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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의 배치는 법화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석가모니가 가장 많이 설법한 인도 영취산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석가모니 본존불이 가운데 있고 주변을 십대제자와 과거불들, 팔부신중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迦)]등이 둘러싸고 있다.
석굴암의 가운데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석불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때를 기점으로 이후의 석불들은 조형적인 완성도에서 오히려 점차 쇠퇴한다고 평가받는다.[13]
통일신라는 성덕왕 때부터 전제왕권이 수립되고 효성왕~경덕왕 초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신라의 전제 왕권이 극성기를 맞던 때였으며 화엄종과 같은 종파 불교가 전제왕권의 이념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이때의 경주는 국제도시로 변모하고 당, 인도, 페르시아 문화가 직접적으로 수입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예술적 특징은 당나라 성당(盛唐) 시대의 사실주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사실주의를 토대로 신라화된 모습을 보여줘서 '이상적 사실주의'에 기반한 예술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즉,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조형적으로 완벽한 불상을 만들었다.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인도 간다라 미술의 영향도 고려된다.
석굴암 본존불은 이상적 사실주의에 바탕한 육감적인 관능성을 보여준다. 쇄골 표현이나 허리와 엉덩이는 완전히 일직선이라거나... 불상의 표정은 자비롭다기보다는 왕을 연상케 하듯 근엄하고 덩치가 크고 남성적인 느낌이 철철 흐른다. 그 이유는 위에 서술한 전제 왕권 강화와 맥락을 같이 한다. 왕즉불 사상에 의거해서 실제 경덕왕의 얼굴이 본존불의 모델이라는 설도 있다.[14]
또한 실제 비율보다는 관람자의 시선을 감안해 원근법을 활용했다. 본존불은 실제 인간의 신체 비례와 달리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고, 뒤쪽 지붕에 조각된 광배(후광)도 실제로는 약간 타원형이다. 영남대 김익수 교수는 석굴암을 건설한 김대성의 키가 170 cm일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3m 45cm 규모의 본존불 앞에 서서 올려다볼 때 이 타원형 광배가 원근법상 가장 똑바른 원으로 보이는 지점이 172 cm인 사람의 눈높이인 160 cm라는 것이다. 172에서 신발의 높이 2 cm를 빼서...? 170 cm라는 것.
조각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그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보통 석조 조각은 비교적 무른 대리석(모스경도 2~3)을 이용하지만, 석굴암은 암석 중에서 특히 단단한 화강암(모스 경도 6~7정도)을 깎아 만들었으므로, 조각 난이도로서는 단언 최상위라 할 수 있다. 간다라 불상이나 당시 그리스 석상에 비해 투박하지만 조각 난이도가 매우 힘든 화강암을 이 정도로 조각한 게 용하다.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 새겨진 11면 관음은 중국 보경사 11면 관음과 상당히 유사하다.
석굴암의 주인공은 본존불이라 본존불에만 집중하기 쉽지만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십대제자를 비롯한 여러 부조도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다. 십대제자는 본존불 옆과 뒤에 있는데 출가한 순서대로, 본존불 오른쪽에 앞부터 1~5대 제자가 서고 왼쪽 앞부터 6~10대 제자가 배치돼 있다. 각자의 특성이 반영돼 있는데, 1대 제자 지혜제일 사리불은 석가모니보다 나이가 많았던만큼 어깨가 굽고 야윈 모습으로 묘사되었고, 9대 제자 라훌라는 석가모니의 친아들인만큼 나머지 9명 제자들의 부조는 전부 본존불을 바로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모습인데 라훌라만 아버지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구도로 조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석굴암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본존불 맞은편 좌우에는 보현보살, 제석천, 문수보살, 범천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석굴암의 범천, 제석천 부조는 한국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빠른 시대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석굴이 가장 좁아지는 통로에는 갑옷을 입은 사천왕이 있고, 관람자가 본존불과 함께 정면으로 마주보는 벽면에는 부처님 법을 지키는 2구의 상의탈의한 근육질의 금강역사가 있다. 둘 중 한 쪽은 입을 '아' 하듯이 벌리고 다른 한쪽은 '훔' 하듯이 입을 다무는데, 벌린 쪽을 '아(哦) 금강역사' 다문 쪽을 '훔(吽) 금강역사'라고 부른다. 하필 '아/훔'이란 소리로 구분하는 것은 아(哦)와 훔(吽)이 산스크리트어에서 첫 번째 소리, 마지막 소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관람자와 가장 가까운 부분인 전실에는 불교의 호법신 팔부신중[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喉羅迦)]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다만 왼쪽 맨 앞의 아수라, 왼쪽 3번째 건달바 등 일부 외에는 누가 어떤 팔부신중인지 비정이 정확하진 않은 상태다. 이 팔부신중은 뒤에 서 있는 다른 석굴암 조각보다 솜씨가 조금 떨어지기 때문에 경덕왕 시대에 김대성이 만든 게 아니라 후대에 추가로 조각해 넣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던 석불사 밑의 샘물도 주목할 만 한데, 물이 건물의 하단부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물보라를 일으켜 석불사가 마치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더욱이 햇빛이 비치는 날에는 물보라에 빛이 산란되어 무지개까지 만들어져 더욱 신비로웠다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사진으로 감상할 수 있다. (nrich.go.kr, 자료마당-기증자료)4. 논란[편집]
그런데 석굴암 불상에는 논란이 있다. 첫 번째는 조성연대 문제다. 삼국유사에는 불국사가 751년에 중건되어 77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시기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신라 불교미술은 중대와 하대의 양식이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불국사의 창건 연대를 기록했을 뿐 석굴암을 언제 만들었는지는 적지 않았다. 심지어 불국사도 751년에 창건을 시작하여 김대성이 774년에 사망하고 나라에서 이어 완공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774년 이후 완공을 의미하지 774년에 완공이 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거기에 불국사석탑에서 발견된 석탑중수기 일명 묵서지편이 판독되었는데 여기에는 불국사의 창건 시작 연대를 742년으로 기록했다. 삼국유사와는 9년이 차이난다.
석굴암을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드느라 내부 조각상들의 양식이 서로 달라졌다. 이 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본존불을 1양식, 그 주변을 둘러싼 10대제자상을 2양식, 사천왕이나 인왕상, 팔부중상을 3양식으로 명명해보자. 1양식과 3양식의 조형적 미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본존불이 최정점이라면 팔부중은 그에 비해서 세밀함이 덜하고 양감이 부족하다.
세 번째 문제는 본존불의 명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명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의 명호에 따라 주변에 배치된 조각상들의 명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존불이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는데, 항마촉지인은 본래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手印)이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은 오랫동안 석굴암 본존불상을 석가여래라고 판단했지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신라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창건자 김대성 관련 설화 또한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김대성 설화에선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생의 부모가 극락왕생하길 바랐다면 아미타불을 조성함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이 어느 나라에 강림하느냐에 관심을 쏟느라 미륵 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다.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15]에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고 주장함은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제자상 때문이다. 10대제자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므로 석가불상에만 함께 배치한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아미타불상 주변에 배치한다면 굉장히 이상하다. 또한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는 십일면관음의 부조가 있는데, 관세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16] 어쨌든 이런 이유로 학계에서 석가여래를 주장하는 사람은 9, 아미타불을 주장하는 사람은 1 정도로 석가여래라는 것이 중론이다.
대중들에게 대단히 인지도가 높은 문화재이다 보니 각종 루머가 많다.
본존 이마에 박힌 보석(호박?)을 일본인들이 빼돌렸다거나 그 보석에 햇빛이 닿으면 반사돼서 일본까지 간다는 뭔가 초현실적인 것이 많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 마의태자가 2명이고 1명은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죽었다. 그것에 그의 시신과 함께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일본군이 전쟁 말 일본 본토로 가져가려 한다는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돔형 지붕의 뚜껑 돌이 파손되었지만, 일제가 훼손한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에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전설에 가깝긴 하지만 기록이 있다.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대성이 속이 상해 있다가 깜빡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내용. 창건자가 돌 깨뜨렸지만 천신이 붙여주셨으니 그냥 쓰자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17] 실제로 저랬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오늘날에도 건축자가 집주인 몰래 마음대로 하자보수 했다가는 소송이 걸릴 일인데 당시 신라의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김대성의 권력을 생각해보면... 석공들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루머로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방향이며 이는 신라의 호국불교 사상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방향이 대충 비슷하긴 하나, 정확히는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에 더 가깝다. 반면 '석굴의 방향이 동짓날 일출 지점'이고 '동해의 아침 햇살을 본존불 백호에 맞추려는 거룩한 의도로 석굴이 지어졌다.'는 주장은 논지가 일본 아마테라스 신의 태양 숭배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다.
원래는 채색된 불상이었다는데 이는 역사스페셜에서도 다룬 적이 있다.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려면 터미널이나 경주 시내에서 바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없고 불국사까지 와서 환승해야 한다. 어차피 경주 와서 석굴암만 달랑 보고 경주를 떠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불국사를 보는 김에 석굴암도 같이 보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을 것이다. 불국사까지는 터미널이나 경주역, 시내에서 10번, 11번, 700번을 타면 된다. 신경주역에서는 35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700번을 이용하면 된다. 10번과 11번은 같은 노선으로 순환 방향만 다를 뿐이다.
불국사에서 석굴암으로 가는 버스는 12번인데 불국사와 석굴암만 왔다갔다하는 석굴암 셔틀버스나 다름없다. 불국사 주차장 맞은편(10, 11번 시내버스 정류장 맞은편)에서 탈 수 있다. (단, 불국사를 관람한 뒤 바로 석굴암으로 가려고 한다면 아래쪽 주차장까지 내려올 필요 없이 매표소 광장 앞길을 건너가면 동리 목월 문학관 넘어가는 바로 앞에도 정류장이 있다.) 불국사에서 매시 40분 출발이다. 석굴암에서 불국사로 돌아오는 버스는 매시 정각 출발. 석굴암 매표소에서 석굴암까지도 제법 걸어 들어가야 된다.
혹은 불국사 부근에 있는 토함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을 이용해서 40분 정도 걸어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남산처럼 올라가는 길에도 문화재가 많거나 하진 않고 평범한 등산로다. 12번 버스를 타고 석굴암을 먼저 본 뒤 불국사를 볼 계획이라면, 이 산길을 통해 내려오는 방법도 있다. 석굴암 매표소 바로 뒤쪽으로 불국사로 내려가는 길이 시작된다. 내려올 때는 당연히 40분보다는 덜 걸린다.
직접 차를 운전해서 온다면 운전을 조심하자. 불국사와 석굴암을 연결하는 불국로와 석굴로가 상당히 구불구불하고 험하다. 그나마 감포 방면은 헤어핀 1번만 조심하면 갈 수 있지만 불국사와 경주 방면은 헤어핀 및 급커브가 굉장히 많다.
관람시간
평일 | 오전 9시 ~ 오후 6시 |
주말 및 공휴일 | 오전 8시 ~ 오후 6시 |
주차 요금 (후불)
대형차 | 4,000원 |
중형차 (1,000cc 이상) | 2,000원 |
소형차 (1,000cc 미만) | 1,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