鄧麗君私家相冊 덩리쥔 개인 앨범 (2편)
时间:2010-3-24 23:36:37 点击: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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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열독: 덩리쥔_특별주제, 화보집_특별주제/ 金康顯 飜譯 2010-9-14
出生于1953年1月29日的邓丽君幼时家境贫寒,母亲赵素桂为山东人,而父亲邓枢为河北人,1949年,邓枢一家随败退的‖国 .
民 . 党‖军撤退到台湾,他们租住在台湾中部的云林县褒忠乡龙岩村,隔年举家迁往屏东机场附近居住。
邓丽君在家中排行第四,由于在她之前是三个哥哥,邓丽君的出世使其双亲分外欣喜,她更是受母亲的宠爱,无论走到哪里,
身边总带着邓丽君。由于母亲爱看电影,也爱听黄梅戏、评戏等地方戏曲,因此邓丽君自幼随着母亲耳濡目染于这些中国传统音乐,
奠定了对音乐的爱好与根基,而邓丽君当初一鸣惊人的也是其演唱的黄梅戏。
1953년 1월 29일에 태어난 덩리쥔은 어릴 때 가정 환경이 가난하였는데, 어머니 차오수궤이(趙素桂)는 산동인이고
아버지 덩슈(鄧樞)는 하북인이었다. 1949년 鄧樞가족은 패퇴하는 국민당 군을 따라서 대만으로 철수하였는데,
그들은 대만의 중부지역의 윈린현(雲林縣) 빠오충현(褒忠鄕) 롱암촌(龍岩村)에서 집을 빌려서 살았다.
이년 뒤에 온 가족이 이사를 하여 핑똥(屛東) 비행장 근처로 이사하여서 살았다.
덩리쥔은 집에서 4째 아이로, 그녀의 위로 3명의 오빠가 있었다. 덩리쥔이 태어나니 그 부모는 유달리 매우 기뻐하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총애를 더욱 받았다. 어디를 가더라도 가리지 않고 곁에 언제나 덩리쥔을 데리고 다녔다.
어머니가 영화보기와 황매희(黃梅戲), 평희(評戲,評劇) 등 지방 희곡도 듣기 좋아하여서
덩리쥔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서 이들 중국 전통 음악을 귀에 익히고 눈에 익숙하게 하여서 음악에 대한 사랑과
기초를 단단히 다졌다. 이리하여 덩리쥔은 처음부터 한 번 노래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도 공연한 저 黃梅戲이었다.
[역자 주]: 황매희 黃梅戲: 안후이(安徽)성 중부 지방에서 유행한 지방극.
주된 곡조가 후베이(湖北)성 황메이(黃梅) 지역의 채다조(采茶調)에서 변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
평희(評戲,評劇): 지방 전통극의 하나로 화베이(华北), 둥베이(东北) 등지에서 유행했음.
20세기 초 설창 문예 '莲花落(liánhuāluò)'의 기초 위에서, '河北梆子(héběibāng·zi)',
'二人转(èrrénzhuàn)'의 곡조를 흡수, 발전시켜 만들어짐. 초기에는 '蹦蹦儿戏(bèngbèngrxì)'라고 불렀음.
这是邓丽君自赴照相馆拍摄的照片,她摆出像大人一样在休憩时的姿势,显得非常可爱。这张照片里有个有趣的故事。
有一回,小邓丽君独自来到家附近的照相馆,一进门就告诉老板娘:“我妈妈要我来照相!”老板娘虽然惊讶于她的到来,
也不多想,要拍就拍吧。拍照的过程中,邓丽君完全展露了未来大明星的气质,各种姿态和表情完全难不倒她。
相片冲洗后,照相馆将照片送至邓家,邓妈妈接到了小女儿的照片觉得又惊讶又好笑,不知道爱拍照的女儿何时做了这么一件有趣的事。
屏东眷村的附近有条小河,邓丽君的兄弟都很喜欢到河边玩耍,五岁时邓丽君很喜欢跟着哥哥们出去玩,
但是三位哥哥嫌她年纪小需要照顾,是个小麻烦,都不让她跟。有一次三位哥哥玩得忘了时间,回家被严肃的邓爸爸罚跪,
小小年纪的邓丽君看见哥哥被罚跪,于是也跟着大家跪下,邓爸爸看见这一幕,心疼小女儿,也因为她的友爱之心,
邓爸爸就让大家都起来免跪了。从此以后哥哥们出去玩都愿意带着妹妹,邓丽君成为哥哥们的“护身符”了。
이것은 덩리쥔이 사진관에서 스스로 가서 찍은 사진으로 마치 어른처럼 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매우 사랑스럽게 보인다. 이 사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 있는데 한번은 어린 덩리쥔이 혼자서 집 근처의 사진관에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인 아주머니에게: "우리 엄마가 저더러 사진을 찍고 오라고 하였어요!" 라고 말을 하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덩리쥔이 온 것에 대해서 비록 놀라긴 하였어도, 그다지 오래 생각하지 않고서 찍고 싶으면 찍어라 하였다.
사진을 찍는 과정 중에 덩리쥔은 미래의 대 스타의 기질을 완전히 드러내었다. 여러 자세와 표정을 그녀는 완전히
어렵지 않게 하였다. 사진을 현상한 뒤 사진관에서 이 사진을 덩리쥔의 집으로 보냈는데 덩리쥔의 어머니는 어린 딸아이의
사진을 보고서는 또한 놀라기도 하며 웃기도 하였다. 얼마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여서 어린아이가 언제 이런 재미있는
일을 하였는지 몰랐다. 핑똥(屛東) 권촌(眷村/역자주: 군인가족 집단 거주 지역을 일컬는 단어)의 가까이에는
작은 시냇물이 있었는데 덩리쥔의 형제는 모두 다 냇가에서 놀기를 좋아하였다. 5살 무렵의 덩리쥔은 오빠들을 따라서
놀러가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러나 3째 오빠는 그녀가 어려서 돌보아 주어야 하기에 싫어하였다. 이 작은 귀찮음 때문에
모두 다 그녀를 데리고 가려하지 않았다. 한 번은 3째 오빠가 노느라고 시간을 잊어버리고 집에 돌아오자
엄한 아버지가 벌로 무릎을 꿇게 하였는데, 아주 어린 덩리쥔이 오빠들이 벌로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는
모두를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덩리쥔의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는 이 작은 딸아이를 더욱 귀여워하였다.
또 그녀의 우애의 마음으로 인하여 덩리쥔의 아버지는 모두에게 무릎 꿇는 것을 면하여 주고 일어서게 하였다.
이때부터 오빠들은 놀러갈 때 모두 다 여동생을 데리고 가고 싶어 하였다. 덩리쥔은 오빠들의 호신부가 되었던 것이다.
第一部分: 小城故事中的“清贫乐”台北姑娘小城故事中的“清贫乐”台北姑娘(2)-(图)
제1부분: 작은 도시의 이야기(小城故事) 가운데의 "청빈의 즐거움" 대북아가씨(台北姑娘) (2)
邓丽君11岁时在照相馆摄下的照片。
邓丽君出生时上有三个哥哥,由于家境贫寒,她母亲在怀孕的时候曾对人说,如果再生个男孩就将他送给人,幸好她生下的是女儿。
邓丽君最爱的就是她母亲,也因为是唯一的女儿,她得到了家人最多的宠爱。多年后,大哥邓长安披露:“由于家中只有你一个女生,
妈妈对你就照顾得多一点,遇有亲友家喜事,总是将你打扮得漂漂亮亮的带你参加,回来时会带你到邻居‘初妈妈’开设的照相馆,
照张相留作纪念。四岁多时送你去读当地唯一的幼稚园,又送你去当时屏东唯一的‘李彩娥舞蹈社’学芭蕾舞,你也未使妈妈失望,
聪明伶俐,一学就会。幼稚园中班时欢送大班毕业,你代表在校生致辞,老师写的讲稿,你在妈妈带你读二三遍后,即可朗朗上口,
一会儿就会背诵了。毕业典礼时你上台由人将两节式的麦克风放到了最低还需在脚下放一张小凳子,才能对上麦克风致辞,
你从容大方地致辞完毕,观礼家长们报以热烈的掌声,自此‘邻家丫头’的知名度即大大地提高了。”
덩리쥔이 11살 때 사진관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덩리쥔이 태어났을 때 위로 3명의 오빠들이 있었는데 집안이 가난하여서
그 어머니는 임신하였을 때 사람들에게 만일 또다시 사내아이를 낳는 다면 그 아이를 남에게 보낼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행히도 낳은 아이는 계집아이였다. 덩리쥔을 가장 사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로, 왜냐하면 하나밖에 없는
딸이기도 해서였다. 덩리쥔은 집안에서 가장 많은 총애를 받게 되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큰오빠 덩창안(鄧長安)이 밝히길:
"집안에 단지 덩리쥔만이 여자아이이었기에 그녀에 대해서 어머니는 좀 더 돌보아 주었는데, 친구의 집의 좋은 일이 있으면,
언제나 덩리쥔을 아름답고 예쁘게 차려입혀서 데리고 갔었다. 돌아올 때 집 근처에 사진관에 처음으로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가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4살 때 그 지역의 하나 밖에 없는 유치원에 동생을 보냈으며 또 그때 핑똥(屛東)에 있는
유일한 李彩娥(리차이어) 발레 교습소에 보냈다. 덩리쥔도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고 총명하고 영리하여서 한 번 배우면
할 수 있었다. 유치원의 중급반 때 상급반 졸업을 환송할 때, 덩리쥔이 유치원 대표로 송사를 하였다.
선생님이 쓴 원고를 어머니가 덩리쥔과 더불어 두세 번 읽은 뒤에 곧바로 또랑또랑하게 읽을 수 있었고 잠시 뒤 다 외웠다.
졸업식전 때 덩리쥔이 단상에 오르자 사람이 2단 조절 마이크를 가장 낮게 하였으나 여전히 발밑에 작은 걸상을 놓아야 하였다.
그제서야 비로소 마이크를 대고 송사를 할 수 있었는데 침착하고 시원시원하게 송사를 다 끝냈다. 졸업식에 참석한 여러
학부모들이 뜨거운 박수로 보답하여서 이때부터 隣家丫頭(이웃집의 못난 계집아이)의 지명도는 크게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1961년 가족사진]
童年邓丽君和她家人的全家福。 这是1961年除夕春节时的照片,当时的邓丽君只有八岁而已。照片的背景是樱花和富士山,
从中可以看到日本殖民者在台湾50年统治对民间的影响。邓丽君和弟弟依偎在父母的身旁,而哥哥们都站在他们身后。
后排从左到右分别是:二哥邓长顺、大哥邓长安、三哥邓长富。邓丽君的兄弟们都比较像母亲,眼睛都小,而邓丽君像父亲,
眼睛比他们都要大一些。 邓丽君身上的棉袄还可见到中国北方过冬服装的痕迹,事实上,
她的许多衣服都是由籍贯为山东的母亲赵素桂亲手所制的。虽然是手工制作,却很细致合身,是那个时代比较时髦的儿童服装款式。
邓丽君幼时在照相馆拍下的芭蕾舞照,在屏东的时候,她的哥哥常常用单车载着她去学习芭蕾舞。
어린 시절 덩리쥔과 집안 가족의 가족사진이다. 이것은 1961년 제야와 정월 초하루 무렵의 사진으로 그때의 덩리쥔은
겨우 8살이었다. 사진의 배경은 벚꽃과 후지산으로 이것에서 일본의 50년간 대만에 대한 식민지 통치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덩리쥔과 남동생은 부모의 곁에 붙어 있었고 오빠들은 모두 다 그들의 뒷줄에 있었다. 뒷줄 좌에서 우로 나누어서 보면:
둘째 오빠인 덩창순(鄧長順), 큰오빠인 덩창안(鄧長安), 셋째 오빠인 덩창푸(鄧長富)가 있다.
덩리쥔의 남자 형제들은 비교적 어머니를 닮아서 눈이 모두다 작았으나 덩리쥔은 아버지를 닮아서 눈이 그들에 비해서
모두 다 조금은 컸던 것 같다. 덩리쥔이 입은 무명옷은 아직도 중국의 북방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월동복의 흔적이다.
사실상 그녀의 많은 옷은 모두 다 원 고향인 산동성인 어머니 趙素桂(차오수꿰이)가 손수 만든 것이다.
비록 손으로 만든 것이지만 오히려 몸에 아주 잘 맞았고. 이것은 그 때의 시절에 비교적 유행하던 아동복의 스타일이었다.
덩리쥔의 어린 시절 사진관에서 찍었던 발레 무용 사진으로, 핑똥(屛東)시절에, 그녀의 오빠가 언제나 자전거에
그녀를 태우고 발레 무용을 배우러 갔었다.
[무용사진]
邓丽君对表演有着浓厚的兴趣,据她的弟弟介绍说,她从小就不怕生,很受大人的喜爱。根据《邓丽君之梦》一书中的记述,
邓丽君坦承:“不是大人要我唱,而是我自己想唱的,刚开始时是参加国小才艺表演,后来参加当时的广播节目办的歌唱比赛。
那时候广播节目是在学校操场录音,我因为很喜欢唱歌,所以唱得非常卖力,而且当时的我非常可爱。”
的确,从这张照片之中可以看见当时的邓丽君举手投足间已相当有明星气质了。当回忆第一次在正式场合唱歌的情形,她说:
“很有趣,虽然还小,但我相当兴奋。”接着,她又诚实地说出自己为何而唱,“不仅是为奖金和鼓励而唱。我很喜欢唱歌,
所以我只是为自己在唱而已,即使没有奖金,只要能唱歌,我就非常高兴了。” 邓丽君第一次在公众场合里唱歌缘于一次偶然。
一个清闲的午后,突然想骑脚踏车的她,却没有多余的零用钱租车。租车行的老板见她爱不释手,于是向她约定唱首歌来听听,
如果唱得好,一定便宜租给她。没想到她毫不怯场,不急不徐唱起《访英台》,唱做俱佳的她得到车行老板的大力喝彩,
答应将车子免费租给她,还让她爱骑多久就骑多久。
그녀의 남동생의 말에 의하면, 덩리쥔은 공연하는 것에 대해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낯을
가리지 않아서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鄧麗君之夢: 덩리쥔의 꿈]이라는 책에 쓰여진 것에 의하면
덩리쥔은 솔직히 인정하였는데: "어른들이 나더러 노래하기를 바라지 않으면 되려 내가 스스로 노래를 부르려고 하였고,
맨처음으로 한 것은 초등학교 재능 공연에 참가한 것이며 이후로 그때 방송 프로그램이 주최한 노래자랑 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때 방송 프로그램은 학교 운동장에서 녹음을 하였는데, 나는 노래하기를 너무나 좋아하였기에, 특히 힘을 다해서
노래를 불렀고 게다가 그때의 나는 매우 귀여웠다." 분명히 이 사진 속에서도 그때의 덩리쥔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매우
스타의 끼를 볼 수 있다. 맨 처음의 정식 회합 노래자랑의 모습을 회상해 보면, 그녀가 말하길:
"매우 흥미가 있어지요, 비록 어리긴 하여도 그러나 나는 매우 흥분되었지요." 이어서 그녀는 또한 성실하게 자기가
무엇 때문에 노래를 부르는지를 이야기 하였다. "단지 상금과 격려만을 위해서 노래를 하지 않아요, 나는 노래하는 것을
매우 좋아해요, 그래서 나는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노래할 뿐이에요. 설령 상금이 없더라도 단지 노래를 할 수만 있으면,
나는 매우 흥분이 되어요." 덩리쥔의 맨 처음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노래를 한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어느 한가로운 오후에 갑자기 자전거를 타고 싶어진 덩리쥔이, 그러나 자전거를 빌릴 여분의 용돈이 없었는데,
자전거포 주인 아저씨는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손을 놓지 못하는 덩리쥔을 보고는 이때 그녀에게 노래를 좀
불러 보라고 하며, 만일 노래를 잘 부르면 반드시 싸게 자전거를 빌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뜻밖에 덩리쥔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서두르거나 미적거리지 않고 [訪英台]를 불렀는데,
모두 다 아름답게 부른 그녀에게 자전거포 주인아저씨는 크게 갈채를 보냈으며,
자전거를 거저 그녀에게 빌려 주었고 얼마든지 타고 싶은 만큼 타게 하여서 오랫동안 타게 되었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