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노벨 경제학상 받은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 (Daniel Kahneman) 교수
당신의 상식은 틀렸다. 수십만명 행동실험 결과 엉뚱한 결정하는 경향 커, 암보다 테러·지진 등…
확률 낮은 위험 과대평가 "주관적 자신감은 감정일 뿐… 빠른 사고는 '내가 보는 게 세상(WYSTI·what you see is all there is)의 전부'라는 함정에 빠져"
"저는 고정관념에 기초한 인간의 두루뭉술한 사고와 편향성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인간이 모두 비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합리성'이라는 개념은 매우 비현실적입니다. 저는 '합리성'이란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싶을 뿐입니다."
2002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경제학상 시상식. 이스라엘 출신의 한 심리학자가 밝힌 이 수상 소감은 주류 경제학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학창 시절에 단 한 번도 경제학 수업을 듣지 않은 심리학자가 사상 처음 주류경제학자들의 '텃밭'인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데다가, 아예 '인간은 합리적 선택을 하는 존재'라는 주류경제학의 기본 토대 자체가 잘못됐다고 '폭탄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대니얼 카너먼(Kahneman·78) 프린스턴대 명예교수.
지금까지 역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총 69명) 가운데 비(非)경제학자는 4명인데 그중 한명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단연 돋보인다. 인간이 판단·결정을 할 때 얼마나 비합리적일 수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경제활동을 하는지를 들여다보는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의 창시자이자, 대부(代父)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수십만명의 인원을 실험에 동원해 50여개의 이론을 정립했다.
현대 자본주의의 동맥(動脈)인 주류 경제학은 '인간은 이성적인 노력으로 최대한 똑똑한 결정을 내린다'는 대전제를 깔고 있다. 그러나 카너먼 교수의 결론은 완전히 다르다. 이성이 판단을 지배하기는커녕 인간은 비합리적이고 상식 밖의 결정을 하는 성향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주관에 휘둘려 충동적이며, 집단적으로 똑같이 행동해 자기 과신(過信)과 편향에 빠집니다. 때로는 자신이 보는 대로, 때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결정하는 존재입니다."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
그가 정립한 '합리적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영향으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비합리적 의사결정을 한다'는 '전망 이론(Prospect theory)'은 세계적인 행동경제학 열풍을 낳았다.
"카너먼 교수 이전에는 행동경제학이란 장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행동경제학'이란 학문의 첫 페이지를 연 대가(大家)이다."(이준구·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카너먼 교수를 포함한 행동경제학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동원해 주식시장의 거품, 기업의 독단적인 결정, 돈에 눈먼 금융회사의 행태 등을 집중 공격했다. 이들은 합리성으로 포장된 인간의 이면(裏面)에 숨겨진 비합리성의 허물을 벗겨 내면서 '개인은 물론 집단도 비상식적인 판단·결정으로 몰락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빠져 뭐든지 잘될 거라는 낙관주의와 과도한 자신감에 빠져 있으며 이런 비합리성이 자본주의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금 같은 기업의 의사결정, 소비자의 행동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세계 경제에는 2000년대 초 IT 버블이나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같은 거품(bubble)문제가 계속 발생할 것입니다."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 사는 카너먼 교수를 Weekly BIZ가 국내 언론 최초로 직접 찾아가 만났다. 그의 50년 연구성과를 농축한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fast and slow)'이 지난해 10월말 미국에서 출간된 지 딱 5개월 된 날이었다. 80세를 앞둔 고령인데도 카너먼 교수는 시종 활력이 넘쳤다.대니얼 카너먼(Kahneman) 미국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의 핵심 논지는 '뇌에는 두 가지 생각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빠른 사고'(fast thinking)와 '느린 사고'(slow thinking)이다.
빠른 사고는 감성적이며 직관적으로 즉각 작용하지만, 느린 사고는 천천히 논리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통제한다. 대부분 사람은 빠른 사고를 하면서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리고 문제를 일으킨다.
예를 들어 보자.
"야구방망이와 야구공을 합쳐 1달러 10센트다. 방망이는 공보다 1달러 더 비싸다. 공의 가격은 얼마인가?" 카너먼 교수는 "대부분 사람은 곧장 10센트라고 답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오답(誤答)이다.
공이 10센트이고 방망이가 1달러 더 비싸다면 방망이는 1달러 10센트로 방망이와 공을 합쳐 1달러 20센트가 된다. 결국 공은 5센트가 돼야 방망이(1달러 5센트)를 합쳐 1달러 10센트가 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 과학전시관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물었다.
"기름 유출에 피해를 본 새들을 구하기 위해 5달러를 기부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방문객들은 평균 20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질문에서 기부금액을 5달러에서 400달러로 높여 보니 사정이 달라졌다. 평균 143달러로 기부금이 확 높아진 것이다.
질문에 제시한 기부금액에 따라 천차만별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는 강조한다.
"빠른 사고는 결국 '당신이 보는 게 세상의 전부(WYSTI·what you see is all there is)'란 함정에 빠지게 된다. 빠르고 사려 깊지 못한 의사결정은 과신(過信)과 낙관주의로 이어진다.
논리적이고 느린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을 알지만, 그걸 하지 않는다. 이득보다 손실의 불만족을 두려워하게 되고, 편향적인 판단을 일삼는다."
직관적인 사고의 위험성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을 성급히 사실이라 믿어버리는 경향 커
자신을 부정하는 걸 본능적으로 거부
카너먼 교수는 뉴욕 맨해튼 중심부에 있는 타임스퀘어에서 3㎞쯤 떨어진 한 고급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132㎡(약 40평)쯤 규모로 전 프린스턴대 교수인 부인과 함께 카너먼 교수가 20년간 지내온 곳이다. 거실 벽면 곳곳에 유화(油畵)가 걸려 있는 소파에 카너먼 교수와 마주 앉았다. 기자가 질문을 하기 무섭게 그는 속사포처럼 대답했지만,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질문엔 한참 고민하다가 입을 뗐다.
―'빠른 사고'를 강조했는데 인간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인가.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을 성급히 '사실'이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크다. 스스로 비판적이기가 너무 어렵다. 직관을 거부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일을 본능적으로 싫어한다.
잘못된 의사결정이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에도 방치하는 경향이 높다."
―왜 인간은 '빠른 사고'에 익숙해졌는가.
"사람의 자아에는 기억 자아(remembering self)와 경험 자아(experiencing self)가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과거의 경험을 다양한 각도로 분석해서 판단하지 않고, 기억 자아에만 의존해 내가 하고 싶은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상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 자아를 고려해 종합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은 없을까.
"느리고 빠른 두 가지 사고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혼자서는 통제력이 떨어져 어렵다. 개인보다 조직이 오류를 잘 피할 수 있다.
조직은 개인보다 천천히 생각하고, 질서 정연한 절차를 부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은 더 정교하게 개인을 훈련시킬 수 있고, 서로의 잘못을 봐줄 수 있다."
글로벌 경제의 거품위기가 터질 때마다, 파이낸셜타임스(FT)·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들은 카너먼 교수에게 달려갔다. 기존의 경제적 이론과 판단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분석적 설명을 듣기 위해서다. 카너먼 교수는 이날 지난 10년간의 경제위기와 기업과 소비자의 의사결정 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았다.
―지속적인 '버블' 현상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결과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데.
"당연하다. 과도한 자신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투자한 돈 이상을 거둬들이게 될 거라고 맹신했다. 이른바 소유 효과(endowment effect)다.
내가 소유하면, 다른 사람이 소유할 때보다 더 큰 가치가 있고, 섣불리 되팔기 싫다는 그릇된 믿음에서다.
가령, 20달러짜리 시계도 내 소유이면 40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누가 30달러에 사겠다고 하면 '말도 안 된다'며 거절하는 것이다. 이런 과도한 자신감이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힘이다. 사실 나에게 그동안 경제적 측면에서 버블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뭔가 변하지 않는다면 이런 위기는 계속 찾아올 것이다."
▲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팔순(八旬)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외관상 정정했다.
매일 러닝머신을 이용해 운동하며 건강을 유지한다는 그는“대기업 컨설팅을 하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 연구가 될 인간의 행복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 정부 수립 후 이스라엘 국적자로 5번째 노벨 수상자인 그는“자녀의 사소한 아이디어도 존중(respect)해주는 이스라엘의 교육환경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원동력”이라고 했다. 카너먼 교수는 Weekly BIZ와의 인터뷰에서“비합리적인 선택과 결정은 인생에 도움이 안되므로 평소 스스로 깨달으려는 노력을 기울여 고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 뉴욕=이신영 기자
―그럼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편향적인 CEO들의 의사결정이다. 사람들은 자기 어깨너머로 자신의 결정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싫어한다. 실패를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는다.
CEO들은 자신을 스스로 태풍을 헤쳐나가는 선박의 선장(captain)이라고 생각한다. '나한테 맡겨라. 내가 해결해주겠다!'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CEO들은 의사결정이 도박(gambling)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장의 역할은 제한적이며, 배가 침몰할 수 있다."
―기업이 의사결정을 잘하려면 뭐가 달라져야 하나?
"기업은 단순히 상품만을 만드는 조직이 아니라, 의사결정을 생산하는 공장(decision making factory)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TV를 만드는 회사는 부품관리를 하는데, 왜 그 TV 회사는 의사결정의 품질 관리는 안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의사결정을 돌아보는 시스템적인 구조를 만들고, 전체적인 경험을 토대로 되돌아봐야 한다."
―의사결정상의 문제를 드러낸 대표적인 기업을 꼽는다면?
"필름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코닥(KODAK)이다. 코닥은 수익률이 가장 좋을 때 혁신을 못했다. 코닥이 파산으로 몰리게 될 가능성은 매우 명백했다. 빨리 유동성을 공급했어야 했다. 문제는 손실을 회피하느라 불확실한 결정을 내렸다는 데 있다. 회사 이미지가 상하게 될까 봐 '아직 배가 침몰하진 않았다'는 임시방편적인 결론을 계속 내린 것이다. 재빠르게 팔 건 팔고, 주주들을 설득하고…. 그런 의사결정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브리티시 페트롤리움(BP)도 2010년 4월 멕시코만 대형 기름유출 문제를 냈으나 다른 회사 탓이라고 계속 변명하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사과했다.
"BP의 전 CEO인 토니 헤이워드(Hayward)는 자신의 의사결정을 도울 유능한 코치(측근)가 회사에 있었다. 만약 CEO와 코치가 관계가 좋았다면 의사결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헤이워드는 코치의 말을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일본은 쓰나미 문제로 원전의 방사능 유출 문제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쓰나미가 올 것을 알고도 안전문제에 소홀했다고 지적한다.
"물론 쓰나미로부터 안전을 지키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쓰나미에 대비하는 계획을 최초에 세웠어야 했다.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의사결정의 틀이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실패에 대한 결정이 최초에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발생 가능한 오류를 포함해 계획을 세워야 하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은 '과도한 자신감'을 기업의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한국도 저축은행 여러 곳이 과신에 빠져 부동산업자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빌려줬다가 거품이 꺼지자 유동성 위기로 영업정지됐다.
"금융회사는 '뭐든지 하면 된다'는 낙관주의로 무리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쏜 화살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짓을 중단해야 한다. 소비자에게 로열티(loyalty)를 강요하지만, 결과적으로 전후 사정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꼴이다. 금융회사는 소비재를 파는 기업보다 상대적으로 (소비자로부터의) 피드백이 그만큼 적어 피부로 체감을 잘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는 어떻게 경제활동을 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대해, 카너먼 교수는 "적정가격이 존재하지 않은 주식시장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통 주식 매수(買收)자는 주식이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고 여기지만, 매도(賣渡)자는 같은 주식을 두고 주가가 너무 높아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여긴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적정가격이 없는 주식시장을 재산을 몽땅 날릴 수도 있는 대표적인 '비합리적 공간'으로 뽑는다.
―주식거래를 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은 무엇인가?
"주식의 수익률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내가 왜 주식을 샀는지 끊임없는 관리가 필요하다. 내가 사고자 계획을 짰던 주식을 왜 사야 하는지, 내가 왜 안 사는지 이유도 만들어야 한다.
너무 자주 주식거래를 하면 안 된다. 주관적인 자신감은 감정일 뿐이다. 시장 평균을 웃도는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고집스럽게 믿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3개의 뮤추얼펀드(mutual fund)가 있다면 2곳은 특정 해에 전체 시장 평균보다 투자 수익률이 낮다. 펀드 성과나 수익과 해당 관리 직원의 능력과의 관련성은 1% 수준밖에 안 된다."
필름의 제왕 코닥의 몰락
수익률 가장 좋을 때 혁신 못해
회사 이미지가 상하게 될까 봐 임시방편적인 결론만 계속 내려
주식 거래를 할 때 유의점
시장평균 웃도는 수익 낼 수 있다는 막연한 낙관주의 때문에 무리수 둬
내가 왜 샀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애플의 주가가 주당 600달러대까지 올라갔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애플 주식을 사지 않으면 바보로 평가받는다. 주변 사람들이 애플 주식을 갖는 게 굉장히 현명해 보이니까 사는 것이다. 얼마에 팔지, 얼마를 유지할지는 모른다. 과장된 것으로 본다.
어느 순간엔 내려가지 않겠느냐?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카너먼 교수는 "사실 나는 수년 전 재무관리사로부터 '해고'를 당했다"고 했다. 공격적인 투자를 원하는 재무관리사와, 물가상승률보다 조금 나은 수익을 추구하던 그와 마찰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굉장히 보수적이라서 주식투자를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교수님은 "창업하는 사람은 처음에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상당수가 망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경제활동은 낙관주의에 따라 움직인다. 그들에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라'고 얘기해줄 수 없다. 다만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면밀하게 분석하고 창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물론 내 친구가 창업한다면 말릴 것이다(웃음)."
―당신의 사상을 평가한다면?
"행동경제학은 시장이 완벽하고, 기업은 합리적이며 소비자를 보호해준다는 기존의 주류경제학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앞으로 더 성장할 것이다. 이 학문에 많은 사람이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왜 선택의 기로에서 주먹구구식 판단을 하나
카너먼 교수의 '전망 이론' 동전 뒷면이 나오면 100달러 잃고, 앞면이 나오면 150달러 받는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내기에 안 응해, 100달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전망(Prospect) 이론'으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그 이론이 나온 후 인간의 경제적 선택 행위를 추적하는 연구들이 쏟아졌다. 이 연구들의 결론은? 의외로 현실 세계에서 인간은 경제학이 상정(想定)하는 합리적(rational) 인간과 정반대로 비합리적(irrational) 측면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주식 투자·부동산 거래, 복권 구매 등에서 비합리적 결정
딸의 결혼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 중인 주식을 일부 처분해야 할 중년 신사가 있다. 한 종목에선 지금까지 5000달러를 벌었고, 다른 종목에선 5000달러를 잃었다. 어느 종목을 팔까.
합리적 투자자라면 주식 매입가와 상관없이 앞으로 전망이 좋은 주식은 갖고 있고 그렇지 않은 주식을 팔 것이다. 하지만 통계분석은 투자자들이 전망과 별도로 매수 가격보다 오른 주식을 파는 걸 훨씬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유자산 가격이 매수 가격 이하로 떨어졌을 때 매도를 꺼리는 것이다.
'전망 이론'은 인간이 확률을 정확하게 따지기보다는 경험·감정에 비춰 어림짐작의 주먹구구식 방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사람들은 테러·수해·지진처럼 일어날 확률이 극히 낮은 사건의 발생 가능성을 실제보다 높게 예상하고, 암·뇌졸중·당뇨병 등 확률이 비교적 높은 것은 실제보다 낮게 예상한다. 당첨 확률이 매우 낮음에도 복권을 경쟁적으로 구입하거나 감염될 확률이 매우 낮은데도 광우병에 걸릴까 봐 쇠고기를 먹지 않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이례적인 일에 과도하게 가중치를 부과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 때문이다.
◇연봉과 불일치하는 행복감, '위험 회피' 선호(選好)하는 인간 심리
'전망 이론'에 따르면 연봉이 2500만원과 3500만원인 A,B 두 사람 가운데, 반드시 B의 행복지수가 더 높은 것은 아니다. 지난해 A의 연봉이 2000만원이었고, B의 연봉은 4000만원이었다면, 정작 행복한 미소를 짓는 쪽은 A이다. 부가 많을수록 효용이 높아진다는 통념을 깨는 것이다.
만약 동전 뒷면이 나오면 100달러를 잃고, 앞면이 나오면 150달러를 얻는다면. 사람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카너먼 교수는 실험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100달러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150달러를 얻으리라는 기대감보다 강한 탓이다.
카너먼 교수는 "주식 투자자가 100달러를 잃을 때 느끼는 고통이 100달러를 벌 때 기쁨의 1.5~2.5배에 이른다"며 "앞면이 나오면 200달러 정도 받는다고 할 때에야 마음이 움직인다"고 했다.
'전망 이론'은 이처럼 인간 심리의 '위험 회피(loss aversion)' 속성의 가치를 부각시켰다. 현재 상태에서 변화를 일으켜 좋아질 가능성과 나빠질 가능성이 반반이라면 나빠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거나, 가입한 통신상품을 잘 바꾸지 않고 관습에 따라 같은 브랜드 상품을 사고, 웬만하면 같은 직장에 머무는 사람들의 성향은 이런 위험 회피 속성과 연관돼 있다.
◇마케팅 등 일상생활에 적용
이런 비합리적인 인간 심리를 활용한 마케팅 기법도 발달하고 있다. 전략컨설팅 기업 '맥킨지'에 따르면 한 이탈리아 통신회사 콜센터는 서비스를 해지하려는 고객에게 "서비스를 유지하면 100회 무료 통화 보너스를 제공하겠습니다"라고 설득하다가 "이미 제공한 100회 무료 서비스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로 응대 방법을 바꿔 가입자 유지율을 더 높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확보했다고 생각하는 무료통화 혜택을 포기하지 않는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주력 상품을 팔기 위해 아주 비싸거나 아주 싼 와인을 곁다리로 비치하는 것도 인간의 비합리성을 노린 마케팅이다. 사람들은 두 번째로 고가(高價)이거나 두 번째로 저가(低價)인 와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는 심리적 특성을 겨냥한 것이다.
[한국의 학부모와 교육 당국자들에게]
"기계적 공부에만 매달리게 하는 한국식 교육은 문제,
자녀가 권위에 도전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혁신 가능"
"고등학교에서도, 심지어 대학교에서도 저는 경제학 수업을 한 번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노벨 경제학상을 탈 수 있었습니다. 인접한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갖고 공부한 덕분이죠.
부모들은 자녀가 스스로 '혁신(innovation)'할 수 있게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합니다."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관련, "아이들을 기계적인 공부에만 매달리도록 하는 것은 전혀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며 "과열된 교육 경쟁은 '파멸로 가는 시스템'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책상 앞에 앉아 대학 입시에 매달리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저는 대학입시 때 하루에 7~8시간만 공부하고 쉬었어요. 그리고 다른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내 분야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를 깊이 고민해왔습니다. 다른 분야의 친구들을 사귀어 놓으려고 애썼지요. 이런 열린 교육문화를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혀야 합니다."
그는 "한국은 이스라엘의 교육시스템을 참조할 만하다"며 이스라엘 교육의 3가지 특징으로 ▲혁신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 ▲다른 분야와의 연계학습 강조 ▲다언어(多言語) 습득을 꼽았다.
한국 사회가 창의적인 인재를 배출하려면 '권위에 대한 도전의식'을 적절하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선 자녀들이 혁신한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경쟁적이고, 다른 학부모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으니 '나도 그렇게 (따라서) 해야 한다'식의 생각을 버리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먼저 가식적인 권위를 탈피하고 오히려 자녀가 권위에 도전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노벨상 수상 비결을 묻는 질문에 대해 "운(運)이 작용한 면이 컸다. 노벨상을 타겠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살지 않은 게 오히려 약(藥)이 됐다"고 답했다.
"학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나중에 노벨상을 꼭 타야 한다'거나 '미래의 노벨상감이다'고 강요하면 안 됩니다. 특정한 상(賞)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공부를 시키는 것은 더더욱 금물(禁物)입니다. 혁신적인 학습을 한다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습니다. 저는 평생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없답니다."
/ 조선비즈
노벨 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언론 주목 "신선한 충격"
“폴은 A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A 회사 주식을 팔고 B 회사 주식으로 갈아탈까 고민했지만 그냥 그대로 있기로 했다. 이제 그는 만일 B 회사 주식으로 갈아탔다면 1,200달러를 더 벌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조지는 B 회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B 회사 주식을 팔고 A 회사 주식으로 갈아탔다. 이제 그는 만일 B 회사 주식을 그대로 보유했다면 1,200달러를 더 벌 수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누가 더 후회가 크겠는가?
답은 명확하다. 응답자의 8퍼센트는 폴을, 92퍼센트는 조지를 꼽았다.
이 결과는 이상하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둘 다 현재 A 회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B 회사 주식을 보유했다면 똑같은 액수의 돈을 더 벌었을 것이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조지는 거래라는 행동을 통해 지금 위치에 와 있지만 폴은 거래하지 않았기에 똑같은 위치에 있다. 이 단편적인 사례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사람들은 결과가 똑같더라도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얻는 결과보다는 어떤 행동 때문에 생긴 결과에 후회를 포함한 더 강력한 감정적인 반응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도박이라는 맥락 속에서도 입증되어 왔다. 도박을 하지 않아서 손해를 보지 않았을 때보다 도박을 해서 손해 보지 않았던 것과 동일한 액수를 벌었을 때 더 행복하다. 이런 불균형은 특히 손해의 경우에 두드러지며, 후회뿐 아니라 비난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상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이자 300년 전통경제학의 프레임을 완전히 뒤엎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이 행동경제학과 인간심리학의 바이블을 출간했다.
대니얼 카너먼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인간의 2가지 사고체계 ‘빠른 직관’과 ‘느링 이성’의 충돌과 융합을 독창적 사례분석으로 밝혀냈다.
카너먼은 아모스 트버스키와 함께 1969년부터 지속적인 협업과 연구를 진행했다. 둘의 논문과 연구는 발표되는 건마다 학계에 파란과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인간의 사고는 시스템적 오류에 취약하다’는 논문을 발표해 사회과학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던 두 학자는 마침내 1979년 ‘전망 이론: 위험한 상황 속에서 내리는 결정 분석’이라는 논문을 통해 행동경제학의 기초가 되는 선택 이론을 발표했다.
‘판단과 의사결정’에 관한 이 이론으로 인해 행동경제학이 그 태동을 시작했고, 카너먼은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행동경제학 도서들이 마치 유행처럼 서점가에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창시자의 책은 없었다.
카너먼의 첫 대중교양서가 출간되자 정치, 경제, 사회, 과학계의 모든 리딩 언론이 주목했다.
그 책은 ‘생각에 관한 생각’이었다.
이 책에서 카너먼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 즉 인생의 근원인 생각을 크게 2가지로 구분해 설명한다. 직관을 뜻하는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다.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는 동물적 감각의 순발력, 2+2의 정답, 프랑스의 수도를 떠올리는 것처럼 완전히 자동적인 개념과 기억의 정신활동이 ‘빠르게 생각하기’다. 반면 전문가의 해결책이나 354 x 687의 정답처럼 머릿속에 즉시 떠오르지 않는 문제의 답을 심사숙고하여 노력하는 사고방식이 ‘느리게 생각하기’이다.
빠르게 생각하기와 느리게 생각하기의 차이는 지난 25년 동안 수많은 심리학자들의 단골 연구 주제였다. 대니얼 카너먼은 ‘시스템 1’과 ‘시스템 2’라는 빠른 생각과 느린 생각을 유발하는 두 주체의 은유를 들어 흥미로운 인간의 정신생활을 적나라하게 설명한다.
직관적인 시스템 1은 경험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우리가 내리는 수많은 선택과 판단을 은밀하게 조종한다. 이 책은 대부분 시스템 1의 작동 방식과 그것과 시스템 2 사이의 상호 영향을 마치 두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는 한 편의 사이코드라마처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언뜻 보면 어려워 보이는 이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판단과 선택에 두 시스템이 미치는 영향의 기본 원리를 제시한다. 시스템 1의 자동적 활동과 시스템 2의 통제적 활동의 차이를 설명하고 시스템 1의 핵심인 ‘연상 기억’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계속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2부에서는 판단 휴리스틱을 다룬 최신 연구결과를 소개한다. “인간이 통계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퍼즐을 맞춘다. 우리는 쉽게 연상하면서 생각하고, 은유적으로 생각하고, 인과론적으로 생각하지만 통계는 한 번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3부의 주제는 통계적 사고의 어려움이다. 여기서는 우리 마음의 복잡한 한계를 설명한다. 인간의 과도한 자신감과 무지의 정도, 이 세상의 불확실성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대해서다. 우리는 자신이 세상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과대평가하는 반면, 사건들에서 발생하는 우연과 운의 역할은 과소평가한다.
4부에서는 “의사결정의 성격과 경제 주체들은 합리적”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경제학 원칙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아모스와 함께 발표한 전망 이론의 핵심 개념에 대한 현대적 관점도 펼쳐진다. 인간이 내린 선택이 합리성 규칙과 어긋나는 이유도 설명하고 있다. 문제를 별도로 분리해 다루려는 불행한 경향과 선택 문제들의 비논리적 특징에 영향을 받는 프레이밍 효과도 다룬다. 시스템 1의 특징들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이런 결과들은 표준경제학에서 선호되는 합리성 가정에 중대한 도전장을 던진다.
5부에서는 두 가지 자아, 즉 경험 자아와 기억 자아의 차이점을 소개한다. 일례로 우리는 ‘경험 자아’를 만족시키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정작 재미있는 어떤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사진만 열심히 찍어댐으로써 ‘기억 자아’만 만족시키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훗날 어떤 에피소드를 되새길지 선택할 때 자연스럽게 기억 자아의 지도를 받는다. 이때 자신의 경험 자아를 불필요한 고통에 노출시키기도 한다. 이 두 자아는 우리의 ‘행복’을 측정하는 데도 적용된다. 한 몸에 있는 서로 다른 두 자아가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은 개인뿐 아니라 대중의 행복을 정책 목표로 삼는 사회에게 심오한 질문을 제기한다.
저자 대니얼 카너먼은 예루살렘 헤브루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시건대학교와 케임브리지대학교 응용심리연구소 과학자, 인지연구센터(Center for Cognitive Studies) 연구원으로 활약했으며, 하버드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강의했다.
현재 프린스턴대학교 명예교수이며 비즈니스와 사회공헌 분야 컨설팅 회사인 ‘더 그레이티스트 굿(The Greatest Good)’의 설립자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행하는 인간의 판단과 선택’을 설명한 혁신적 연구 ‘전망이론(prospective theory)’으로 카너먼은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1979년 처음 발표된 이 이론으로 인해 그 해는 ‘행동경제학의 원년’으로 명명되었다. 심리학자인 그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심리학과 경제학을 완벽히 융합하여 인간을 경제활동의 주체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2005년 이스라엘 국민들이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인’으로 선정, 2007년에는 평생을 심리학에 바치며 이룩한 탁월한 기여를 인정받아 미국심리학협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가 수여하는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1년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가 선정한 ‘세계 일류 사상가’이며 ‘블룸버그’가 선정한 ‘세계 금융 분야에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 중 한 명이다. 인간의 비합리성과 그에 따른 의사결정에 관련된 연구로 수많은 기념비적인 논문을 집필한 바 있다. / 매경
인간의 생각은 논리적? 착각입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견줄 사회과학의 랜드마크라는 찬사가 따라다니는 책이다. 저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천재 심리학자. 정통 경제학의 프레임을 완전히 뒤집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다.
저자는 거창한 말을 동원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실험을 통해 ‘인간이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주류 경제학의 신화를 깨부순다. 주장의 중심에는 인간의 뇌가 있다. 매우 비효율적일 수 있는 뇌 말이다. 뇌의 무게는 체중의 2% 정도이지만 기초 대사의 20%를 소모한다.
따라서 뇌는 가능한 한 직관적인 시스템(시스템1)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의식적 시스템(시스템2)의 부하는 줄이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시스템1은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 또 영국의 철학자이자 물리화학자인 마이클 폴러니가 말한 암묵지(암묵적 지식)와 비슷하다. 저자는 다만 시스템1을 프로이트의 무의식 같은 신비적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스템1의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시스템2의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는 서로 교류하기 때문. 예컨대 피아노 연주를 처음 배울 때는 시스템2로 의식하며 건반을 두드리지만, 익숙해지면 시스템1에 의해 손가락을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경지에 도달한다.시스템1과 2의 역할 분담은 사람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누가 명령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조직적으로 행동하는 일본인이라면 시스템1에서 공유하는 정보가 많고, 사람들의 균질성이 큰 것이다. 반대로 미국인은 시스템1에서 공유하는 정보가 적기 때문에 대부분의 작업에 시스템2를 사용한다. 문제를 계약이나 소송에서 논리에 의해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어느 순간 시스템1과 2라는 용어와 개념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둘 중 어느 걸 편애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건 생각을 지배하는 생각과 만나는 여행이다. 생각, 혹은 사고는 논리라는 고정관념이 보기 좋게 무너진다. / 중앙
생각을 지배하는 생각? 행동경제학에 물어라
[책] 직관과 이성의 충동과 융합을 분석한 <생각에 대한 생각>
우리가 연구한 현상은 ‘닻 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한다.
닻을 내린 곳에 배가 머물듯, 처음 입력된 정보가 정신적인 닻으로 작용해 이후 판단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미지의 양을 추정하기 전 그 양의 가치를 추정해볼 때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 추정치는 사람들이 미리 생각하고 있던 숫자와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다. 닻의 이미지가 계속 남는 것이다.
“간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이가 114세 이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간디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이가 35세였는지를 묻는 질문을 받았을 때보다 간디의 사망 나이를 더 높게 추정할 것이다.
집값으로 얼마를 지불해야 할지 고민할 때도 매도 호가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만일 매도자가 부르는 값이 높다면 낮을 때보다 그 집이 더 가치 있어 보인다.
숫자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겠다고 결심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이 ‘닻 내림 효과’의 사례들은 부지기수이다. 당신이 추정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을 고려해보도록 부탁받은 어떤 숫자라도 ‘닻 내림 효과’를 유발할 것이다.(책 <생각에 대한 생각> 中)
“생각, 생각, 생각, 생각 좀 하고 말해”
이는 최근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하는 멘트이다. 이렇듯 현대인들은 생각에 대한 신중함을 개그프로그램에서도 요구받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직관적으로 재빠르게 판단하지 않는다면 ‘바보’로 평가절하 당할 수도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 둘을 어떻게 해야 적절하게 섞을 수 판단할 수 있을까.
답은 ‘행동경제학’에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빠른 직관’과 ’느린 이성’의 충동과 융합, 전혀 부딪힐 것 같지 않은 인간의 사고체계를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심리학자가 풀어낸 책 <생각에 대한 생각>이 출판됐다.
심리학과 경제학을 융합해 인간을 경제활동의 주체로 분석한 대니얼 카너먼은 2002년 유수한 경제학자들을 제치고 노벨경제학상을 거머줬다. 그는 심리학과 졍제학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과 통섭으로 새로운 학문인 ’행동경제학’을 창시한 이스라엘 출신의 ’천재 심리학자’로 불린다.
그는 <생각에 관한 생각>이라는 책을 통해 행동경제학의 기원과 탄생, 발전과정을 한눈에 통찰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카너먼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뒤 수많은 행동경제학 도서들이 유행처럼 서점가에 쏟아져 나왔지만 창시자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에서 카너먼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활, 즉 인생의 근원인 생각을 크게 2가지로 구분해 설명한다.
직관을 뜻하는 ‘빠르게 생각하기(fast thinking)’와 이성을 뜻하는 ’느리게 생각하기(slow thinking)’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직관과 이성에 대해 크게 5부로 구성했다. 1부에서는 판단과 선택에 두 시스템이 미치는 기본 원리를 제시했고, 2부에서는 인간이 통계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다뤘다.
3부는 통계적 사고의 어려움을 분석했고, 4부는 의사결정의 성격과 경제 주체들은 합리적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경제학 원칙을 설명했다. 5부에서는 경험자아와 기억자아의 차이점을 소개해 개인 뿐 아니라 대중의 행복을 정책 목표로 삼는 사회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책에 대해 "카너먼의 친절하고 명료한 실험은 우리가 생각에 관해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어 놓았다. 인간은 자신을 유일하게 이성적인 종족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카너먼은 이런 우리의 생각과는 매우 다른 결과를 풍부한 사례와 치밀한 연구결과로 제시해준다"고 추천서를 쓰기도 했다.
대니얼 카너먼(히브리어: ????? ??????, 영어: Daniel Kahneman, 1934년 3월 5일~)은 이스라엘 국적의 심리학자겸 경제학자로서 노벨상 경제학상 수상자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판단과 의사결정분야의 심리학, 행동경제학과 행복심리학이다. 아모스 트버스키와 다른 학자들과 함께 발견법과 편향을 만드는 공통적 인간 요인에 대한 인지적인 연구의 토태를 세웠으며 전망이론을 만들었다. 이러한 전망이론의 성과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현재는 프린스턴 대학의 우드로 윌슨 스쿨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생애
대니얼 카너먼은 1934년 텔 아비브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은 프랑스 파리에서 보냈다. 1940년 나치의 파리 점령시까지 파리에 있었고 이후 1946년 영국령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 1954년 예루살렘의 헤브루 대학에서 심리학과 수학(부전공)을 전공하고 이스라엘 군에서 복무하였다. 1958년 박사학위를 위해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을 다녔으며 거기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지 심리학
카너먼은 1961년부터 예루살렘의 헤브루 대학에서 심리학강의를 시작하였으며 1966년에 선임강사로 승진하였다. 이시기 그의 초기 연구는 시각적 인식과 관심에 관한 것이었다.
판단과 의사
결정카너먼의 연구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 아모스 트버스키와 판단과 의사결정 연구를 같이 시작하게 되었으며 1979년 획기적인 전망이론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는 1968년경 헤브루 대학에서 열렸던 카네먼의 세미나에 트버스키가 초청강연을 하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처음 공동 발표한 논문은 1971년 "작은 수의 법칙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후로 유명 저널에 7개의 논문을 공동저작하게 되는데 전망 이론외에 유명한 논문으로는 "불확실성아래에서의 판단문제: 발견법과 편향"(1974)이 있다. 2002년에 전망 이론에 대한 공로로 카너먼은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1996년에 사망한 트버스키에게 공로를 돌렸다.
행동경제학
1977년에서 1978년까지 트버스키와 카너먼은 스탠포드 대학의 행동과학연구소의 연구원이었다. 거기서 리처드 탈러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트버스키와 카너먼의 전망이론을 발전시켜 탈러가 "긍정적 소비자 선택이론에 대해"논문을 1980년에 발표하였다. 이는 행동경제학의 토석이 되는 논문이 되었다.
행복심리학
1990년대에 카너먼의 연구는 행복심리학(hedonic psychology)쪽으로 더 촛점이 맞춰졌다. 이는 긍정적 심리학 운동에 연관되어 이 시기에 인기있었던 연구 주제였다. / 위키백과
마음의 기적
1. 관찰자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실재라고 받아들이는 세계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물건은 크고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단단하며 어떤 것은 부드럽다. 그러나 이 중의 어떤 성질도 우리 자신의 인식을 벗어나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예컨대 접는 의자와 같은 어떤 물체를 가정해 보자. 우리에게는 그 의자는 그리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개미에게는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단단해 보이지만, 중성미자(neutrino)는 그 속을 거침없이 지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아원자(亞原子) 입자에게는 의자의 원자들이 서로 수마일씩이나 떨어져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의자가 가만히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만약 당신이 외계의 어느 지점에서 그것을 본다면 의자는 지구상의 모든 것들과 함께 돌면서 시속 수천 마일의 속도로 우리의 눈앞을 지나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단지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우리가 의자에 대해서 묘사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성질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가 있다. 예컨대 의자가 붉은색이라면 초록색 안경을 쓰고 봄으로써 검은색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다. 만일 의자의 무게가 2.5킬로그램이라면 그것을 달 위에 가져가 1킬로그램도 채 안 나가게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밀도가 큰 행성의 중력장 속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수십만 킬로그램의 무게로 만들 수도 있다.
물질세계에서는 절대적인 속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 밖에’ 어떤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일이다. 우주란 그것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의 반영일 뿐이다. 인간의 신경계는 우주 속에 진동하고 있는 총 에너지의 10억 분의 1도 안되는 지극히 미소한 부분만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박쥐나 뱀과 같은 다른 동물들의 신경계는 우리의 세계와 공존하고 있는 또다른 세계를 반영한다. 박쥐는 초음파의 세계를 감지하며, 뱀은 적외선의 세계를 감지한다. 두 세계 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진정으로 ‘저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다만 인식자인 우리가 해석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정형화되지 않은 원시 데이터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사용하여, 물리학자들의 말하는 ‘지극히 불명확하고 멀건 양자의 수프’를 굳혀서 3차원의 고형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영국의 뛰어난 신경학자인 존 에클스(John Eccles) 경은 다음과 같이 놀랍지만 반박할 수 없는 단언으로써 감각이라는 환상을 통찰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자연의 우주에는 어떤 색깔도,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색깔이나 소리와 비슷한 것, 즉 직물, 문양, 아름다움, 향기 등등의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단히 말해서, 우리가 현실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어떤 객관적 사실도 본질적으로는 무효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혼란스럽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이 속에는 ‘단지 당신의 인식을 바꾸기만 함으로써’ 당신의 우주 - 당신의 몸을 포함한 -를 당신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믿기지 않는 해탈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몸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65세에 맞게 되는 정년퇴직이 제멋대로 한 사람을 사회에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65세가 되기 전날까지만 해도 한 직장인은 노동과 가치로써 사회에 기여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는 사회의 피부양자가 된다. 의학적으로 이러한 인식적 전이의 결과는 비참하다. 퇴직이후 몇 년 동안에 심장마비와 암의 발병률이 치솟고, 퇴직하기 전에 건강했던 사람들이 조기에 죽음을 맞는다. 소위 ‘조기은퇴성 사망’이라는 이 증후군은 자신이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인식에 기인한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인식일 뿐이지만 그것을 굳게 믿는 사람에게는 질병을 일으키고 사망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비교한 바에 의하면, 노년층이 사회의 어엿한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는 노인들이 지극히 원기왕성하다. 그들은 미국의 노인네들로서는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굽히기, 들기, 오르기 등을 거뜬히 해낸다. 간의 표피세포와 같은 오래된 세포를 고배율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그 광경은 마치 전쟁터처럼 황폐화되어 있다. 섬유질이 이러 저리 얽혀 있고 지방질 노폐물과 처리되지 않은 순환노폐물이 보기 흉한 덩어리로 엉켜 있다. 리포푸신(lipofusin)이라 불리는 암황색 색소가 세포내부의 10 내지 30퍼센트까지 축적되어 더럽혀져 있다.
이 황폐한 광경은 아세포 기능의 이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물질적인 렌즈가 아니라 정신적인 렌즈로 들여다보면, 이 오래된 세포들이 마치 그 사람의 경험이 기록된 지도와 같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 일들과 함께 우리를 괴롭힌 일들이 거기에 각인되어 있다. 의식 층에서는 오랜 전에 잊혀진 일들이 마치 감춰진 컴퓨터 마이크로칩처럼 여전히 외부로 신호를 보내어 우리를 초조하게 하고 긴장하게 하며 지치고 근심스럽고 후회스럽고 의심스럽고 실망스럽게 만든다. 이러한 반응들은 심신의 경계막을 넘나들면서 우리의 일부가 된다. 오래된 세포 속의 독성 노폐물 덩어리들이 누구에게나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전적인 차이가 거의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70세에 이를 즈음이 되면 당신의 세포는 독특한 형태를 띠게 될 텐데, 그 형태는 당신이 자신의 신체조직과 내장기관에 대사작용으로 변화시키고 처리시킨 독특한 경험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모습이 될 것이다.
혼돈스럽고 거칠게 진동하는 ‘양자의 수프’를 다루어서 의미있고 질서있는 현실의 단편들도 만들 수 있게 되면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오직 당신이 그것을 알고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당신 의식의 거의 대부분이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몸을 만들어 내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소위 자율신경계는 당신의 의식을 빠져나간 기능들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멍한 상태로 길을 걸어가더라도 뇌 속의 자율신경 중추는 여전히 위험한 순간을 살펴서 긴장반응을 발동시킬 태세를 갖추고 외부세계에 대처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수많은 일이 행해지고 있다. 숨쉬고, 소화시키고, 새로운 세포를 키우고, 손상된 오래된 세포를 고치며, 독성을 순화시키고, 호르몬의 균형을 유지하며, 지방을 혈당으로 바꿈으로써 저장된 에너지를 변환시키고, 눈동자의 조리개를 조절하고, 혈압을 높이고 낮추며,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걷는 동안에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근육으로 혈액을 보내 주고, 주변의 소리와 움직임을 감지하는 등의 일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율적인 과정이 노화현상에 아주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이러한 기능들을 조절하는 능력이 떨어져 가는 것이다. 한평생 무의식적인 생활을 이어가면 수많은 노후작용이 일어나고, 한평생 의식적으로 활동하면 노화를 예방할 수 있다. 신체의 기능을 자동운전 상태로 내버려두는 대신에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 그 자체가 당신이 어떻게 나이를 먹느냐에 변수가 될 것이다. 심장박동과 호흡으로부터 소화와 호르몬 조절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른바 자율기능들은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다. 바이오피드백(biofeedback)과 명상의 시대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었다. 여러 가지 일 중에서도, 예컨대 심신건강 연구실에서는 심장질환자가 의지로서 혈압을 내리거나, 위궤양 환자가 위산의 분비를 줄이는 훈련을 받고 있다. 이러한 능력을 노화현상에 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구태의연한 인식을 새롭게 바꾸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우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자율신경계에 영향을 미치는 기법은 얼마든지 있다.
2. 우리의 신체는 에너지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패턴을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우리의 몸은 분자와 원자로 쪼개어지는 고형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은 모든 원자의 99.9999퍼센트가 텅 빈 공간이며, 실제로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덩어리인 아원자 입자가 이 공간 속을 빛의 속도로 돌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이 진동은 무작위적이고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한 덩어리의 진동은 수소 원자의 정보를 지니고, 또 다른 덩어리의 진동은 산소 원자의 정보를 지닌다. 사실 모든 원소들이 하나의 고유한 정보이다.
정보는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우주와 그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추상적인 것이다. 인체의 물리적 구조를 궁극적인 근원으로 추적해 가면 분자가 원자로, 원자가 아원자 입자로, 아원자 입자는 텅 빈 공허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유령 같은 에너지로 꽁무니를 감추어 버려서 마침내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된다. 신비스럽게도 이 공허에는 어떤 정보가 표현되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기억 속에 소리없이 존재하는 것처럼, 양자의 장은 표현되지 않은 형태로 온 우주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 십억의 은하계가 이 문장 끝의 마침표보다 수백만 배나 작은 공간 속에 압축되어 있었던 대폭발(Big Bang)의 순간 이래로 늘 그래 왔었다. 그러나 무한히 작은 그 점 이전에도 우주의 구조는 나타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을 포함한 우주의 근본 질료는 비질료(non-stuff)이다. 그러나 그것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비질료이다. 모든 원자 내부의 공허는 보이지 않는 지능으로 맥동하고 있다. 유전학자들은 이 지능이 본래 DNA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생각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DNA가 정보화된 자신의 지능을 쌍둥이 격인 RNA에 전해 주고, RNA는 나아가서 세포 속으로 들어가 수천 개의 효소들에게 그 지능의 조각들을 전달해 주고, 그러면 효소는 그 특정한 지능의 조각을 단백질을 만드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생명이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의 모든 순간에 에너지와 정보가 교환되어야 하며, 이것이 없이는 생명 없는 물질로부터 생명이 생겨나지 않는다.
인체는 주로 글루코스나 혈당의 형태로 세포에 전달되는 당분을 연소함으로써 에너지를 뽑아 낸다. 글루코스의 화학구조는 우리가 먹는 설탕인 자당(sucrose)과 매우 가깝다. 하지만 설탕을 태운다고 해서 복잡하고도 정교한 구조를 가진 살아있는 세포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꺼먼 숯덩어리와 물과 이산화탄소의 흔적만이 남을 뿐이다.
물질대사는 단순한 연소과정 이상의 어떤 것이다. 각설탕 속에 비활성 상태로 들어 있는 당분이 그 에너지로써 생명을 지탱하는 것은 인체 세포가 그것에 새로운 정보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당분은 그 에너지를 예컨대 신장, 심장, 혹은 뇌의 세포에 줄 수 있다. 이 세포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독특한 형태의 지능을 지니고 있다. 심장세포의 율동적인 수축운동은 뇌세포의 전기적 방전작용이나 신장세포의 나트륨 교환작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지능의 풍부성과 다채로움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온 신체가 공유하고 있는 단일한 지능이 있다. 이 지능의 흐름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하며, 사망의 순간에 이 흐름이 끊기면 우리의 DNA 속에 저장된 그 모든 지식도 쓸모없게 된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이 흐름은 다양한 방법으로 손상된다. 면역계통과 신경계통, 내분비계통의 특유한 지능이 모두 쇠퇴하기 시작한다. 생리학자들은 이 세 가지 계통이 인체의 가장 중요한 제어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면역세포와 내분비선은 뉴런과 마찬가지로 뇌의 신호를 받아들이는 수용체(receptor)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확장된 뇌와도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노화란 단순히 우리의 잿빛 물질덩어리 속에 한정된 하나의 질병으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면역계통이나 내분비계통의 지능이 상실되면 온몸의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차원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말기 단계까지 진행되어 신체적인 증상으로 나타날 때까지도 그 손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오감은 노화를 일으키는 수십 억의 양자의 교환작용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깊이 침투해 들어가지 못한다. 그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빠른 동시에 너무나 느리다. 각각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는 데에는 10,000분의 1초도 걸리지 않기 때문에 너무 빠르다는 것이며,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누적된 효과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너무 느리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들에는 한 개의 원자보다 수백만 배 작은 규모의 정보와 에너지가 개입된다.
인체가 단순한 물질이라면 노화에 의한 쇠약을 불가피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엔트로피(entropy), 즉 질서있는 체계로부터 점점 무질서하게 되어 가는 경향성의 희생물이기 때문이다. 엔트로피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폐차장에서 녹슬어 가는 고물차와 같은 것이다. 엔트로피는 잘 돌아가던 기계를 찌그러진 고물로 망가뜨려 놓는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반대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녹슨 고철 무더기가 저절로 재조립되어 새 차로 만들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엔트로피의 법칙이 지능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세월의 약탈에 영향받지 않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을 지금 막 밝혀 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신체의 젊음을 유지해 온 스승들의 영적인 전통 속에 이미 수천 년동안 전해져 내려왔던 것이다.
인도와 중국, 일본, 그리고 그보다 좀 희귀하긴 하지만 서양의 기독교권에서도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 지능의 한 흐름임을 깨달은 현자들을 배출해 왔다. 이 흐름을 유지하고 해가 갈수록 풍부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계의 심층적 차원에서 엔트로피를 극복해 냈다. 인도에서는 이 지능의 흐름을 프라나(흔히 ‘생명력(氣)’이로 번역된다)라고 한다. 이것은 의지로써 증가시키거나 이곳 저곳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육신을 젊고 순조롭게 유지하도록 조종할 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 프라나를 접하고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안에 있다. 요기(yogi)는 다름아닌 의식의 집중을 이용하여 프라나를 움직인다. 심층적 차원에서 프라나와 의지의 집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의식이며 의식이 곧 생명이다.
3. 몸과 마음은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이다.
지능은 그것을 가리고 있는 물질이라는 가면보다 훨씬 더 융통성이 있다. 그 자신을 사념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분자로써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다. 두려움과 같은 기본적인 감정은 하나의 추상적인 느낌으로 묘사될 수도 있고, 혹은 눈에 보이는 아드레날린 호르몬의 분자로 묘사될 수도 있다. 느낌이 없이는 호르몬도 없으며, 호르몬이 없이는 느낌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신호가 없으면 통증도 없고, 통증의 수용체에 꼭 들어맞아서 통증의 신호를 차단시키는 엔도르핀(endorpin)이 없으면 통증으로부터 해방될 수도 없다. 심신상관 의학(Mindbody medicine)이라고 불리는 혁명은 이 단순한 발견 위에 근거한 것이다. 생각이 가는 곳에 화학물질이 동반된다. 이러한 통찰이, 예컨대 남편을 최근에 사별한 여성들에게 유방암이 일어나는 확률이 왜 두 배나 더 높은지, 또 오랫동안 우울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병을 얻는 확률이 왜 네 배나 더 높은지 등을 이해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정신적인 압박상태가 질병을 일으키는 생체화학물질로 변환된 것이다.
나의 임상 경험에서도, 쥐어짜는 듯이 숨막히는 통증을 유발하는 심장계통의 대표적인 질환인 협심증 환자가 두 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통증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전혀 느끼지도 않고 달리기와 수영, 심지어는 등산까지 즐기는데 비하여 다른 사람은 팔걸이 의자에서 일어나려고만 해도 거의 까무러칠 정도의 통증에 시달리는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두 사람의 신체적인 차이를 조사해 볼 것이지만, 그것은 발견할 수도 있고 전혀 발견 못할 수도 있다. 심장병 전문의들은 세 개의 관상동맥 중에서 최소한 하나가 50퍼센트 이상 막혔을 때 협심증의 통증이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혈관이 막히는 것은 대부분이 죽은 세포, 응고된 혈액, 지방질이 낀 혈소판 등이 혈관내벽에 끼어서 이루어진 동맥경화의 형태이다. 그러나 50퍼센트라는 수치는 단지 어림짐작일 뿐이다. 어떤 협심증 환자들은 오직 관상동맥의 한 군데에만 혈행을 방해하는 작은 병변(病變)을 가지고도 통증으로 장애인이 되는 반면, 다른 환자들은 관상동맥을 85퍼센트까지 말고 있는 덩어리들을 여러 군데에 지니고도 마라톤 코스를 뛴다고 알려져 있다. (덧붙일 것은, 협심증은 반드시 어떤 물질이 낄 경우에만 발병되는 것은 아니다. 관상동맥에는 근육세포층이 붙어 있는데, 이것이 경련을 일으켜서 혈관이 닫혀 있을 때에도 박동하여 통증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데 따라 반응이 매우 다르다.)
심신상관 의학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나의 두 환자는 통증에 대한 각자의 서로 다른 해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환자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자신만의 특유한 낙인을 찍는다. 그리고 통증(혹은 기타의 증상)은 심신체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과거의 모든 영향들과 상호작용한 다음에야 의식 속으로 떠오른다. 모든 사람이, 아니 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일에 항상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통증의 신호는 다양한 용도로 변환될 수 있는 원시 데이터일 뿐이다. 장거리 달리기 같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경기는 선수로 하여금 고통을 성취의 신호(‘고통 없이는 성취도 없다’라는 속담을 보라)로 해석하게끔 만들지만, 똑같은 고통이 다른 상황에서 주어지면 전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육상 선수들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코치를 존경하지만, 신병훈련소에서 그와 같은 훈련을 받으면 교관을 증오한다.
의학은 이제 막 심신의 상관관계를 치료에 이용하기 시작하고 있다. 통증 치료가 그 좋은 보기이다. 플라시보(placebo), 즉 가짜 약을 투여하면 30퍼센트의 환자는 정말 진통제를 투여한 것과 같은 진통효과를 경험한다. 그러나 심신의 상관효과는 이보다 훨씬 더 전일적(全一的)이다. 똑같은 가짜 약으로써 진통을 겪게도 하고, 위궤양 환자의 과다한 위산분비를 멈추게도 하며, 혈압을 낮추기도 하고, 항암제 역할도 한다. (설탕으로 만든 약을 환자에게 주면서 강력한 항암제라고 믿게 하여 머리가 빠지고 구토증이 나는 등 화학요법이 일으키는 모든 부작용이 나타나게 할 수도 있으며, 생리식염수 주사로 말기의 악성 종양을 실제로 완화시킨 예도 있다.)
약효가 없는 동일한 약물로써 이처럼 전혀 다른 반응을 이끌어 낼 수가 있으므로, 마음에 적당한 암시만 주면 인체는 ‘그 어떠한’ 생화학 반응이든지 만들어 낼 능력이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가짜 약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 플라시보 효과를 나타내는 힘은 다름아닌 암시의 힘이다. 이 암시가 인체가 자신을 치유하려는 의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짜 약으로 환자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고, 바로 그 ‘치유의 의지’로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만약 우리가 늙지 않으려면 의지를 효과적으로 발동시킬 수만 있다면 인체는 그것을 자동으로 실행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매우 흥미로운 증거를 가지고 있다. 노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병 중의 하나는 파킨슨병이라는 신경장애로서, 근육운동을 조절할 수 없어서 걷기와 같은 신체동작이 극도로 느려지다가 결국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경직되게 만드는 병이다. 파킨슨병은 도파민(dopamin)이라는 뇌의 매우 중요한 화학물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고갈되는 것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편 어떤 종류의 약물에 의해 도파민을 생산하는 뇌세포가 파괴되어서 일어나는 파킨슨병 증상도 있다. 이 두번째 형태의 증상의 심화되어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어떤 환자를 가정해보자. 그는 안간힘으로 겨우 한두 걸음을 옮기고는 다시 동상처럼 뻣뻣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바닥에다 금을 그어 놓고 “이 금을 밟아 보세요.”하고 말하면 그 사람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그 금 위에 설 수가 있다. 도파민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기능이며, 저장된 것은 완전히 소모되었다는 사실(거의 뇌가 다리의 근육에게 한 걸음 더 움직이도록 신호를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는 것처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걸음을 걷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뇌가 깨어난 것이다. 그 사람은 몇 초만 지나면 다시 얼어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시 그에게 마음 속으로 금을 긋고 그것을 밟아 보라고 하면 그의 뇌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노인들의 쇠약이나 활동력 감퇴는 대부분의 경우 단지 휴지상태일 뿐이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활동적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의지만 재확인시켜 주면, 많은 노인들이 운동능력과 체력과 민첩성과 정신반응을 극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의지는 의식집중의 적극적인 동업자이다. 의지는 우리가 자동적인 과정을 의식적인 과정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이다. 거의 대부분의 환자가 간단한 심신상관관계 훈련을 이용해서 빠른 맥박과 천식성 기침, 뭔지 모를 불안감을 몇 번만에 좀더 정상적인 반응으로 바꾸어 놓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의 통제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적절한 기법을 이용하여 다시 통제권 안으로 가져올 수가 있다. 이것이 노화에 대해 시사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예컨대 ‘나는 정력과 활동력을 나날이 증진시키고 싶다’는 식의 의지를 사고과정에 주입함으로써, 활동에 표현되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는 대뇌중추에 통제력을 행사하기 시작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 활동력이 감퇴하는 것은 대부분이 그렇게 감퇴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대’한 결과이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패배적인 의지를 강한 신념의 형태로 심어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심신의 상관관계가 이러한 의지를 자동으로 실행하게 된다.
과거에 우리가 지녔던 의지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구시대의 프로그램을 만든다. 사실은, 의지의 힘은 언제든지 다시 각성시킬 수가 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의식적으로 마음을 프로그래밍함으로써, 나이가 들기 전에 일찌감치 그와 같은 손실을 방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4. 인체의 생화학작용은 의식의 산물이다.
낡은 패러다임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대한 한계 중의 하나는, 인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함에 있어서 그 사람의 의식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는 그 사람의 신념, 추측, 기대, 그리고 자신에 대한 자아상을 또한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인체를 마음이 없는 기계로 보는 입장이 아직도 서양의학의 주류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와는 반대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있다. 암이나 심장질환으로 사망하는 비율은 아무래도 심리적인 압박감을 가진 사람들이 더 높고, 목적의식이 강하고 행복한 사람들은 더 낮다.
최근 몇 해 동안 이루어진 의학연구 결과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의 하나는 스탠퍼드 대학의 정신의학자인 데이비드 스피겔(David Spiegel)이 행한 실험이다. 그는 환자의 마음상태가 암의 극복과정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는 많은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신념과 태도에 중요한 의미를 두는 것이 이로운 점보다는 해로운 점이 더 많으리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암을 일으킨 원인은 나에게 있다’는 식의 생각은 죄의식과 자기비판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스피겔은 유방암이 상당히 진전된 86명의 여성(그들의 병은 관행요법으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다)들을 대상으로, 그들 중의 반수에게 매주 자기최면법 강의와 결합된 정신요법을 행했다. 어느 모로 보나 이것은 최소한의 개입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 그것도 여러 명의 환자가 함께 하는 요법으로써 죽음이 불가피하게 된 말기 증상의 병과 어떻게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 결과는 뻔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험 대상자들을 10년 동안 추적해 본 스피겔은 요법을 받은 그룹이 요법을 받지 않은 그룹보다 평균 두 배나 오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근까지 단지 세 명만이 살아 있었는데, 그들 모두 요법을 받은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 연구결과는 연구자가 그 효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라서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한테서도 이와 비슷한 연구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예일 대학의 젠센(M. R. Jensen)이 보고한 1987년의 신중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감정을 억누르고 절망감에 빠지고 분노나 두려움, 기타 부정적인 감정을 발산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닌 여성들에게는 유방암이 빠르게 퍼져 나간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류머티스 관절염이나 천식, 난치성 통증, 그리고 기타의 장애 증상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발견이 보고되었다.
낡은 패러다임에 빠져 있는 의사들은 이러한 연구결과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통찰력이 번득이는 저서 <의학과 의미(Medicine and Meaning)>에서 래리 도시(Larry Dossey)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의학 회보나 의과대학 강단에서 끊임없이 설교되고 있는 지배적 교훈은 ‘전래의 병리학’만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며, 느낌, 감정, 태도 등은 한갓 들러리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감정이란 외딴 정신의 공간 속을 스치듯 지나가는 사건이 아니라 의식의 표현이며 생명의 근본적인 질료라는 사실이다. 모든 종교 전통 속에서 생명의 숨결은 곧 영혼이다. 영혼을 고양시킨다거나 저하시킨다는 것은 인체가 반드시 반영해야 할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의식은 노화현상에 매우 큰 차이를 가져온다. 고등한 생명 형태를 지닌 모든 종이 노화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인식을 다시 노화 자체로 재번역한다. 늙어가는 것에 절망을 느끼기 때문에 한층 더 발리 늙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그것을 아량으로 받아들이면 육체적?정신적인 많은 불행을 막아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늙는다’는 속담은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생각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계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정보의 자극이다. 우리가 나무, 별, 산, 바다라고 부르는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도 자연계의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 이와는 다르다. 자연계는 자신의 생각의 형태가 일단 정해지면 거기에 고정되어 버린다. 행성이나 나무와 같은 사물은 생겨나고 발달하고 쇠퇴하고 분해되는 자동적 단계의 성장 사이클을 따른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의 주기 속에 갇히지 않는다. 인식능력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반응에 참여한다. 우리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을 때 문제가 일어난다. 마이클 탤보트(Michael Talbot)는 자신의 저서 <홀로그램 우주(The Holographic Universe)>라는 책에서 이것을 희랍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 왕에 빗대어 재치있게 이야기한다. 자기가 손을 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해 버리므로, 마이더스 왕은 사물의 실질적인 재질을 알 수가 없다. 물도, 밀알도, 살도, 깃털도, 모두가 그가 손을 대는 순간 단단한 금속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우리의 의식은 양자의 장을 일상의 물질적 현실로 바꾸어 버리므로 우리는 양자적 현실 그 자체의 재질을 알 수가 없다. 오감을 통해서도 알 수 없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으로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 또한 양자의 장을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생각은 공허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떤 시공간적(時空間的)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특정한 시공간적 사건이다. 우리는 순전히 추상적인 잠재력을 고형의 물체로 바꾸어 놓은 마이더스의 손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육체의 물질성만을 경함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의식을 의식하지’ 못하는 한, 육체를 바꾸어 놓는 자신의 행위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5. 인식이란 학습된 현상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어떤 경험에 대해서 똑같은 반응을 하게 되어 있다면, 의식의 힘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분명히 일어날 리가 없다. 어떤 것에 대해서도 두 사람이 똑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일은 없다. 당신 애인의 얼굴이 나의 가장 미운 적일 수도 있고, 당신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에게는 구역질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각 개인의 반응들은 반드시 학습된 것이다. 여기서 개인의 차이가 비롯된다. 학습 행위는 마음을 매우 활발히 사용하는 것으로, 신체에 매우 활발한 변화를 일으킨다. 사랑, 증오, 기쁨, 혐오 등의 인식은 신체에 서로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의 자극을 준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몸은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배운 모든 해석방식의 육체적 산물인 것이다.
장기이식 수술을 받은 일부 환자들은 신장이나 간, 심장 등을 기증 받은 후에 괴이한 경험을 했다는 보고를 해 온다. 장기를 기증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은 기증자의 기억 속에 끌려들어 가기 시작한다. 사람의 체내에 다른 사람의 신체조직이 이식되면 그 사람의 대인관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번은 심장이식 수술을 한 어떤 여성이 잠을 자다 깨어났는데, 갑자기 맥주와 통닭을 먹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전에는 그런 것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티미라는 젊은 남자가 나타나는 이상한 꿈을 꾸기 시작하고부터 그녀는 교통사고로 병원에서 죽은 심장 기증자의 신상을 조사해 보았다. 그녀가 그의 가족을 만나본 결과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이 티미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맥주를 매우 즐겼으며 맥도널드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초자연적인 설명을 찾기보다 우리의 신체는 경험이 육체적 표현으로 변형된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우리가 ‘육화’시키는 어떤 것이므로 우리 몸의 세포 속에는 우리의 기억이 주입되어 있으며, 그래서 다른 사람의 세포를 받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 사람의 기억도 받는 것이 된다.
당신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경험을 처리하고 그것을 당신의 개인적 관점에 의거하여 대사작용으로 변환시킨다. 당신은 단순히 원시 데이터를 눈과 귀를 통해 통과시키고 거기에 판단의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그것을 내화하면서 실제로 자신이 그 해석 자체로 ‘변하는’ 것이다. 일자리를 잃어서 실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몸 구석구석으로 그 슬픔을 투사한다. 즉, 대뇌에서 나오는 신경전달물질이 고갈되고 호르몬의 양이 떨어지며, 수면 주기가 혼란해지고, 피부세포의 표피층에 있는 뉴로펩티드 수용체가 교란되고, 혈액 속의 혈소판이 끈적끈적해져서 덩어리가 되기가 더 쉬워지며, 눈물조차 기뻐할 때의 눈물과는 다른 화학성분을 보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새로운 직장을 얻게 되면 이 모든 생화학적 양상이 극적으로 바뀌며, 만일 그 직장이 매우 만족스럽다면 그의 몸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 호르몬, 수용체, 그리고 DNA 자체에 이르기까지 다른 모든 필수 생화학물질들은 갑작스럽게 상황이 호전되었음을 반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DNA를 유전정보가 저장된 잠겨진 창고로 생각하지만, 작용상 쌍둥이인 RNA는 매일매일의 상황에 반응하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은 시험기간이 되면 암에 대항하는 면역반응에 필수적인 화학물질인 인터루킨(interlukin) 2의 수치가 줄어드는 현상을 보인다. 인터루킨2의 생산은 전령 RNA(messenger RNA)에 의해 제어되는데, 이것은 시험결과에 대한 학생들의 걱정이 유전자에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점은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상태의 신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사용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는 것을 역설해 주고 있다. 의과대학생들의 시험에 대한 걱정은 실업자의 걱정처럼 언젠가는 지나간다. 그러나 노화현상만은 날마다 대면해야만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 향후 40, 50년, 혹은 60년 동안에 일어날 일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신경학적으로 말하자면, 뇌의 신호는 한갓 물결치는 에너지의 결합이다. 당신이 혼수상태에 있다면 이 신호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이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그 신호는 무한히 창조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 중에서 ‘우리는 꿈과 똑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하는 프로스페로의 대사는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인체란 대뇌신호가 3차원적으로 투사되어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상태로 변형된 것, 즉 현실화된 꿈과도 같다.
노화란 일련의 오도된 변형, 즉 균형잡히고 안정적인 자기쇄신의 과정이 옆길로 샌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육체상의 변화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먼저 우리의 의식 - 우리 마음 속의 의식이든 세포 속의 의식이든 상관없다 - 이 옆길로 샌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어떻게 이처럼 옆길로 새게 되었는지를 깨달음으로써 체내의 생화학기능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의식을 벗어나면 생화학작용은 없다. 우리 몸 안의 모든 세포들은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신은 냉혹하게 몸을 허물어뜨리는 세월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던 환상은 깨끗이 떨어져 나간다.
6. 지능의 자극이 신체를 시시각각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낸다.
몸을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 내는 것은 변화하는 생명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서 필요하다. 예컨대 어린아이의 눈에 보이는 현실 속에는 친숙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있다. 그리하여 세상에 대해서 좀더 많은 것을 배우기까지는 그의 몸은 능숙하고 조절되지 못한 행동을 보인다. 3개월 된 아이는 그림 속의 계단과 실제의 계단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 아이의 대뇌는 어떤 것이 눈의 착각인지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6개월이 되면 아이의 현실이 변화된다. 그 정도 된 아이들은 눈의 착각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 지식을 이용해서 그들의 몸은 3차원 공간을 좀더 잘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거울이 벽 속의 구멍처럼 보이지 않으며, 진짜 계단은 올라가기 위한 것이지만 그림 속의 계단은 그렇지 않으며, 둥근 것과 판판한 것은 다르다는 등.) 이러한 인식의 변천은 단지 정식적인 것만이 아니다. 눈과 손을 사용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 성공적으로 사용되며, 형상을 인식하고 운동기관을 조절하는 뇌의 다양한 중추의 육체적인 수준에도 변화가 온다.
새로운 인식이 계속 뇌로 들어오는 한 우리의 몸은 새로운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다. 이보다 더 강력한 젊음의 비결은 없다. 여든 살 먹은 나의 환자 한 분이 간명하게 말씀하신 것처럼, ‘사람은 성장하기 때문에 늙지 않는다. 성장하기를 멈추면 늙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기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 이런 것들이 몸과 마음을 성장시키며 이 일이 계속 일어나는 한 시시각각 새로워지려고 하는 본연의 경향이 외부로 표현된다.
양자의 세계에서, 변화는 불가피하지만 노화는 그렇지 않다. 우리 육신의 시간적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청년 같은 50대가 지니고 있는 분자와 할아버지 같은 50대의 체내 분자는 나이가 같다. 어느 쪽이나 몸의 나이를 말하자면 50억 살(온갖 종류의 원자의 나이)이라고도 할 수 있고, 한 살(인체 조직 속의 원자가 교환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라고 할 수도 있으며, 혹은 3초(세포가 음식과 공기와 물을 처리하는 효소를 교체하는 데 걸리는 시간)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우리를 소용돌이처럼 휩쓸고 지나가는 정보의 나이만큼밖에 나이가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은 매우 운 좋은 일이다. 우리는 양자장에 담겨 있는 정보의 내용을 통제할 수 있다. 각 세포를 이루고 있는 음식과 물과 공기 속의 원자에 담겨 있는 정보는 일정량의 고정된 것이지만 그 정보를 변형시킬 수 있는 힘은 자유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 한 가지, 이 세계에서 당신이 자유롭고 확실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세계에 대한 당신의 해석이다. 예를 들자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어린아이들이 성장을 멈춘 의학적 사례가 놀랄 정도로 많이 있다. ‘사회심리적 소인증(小人症)’이라고 불리는 이 증후군은 심하게 학대받은 아이들 가운데서 발생하는데, 그들은 사랑의 결핍을 성장호르몬의 결핍으로 바꿔 놓는다. 이 증상은 성장호르몬은 모든 아이들의 DNA 속에 새겨진 기정(旣定) 시간표에 따라 분비되는 것이라는 가설을 무색하게 만든다. 이런 경우에 해석의 힘은 신체 정보의 장에 변화를 일으킴으로써 유전자에 새겨진 내용을 무효화시킨다.
해석은 자신과의 상호작용에서 일어난다. 당신은 이것을 마음 속의 대화로 경험한다. 생각, 판단, 그리고 느낌이 끊임없이 마음 속을 소용돌이친다. “난 이것이 좋아. 저것은 싫어. 이것은 겁나지만 저것은 잘 모르겠어.” 등등. 마음 속의 대화는 제멋대로 일어나는 정신적 잡음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지닌 가정과 신념에 의해서 의식의 심층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이 현실에 대해 세워 놓은 어떤 가정이 진실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신념의 핵심이 형성된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견지하고 있는 한, 당신의 신념은 신체 정보의 장을 특정한 변수의 범위 안에 가둬 놓는다. 즉, 당신은 어떤 것을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에 맞는가 안 맞는가에 따라서 좋은 것으로, 혹은 싫은 것으로, 괴로운 것으로, 혹은 즐거운 것으로 인식한다.
어떤 사람이 인식을 변화시키면 그의 현실에도 또한 변화가 일어난다. 사회심리적 소인증을 앓는 아이들의 경우, 성장호르몬을 투여하는 것보다 사랑이 있는 환경 속에 살게 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나타낸다. (자신은 부모가 원치 않으며 가치없는 존재라는 신념이 너무 강하면 성장호르몬을 투여해도 몸이 자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양부모를 만나 자신이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라고 믿는 이들의 근본 신념이 바뀌며 그들은 자연의 성장호르몬을 마치 둑이 터지듯이 분비하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정상적인 키와 몸무게와 발육상태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들이 자신을 달리 보게 됨으로써 생리적 차원에서 그들의 개별적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노화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은 늙게 되어 있다는 뿌리깊은 신념이 어떻게 노화 그 자체로 변형되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강력한 일화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신념이 늙어가는 자화상을 만들고, 그것들이 자기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 마음 속으로 바랐던 것이 실제 결과로 나타나는 것 - 으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이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이 떠받치고 있는 신념을 뒤엎어야만 한다. 당신의 몸이 시간과 함께 쇠퇴해 간다는 신념 대신에 당신의 몸은 시시각각 새로워진다는 신념을 키워 가라. 당신의 몸이 마음 없는 기계라는 신념 대신에, 당신의 몸은 생명의 심원한 지능으로 차 있으며 그 지능의 유일한 목적은 당신을 북돋우는 것뿐이라는 믿음을 키우라. 이 새로운 신념들은 그저 지니기에 기분좋은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다. 우리는 몸을 통해서 삶의 희열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이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7. 분리된 개체처럼 보이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가 우주를 지배하는 지능의 패턴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와 주위의 환경은 하나이다.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이 어느 지점에서 끝나 있다고 인식한다. 우리의 몸은 방의 벽이나 집 밖의 나무와는 텅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러나 양자의 관점에서 보면 ‘고형 물질’과 ‘빈 공간’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1입방센티미터마다 양자 공간은 거의 무한대의 에너지로 채워져 있다. 또한 아무리 미세한 진동이라도 그것은 전체 은하계 속을 진동하고 있는 광대한 장의 일부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의 환경은 곧 우리 몸의 연장이다. 호흡을 할 때마다 우리는 중국에 사는 누군가가 어제 내쉰 수억 개의 공기 원자를 들이마신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산소와 물과 햇빛은 우리 체내에 있는 것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사물과 합일되어 있는 상태를 체험할 수 있다. 보통의 깨어 있는 의식 상태에서는 당신은 장미를 만져 보고 딱딱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의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당신의 손가락이 또다른 에너지와 정보의 덩어리인 장미를 만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손가락과 그것이 만지는 대상은 둘 다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무한한 장의 한갓 미세한 끄트머리일 뿐이다. 이러한 진리가 고대 인도의 성현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이렇게 외치게 하였다.
소우주가 그러한 것처럼 대우주 또한 그러하도다. 원자가 그러한 것처럼 우주 또한 그러하도다. 인간의 몸이 그러한 것처럼 우주의 몸 또한 그러하도다. 인간의 마음이 그러한 것처럼 우주의 마음 또한 그러하도다.
이것은 한낱 신비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분리의 상태에서 의식을 해방시켜 만물과의 일체성(unity)을 확인한 이들의 실제적인 체험이다. 일체성 속에서는 ‘외부에’ 있는 의식, 사람들, 사물들, 그리고 사건들은 모두 우리 몸의 일부가 된다. 사실, 우리는 이 영향력들의 중심에 있는, 관계들의 거울일 뿐이다. 유명한 자연주의자인 존 뮤어(John Muir)는 “무엇인가를 따로 집어 내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우주 속의 모든 것들과 얽혀 있음을 발견한다”고 외쳤다. 이것은 결코 희귀한 경험이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물들의 주춧돌이다.
일체성의 경험을 할 수 있는가는 노화와 관련해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와 우리의 연장된 몸 사이에 조화로운 상호작용이 있으면 우리는 기쁘고 건강하고 젊은 느낌을 느끼기 때문이다. “공포는 분리에서 나온다”고 인도의 성현들은 말한다. 이 말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노화하는가를 깊숙이 지적해 주고 있다.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봄으로써 우리는 자신과 ‘외부의’ 사물들 사이에 혼돈과 무질서를 만들어 낸다. 최종 상태의 분리인 죽음은 공포스러운 미지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생명의 일부인 변화의 가능성 그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상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폭력을 수반한다. 다른 사람들, 사물들, 사건들이 우리와는 떨어져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게 만들고자 한다. 조화 속에는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체성 속에 있는 사람은 지배가 불가능한 것을 지배하려고 무모하게 애쓰는 대신 받아들이는 것을 배운다. 그렇게 해야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그의 내면과 그의 연장된 몸 속에는 평화와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성현인 크리슈나무르티(Jidu Krishnamurti)는 경이롭게 각성된 의식과 지혜와 줄어들 줄 모르는 활력으로 90여 성상을 살았다. 나는 그가 여든 다섯의 나이로 강단을 향해 계단을 뛰어 올라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를 여러 해 동안 알고 지낸 한 여인이 하는 말에 나는 매우 감명 받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 이 한 가지만을 알았습니다. 그에게는 폭력성이 전혀 없습니다.”
양자적 우주관은 그 방정식과 가정에 관한 한 영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발견에 대해 신비로운 경외감으로 일치되어 있었다. 닐스 보어는 물질의 파동적인 속성을 우주심에 비교했다. 그리고 어빈 슈뢰딩거는 우주는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마음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생을 마쳤다. (이것은 중력과 다른 모든 힘들이 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라고 한 뉴턴의 말을 재확인시킨다.) 진리인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을 탐사하는 것이 언제나 인간을 더 큰 의미의 영혼의 가장자리로 데려다 놓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이러한 만남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한때 마음과 몸과 영혼을 갈라 놓았던 경계를 실제로 넘나들 수 있게 해준다.
분리로부터 일체로, 분쟁으로부터 평화로의 변화가 모든 영적 전통의 목표이다. “우리는 똑같은 객관적 세계 속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이 대답했다. “그렇다. 그러나 그대는 세계 속에 있는 자신을 보고 나는 내 속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 하찮은 인식의 전환이 속박과 해방의 그 모든 차이를 만든다.”
우리는 모두가 자신을 분리되고 외떨어진 존재로 봄으로써 만들어낸 무질서 속에 구속되어 있다. 그 완벽한 예가 감정이 격하고 욕구불만적인 행동은 보이며 끊임없이 마감시한에 쫓기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A형의 성격(Type A Personality) - 성급하고 경쟁심이 많으며 항상 긴장하고 있는 인간의 행동유형. 미국의 심장의학자 메이어 프리드먼(Meyer Friedman)과 로이 로젠먼(Roy H. Rosenman)이 만든 말이다. - 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어떤 종류의 포용성이나 흐름 속에도 자신을 풀어놓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과거의 상처를 분노로 키워 간다. 이같이 억눌린 혼란은 적개심과 성급함, 타인에 대한 책망, 까닭 없는 공포로 주변 환경에 투사된다. 이런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지배하려고 하며 사소한 스트레스에 대해서도 과민하게 반응하여 자신과 남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가한다. 특히 사업계에서 A형의 사람은 끊임없이 혼돈을 일으키는 와중에서 자신은 성공적으로 경쟁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실제에 있어서는 일의 성과는 매우 낮으며 욕구불만이 쌓여 감에 따라 자신의 연장된 몸으로부터 들어오는 피드백은 육체적 몸 속에 더 많은 폐허상태를 만들어 낸다. 혈압과 콜레스테롤치가 상승하고 심장은 불필요한 스트레스성 발작을 잘 일으켜 치명적인 심장마비나 뇌졸중의 위험이 심각하게 높아진다.
A형의 성격은 자신의 연장된 몸과 조화롭게 교류하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해로움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환경 속에서 인식하는 스트레스는 모든 사람들을 덮쳐 오는 대부분의 노화현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우리를 노화하게 만드는 것은 스트레스라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인식하는 것이다. ‘저 밖에’ 있는 세계를 위협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스트레스 반응이 가져오는 손상에서 해방되어 환경과 공존할 수 있다. 여러 모로 보아, 늙지 않는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세계가 바로 당신 자신임을 확인시켜 주는 지식을 더욱 풍부하게 가지는 것이다.
8.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만물의 배후에 숨어 있는 실재는 영원하다. 이른바 시간이라는 것은 사실은 계량화된 영원이다.
우리의 몸과 온 물질세계가 끊임없는 변화의 전개이기는 하나, 그것은 과정이라기보다는 실재이다. 우주는 생겨났으며 진화하고 있다. 우주가 생겨남으로써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게 되었다. 대폭발의 순간 이전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리적인 마음으로는 ‘시간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또는 ‘공간보다 큰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아인슈타인조차도 양자이론을 처음 구상하던 젊은 시절에는 뉴턴의 사상에 빠져 우주가 변하지 않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낡은 관념을 고수하여, 시간과 공간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영원한 상수라고 생각했다.
이 정상(定常)상태(steady-state)의 실재관은 우리의 오감이 아직도 우리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빨라지거나 늦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공간이 확장되거나 수축되는 것을 감지할 수가 없으나, 이 또한 리드미컬한 우주의 일부분이다.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던 무차원의 영역을 상상한다는 것은 인식의 급격한 전이를 요구한다. 우주는 모종의 영원한 근원이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전이를 강요당하고 있다.
우리의 몸이 변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흐름, 혹은 연속(순차적 연쇄)이 있어야 한다. 이 연속 속에는 전과 후가 있다. 이번의 호흡 전에는 먼젓번의 호흡이 있었고 이번의 심장박동 후에는 다음번의 심장박동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시간과 도구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의 평생 동안의 심장박동에 대한 심전도(心電圖)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출력된 그것을 손에 듦으로써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자리에 담긴 것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아래로 훑어볼 수도 있고 위로 거슬러 훑어볼 수도 있다. 마지막의 박동과 맨 처음의 박동이 나란히 오도록 접어 볼 수도 있다.
자연계 속의 가장 기본적인 시공간적 사건들에 관해서 양자물리학이 밝혀 놓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식의 조작이다. 이 사건들이 에너지 상태를 교환할 때 두 개의 입자는 쉽게 시간을 거슬러갈 수도 있고 앞질러갈 수도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미래의 에너지 사건에 의해 변경될 수도 있다. 화살처럼 돌이킬 수 없이 앞으로만 날아가는 시간의 개념은 양자 공간의 복잡한 기하학 속에서 영원히 깨져 버렸다. 양자공간 속에서는 다차원의 줄과 고리가 시간을 모든 방향으로 끌고 다니며, 심지어는 그것을 정지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절대는 무시간성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온 우주가 그보다 큰 실재에서 터져 나오는 일개사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날과 달과 시, 분, 초라고 인식하는 그것은 더 큰 실재에서 떼어 낸 조각들이다. 무시간성을 마음 내키는 대로 떼어 내는 것은 인식자인 우리에게 달린 일이다. 우리의 인식이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을 만들어 낸다. 끊임없이 손에서 빠져나가는 귀한 생필품으로서 시간을 경험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개인적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루를 늘 시간에 쫓기며 살고 있는가? 당신은 빠르고 불규칙적인 심장박동과 소화 리듬의 교란, 불면증, 고혈압으로 신체상에 나타나는 숨막히고 공포스러운 ‘시간병’ 증세에 시달리는가? 이러한 개인 간의 차이는 우리가 변화를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변화의 인식은 시간의 경험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과거나 미래에 의식을 두고 있으면, 우리는 시간의 장 속에서 노화를 만들어 내는 셈이다. 나이에 비해서 놀라울 정도로 젊어 보이는 한 인도의 스승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 속에서 일생을 보낸다. 그러나 나의 삶은 현재 속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다.” 인생이 현재 속에 집중되어 있으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과거나 미래가 그 위에 침범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과거나 미래는 어디 있는가? 아무 데도 없다.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정신적인 투사(投射)이다. 당신이 이 투사에서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면, 과거를 건져 내려고도, 미래를 어떻게 해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전혀 새로운 체험의 공간이 열린다. 그것은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체험이다.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현실과 일체가 될 수 있는 능력은 지극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지 못하면 시간이 불가피하게 가져오는 노쇠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다. 당신은 간단한 심신 훈련으로써 시간을 초월한 상태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압박감 없이 이완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을 정하라. 편안한 의자에 앉아 시계를 풀어라. 시계를 들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가까운 장소에 시계를 놓아 두라. 이제 눈을 감고 호흡을 의식하라. 의식으로 하여금 들고 나는 숨의 흐름을 편안히 따르도록 놓아두라. 호흡의 흐름과 함께 온몸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고 상상하라. 1, 2분 후에는 따뜻하고 이완되는 느낌이 근육 전체에 퍼지는 것을 의식하게 될 것이다.
내면적으로 안정되고 고요해지면 천천히 눈을 살짝 떠서 시계의 초침을 엿보라. 초침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이 얼마나 이완되느냐에 따라 초침은 다른 행태를 보일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초침이 완전히 멎어 있을 것이고 이런 효과는 1초 내지 3초까지 지속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0.5초 정도 머뭇거리다가 정상적인 째깍거림으로 건너뛸 것이다. 또다른 사람들에게는 초침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평상시보다 느려져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실험은 직접 해 보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시계가 멈추어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면 시간이 인식의 산물임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다. 존재하는 유일한 시간은 당신이 인식하고 있는 시간뿐이다.
당신은 자신의 의지대로 의식을 시간을 초월한 영역으로 데려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명상은 이러한 경험을 익히기 위한 고전적인 기법이다. 명상중에는 활동하는 마음이 그 근원으로 철수된다. 이 변화하는 우주가 변화를 초월한 근원을 가져야만 하듯이, 쉬지 않고 활동하는 당신의 마음 또한 생각과 느낌과 감정과 욕망과 기억을 넘어선 의식 상태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심오한 개인적 체험이다. 시간이 없는, 혹은 초월적인 의식의 경지에서 당신은 충만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변화와 상실과 쇠퇴 대신 안정감과 충만감이 있다. 당신은 무한(無限)이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경험이 현실이 되면 변화와 결부된 공포는 사라지고 시, 분, 초와 날과 달로 쪼개어진 영원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매순간의 완전성이 본질적인 것이 된다.
이제 명상은 서양 문화의 주류 속으로 진입했다. 연구자들은 침묵과 충만과 영원이라는 주관적 경험을 측정해 내기 위해 과학적 기법들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명상자의 생리기능이 훨씬 더 효율적으로 발휘되는 상태로 전이하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다. 수많은 개인적 연구결과에 의하면, 호흡이 길어지고 산소 소비량이 줄어들며 대사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노화와 관계되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스트레스 - 노화현상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알려진 - 와 관련된 호르몬의 불균형이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노화와 연관되는 다양한 생리상태의 변화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노화과정을 늦추거나 심지어는 역전시키기까지 한다. 초월명상(TM, Transcendental Meditation) - 인도의 스승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가 미국에 전파한, 만트라를 통해 의식을 일종의 초월상태로 이끄는 명상기법 - 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연구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오랫동안 명상을 한 사람은 생리적인 연령이 실제 나이보다 5년 내지 12년 정도 젊은 것이 확인되었다.
20년이 넘도록 계속된 이 연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노화의 생리적 과정 그 자체를 조작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의식을 통해서만도 바라는 결과가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명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시간을 경험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틀 그 자체를 바꾸어 놓는 것이다. 양자 차원에서는, 시간이 그다지 큰 지배력을 지니지 못하는 현실 속으로 마음을 옮겨다 놓는 것만으로도 심장박동이나 호르몬치와 같은 시공간 속의 물리적 사건에 영향을 준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시간이 다양한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의식은 그 모든 차원을 사용할 수 있다.
9. 우리는 모든 변화를 초월한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이 현실을 경험하면 변화는 우리의 지배 아래에 들어온다.
지금 당신이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생리학은 시간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의식에 종속된 것이라는 사실은 당신이 전혀 다른 형태의 기능 - 불사의 생리학 - 을 보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곧 불변성의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 불변성은 변화의 결과로서는 생길 수가 없다. 그것은 시간에 속박된 의식으로부터 시간을 초월한 의식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환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다. 예컨대 당신이 극도로 시간에 쫓기면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 압박감에 대한 신체의 반응이 언제나 일률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압박감을 창조성과 에너지의 원천으로 이용하여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그에 떠밀려서 적극적인 동기를 상실하고 중압감을 느껴 스트레스를 보상할 만한 만족을 얻어내지 못한다.
창조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시간의 압박에 휘말리지 않는 법을 알고 있다. 그로부터 스트레스와 구속감을 느끼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자신을 덮쳐 온다. 그는 내부의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몸 세포는 끊임없이, 온갖 미묘한 방법으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자신을 맞추어 나간다. 생리학자라면, 우리가 수백만의 얽히고 설킨 심신상관적 사건들로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의 연쇄 속에 끌려 다닌다고 혹은 갇혀 있다고 말할 것이다.
시간에 얽매인 과정들을 재정돈할 수 있는 어떤 상태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문제이다. 간단한 비유가 이 점을 밝혀 줄 수 있다. 당신의 신체를 뇌와 모든 세포 사이를 왕복하는 신호들의 출력물로 생각하라. 보내지는 신호의 종류를 정하는 신경계는 신체의 소프트웨어 역할을 한다. 온갖 종류의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과 기타 전령 분자(messenger molecule)들을 이 소프트웨어가 처리하는 입력물이다. 이 모든 것이 당신의 몸을 구성하는 눈에 보이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프로그래머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어디엔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심신상관 체계 속에서는 매초마다 수천 개의 결정이 내려지고 생명의 요구에 부응하게 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이 내려진다.
만일 내가 인도에서 길을 걷다가 코브라를 보고 겁에 질려서 뒤로 물러섰다면, 이 사건을 제어하는 눈에 보이는 장치는 내가 보인 근육의 반응일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신경계가 보낸 화학적 신호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빨라진 심장박동수와 가빠진 호흡은 뇌하수체에서 보내진 특별한 화학물질(부신피질 자극 호르몬)에 반응하여 부신피질에서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촉발시킨 것이다. 나의 겁에 질린 반응과 관련된 분자 차원의 작용을 생화학자가 낱낱이 추적할 수 있다고해도, 그는 여전히 그렇게 반응하기로 결정을 내린 눈에 보이지 않는 결정자를 발견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짧은 순간적 반응을 한다고 할지라도 마음도 없이 몸이 혼자 놀라 물러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혀 다른 프로그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땅꾼이라면 흥미롭다는 듯 허리를 구부릴 것이고 힌두교 신자라면 시바 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경외감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사실은 ‘그 어떤’ 가능한 반응 - 공포, 흥분, 신경질적 반응, 마비, 무감각, 호기심, 기쁨 등등 - 도 다 일어날 수가 있다. 보이지 않는 프로그래머는 눈에 보이는 신체기관을 프로그램할(어떤 유형의 행동을 하라고 지시할) 수 있는 무한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가 뱀과 마주치는 순간, 나의 모든 기초 생리기능들 - 호흡, 소화, 대사, 배설, 인식, 사고작용 - 은 코브라가 나에게 지고 있는 ‘의미’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올더스 힉슬리(Aldous Huxley)의 말 속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 “경험이란 당신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일어나는 것에 대한 당신의 반응이다.”
당신은 이 의미란 것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빠르고 손쉬운 대답은 대뇌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신체 기관은 다른 모든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순간마다 뇌 속의 수 십억의 원자들은 철새처럼 들락거린다. 대뇌는 일평생 단 한번도 동일한 패턴을 보이는 법이 없는 전기파로 회오리친다. 뇌의 기본적인 화학작용은 점심식사에 색다른 음식이 들어왔거나 갑작스럽게 기분이 흔들리면 변이될 수 있다. 그러나 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변화라는 큰 바다 속에 녹아 없어지지 않는다. 나의 기억은, 그 기억 위에 서서 말없이 나의 삶을 지켜보며 나의 경험을 참고하여 언제든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즐기는 프로그래머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프로그래머는 단지 선택하는 의식일 뿐이다. 그것은 변화에 압도되지 않고 다만 음미한다. 그러므로 시간에 얽매이는, 일상적 인과의 세계에서 생기는 한계에 제약받지 않는다.
뱀을 무서워하는 ‘나’는 과거 언젠가 그 두려움을 학습했다. 나의 모든 반응은 시간에 얽매인 자아와 그것이 지닌 성향의 요체이다. 1,000분의 1초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프로그램되어 있던 공포가 일련의 신체적 신호의 연쇄를 일으켜서 그와 같은 반응을 만들어 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는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의식을 가지고 말없이 지켜보는 결정자(decision maker)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미묘한 경로로, 우리 내부에 있는 어떤 것이 우리가 갓난아이적 이래로, 설사 변한 것이 있다고 해도 크게 변한 것이 없음을 다들 느끼고 있다. 아침에 깨어나면 오랜 세월동안 형성되어 온 온갖 규정들이 자동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의 순수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행복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으며, 잘난 체하지도 않고 겸손해 하지도 않으며, 늙은 것도 아니고 젊은 것도 아니다.
아침에 깨어날 때 이 ‘나’는 경험이라는 갑옷을 재빨리 걸쳐 입는다. 수초 내로 나는 자신을 상기한다. 예컨대 나는 마흔여섯 살의 의사이며 아내가 있고 두 자녀가 있고 보스턴 근교에 집이 있고 병원까지는 10분 거리에 있다는 등으로, 이러한 자아의 정체성은 변화의 결과이다. 변화를 초월한 ‘나’는 어디서나 일깨워질 수 있다. 할머니의 요리냄새를 맡고 있는 인도 델리 시의 다섯 살배기 아이, 플로리다에서 야자수 나뭇잎을 흔드는 사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든 살 노인네 등으로. 고대 인도의 성현들이 간단히 ‘진아(眞我)’라고 부른 이 변함없는 ‘나’는 경험에 있어서 나의 진정한 기준점이 되어 준다. 다른 모든 기준점은 변화와 쇠퇴와 상실을 피할 수 없다. 다른 모든 ‘나’의 느낌은 상대적 세계가 부과하는 모든 시간에 얽매인 조건, 예컨대 고통 아니면 기쁨, 빈곤 아니면 부유, 행복 아니면 슬픔, 젊음 아니면 늙음과 동일화되어 있다. 일체의식 속에서는 이 세계는 영혼(Spirit) - 곧 의식 - 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우리의 지상의 목적은 영혼으로서의 진아와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긴밀한 관계를 만들어 내는 정도에 따라서 늙지 않는 몸과 시간을 초월한 마음의 경험이 실현될 것이다.
10. 우리는 노화와 질병과 사망의 제물이 아니다. 이들은 풍경의 일부일 뿐 어떤 형태의 변화에도 물들지 않는 지켜보는 자는 아니다.
근원적으로 생명은 창조이다. 당신이 자신의 내면의 지능과 접하게 되면 당신은 생명의 창조적인 핵심에 이른 것이다. 낡은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DNA에 주어져 있었다. DNA는 극도로 복잡한 구조의 분자로서, 유전학자들에게조차 그 비밀은 1퍼센트도 밝혀져 있지 않다. 새로운 패러다임에서는 생명의 지배력이 의식에 속해 있다. 앞에서 열거된 모든 예들 - 성장호르몬의 분비를 차단할 수 있는 아이, 초조감을 느낄 때 인터루킨 생산에 변동이 오는 의대생들, 의지로써 심장박동수를 조절할 수 있는 요기들 - 은 대부분의 기초 신체기능들이 우리의 정신상태에 반응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의 몸 세포 속에서 일어나는 수십억 가지의 변화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생명의 광경일 뿐이다. 이 막 뒤에는 지켜보는 자가 있다. 그는 곧 흐르는 의식의 근원이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의식과 함께 시작되고 끝난다. 내가 스스로 정하는 모든 목표와 기대치는 의식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고대의 성현들이 진아라고 한 그것은 현대 심리학 용어로 의식의 연속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일체의식이라고 알려진 의식상태는 의식이 완전한 상태이다. 즉, 가면과 환상과 벌어진 틈바구니와 파편이 없는 자신의 연속체 전체를 간파하는 상태이다.
우리는 의식의 연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므로 모두가 이런 저런 종류의 틈바구니 속으로 떨어진다. 많은 물질적 존재의 영역들이 우리의 지배를 벗어나 질병과 노화와 사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의식이 파편화되었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1970년대 초반에 메닝거 병원에서 행한 유명한 일련의 실험에서 인도의 저명한 영성가인 스와미 라마는 의지로써 자신의 심장박동수를 70회에서 정상치를 크게 상회하는 300회까지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시범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심장박동은 더 이상 정상적으로 리드미컬하게 혈액을 펌프질하지 못하고 일종의 경련상태에 이르렀다. 보통사람이라면 심장의 경련은 심장마비와 기타 심각한, 때로는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런 사고는 해마다 수천 명의 건강한 사람들을 괴롭힌다.
그러나 스와미 라마는 이러한 심장이상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일은 의식의 직접적인 명령하에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장박동수가 정상이다가 갑작스러운 이상으로 불과 수분만에 죽는 사람들(모든 종류의 부정맥, 심장 세동(細動), 심빈박(心頻搏)이 이런 범주에 속한다)이 실제로는 의식의 손상을 겪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우리는 우리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비추어 이러한 손상의 원인을 심장근육의 탓으로 돌린다. 즉, 규칙적인 심장박동을 주관하는 전기화학 신호가 교란되었다는 것이다. 심장을 구성하고 있는 수십억개의 세포들이 전체의 유연하고 통일된 운동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제각각으로 혼란스럽게 수축하여 심장을 마치 꿈틀대는 뱀이 든 주머니 모양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모든 심장전문의들이 두려워하는 이 끔찍스러운 광경은 2차적인 현상일 뿐이다. 심장세포 가운데서의 의식 손상이 1차적인 원인이다. 이 의식의 손상은 국부적인 손상이 아니라 전반적인 손상이다. 환자 자신이 자신의 모든 몸 세포를 다스리고 제어하는 지능의 심층차원과의 통신로를 잃어버린 것이다. 실상, 모든 세포는 눈에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층의 패턴으로 조직된 지능 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스와미 라마와 같은 도인은 우리의 의식이 그처럼 조각조각 파편화되고 축소되어야 할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게 되면 그는 자신이 이 지능의 흐름의 근원이며 경로이며 목표임을 깨달을 것이다. 세계의 종교 전통이 영(Spirit)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전체(wholeness), 즉 의식의 모든 조각난 파편들을 굽어보고 있는 의식의 연속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질병과 노화와 사망의 제물이 되었다. 의식을 잃는 것은 지능을 잃는 것이고 지능을 잃는 것은 지능의 최종산물인 인체에 대한 지배력을 잃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교훈은 이것이다. 즉, 몸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먼저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매우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당신의 자아관(自我觀)의 결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해전에서 독일 군인들은 가끔씩 전함이 침몰되어 구명보트에서 며칠, 혹은 일주일씩 구조를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서 어김없이 맨 먼저 죽는 것은 젊은 군인들이었다. 전에도 침몰 당했다가 살아난 적이 있는 베테랑 선원들은 위험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경험이 없는 젊은 선원들은 자신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어갔던 것임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 현상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사례에서 단서를 잡아, 동물실험 연구자들은 실험용 생쥐들을 물탱크 속에 빠뜨리는 등의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이들을 빨리 노화시키거나 병들게 하여 죽도록 만들 수 있었다. 한번은 그러한 상황에 처해 본 적이 없는 동물들은 그것을 절망적으로 받아들이고는 금방 포기하여 죽어 버린다. 물탱크에 단계적으로 익숙해진 동물들은 그것을 견뎌 내어, 세포가 스트레스에 의해 파괴되는 증세를 보이지 않고 오랫동안 헤엄을 치면서 버틴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노화는 대부분 절망 때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었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운 상상이 노인들의 높은 발병률과 노인성 치매와 합세하여, 냉혹하며 자기충족적인 기대를 가져다 주었다. 노년은 몸과 마음이 점점 더 허약해지는, 피할 수 없는 쇠약과 상실의 시기이다. 이제 우리의 사회 전체는 노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으로 깨어나고 있다. 60, 70대의 노인들이 40, 50대의 원기왕성한 건강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가정 - 인간은 늙어‘야만’ 한다는 것 - 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 늙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가 낡은 패러다임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서, 의식의 전환이 새로운 사실을 백일하에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낡은 우주관 속에 하나의 사실로서 완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우주관이란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를 어떤 논리적인 틀 속에 정돈하는 하나의 방식론일 뿐이다. 노화는 모든 것이 변해 가고 사라지고 죽는 자연계의 틀 속에서는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지능의 끝없는 흐름이 온통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세계 속에서는 그 합리성을 상실해 버린다. 어느 쪽의 관점을 받아들일 것인가는 당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당신은 장미꽃이 피었다가 시드는 것으로 보기로 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끝없는 생명의 물결로 보기로 할 수도 있다. 다음해에는 그 장미의 씨앗에서 싹터 나온 새 장미를 보게 될 것이므로.
물질은 시간과 공간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유폐된 순간이다. 우리 자신과 우주를 유물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우리는 우주의 유폐된 측면이 과도한 중요성을 지니게 만든다. 나는 여러분들의 우주관이 바뀔 때 존재란 것이 얼마나 유연하고 힘들지 않는 것일 수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은 고형적인 물리적 외양에도 불구하고 흡사 강과도 같다. 헤르만 헤세가 영적인 소설 <싯다르타(Siddhartha)>에서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던 그 신성한 강 말이다. 깨달음을 찾아 헤매는 구도자 싯다르타가 마침내 자신의 평화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여러 해를 방랑하던 끝에 그는 넓은 니란자 강가에서 발을 멈추는데 그때 내면의 소리가 이렇게 들려 온다. ‘이 강을 사랑하라. 그 곁에 머물러 그로부터 배움을 얻으라.’ 나에게는 이 속삭임이 생명의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흐르고 흐르는 나의 몸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 강과도 같이, 나의 몸은 순간의 바뀜과 함께 변화하며, 만일 내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 어떤 공백도, 새삼스러운 고통을 일으킬 과거의 어떤 아픈 기억도, 두려움을 가져올 미래의 상처에 대한 예상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몸은 우리를 떠받쳐 주는 생명의 강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너무나 겸손하여 우리의 인식조차 요구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면, 힘있는 어떤 지능이 그 속에 우리와 함께 깃들여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학문적인 지능이 아니라 하나의 세포 속에 짜여 들어 있는 수백만 년의 지혜에 버금가는 그런 것이다. 학문적인 지식은 그처럼 웅대하지는 못하다. 싯다르타는 그 강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기를 원했다. 이 점이 지극히 중요하다. 당신이 몸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려면 몸의 흐름과 다시 하나가 되기를 원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낡은 관점이 간과해 왔던 지식에 대해서 기꺼이 마음을 열어 놓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헤세는 “그에게는, 이 강과 그 비밀을 이해하는 자는 누구나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많은 비밀들을, 아니 모든 비밀을 이해하게 되리라고 생각되었다.” 당신에게 일어난 것은 모두 당신의 몸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능성 또한 그 속에 있다는 것이다. 노화는 당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대부분 당신의 몸이 배워 온 것이다. 신체는 프로그래머인 당신이 입력시킨 것을 수행하도록 배워 왔다. 이 프로그램의 너무나 많은 부분이 당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신념과 가정에 지배받는 무의식적인 것이어서,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물질세계를 가져다 준 사념체계를 모두 허물어뜨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적 자아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친숙한 경험 속에 가장 개인적인 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에 대해서 편안해지면, 질서가 엔트로피와의 싸움에서 자꾸만 밀릴 때 모든 것 위에 덮쳐오는 공포의 그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믿도록 배워 온 세계는 그런(질서가 엔트로피 앞에서 밀리는) 세계이다. 그러나 또다른 방식이 있고 다른 세계가 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강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었다.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행자인 바수데바에게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네도 강의 비밀을 깨달았는가?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말이야.”
바수데바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퍼졌다. “그렇다네, 싯다르타. 자네가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닌가?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지. 그 근원에도, 하류에도, 폭포에도, 나루터에도, 흐르는 줄기에도, 바다에도. 그리고 강에게는 과거의 그림자도, 미래의 그림자도 없이 오직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 말일세.”
“바로 그거야.”하고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돌아보았고 그것 또한 하나의 강이었네. 어린 싯다르타와 젊은 싯다르타, 그리고 늙은 싯다르타는 실재가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된 것일 뿐이었지.”
그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으나 바수데바는 그저 환한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수세기에 걸쳐 물질주의가 조장해 온 망상은 우리가 강을 정복하여 그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로부터 얻는 유일한 것은 죽음일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 진리인 것은, 우리의 삶이 더욱 더 큰 경험의 장으로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존재 속에 집약되는 에너지, 정보, 그리고 지능에는 한계가 없다. 이러한 무한의 창조성은 그 육적인 형태로서 당신의 세포 속에 육화되어 있다. 또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서, 말해지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의미, 가능한 모든 진리, 가능한 모든 창조로 충만해 있는 공(空), 즉 마음의 침묵 속에 표현되어 있다. 모든 원자의 핵심 속에 존재하는 공은 우주의 자궁이다. 두 개의 뉴런이 상호작용할 때 명멸하는 사념 사이에 새로운 세계 탄생의 기회가 존재한다. 시간의 호흡이 시들지 않고 오직 새로워질 뿐인 바로 그 침묵의 탐사에 관한 것이다. 아무도 늙지 않는 땅을 찾으라. 그곳은 다름 아닌 당신 안에 있다 |
- 디팩 초프라-
양자물리학과 의식의 본질
1. 완전한 관찰자로서 자신을 볼 수 있을까?
2. 이전에 내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떤 점에서 현실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
3. 양자역학은, 간단하게 말해서 '가능성에 관한 물리학'이다.
4. 현대의 물질주의는 사람이 모든 것이 주인이라는 생각을 빼았아 버렸다. 양자물리를 깊이 공부해보면, 그 책임은 분명히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5. 우리가 일상을 그냥 사는 것이 너무 익숙해져서, 현실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6. 우리는 외부의 세계가 내부의 세계보다 훨씬 더 실질적이라는 사실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양자물리학에 따르면 그 반대다. 즉,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외부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7. 뇌는 초당 4000억 비트의 정보를 처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 중 단지 2000여 가지만을 인식한다. 대부분 '자기보존'을 위한 정보들이며, 주로 몸과 주위환경 그리고 시간에 관한 것들이다. 뇌는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두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8. 뇌가 볼 수 있다고 하는 것들만 뇌 안에 저장해 둔다는 사실을 아는가? 카메라가 인간의 눈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이유는, 아무런 반대의견이나 판단이 없기 때문이다.
9. 뇌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는 것들 뿐이다. 즉, 우리가 가능하다고 믿는 것만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조건화를 통해 우리 안에 존재하는 것과 맞는 패턴만을 연결시킨다.
10. 미국 인디언들이 처음 콜럼버스의 배가 바다에 나타났을 때, 물결이 일렁이는 것은 볼 수 있었지만 배는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의식 안에 배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관찰 후에 주술사가 먼저 배를 볼 수 있었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을 하자 사람들도 배를 볼 수 있었다.
11. 우리는 현실을 창조한다. 우리는 현실을 창조하는 기관이다. 우리는 항상 현실 속에서 결과를 창조해낸다. 우리는 항상 ‘기억의 거울’에 비춰보고 난 뒤에 그것을 인식한다.
12. 양자물리학은, 도대체 진실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생각, 감정, 직관들이 관련되리라는 가정을 한다.
13. 물질은 우리가 오랫동안 그렇다고 생각해온 것이 아니다.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물질이 정적이고 예측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원자나 분자의 내부는 지극히 작은 입자들과 그리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자는 소멸과 존재를 항상 반복한다. 소멸되었을 때 입자들은 어디로 갈까? 다른 우주?
14. ‘시간의 방향에 관한 신비’라고 하는 거대한 신비가 존재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시간은 과거와 미래사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고, 과거만이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전제는 절대적이지 않다.
15. 우리는 우주가 비어있고 물질은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없다. 우주는 전혀 물질적이지 않다. 단단한 공이라고 보통 생각하는 원자는 원자핵 주위로 전자가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구조다. 원자핵도 단단하지 않다. 전자처럼 계속 소멸과 존재를 반복한다. 이러한 비물질적인 물질들에 대해, 우리가 가장 견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16. ‘생각’은 구체화된 정보조각 같은 것이다.
17. 물질은 구성하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나 개념, 정보들이다.
18. 우리에게 시간이 앞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의식의 경험’에 불과하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시간을 거꾸로 갈 수 있다.
19. 관찰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관찰하면 입자처럼 보인다. 관찰하지 않을 대는 ‘가능성의 파동’이 존재하고, 관찰할 때는 ‘경험의 입자’들이 존재한다.
20. 우리가 ‘견고’하다고 생각하는 입자들은 실제로는 ‘중첩’되어 존재한다. 가능한 위치가 펼쳐지고, 입자는 한 순간 ‘모든 위치’에 존재한다. 조사하는 순간, 입자는 가능한 위치 중 하나로 고정된다.
21. ‘양자 중첩’은 입자가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상태로 둘 이상의 위치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주 이상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양자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미 검증된 것이다.
22. ‘관찰’을 통해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23. 어떻게 시스템이나 사물이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하다, 물질을 물질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우리는 주위의 사물을 내가 입력하거나 선택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미 존재하는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 생각을 없애야 한다.
24. 대신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은 물질세계라 하더라도 이 모든 것들이 단지 ‘의식의 가능한 흐름’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이러한 흐름에서 순간순간 선택을 해서 나의 실질적 경험이 구체화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가장 중요한 생각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과는 별개로 세계가 외부에 이미 존재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으므로 쉬운 일이 아니다.
25. 그렇지 않다. 양자물리학은 그 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하이젠베르크도 원자는 물질이 아니라 단지 ‘경향’일 뿐이라고 말했다.
26. 그래서 사물을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대신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27. 사물들은 모두 ‘의식의 가능한 형태’들이다.
28. 양자물리학은 단지 가능성만을 계산해낸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누가 혹은 무엇이 이러한 가능성을 선택해서 경험이 구체화되는 사건들로 가져왔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 직접적이고 순간적으로 의식의 문제가 개입된다. 관찰자가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29. 우리는 양자물리학적 관점에서 관찰자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지만, 그 관찰자가 실제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뇌의 어느 곳에도 관찰자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외부를 관찰하는 관찰자라고 하는 어떤 것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30. 관찰자를 ‘영’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기계 속의 귀신과 같다. 껍데기를 움직이는 것은 의식이다. 의식은 주위를 관찰하고 몸은 온갖 종류의 감각기관을 갖추고 주위의 신호들을 포착해 낸다.
31. 1993년 여름, 워싱턴 D.C.에서 큰 실험을 한다. 수백 개의 나라에서 온 자원자들이 하루종일 명상을 일정기간 함께 하는 실험. FBI는, 이 정도 규모의 사람들이 명상은 범죄율을 25%정도 감소시킬 것이라고 예측. 경찰관계자는 그해 겨울에 눈이 60센티 이상 와서 범죄율이 25% 감소할 것이라고 TV에 나와서 말함. 실제 실험의 결과가 그러했음. 그 앞선 48개의 연구에서도 이미 예측된 것이었음.
32. 의문: 사람들이 우리가 보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다! 각 개인은 우리가 보는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비록 우리가 현실도피를 하거나 현실의 희생자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 모두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다.
33. 일본의 ‘마사루 이모토’ 박사의 물 결정 사진 연구: 물의 분자구조와 물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 물은 4대 원소 중에 수용성이 가장 뛰어난다. 물이 비물리적인 현상에 반응할 수 있다고 생각, 물에 정신적인 자극을 줌. 암시야 현미경으로 물 결정 사진 찍음. 생각이나 의도가 물 결정을 바꾼다고 생각.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고 말함. 우리 몸의 70%가 물이다.
34. 정말로 생각 하나만으로도 몸을 변화시킬 수 있다.
35.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방식으로는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의지를 적어 내려가다가도 지워버린다. 왜냐하면 그게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다시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그래서 시간적 평균으로 보면 그 의지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결국 그 의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사실로 변해버린다.
36. 만약 생각이 물에 이러한 작용을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37. 우리가 기본적으로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정한다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그렇다, 가능하다. 이런 것을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알고 있다. 멋진 개념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긍정적인 생각의 얇은 막’일 뿐이다. 그 막은 ‘부정적인 생각’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위장해 놓은 것일 뿐이다.
38.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것을 더 견고한 어떤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갇혀 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해 버리는 바로 그)동일한 현실에 갇혀버린다. 왜냐하면 현실이 구체적이라면 분명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실제 현실을 바꿀 수도 없게 된다.
39. 하지만 현실이 나의 가능성 즉 의식 자체의 가능성이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내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고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라는 문제다.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의 이미지를 확장할 수 있을까?
40. 고전적 사고관에서는 나는 어떤 것도 바꿀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현실에서 어떤 역할도 맡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나름대로 움직이는 물질적인 존재이다. 결정적인 법칙에 의해서. 그리고 수학은 주어진 환경에서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결정한다. 경험자인 나는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41. 새로운 관점에 따르면 수학이 어떤 것을 알려줄 수도 있고, 이러한 움직임들이 취하는 여러 가능성을 알려줄 수도 있지만, 내가 나의 의식 안에서 일어나는 실질적인 경험은 알려줄 수 없다. 내가 그 경험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 내가 나의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 물리학을 전혀 모르는 뉴에지류의 그런 폭탄선언이 아니라, 양자물리학이 그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42. 세상은 현실의 시간선 위에서 우리가 선택하기 전까지는 가능성만으로 존재한다. 양자장의 모든 현실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일까?
43. 과학과 철학에 의해 밝혀진 가장 깊은 진실은 단일성이라는 기초적인 진실이다. 현실의 가장 깊은 소립자적 단계에서는 우리는 모두 ‘문자 그대로’ ‘하나’이다.
44. 한 물리학자: 저는 아침에 일어나 하루를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창조합니다. 가끔은 제 마음이 일어났으면 하는 모든 것들을 검토하기 때문에 제가 의도적으로 하루를 창조하는데 있어 조용히 요점에 이르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걸리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하루를 창조할 때 아무 곳에서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저는 그런 것들 역시 나의 창조의 결과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라는 것을 압니다. 점점 더 그렇게 알아갈수록 제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더 많은 신경망들이 저의 뇌에 만들어지죠. 그것들은 다음 날에도 계속할 수 있는 힘과 자극을 줍니다.
45. 중독
46. 중독을 통해서 우리는 최고의 멋진 기회를 맞이합니다. 우리의 몸을 통해 3차원 세계에서 파악할 수 없는 특성의 고귀함과 날마다 그러한 특성이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드러나는 지에 대한 차이점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죠. 그래서 우리는 중독이 화학적으로 황홀한 감정이며 척추의 내분비선을 통하지 않고서도 일어나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적인 환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단지 하나의 성적 자극으로 남자는 자극을 받습니다. 달리 말하면 여기 있는 하나의 생각이 발기로 이러지는 것이죠. 발기를 일어나게 하는 외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존재할 뿐이죠.
47. 수 세기 동안 내려온 다양한 종교와 철학들의 문제의 대부분은, 출발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신은 우리와 분리된 별개의 존재이며 나는 신을 숭배해야 하고 인생의 마지막의 보상을 위해 웃으며 기도하고 희망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것은 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죠.
48. 신은 그렇게 광대한 것입니다. 조직화된 종교와 관련된 대부분이 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제 생각엔 그것들이 세상과 여성들에게 많은 불행을 끼친 어떤 것이기도 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도 불행을 끼친 것이기도 하죠.
49. 그리고 우리는 같은 지점에서 거대한 과학의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겨자씨가 신의 왕국보다 크다고 하는 예수의 말을 설명해주는 가장 근접한 과학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에 맞는 유일한 과학은 양자물리학입니다. 우리는 양자물리학의 많은 신개념들과 실제 기술적 결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낡고 불합리한 신에 대한 개념과 믿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50. 사람들은 위협을 받으면 이렇게 지속되어온 형벌의 심판에 대해 똑 같은 행동을 취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이 존재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전통적인 신에 대한 의문을 품거나 신에 대한 풍자를 하면 사람들은 그를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 사회질서를 전복하려는 사람으로 느낍니다.
51. 신은 나약한 인간의 위대함보다 틀림없이 위대합니다. 그리고 정말 가장 위대한 인간의 기술보다 위대합니다. 신은 우리의 가장 뛰어난 것도 넘어섭니다.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자연과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의 위대함을 등지고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은하의 한 구석에 있는 지구상의 보잘 것 없는 탄소조합이 신의 전능을 배신할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오만의 절정은, 그들 자신의 이미지로 신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의 통제의 절정입니다.
52. 생각을 일으킬 때의 뇌는 벼락치는 풍경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시냅시스의 틈은 번개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구와 비유할 수 있죠. 번개가 치기 전에 징조인 검은 구름이 하늘에서 끓기 시작하고 전기적인 자극들이 그 속을 통과합니다. 전기적 섬광의 선을 따라 바닥을 칩니다.
53. 일관된 생각을 일으킬 때 뇌는 천둥치는 폭풍우 같습니다. 생각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뇌 호르몬 사이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뇌의 각부분에서 일어나는 맹렬한 폭풍입니다. 몸 속에 지도화되어 있는 이러한 것들에 사람들은 반응해야 하고 그것들은 홀로그램 이미지이며 분노, 살인, 증오, 동정이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54. 뇌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 기억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똑 같이 특정한 신경망이 반응하기 때문이죠. 뇌는 뉴런이라고 하는 미세한 신경 세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뉴론은 뻗어 있는 미세한 가지를 가지고 있는 다른 뉴론들과 연결되어 뉴론망을 형성합니다. 뉴론들이 연결되어 있는 곳은 생각이나 기억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래서 뇌는 ‘조합된 기억의 법칙’에 의해 ‘자체의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55. 예를 들어, 개념과 생각, 감정들은 모두 이 뉴론망의 상호연결로 구축된 것입니다. 각 뉴론의 상호간의 가능한 관계라고 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사람의 개념과 감정은 이 광대한 뉴론망 안에 축적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의 개념을 각자 다른 개념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실망에 연결시키기도 하고, 사랑을 생각할 때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슬픔, 화 심지어 분노를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노는 상처나 특정사람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이 거꾸로 사랑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56. 우리는 외부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모델을 세웁니다. 그리고 정보를 더 많이 가질 수록 점점 그 모델을 한 가지나 다른 방식으로 규정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외부세계에 대해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리하고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들은 과거 우리의 경험과 우리가 가지고 있고 가져왔던 감정적인 반응에 의해 채색됩니다.
57. 우리의 감정에 반응하고 통제할 때 누가 주인 자리에 있는 걸까요? 우리는 생리학적으로 뇌세포가 함께 반응하고 엉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반복해서 연습하면 이러한 뇌세포는 장기적인 관계를 갖게 되고, 매일 화를 내거나 좌절하는 것을 반복하거나 매일 괴로워 하거나 인생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이유를 되뇌인다면 여러분은 매일 신경망을 재구성하고 재통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경망은 긴 시간에 걸친 그러한 관계를 ‘정체성’이라고 불리는 다른 신경세포들과 연합하게 되죠. 또 뇌세포는 같이 반응하거나 얽히지 않기도 합니다. 장기적인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몸 속에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생각의 과정을 제지할 때마다 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신경세포들의 오래된 연결이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58. 우리가 자극이나 반응, 그리고 자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제지하고 관찰할 때 즉, 그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마치 자동적으로 환경에 반응하는 몸과 마음이 연결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59. 이것이 감정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감정은 계획된 것이고 어떤 것을 오래된 기억 속으로 화학적으로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죠.
60. 모든 감정은 입체영상으로 굳어진 화학물질입니다.
61. 우주에서 가장 정교한 약국이 여기에 존재합니다. 뇌에는 ‘시상하부’라고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시상하부는 마치 작은 공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곳은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 감정에 맞는 특정 화학물질을 조립하는 장소입니다. 이 화학물질은 ‘펩타이드’라고 불리죠. 그것들은 작은 아미노산의 고리입니다. 몸은 기본적으로 20여 가지의 다른 아미노산을 만들 수 있는데, 모두 탄소단위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몸의 구조를 형성합니다. 몸은 단백질을 생산하는 기계입니다.
62. 시상하부에서는 펩타이드라고 불리는 작은 단백질 고리를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감정상태에 맞는 특정 신경펩타이드와 신경호르몬으로 조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적인 상태, 즉 분노와 슬픔과 고통에 대한 화학물질, 욕망에 대한 화학물질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63. 우리가 몸이나 뇌에서 경험을 하는 그 순간 시상하부는 즉시 펩타이드를 조합합니다. 그리고 뇌하수체를 통해 혈류 속으로 그것들을 풀어 놓으면 혈류를 통해 펩타이드 조합이 흐르는 순간 몸 속의 다른 중심과 기관으로 향하게 됩니다.
64. 몸 속의 개개의 모든 세포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들에 대한 수용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세포가 수 천개의 수용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외부를 향해 열려있죠. 그리고 펩타이드가 세포로 들어오면 글자 그대로 열쇠로 자물쇠를 여는 것처럼 수용체의 표면에 앉아 그것에 붙게 되고 수용체를 움직여 대문의 벨이 울리는 것처럼 세포로 신호를 보냅니다.
65. 어른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신호가 고장나 감정적으로 동떨어진 곳에서 문제들을 다룹니다. 혹은 오늘 일을 어제와 똑같이 다루기도 합니다. 따로따로 떨어져서 다루기도 하지만 혹은 지나치게 반응하며 다루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앞선 현실을 경험해 오면서 전체를 통합해서 다루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66. 세포의 외부를 따라 엄청나게 많은 수용체가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들어오는 정보들을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곳이죠. 펩타이드가 들어있는 수용체는 세포를 다양하게 변화시킵니다. 수용체는 생화학적인 사건으로 핵의 변화까지 유도하며 어떤 수용체는 세포의 핵까지도 실제 변화시킵니다.
67. 모든 세포는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각 세포는 의식을 가지고 있죠. 특히 우리가 의식을 관찰자의 관점에서 규정한다면 ‘세포의 시각(관점)’이라는 것이 항상 존재합니다. 세포는 몸에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죠.
68. 중독에 대한 저의 정의는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이 멈출 수 없는 어떤 것이죠.
69. 우리는 몸에 있는 세포들이 생화학적으로 욕망을 채우는 쪽으로 스스로를 몰고 갑니다. 화학적인 요구와 일치하는 상황을 창조해 내면서 말이죠. 그리고 중독은 화학적으로 찾고 있는 고지로 돌진하기 위해 항상 더 이상을 필요로 합니다.
70. 그래서 제가 내린 중독의 정의가 의미하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감정상태를 조정할 수 없다면 틀림없이 거기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죠.
71. 예를 들어 특정사람과 사랑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이미 중독되어 있는 감정 안에서 그들이 예상했던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다음 중에 성향을 바꿔서 다른 사랑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바로 그것이 개인적인 요구와 정체성에 대한 예측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72. 우리는 감정이고, 감정이 우리입니다.
73. 감정들을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화작용이나 괄약근 혹은 영양과 관련된 모든 세포들은 어떤 곳을 치료하거나 치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포들은 모두 감정의 통제를 받습니다. 제 말은 모두 활발히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74. 감정에는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감정은 삶 자체입니다. 감정은 우리의 경험을 풍부하게 색칠해 줍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감정에 중독되는 것이죠.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감정들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심리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감정은 생화학적입니다.
75. 헤로인은 감정들과 같은 수용체를 사용합니다. 쉽게 말해서 헤로인에 중독될 수 있다는 것은 신경망의 물질이나 어떤 감정에도 중독될 수 있다는 것이죠.
76. 특정 감정상태를 찾기 위해 관련된 탐색명령이 계속됩니다. 제 말은 심지어 눈을 돌리는 것 조차도 감정적인 면의 충족을 위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이죠.
77. 섹스에 중독된 사람은 어떤 걸까요?
78. 우리의 마음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몸을 창조합니다.
79. 모든 것은 세포단위에서 시작합니다. 세포는 단백질을 만드는 기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포는 뇌로부터 신호를 받습니다.
80. 수용체는 감각에 의해 변화합니다. 만일 어떤 약이나 내부의 분비액이 오랜 기간 동안 강렬하게 자극 받아 나오게 되면 말 그대로 줄어들거나 둔감해지거나 통제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비슷한 양의 화학물질이나 체액이 작은 규모의 반응을 유도해내게 됩니다.
81. 세포는 매일 일정하게 반복해서 동일한 태도나 화학물질로 충격을 주게 되면 분열하는 세포들과 더 젊은 세포들은 이러한 감정에 맞는 신경물질을 더 만들어 내게 되고 비타민이나 미네랄 그리고 분비액의 교환을 위한 수용체는 줄어들게 됩니다. 심지어는 독성이 있는 물질까지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82. 모든 노화는 단백질의 부적당한 생산 때문에 일어납니다. 나이가 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피부가 탄력을 잃는데, 그 탄력은 단백질입니다. 효소의 문제는 어떨까요? 소화력이 떨어집니다. 활액낭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부서지기 쉽고 뻣뻣해집니다. 뼈도 역시 약해집니다. 그래서 모든 노화는 단백질이 부적당하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3.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먹는 음식물이 중요한가 입니다. 좋은 영양공급을 한다고 해도 감정적으로 20년 동안 자기학대로 세포가 그 영양분을 흡수하거나 받아들일 수용체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그러한 영양분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84. 우리의 모험이 향하는 긴 항로에서 이제 진로를 수정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진로수정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주는 우리의 모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큽니다. 우주는 우리의 생각보다 항상 더 큽니다.
85. 어느 누구도 당신의 아름다운 보석과 내면에서 외부로 향하는 충만한 지혜에 대해서는 다 알지 못합니다. 왜 우리는 중독되는 것일까요?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꿈을 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도 여러분에게 더 나은 꿈을 꾸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6. 일반적으로 정신의학에서는 사람들의 편에서 사람들의 자유를 충분히 이야기 해 주지 않습니다. 제 말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문제들의 많은 부분들이 정신의학적으로 규정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불쾌한 선택들만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다른 선택들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87. 소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는 육체적인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뇌 안에 우리의 개성과 사람들, 장소들, 시간들, 사건들과 관련 있는 곳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88. 우리는 뇌 안의 개성과 관련된 조직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89. 일반적인 사람들이 지루하거나 영적으로 감흥이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을 가슴 뛰게 하는 지식이나 정보를 얻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90. 사람들은 미디어나 텔레비전, 그리고 그들이 되고 싶어하는 우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과, 육체적인 외모나 아름다움, 용기라는 말에 최면이 걸려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환상입니다.
91. 결코 그런 것들에 굴복해서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고 그들의 영혼이나 욕망이 표면으로 결코 떠오르지 못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또 다른 것을 원하게 되고 그러한 질문이 표면위로 나타나게 되면 더 나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게 됩니다.
92. 나는 왜 존재하는가?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93. 이러한 질문들을 하게 되고 신경망의 도약을 위한 개념들과의 교류의 날개짓을 시작합니다.
94. 그리고 현실에서 그들의 세상과 삶을 지배해오던 오래된 개념들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95. 이러한 변화가 시작될 때, 우리는 뇌라고 하는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어떠한 작업을 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뇌의 신경망을 재구성하는 영역에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개념과 재접속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행위들은 내면에서 밖으로의 변화를 이끌어 냅니다.
96. 내가 마음을 바꾸면 나의 선택들도 바뀔까요? 내가 선택을 바꾸면 나의 삶이 바뀔까요? 왜 나는 바뀌지 않는 걸까요? 내가 집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집착하는 사람이나 장소, 사물, 시간 또는 사건들은 내가 그것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거기서부터 인간의 삶이란 것이 펼쳐지는 것이죠.
97. 은하계에서 종교에 젖어들어 종교의 엄청난 지배아래 있는 행성이 어디일까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설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다던가 다르게 행동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들은 정말로 어설픈 설명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따라야할 지도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과는 비참합니다. 왜냐하면 선이나 악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을 너무나도 피상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죄를 지었다거나 방당하다거나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이곳에서 경험하는 것들에 대해 당신의 표현과 이해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를 성장시키는 경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이러한 행동을 하고 저러한 행동을 했다고 해서 당신을 심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98. 사람에게 죄를 선고하는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입니다. 동시에 신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부분들과 함께하는 어떤 것의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는 초월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장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99. 저는 신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에 대한 경험을 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 매우 실제적인 무엇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신을 어떻게 규정하거나 인간이나 사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에게 신을 설명하라고 하는 것은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물을 설명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100. 신은 모든 것들에 함께 하는 어떤 정신입니다. 여러분의 신의 여정을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정을 걸어가야 하지만 언젠가는 여러분이 집착하는 것들만큼 이러한 추상적 것들을 사랑해야만 할 것입니다.
101. 내 자신이 위대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몸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에 하는 것입니다.
102. 만일 의식적으로 나의 운명을 계획한다면 그리고 정신적인 관점에서 의식적으로 나의 현실과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성찰한다면 결국 그러한 현실이 나의 삶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하루를 창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도 나는 나의 하루를 창조하고 있고 근본적인 장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3. 그리고 그 관찰자가 항상 모든 행동을 바라보고 스스로에게 그러한 정신적인 방향이 존재한다면 내가 창조하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신호를 보여 줄 것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이 전개되고 또 그러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게 될 것입니다.
104. 뇌는 무한히 많은 것들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는 얼마나 위대한 존재이고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라운 것들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과 배우고 실제로 변화시키고 적용할 수 있는 수 많은 것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 우리의 모습보다 더 나아질 수 있고 서로에게 실제 도움이 되고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105. 아마도 존재의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거나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거나 사람들과 사물들의 관계를 더 깊게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뇌 안에 영적인 부분을 찾는 것은 우리 모두가 접근할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06.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체화하고 그것에 완전히 집중하고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107. 우리의 의식을 완전히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자기라고 동일시했던 모습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한 스스로를 벗어나고 시간을 벗어나는 그 순간이 진실로 실재라고 말할 수 있는 모습입니다.
108. 그리고 결심을 하고 어떤 것을 하고자 할 때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양자물리학이며 분명한 현실이고 진실된 관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9. 여러분의 의식은 주위의 사람들과 물질적인 특성들, 그리고 미래에 여향을 미칩니다. 여러분은 미래를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110. 당신이 창조하는 이러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창조가 이어지고 이러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게 될 것입니다.
111. 여러분이 이미 ‘그 존재’가 되어서 여러분을 바라본 적이 있나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잠시 모든 일을 멈추고, 완전한 관찰자의 눈으로 여러분을 바라본 적이 있나요?
112.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더 큽니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나는 주위 환경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우주 자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나는 미래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있음으로 존재하고 나와 주위는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들은 하나의 일부이고 나는 그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는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113. 우주의 상호연결을 이해하고, 우리가 우주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단계에서 우리의 신성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유의지의 선물을 펼쳐내고 실질적인 창조자가 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입니다.
114. 우리는 창조주가 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과 생각들을 우주에 스며들게 하고, 그러한 삶을 이루기 위해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115. 근본적인 나를 인정하고 우리가 그러한 선택권을 가진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의 존재를 인정할 때 관점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 때 깨달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16. 양자역학은 자유라고 하는 만질 수 없는 현상을 인간의 본질 속으로 엮어냅니다.
117. 양자물리학은 아주 간단히 말하면 가능성에 관한 물리학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을 함으로써 실질적인 경험이 일어나게 됩니다.
118. 논리적으로나 의미적으로 만족할 만한 단 하나의 정답은 의식이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119. 우리는 집착을 떠나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지식이 현실로 나타나고 우리의 몸에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마음의 변화와 홀로그램으로 그리고 우리의 흐트러진 꿈들을 넘어 전혀 다른 생각들로 그 현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20. 우리 모두는 아바타의 단계를 넘어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아왔던 예수와 부처를 이룰 것입니다. 신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곳엔 판단도, 증오도, 시험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121.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비활성 물질을 움직이게 하고 혼돈 속으로 끌어 들이는 만질 수 없는 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형태를 갖추면 우리는 그것을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22. 결과를 어떻게 알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삶의 어떤 시점에서 무엇인가가 변화했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만일 변화했다면 비로소 우리존재의 이유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지요.
123. 겉만 보고 받아들이지 말고 그게 사실인지 시험해 보십시오.
124. 이성적으로 성찰해 보세요!
-좋은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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