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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뼈대를 다시세울
필요가 있는거죠.
지금의 서해가 육지 였다고
하지요. 이게 처음이죠.
그러다 해수면이 높아지고
물이 들어옵니다.
자! 동물들과 인류들은 어떻게
반응 했을까요?
학자들은 북쪽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합니다.
아니 동쪽과 서쪽이 가깝고 기후
조차도 따뜻해 지는데 왜 북쪽
으로만? 이런 합리적이고 상식
적인 의문이 드는 대목이죠.
당연히 동.서로도 옮겨 살았을
것이라 보는게 합리적입니다.
즉. 동.북.서. 세 방향으로 이동
했겠지요.
고인돌분포 비파형청동검 분포
등을 대충 살펴보면 그렇게 보여
집니다.
고고학적 시각과는 좀 다르죠.
고고학 에서는 문화의 유입과
유출을 추정 하다보니...
어디서 발생하여 어디로 흘러
갔는지에 촛점을 맞추고 추정
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을
인류의 이동과 동일시 하며
그것을 역사라 인식 하지요.
그러나! 한류가 유럽이나 미국
으로 전파 된다고 하여 한국인
들이 유럽이나 미국으로 이동
하는것은 아니듯이...
문화의 출입과 인류의 이동사는
떼어놓고 바라볼 필요가 있지요.
바로 이점이 문화출입 역사학의
중대한 오류일수 있을겁니다.
전기밥솥. 세탁기등을 서구인이
들고 줄줄이 한반도로 들어온건
아니라는거죠.
반면에.... 순다랜드라 하던가요?
서해 평원에서의 대이동 경우는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들까지
바닷물을 피해서 이동한거죠.
이동하지 못한것은 바닷물에
잠겼을 것입니다.
이것이 첫번째의 대 명제죠.
이를 염두에 두고 본다면?
요하쪽 문화가 한반도로 또는
중원동쪽 산둥반도 쪽으로
전파 되었다는 학설이 조금쯤
퇴색하지요. 무색해지는 겁니다.
즉. 고인돌 이나 동검 문화는
유입 유출이 아니라 본래 거기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유입과 유출은 소소한 변화에
불과 했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서구문명의 유입으로
서구화 되었다고 하여 곧바로
한반도에 서구인들이 된통
많아졌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냥 전기밥솥 냉장고 티비
자동차가 들어온것 뿐이죠.
신석기나 청동기시대 일지라도
웬만해서는 자기무덤 못만들죠.
만들어도 오래 못가고요.
엘리트층만이 만듭니다.
그 엘리트 문화를 보고는...
민족의 이동을 추정 한다면?
오버한거 아니겠어요?
삼국유사 단군 이야기 속에서도
바로 이점을 엿볼수 있습니다.
맨땅에 환웅이 내려온게 아니죠.
토착 무리가 있었다는 겁니다.
단군 이전의 인류들이죠.
그들의 정체성은 순다랜드라
볼수 있을겁니다.
두번째 전제로는...
남아있는 소수의 유물을 가지고
전체적인 보편사회 문화를 규정
하려는 착각입니다.
석기만 남아 있으니 "석기시대"
라는 사고방식 말입니다.
보편 타당한 상식으로 본다면?
당연히 목기시대 겠지요.
"마제석기"
죽치고 앉아서 주구장창 돌을
갈아서 연장을 만들 정도라면?
그시대에 목기의 발달이 어떨지
명약관하 한 판단이 될겁니다.
"최첨단 목기시대" 라는거죠.
그리고 이렇게 볼때면?
해양문화도 자연히 추정가능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는
반구대 암각화에 잘 나타나죠.
학계에서는....
그 보잘것 없는 사료와 유적 유물
들을 가지고 문화의 전파도를
그리며 암각화를 새긴 이들이
우리의 직계 선조들이냐 아니냐
따지고 앉았습니다. 그래서..
규명될수 있는 겁니까?
만약 그들이 눈파란 사람들
이었다면 그들과 함께 문화조차
소멸되고 단절 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인가요?
반구대 암각화는 그냥 해적떼
같은 이들이 들어와 새겨놓고
살다가 떠난 거라고요?
무슨 그런 엉터리같은 생각이...
면새김 기법과 선새김 기법이
함께 나타나 있습니다.
한사람이나 한집단이 새긴것이
아니라는 얘기죠.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에
새겨졌다 보는것이 학계의 정설
입니다. 대충 일만년 정도의
흔적이라 볼수 있지요.
인걸은 간곳 없어도 산천은 유구
하니 자취도 남은겁니다. 그럼...
문화는요? 사람과 함께 떠나고
소멸되고 단절 되는게 문화는
아니지요.
대뇌피질 속에 원시 생명체의
자취가 남아있다 하듯이....
반구대 암각화의 자취는 우리의
문화와 언어생활 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한번 뒤적여 볼까요?
"활" 입니다.
"활을 들고있는 사람"이 새겨져
있어요. 고구려 보다도 까마득한
예전입니다. 한명도 아니고
서너사람 되죠?
자! 무엇을 알수있죠?
배가 있었고 활이 있었어요.
그게 초기의 우리문화 입니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거죠.
활은 조선왕조 말기 까지도
우리의 중요한 개인무기 였어요.
우리의 정체성을 대표한다 할수
있지요. 활과 사람의 연관성
말입니다.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사람 인(人) 이란 문자를 보죠.
고대의 人을보면 아랫 부분이
꼬불꼬불 합니다. 왜?
학자들은 무릎을 꿇은사람 모습
이라 하지요. 과연? 그런가요?
고대에는 사람과 활을 동일시
했어요. 농사꾼에게 지게가
그러하듯이 수렵 시대에는
활이 곧 의관(衣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과 활을 동일시한
인식을 찾아볼수 있죠.
쏠사(射)가 또한 그래요.
갑골 금문으로 가면 射의 身이
弓으로 바뀝니다.
몸궁(躬)... 身弓 이 체(體)라는
의미지요.
이(夷)도 그렇습니다.
허신의 설문해자에...
이(夷)는 弓大人이 아니라
大人이다. 그러나!
후한때의 허신은 소전(小篆)을
주로 접할수 있었던 탓이죠.
소전체 부터 大로 변하니까요.
갑골이나 금문에서는?
大가 아니라 矢입니다.
즉. 夷는 弔와 같은상형 이었죠.
또 弔는 引/弘과 같은겁니다.
이렇듯 사람과 활을 밀접하게
여기는 풍토에서 弓이 人으로
파생된 것이지요.
의미는 人과 夷가 유사했던거죠.
중원에서 人은 "다른사람들"에
의미로 쓰입니다.
즉. 우리말의 "남들" 이라는
말이 됩니다.
왜일까요?
활은 중원의 농경문화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는 혐오와 질시의 대상
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활과 군자를
연관지어 논어에 언급 하지요.
군자(君子)의 표상이 활이에요.
한나라 이전시대 이기 때문이죠
중원중심 농경문화는 한나라때
만개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중원중심 사고방식이
만개한 것이지요.
주역(周易)도 한나라 이전시대
혁(革)괘에 군자표변(君子豹變)
나옵니다.
혁(革)은 관혁(貫革)의 革이죠.
혁명(革命)개혁(改革)변혁(變革)... 혁(革)입니다.
활은 문명(文明)입니다.
종이.활자.화약. 문명보다도
인류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죠.
그래서... 홍익인간(弘益人間).
홍익(弘益)입니다.
학계의 홍익 해석은 중대한 와전
입니다. 왜곡 이지요.
활문명 혐오. 질시. 배척 정서에
따라서 "활빠진 홍익" 으로
해석됩니다.
활의 우리민족의 얼이자 넋이죠.
그러니....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라는
해석은 얼빠지고 넋빠진 해석
입니다.
주역의 이섭대천(利涉大川)을
발판으로 삼아보죠.
利는 涉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수렵(狩獵)문화였죠.
즉. 산넘고 물건너 사냥함이...
섭렵(涉獵)입니다.
이(利)는 섭렵(涉獵)함에 있다.
하는것이 이섭대천의 바른해석
입니다.
섭렵(涉獵)이 섭대천(涉大川)
으로 바뀌어 가는거죠. 왜?
중원은 산악지대가 아니니까
그렇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활문명을 염두에 두고
사료들을 바라보면 기존의
해석이 다르게 보입니다.
좀더 비약하면?
대천(大川)에 의미도 그렇지요.
천(川)이 시냇물 강물이던가요?
춘천. 제천. 연천. 포천.....
이래도요?
네... 우리의 대천(大川)에 뜻은
앞되/버덩 이라는 의미가 되죠.
산골의 반대의미 입니다.
요즘말로.. "도회지" 에 가까운
의미가 대천이란 말이었다는
거죠.
그런 곳에서는 수렵(狩獵)을할수
없으니 섭렵(涉獵)하라는 거죠.
"涉 大川 獵" 이라고요.
'利는 마을 밖으로 나아가
사냥을 함에 있다'
이것이 활문명 에서의 본래의미
였던 것입니다.
농경문화 에서는 불가능한 주문
이지요. 그래서 렵(獵)이 슬며시
빠지는 겁니다.
섭렵(涉獵)이라는 말에서도...
렵(獵)에 의미가 퇴색하지요.
이러한 패턴으로....
홍익(弘益)에서도 弓에 의미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집울릴 횡(宖)을 보세요.
울릴 홍(弘)이 맞는겁니다.
그게 중원에서 변하여....
홍익(弘益)이 홍리(洪利)로
왜곡되는 것이지요.
홍익이 홍리면?
요익은 요리(饒利)입니까?
홍익인간(弘益人間)
요익중생(饒益衆生)
명백 하잖아요?
홍(弘)/요(饒)가 주어(主語)죠.
익(益)은 서술어에요.
익(益)을 이(利)로 바꾸어
주어로 삼는 해석은 엉터리죠.
홍익(弘益)은 명현(鳴弦)
이에요.
一夫得情 千室鳴弦
(장부하나 뜻을 얻으면
일천 집에서 활줄이 울린다)
활줄을 퉁기던 풍속에서...
악기(樂器)가 나온겁니다.
섭렵에 성공하여 돌아오면
온마을이 활줄을 퉁기며 환영
했던 것이지요.
사살하여 노획한 동물들은...
해체하여 분배하고 잔여(殘餘)
물(物)들로 잔치를 벌입니다.
"활을잘쏘고 음주가무를 즐겼다"
우리민족의 정체성이죠.
이것이 육예(六藝)의 1.2.3.이죠
예(禮)악(樂)사(射) 입니다.
보세요.
예악 다음이면 서(書)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 지겠지만
서(書)는 다섯번째죠.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
수(數)가 육예(六藝)입니다.
수렵문화 의 산물임이 틀림없죠.
활문명에서 나온게 역법입니다.
주역(周易)/달력(曆)
역(易)에서 역(歷)이 나온겁니다
'달력' 하면 농경문화 부터 연상
하는 풍토가 오류지요.
농경보다 해양문화가 먼저이고
밀물과 썰물. 사리/조금 물때를
알기 위해 만든게 음력이고
달력이지요.
달력은 농사짓기 위해 만든거다
달력은 물때를 알려고 만든거다
어느쪽 이겠습니까?
다시 반구대 암각화를 보세요.
거기에 농경문화를 엿볼수있는
흔적이 눈꼽만큼 이라도 있나요?
전혀 찾아볼수 없어요.
배의 흔적은 있죠. 당연히...
그 뱃사람들이 물때를 중요시
여겼으리란 것도 불문가지고요.
이를 왜? 간과하고 달력/농경
이라는거죠?
농경문화 유입 이전에 굶주렸다?
아니죠. 고기 먹었어요.
고래잡아 먹었다고 새겨놨잖아요
사슴도 잡아먹고요.
반구대 암각화는 화(畵)가 아닌
도(圖)입니다.
하도(圖)/락서(書) 보세요.
도(圖)에서 서(書)로 변합니다.
즉. 문자의 시원이 암각화 라고요
윷판 암각화도 우리나라 유적
입니다. 사냥할때 활을쏘던
장소에 새겨놓은 것이죠.
"우리 사냥터" 라는 표시였어요.
고대에는 사냥터가 주거지죠.
잔치를 벌이고 배부르면
그자리서 자는겁니다.
그게 마을 리(里)이지요.
전(田)토(土)에요.
1里 400m가 한 마을의 직경
입니다. 활의 최대 사거리죠.
반지름 200m가 유효 사거리
입니다.
전(田)이 사냥터 였다는 증거는
노자에 전렵(田獵)이란 단어죠.
섭렵(涉獵).수렵(狩獵).전렵.
천렵(川獵)....
그러니 윷판 암각화는...
전석(田石) 입니다.
밭돌 이지요.
밭돌/바돌/바독/....바둑.
왜? 바둑판의 田을 집이라 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드러나잖아요?
사냥터가 주거지 였으니요.
속을 고이다/받히다.
그래서 고이기/괴기/고기죠.
밭은 받힘의 준말 입니다.
여기서 비롯된 풍속이 고인돌
이지요.
고인돌/받힌돌 ㅡ 괸돌/밭돌
무덤이 아니라 사냥터 표시였던
것입니다.
농경문화가 만개 하면서 농토
표시로 바뀐것이죠.
윷놀이는 사냥놀이죠
윷가락을 던지는 행위는
활쏘기를 상징합니다.
도낀개낀 ㅡ 윷판용어죠.
낀은 끼니의 준말이고요.
잡아먹기가 쉽다는 뜻입니다.
밥이라고도 하지요.
끼니/밥
뱃속을 받혀주니 밥입니다.
밭/밥 우리말 이지요.
반구대 고래들에 이름이
있었을까요? 없었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시절에 무슨....
향유고래. 범고래. 혹등고래 등의
이름이 있었겠어요?
마찬가지로....
전(田)이라는 발음도 후대에
붙혀진 것이겠지요.
조선왕조만 해도 던(田)이겠죠.
딛다/디디다/..... 딛던...던/전
사냥을 하던.... 던이죠.
(이상하게 던젼이 연상되네..😅)
따/땅 ... 던/덩... 버덩..
바다/바당/.....마당.
우리말을 모르면.....
한자 발음의 유래도 모를겁니다.
바람/파람 모르면 풍(風)의
유래를 모르듯이요.
바람/파랑 우리말이죠.
바람풍(風)이 바람 휭입니다.
중국어 발음이 p가 아닌 f인
이유도 우리말 아니면 모릅니다.
바람 휘ㅡ잉. 바람 피ㅡ잉.
이래서 고대에는 파람/프럼이고
오늘날의 중국어로는 휭이죠.
학자들은 p에서 f로 변한이유
모를겁니다.
우리는 파람 휘ㅡ잉이 무슨
말인지 다들 짐작하죠.
상형(象形)도(圖)는 우리 선조들
작품이고 그걸 서(書)로 쓴것이
중원문화 입니다. 왜?
중원통일 다민족국가 되면서
말이 안통하니 필담으로 하는데
문자의 의미조차 달랐으니 급히
표준화 한것이 진나라 이사의
소전체죠. 그렇게 필담에...
언어가 동화되니 언어가 퇴화
된겁니다.
표준화는 간명화를 추구하죠.
존댓말이 사라진 겁니다.
부사도 대부분 사라졌죠.
엄마 나 밥/아빠 나 똥
식으로 단어만 나열되는 식으로
퇴화 되는겁니다.
바로 이래서....
나랏말쌈이 중귁에 다르게 된
것이지요.
중원에서 문자가 된통 많아진
이유 이기도 하고요.
우리의 경우는 대개 말로 통하고
중요한 상징만 도(圖)로 나타내
두었었는데 통용 문자가 적으니
중원의 잡다한 문자들이 유입된
것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