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성의 굴레를 넘어
어린 시절, 동네 이발소 벽에 걸려 있던 그림들이 기억납니다. 푸른 산과 호수, 해질녘 풍경이 그려진 알록달록한 그림들은 그 시절의 나에게는 무척 매력적이었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그림들이 사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복제된 이미지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발소 벽을 장식하는 이 그림들은 예술적 깊이와 독창성보다는 단순히 대중의 취향에 맞춘 장식물에 불과했습니다. 나의 시조 창작 과정에서도 이같은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이발소 그림처럼, 나의 시조들도 진부한 표현과 상투적 이미지에 기대어 쉽게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내가 스스로의 시조 창작을 돌아보며, 이러한 상투성이 시조 형식에 대한 깊은 탐구와 성찰 없이도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오게 되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시조는 한국 문학에서 매우 중요한 전통 형식으로서, 수백 년 동안 정교하게 다듬어진 예술적 표현의 집합체입니다. 그러나 내가 시조를 창작하면서 느낀 상투성은 단순한 개인적 문제를 넘어, 시조계 전체가 겪고 있는 위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시조의 형식적 틀이 생각의 틀을 만들어 상투적인 주제와 표현에만 머무른다면, 그 문학적 본질과 예술적 힘을 잃고 단순한 장식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할 것입니다.
먼저 내가 반성하게 된 첫 번째 문제는 ‘상투적 표현의 남발’입니다. 시조는 정형화된 짧은 형식 속에 많은 의미를 압축하여 담아내야 하는 예술입니다. 이로 인해 나는 자연스럽게 고정된 이미지와 주제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러한 상투성은 나의 창작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자주 반복됨으로써 독자들에게는 더 이상 신선하게 다가가지 않고, 오히려 진부하고 예측 가능한 이미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투성은 문학적 창조성을 억누르는 요인이 됩니다. 클리셰(cliche)라는 문학적 현상은 익숙한 표현들이 반복될 때 발생하며, 이는 시조가 지닌 예술적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문학은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해야 하는데, 상투적 표현들은 나를 그 반대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독자에게 제공하는 시적 경험의 한계입니다. 시조는 독자에게 짧은 형식 속에서 강렬한 감동과 사유를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창작한 시조는 독자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은 문학에서 중요한 기법 중 하나로,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독자에게 신선한 인식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나의 시조는 익숙한 감정과 표현에 머물러 독자에게 낯선 경험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독자에게는 흥미를 잃게 하기도 합니다. 독창성 없는 반복은 독자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며, 시조라는 장르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시조는 그 형식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시각과 감동으로 독자에게 깊이 있는 인식을 전달해야 하지만, 나의 시조는 이러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셋째, 상투적인 시조는 독자와의 감정적 연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예술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힘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창작한 시조들은 표면적 감정에 머물러, 독자가 더 깊은 의미와 감동을 찾아내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시조는 그 짧은 형식 속에서도 강렬한 여운과 생각할 거리를 남겨야 하지만, 상투적인 시조들은 단순히 감정의 표출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객관적 상관물 개념을 통해 감정을 구체화할 수 있는 이미지나 사건이 제시되어야 하지만, 나의 시조는 이러한 구체적 표현을 사용하지 못한 채 익숙한 감정만을 나열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시조에서 강렬한 감정적 연결을 느끼기 어려워졌고, 결과적으로 시조는 더 이상 독자에게 매력적인 문학 장르로 다가가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시조 창작에서 이러한 상투성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로, 시조를 쉽게 쓰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시조는 그 형식이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시인이 그 안에 새로운 의미를 담기보다는 익숙한 이미지와 표현에 기대어 쉽게 시를 완성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 시조의 전통적 형식을 존중하면서도 그 안에 새로운 내용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적 형식과 외적 형식의 조화가 중요한데, 시조의 형식적 틀을 따르되 그 안에 현대적 감각과 사유를 담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이나 감정들을 시조의 형식 안에 담아내는 시도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시조는 그저 전통을 이어가는 문학이 아니라,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의미 있는 문학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시조의 언어적 실험과 현대적 감각을 도입해야 합니다. 시조는 전통적인 표현 방식이 주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날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언어의 다양성과 실험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조의 형식 안에서 새로운 언어적 시도를 하여 독창성을 추구함으로써, 시조는 단순한 형식의 틀을 넘어선 창조적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술은 늘 변화를 필요로 하며, 시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조는 과거에 갇힌 문학이 아닌,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어야 하며, 이러한 변화를 위해 나 자신이 창조적 탐구를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조는 현대적 감각을 통해 독자에게 다시금 사랑받을 수 있는 문학 장르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시조는 더 이상 교과서 속에서나 배우는 전통 문학이 아닌, 오늘날의 감성과 사유를 담아내는 살아 있는 문학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조가 현대 사회의 문제와 인간의 내면적 사유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임을 증명해야 하며, 시인들이 끊임없이 무엇을 담을지 새로운 시도를 하며 그 가능성을 탐구해야 합니다. 만약 시조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시조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시조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사랑받는 문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오늘 남복희 시인님 외 몇 분의 시인분들과 대화하다가 이발소그림이 이야기 나와서 나 자신의 시조 창작 행위에 대한 반성을 하며 적은 글을 올립니다.
너무 멋진 글입니다. 전혀 가까이 근접도 못하는 실력이지만 저도 추구하고 싶습니다. 이 글 하나로 시조 쓰는 방향은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백프로 공감합니다.
@유성철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이제 곧 시원해지겠지요.
유시인님이나 저나 그런 시원한 시조 쓸 날이 올까(?)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