심적인 요소는 땅이 있음으로 인한 기후풍토와 같은 자연환경일 겁니다. 이와같은 자연환경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속, 종족의 형상등등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이야기하는 사관이 바로 반도사관이라고 봅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료를 기초로 조선의 진면목을 하나 하나 파헤쳐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 회원님들의 관심과 성원 감사드리며, 더 좋은 게시글을 부탁드리고, 저 역시 좋은 게시글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 건강하시길 빕니다.
허구 반도설은 사라져야 합니다 조선총독부 편수회에서 만들어준 조선사 35권은 식민지 삶 수긍 잘 하라고 만든 노예사 입니다 해방후 세작 이병도의 농간으로 검증도 못하고 수정 없이 그대로 답습은 참형 시킬 매국노 짓이죠 지금도 왜놈이 만들어준 조선사 35권 검증서 어디 있습니까 검증서 없이 정사라고 우기면 천벌 받지요 그러고도 역사학자라고 말할 철면피들은 누구인지 알여야 합니다 세작에 후손은 사형 시켜야 하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