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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강원 고성 금강산 건봉사(金剛山 乾鳳寺)를 찾아서 ④
-건봉사, 그밖의 이모저모-
건봉사에서 꼭 보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건봉사 소나무'라 합니다. 그래서 적멸보궁 을 예참하고 나서 소나무를 찾았습니다. 소나무는 내려오면서 오른쪽 산기슭에 있습 니다.
역광이 되어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지만... 건봉사 소나무
건봉사 소나무는 수령이 300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절 건봉사에서 꼭!!! 보셔야 할 곳
꼭 보아야 한다고 해서 소나무를 찾았습니다. 소나무에 무슨 사연이 있기에 보아야 하나 하고 안내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1500여년의 고찰 건봉사는 왕실의 원당으로써 그 규모나 세가 전국 최대의 사찰이 었다. 번성기때는 3,183칸의 전각이 있었던 건봉사의 웅대한 규모도 1500년의 세월 동안 산불과 전란 등으로 인해 여러 번 소실되고 복원되기를 반복하였다.
산내의 전각들이 화재로 소실되는 과정에서 산천초목들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수십 그루의 아름들이 소나무들이 재로 변하기를 수십 번... 그런데, 극락전 지역의 왼쪽 산등성이에 용케 화마를 피해 고고하게 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전각과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 불길을 피해 가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떻게 불길 을 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건봉사의 번성과 아픔을 이야기하듯 300여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소나무 氣를 받아요.
소나무가 얼마나 굵은지 두 아름이 넘네요.
멀리서 보면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데 비니초님과 두 팔로 안아 보니 두 아름이 넘었 습니다. 전쟁의 소용돌이와 화마에서도 굳건히 서 있는 소나무가 너무나 의연하게 보여 안아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길이길이 건봉사를 지켜 보기를 합장해 봅니다.
소나무에서 바라본 건봉사 전경
다음은 건봉사의 명물인 띳집을 찾아 봅니다. 띳집은 띠를 떠다 지붕을 덮은 집이지요. 예전엔 이런 집에서 수행정진하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주 검소한 집이지요.
연화교를 건너면 띳집이 있습니다.
말로만 듣던 띳집을 여기서 봅니다.
지붕을 띠로 이어 만든 띳집입니다.
띳집의 내부 복도 모습
저는 말로만 듣던 띳집을 여기서 처음 보고 이것은 건봉사의 또 다른 명물이겠다 싶었 습니다. 생각해 보면 여름엔 서늘하고 겨울엔 따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절에서 일하는 처사들의 방으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집은 곧 헐어 새로운 현대식 숙소를 지을 예정이라 합니다. 아마도 생활에 불편함이 따르기에 새로 지을 모양이지만 웬지 옛 것이 없어지는 것 같아서 아쉬운 생 각이 들었습니다.
띳집 뒤편의 공터에 있는 영은불망비(永恩不忘碑)
전의정부찬정 여흥민공병한(前議政府贊政 驪興閔公丙漢) 청신녀 갑자생 평창이씨 법우행(淸信女 甲子生 平昌李氏 法雨行) 영은불망비(永恩不忘碑)
연화교를 건너서 주차장으로 갑니다.
대형돌확 -비니초님 사진-
대형돌확 설명문 -비니초님 사진-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만해당 대선사 시비(萬海堂 大禪師 詩碑)
사랑하는 까닭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만해당(萬海堂)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은 한국 말기의 승려로 독립운동가 이자 시인, 문학가, 사상가입니다. 이름은 유천(裕天)이며, 자(字)는 정옥(貞玉), 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며 또 다른 호는 용운(龍雲)입니다.
충남 홍성 출신으로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連谷) 스님에게 출가하고, 만화(萬 化) 스님에게 법(法)을 받아 법호(法號)를 용운(龍雲)이라 했습니다. 3.1운동 때 민족대 표 33인의 한 분이며, 1918년 『유심(유심)』 창간호에서 시 「심(心)」을 발표하며 문단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 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습니다. 장편소설 『흑풍』『후회』 등이 있습니다.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비 롯하여, 《불교대전》《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 수많은 저서가 있습니다.
출정사(出征詞) 조영암 시비
출정사(出征詞)
복사꽃 붉은 볼이 너무도 젊어 사랑도 하나 없이 싸움터로 달린다. 나라와 겨레 위해 몸이 슬어도 천년후(千年後) 백골(百骨)은 웃어 주리니 흐려오는 안정(眼精)에 얼비치는 사람아 흰눈벌 촉루 위에 입맞춰 달라.
<시산(屍山)을 넘고 혈해(血海)를 건너, 정음사 1951>
이 시를 읽으니 <명부전>에 모셔진 수많은 호국영령들의 위패가 떠오릅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한 몸을 기꺼이 바친 호국영령들에게 합장 묵념을 올리며 왕생극락을 기원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조영암(趙靈巖 1918 ~)은 강원도 고성 출신의 시인으로 본명은 승원(勝元)이며, 혜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조선일보에 「파초」, 같은 해 매일신보에「귀로」, 1945년 신문예(新文藝)에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등을 발표해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펼쳐습니다.
시집 시산(屍山)을 넘고 혈해(血海)를 건너」「관음보살대의왕(觀音菩薩大醫王)」등이 있으며, 소설 「고당 조만식」「임꺽정전」 등 많은 소설을 발표하였고, 후에 역학에 몰두 하여 「시인 영암점술방랑기(詩人靈巖占術放浪記」등을 발표하고 작명연구소를 내기도 했습니다.
출정사 해설비(出征詞 解說碑)
조영출(趙靈出) 詩와 노래 碑
칡 넝 쿨
하늘이 하도높아 땅으로만 기는 강안두 칡 넝쿨이 절간 종소리 숙성히도 잘아났다
맷뚝이 뱃쨍이 들이 처갓집 문지방처럼 자조 넘는 칡넝쿨
넝쿨진 속에 季節이 무릎을 꿇고 있다 여름의 한나절 꿈이 향그럽다 줄줄이 벋어간 끝엔 뽀족 뽀족 연한 순이 돋고
어린 소녀의 사랑처럼 온 칡 몰으게 몰으게 茂盛해 간다
袈裟를 수한 젊은 여승이 혼자 단이는 호젓한 길목에도 살금살금 기어가는 칡넝쿨이언만 해마두 오는 가을을 넘지 못해 목을 옴출이고 뒷거름을 치는 植物
칡넝쿨이 안보히면 먼댓 절엔 燭불이 한개 두개 열닌다
「조영출(趙靈出, 1913~1993)은 충남 아산 출생으로 본명은 조명암(趙鳴岩)입니다. <꿈꾸는 백마강> <신라의 달밤> <고향초>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등의 노래가사를 쓴 사람입니다.
15세(1927년)에 건봉사에서 출가하여 중연(重連)이라는 법명을 받은 바 있습니다. 1930년 만해 한용운 스님의 추천으로 보성고보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불문과 졸업하였음.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방의 태양을 쏘라>는 시로 등단하였습니다.
그는 필명으로 대중가요 180여 곡을 작사.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정서를 표현하였 으나 1940년대 친일가요를 만들고 친일연극을 만들면서 친일활동을 해방 후에는 좌익 활동을 하고, 1948년 월북해 북조선 예술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는데 1993년 평양 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명당의승병기념관(四溟堂義僧兵記念館)
사명당의승병기념관(四溟堂義僧兵記念館) 편액 -초당(草堂) 이무호(李武鎬) 선생 글씨-
주차장 한 옆에 사명당의승병기념관(四溟堂義僧兵記念館)이 있어 찾아들어갔습니다. 안에는 사명대사 진영과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기허대사 영규(奇虛大師 靈圭) 스님의 진영을 비롯하여 선조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장삼과 금란가사, 보살상, 달마도, 식기, 화엽형은도금잔, 구염주(九念珠), 가사고리 등 많은 유물이 있는데 대개는 모조품 으로 진품은 밀양 표충사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 스님과 기허대사 영규(奇虛大師 靈圭) 스님 진영
달마도(達磨圖)
일본승 오초(悟初)가 달마 영정을 그려와 찬(讚)을 청하여 써 줌(1605년)
장삼ㆍ금란가사
사명대사의 유품인데 선조임금의 하사품으로 진품은 밀양 표충사에 있음.
보살상(菩薩像)
화엽형은도금잔(花葉形銀鍍金盞)
식기ㆍ구염주(九念珠)ㆍ가사(袈裟)고리
사명대사의 유품으로 진품은 밀양 표충사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두루 살피고 이제 마지막 코스인 부도전에 가기 위하여 백우거를 타고 주차장 을 벗어나 부도전으로 향했습니다. 부도전은 약 500m 아래 입구 산기슭에 있습니다. 많은 부도와 비가 있어 그야말로 부도밭이요 비림(碑林)이었습니다. 그러나...
건봉사 입구에 있는 부도전 모습
독사가 출몰한다고 위험표지판을 걸어 놓고 출입을 금하므로 갈 수 없었습니다.
건봉사는 전국 4대사찰의 하나였던 만큼 고승의 부도가 많습니다.
건봉사의 역사와 함께한 고승들의 부도와 비가 많았으나 갈 수 없어 합장례만 올리고 아쉽게 돌아섰습니다. 다음은 사명대사상(四溟大師像)을 찾았습니다. 사명대사상은 부도전 앞 넓은 공터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건봉사입구이지요.
호국의 성사 사명대사상은 건봉사 진입로 입구에 있습니다.
사명대사 유정상(四溟大師 惟政像)
왼손에 주장자를 오른손에 염주를 든 모습이 위엄있게 보입니다. 호국의 의지와 기상 이 늠름합니다. 불법과 호국을 아울러 표현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 사명대사의 약력이 적혀 있어 그대로 옮겨 봅니다.
1544년(1세) 10월 17일 경남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에서 출생 속성은 임씨(任氏),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四溟)ㆍ 송운(松雲)ㆍ종봉(鐘峰), 법명은 유정(惟政). 1550년(7세) 사략(史略)과 유서(儒書)를 배움. 1556년(13세) 직지사(直指寺)에 출가. 1561년(18세) 승과(僧科)에 급제. 봉은사(奉恩寺)에서 유림과 교유. 시문창화(詩文昌和) 1575년(32세) 서산대사(西山大師) 문하에 입문. 금강산,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찾아 선수행(禪修行) 1592년(49세)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불법(佛法)으로 왜군을 설득, 퇴치. 건봉사(乾鳳寺)에서 의승병을 창의. 평양에서 의승병도 대장이 됨. 1593년(50세) 명(明)나라 군과 평양성탈환. 수락산대첩으로 서울 수복.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와 당상관에 제수. 1594년(51세)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회담. 명(明)ㆍ일(日)의 국토분점 획책을 분쇄. 첨지중추부사에 제수. 1995년(52세) 용기, 팔공, 금오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을 지킴. 1597년(54세) 군량미와 병기를 나라에 바침.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 1598년(55세) 삼남지방의 성곽수축 등 적의 재침에 대비. 1604년(61세) 조정의 명을 받고 도일. 대마도를 거쳐 교토에 도착. 1605년(62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회담. 국교를 회복. 피로인 3,500여명 쇄환(刷還). 선조에게 복명. 1610년(67세) 8월 26일 해인사(海印寺)에서 입적.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이것으로 10시 무렵 건봉사 순례를 마치고 물러나 출출한 위장을 위로하고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송강지(松江池)란 저수지에서 도시락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송강지(松江池)
송강지(松江池) 물이 많이 줄어들어 있음을 봅니다.
올해는 봄부터 지금까지 무척 가물어 저수지의 물이 무척 부족해 보였습니다. 비가 충분히 내려서 이 저수지를 가득 채웠으면 하는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인 통일전망 대로 가기 위해 10시 30분쯤 일어섰습니다.
지금까지 길고 긴 건봉사 순례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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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건봉사의 역사와 유래 등 세세한 설명이 담긴 순례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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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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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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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봉사를 몇 번 방문했었어도 놓친 부분이 많다는 걸 느낍니다.
잘 보았습니다. _()_
건봉사를 몇 번이나 다녀오셨군요. 몇 번을 거듭 가도 놓치고 오는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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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가게 된다면 등공대에 오르고 싶네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려야 저수지에 물이 가득 채워질지 알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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