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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쁜날님.
님께서 본 개혁주의신앙공동체를 찾아주심에 큰 기쁨을 가집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인하여 믿음의 교제에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교제란 단지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친교를 갖는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요 믿음의 교제란 복음의 진리를 인하여서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믿음의 교제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자 하는 마음에 있음으로써 가능합니다.
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의 진리를 보다 바르게 이해하며 반듯하게 알고자 함에 있으며, 이러한 마음이 알고자 하는 것에 대해 질문을 갖게 되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이에 저 기쁨으로, 그리고 즐거움에서 답변을 드립니다.
님께서는,
“궁금한 것이 있어 여쭙니다.” 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알고자 하는 것을 질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5절 말씀 중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물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더러는 말씀이다 하여 설명해 주시고, 더러는 은혜의 방편이다 설명해 주시는데, 제거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제가 아직 어리석어 도통 수긍이 되질 않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세례의 기원까지 궁금하군요. 이스라엘의 온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의 의식 속에서의 세례란 무슨 의미였을까? 하는 궁금함입니다. 구원의 서정 가운데 거치는 어떠한 한 단계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성령님의 임함으로 중생케 되는데, 굳이 물이 필요한가? 라는 단순무식? 한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성령님의 인치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부차적인?( 단어가 좀 그렇습니다) 물, 곧 은혜의 다른 방편이 필요 하겠는가? 입니다….
참고로 여전히 저는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저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으며, 구원의 완료성과 이루어 나감의 진행성의 공존이 저의 단순한 사고 체계 속에서 명확하지 않고, 어떤 형체만을 감지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의 이 질문은 (1) 요한복음 3:5의 “물과 성령으로”에서 ‘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에서 질문하게 되었는데, (2) 이 질문에 그치지 않고 확대되어서 세례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 - 중생한 자,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자 - 인데 굳이 ‘물’이란 것이 동원되고 사용되어서 세례를 받음이 필요하겠는가는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3)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대한 확신에서 이것이 구원론과 관련하여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중에서 (3)의 경우 님이 궁금해 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이 제게선 잘 되지를 않습니다. 님은 “여전히 저는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저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으며, 구원의 완료성과 이루어 나감의 진행성의 공존이 저의 단순한 사고 체계 속에서 명확하지 않고, 어떤 형체만을 감지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미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있다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면 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그래서 구원의 완료형에 있는데, 그런 그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진행형에 있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에 의한 의문에서 인지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이에 전자의 경우로 이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다음의 세 가지로 답변을 드립니다. 하오니, 이 답변이 님이 궁금해 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질문에서 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장5절 말씀 중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물’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더러는 ‘말씀’이다 라고 설명해 주시고, 더러는 ‘은혜의 방편이다’ 라고 설명해 주시는데, 제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제가도통 수긍이 되질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한 분이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본 ‘질문과답’ 567번에서 다른 한 분께서 질문해 주셨었으며, 이에 568번과 570번에서 답변을 드렸었습니다. 이에 님께서는 이 답변의 글을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님은 “이미 이와 같은 논의가 있었군요^^ 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답글을 올리신 분들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목사님께서 따로 수고스러움을 더하실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이미 자세히 올려 놓으셨으니” 라고 말하며, 이 답글로도 충분함을 표하였습니다.
그러나 님은 이것의 질문과 함께 연결된 다른 질문도 두 가지를 함께 더 하고 계시기에 이곳에서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이 답변에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앞서 드린 답변에서 부분적으로 약간의 설명을 더하여서 답변을 드리겠으며, 이와 연관해서 질문한 것에 대해서도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내용을 다시 보면, 님은 “요한복음 3장5절 말씀 중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물’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더러는 ‘말씀’이다 라고 설명해 주시고, 더러는 ‘은혜의 방편이다’ 라고 설명해 주시는데, 제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제가도통 수긍이 되질 않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이 궁금해 하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이란 어구는 요한복음 3: 1-15(또는 3:1-21)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가진 대화에서의 한 부분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원으로서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선생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에서의 ‘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며 여기에서의 ‘물’이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왜냐하면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에서의 ‘물’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고 있는 분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님이 들은 것으로는 사람 중에 더러는 ‘물’은 ‘말씀’이다 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 중에 더러는 ‘은혜의 방편이다’ 라고 설명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한 설명을 들으면서 정작 님은 그러한 설명이 수긍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에서의 ‘물’은 ‘말씀’이거나 혹은 ‘은혜의 방편일까요? 사실 ’물‘을 ’말씀‘이라고 설명하거나 ’물‘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거나 하는 이 둘 모두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닌 사실은 서로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혁교회 - 개혁주의 신앙에 있는 교회 - 는 ’은혜의 방편‘으로서 ’말씀‘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서의 ‘물’은 ‘말씀’ 또는 ‘은헤의 방편’으로 말씀되고 있는 것이겠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요한복음 3:5에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에서 ‘물과 성령으로’에 대한 성경 원문과 번역 성경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먼저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 3:5에서의 “물과 성령으로”란 말의 원문(성경의 원어)은 “엑스 휘다토스 카이 프뉴마토스”(ejx u{dato" kai; pneuvmato")입니다. 이것을 번역한 한글성경은 모두 “물과 성령으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어번역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역번역성경들도 ‘물과 성령으로’라고 번역할 수 있는 “of water and [of] the Spirit"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 원문은 “물과 성령으로”라고 번역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어구만 보면 ‘물’과 ‘성령’으로가 각각 별개의 다른 것으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물’에 대해서 말하고, 또 ‘성령’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여기서 ‘성령으로’는 그 실체가 말해지고 있기 때문에 알겠는데, ‘물’은 우리가 마시고 사용하는 ‘물’을 실체로 말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말해지고 있는지가 궁금하게 됩니다. 즉, ‘물’이라고 하는 용어(단어)를 사용하여서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물과 성령으로”에서 ‘물’이 말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고, 그래서 ‘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세 가지의 견해가 있어왔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씩 설명을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는, 물과 성령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라고 보아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중생케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는 새 것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이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생각과 사상,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한다는(렘 32:39-41; 겔 36:26), 곧 하나님은 사람이 거듭나는 일을 자신의 도≪道 ; 하나님의 말씀, 또는 진리의 복음≫를 우리 마음 안에 심어주어서 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는 사도 베드로가 한 말을 듭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벧전 2:23).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 심어 거듭나게 하시는 일은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의해서 되어지므로, 그래서 성령으로 나는 거듭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마음에 심어 그 말씀에 순종케 하심에 의해서 하시는 일이므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는 견해를 갖습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의 진리를 좇아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으며 또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라는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에서의 ‘물’을 ‘세례’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렇게 물을 세례라고 보는 것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는 성령으로 나는 것인 ‘성령세례’로 되어지는 것으로 이것을 보여주는 표징(표적)의 역할을 하는 것이 세례요한이 행한 ‘물세례’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물’이 ‘성령’과 대비적으로 말씀되어지고 있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사역이 이것의 표징인 ‘물세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이 거듭나기 이전의 사람인 옛사람, 곧 육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에서입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처음 사람의 육을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난 것인 영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여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신다고 이해합니다. 이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일인 표징인 물로 세례를 베푸심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날마다 있는 것이며, 그래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에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생명의 출생을 날마다 겪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물’을 ‘세례’라고 이해하는 견해를 갖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에서의 ‘물’을 뒤이어 나오는 ‘성령’과 같은 것으로 보고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구약성경에서 종종 그랬듯이 내면적 정결케 함을 성령께서 하시는 것의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한 부패한 죄를 씻어 정결케 함으로 새생명을 소유케 하시는 사역은 성령이 하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에 ’물‘과 ’성령의 관계를 ‘물 그리고 성령’으로의 각각 독립적인 것으로가 아닌 ‘물, 곧 성령’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물과 성령으로’에서 사용되고 있는 접속사에 해당하는 ‘~과’는 주로 ‘그리고’에 해당하나, 여기서는 ‘곧’의 의미로 쓰여진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물과 성령’이라 할 때 우리 말의 조사 ‘과’(and)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카이’(kai;)인데, 이 말은 우리말로는 ‘~과’, ‘그리고’ 라고도 번역이 되지만, 또한 ‘곧’이라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는 “물, 곧 성령으로” 라고 해도 되는 말입니다. 그랬을 때에 ‘물’과 ‘성령’을 대등한 것으로, 또는 동의적 개념으로의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출생의 신적 집행자는 성령이신데, 성령께서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일을 죄 씻음의 사역에 의해서, 그래서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되게 하신 것에서 이해하는 견해를 갖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 어느 것이나 그 이해의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어느 것의 견해를 무시할 것은 아닙니다. ‘중생’의 교리를 이야기할 때 세 가지 견해 모두를 가지고 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말이죠. “물과 성령으로”가 중생의 교리에 대한 이해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성경 본문이 지닌 문맥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本意)를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말이죠. 요한복음 3:1-15(또는 3:1-21)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에서의 ‘그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에서는 중생의 교리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성경 구절 모두를 가지고 모두다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해주시고자 하신 그 의도에서의 의미 파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첫 번째의 견해 -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견해 - 는 중생의 교리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성령의 사역과의 관계성에서 사도 베드로가 그가 쓴 베드로전서와의 연관에서 설명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만, 요한복음 3장 본문에서의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가진 대화에서는 그 지지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에서의 의도인 중생의 수단으로써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에서 ‘물’을 예수께서 사용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견해에서 어느 하나일텐데, 사실 두 번째의 견해와 마지막 견해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견해가 아닌 같은 이해를 가진 것으로 그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가진 대화의 내용으로 가 보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물’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말은 그냥 ‘물’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성경 원문에서 이 말이 사용되고 있는 유래를 보면요 ‘비오다’는 말에서 쓰였습니다. 특히 이 말은 ‘소나기 비’, 그러니까 소나기성의 비가 오는, 소나기처럼 마치 물 붓듯이 부으신 것에 의한 ‘물’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러한 물로 관련하여서 성경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주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서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요엘 2:28-29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神)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神)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神), 곧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이것이 임함으로 인한 복을 누릴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인데 그것은 32절에서 보게 되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 시대에 오순절 날에 있은 성령강림 직후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성령 강림 예언 성취로 증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과 관련하여 다시 태어날 것, 곧 거듭나야 할 것의 가르침으로 주신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에서의 ‘물’은 요엘서의 성령 강림 예언의 근거에 의해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요엘 선지자에게 예언하게 하신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을 소나기 비 오게 하듯이 그렇게 하늘에서 물 부으시듯이 쏟아 부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난 모든 각 사람에게 성령의 임하심이 있으며, 그래서 그 성령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물과 성령으로’는 ‘물, 곧 성령으로’라고 봄이 옳아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예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 그러니까 예수께서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인 ‘성령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랬을 때에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에서 ‘물’을 ‘세례’로 보는 견해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베푸실 세례인 성령세례의 표징(표적)으로서 이며, 그래서 “물과 성령”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이 경우 ‘물세례’가 의미하는 바를 세례요한이 물세례를 베풀었던 의미에서 보게 됩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12)가 의미하는 바인, 자신의 뒤에 오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의 심판이 있을 것이기에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단지 물로 세례를 주는 것에서 그 사실을 증거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례요한이 증거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큰 능력의 임하심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요엘 선지자의 예언 성취에 의해서 마치 소나기 비를 쏟아 부어주시듯이 하여 몸 전체로 받게 하시는데 이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자신과 ‘연합’시킴으로써 하십니다. 이것이 세례의 본질적 의미인데 예수님은 그렇게 된 그들을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피에로 이끌고 가서 자신과 함께 죄에 대해서는 못 박힌 자가 되게 하여 죽고 하나님의 생명에 대해서는 산 자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임하심에 있게 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경우에서 “물과 성령으로”를 ‘물 그리고 성령으로’라고 보더라도 이것에서 말하게 되는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각각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고 ‘물’과 ‘성령’이 서로 연관된 상관성의 관계에서 ‘하나의 세례’에서 다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없다”에서의 또 다른 견해인 ‘물’을 ‘내면적 정결케 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이것(물을 세례로 보는 견해)과 사실상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안에 부른 자들의 타락한 부패한 죄를 씻어 정결케 함으로 새생명을 소유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라고 보는 것으로 ‘세례’의 의미 안에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요한복음 3:1-15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시며 또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에서 ‘물’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말씀되어진 것인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의 구속을 위한 공생애를 갈릴리에서 시작하시는 것으로 그리스도이신 모습을 처음 나타내셨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으며(요 2:1-11), 유월절에 절기를 맞이하여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자신이 행하실 메시야 권능의 표적을 증거 하셨습니다(요 2:13-22). 그리고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면서 자신을 나타내셔서 증거 하시는 표적으로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은 예수님의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표적을 행하신 그 능력을 보고-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서 단지 표적을 행한 그 능력만 보고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서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을 부인하여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이라는 그들의 마음, 곧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요 2:23-24).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기도 했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인 지도자-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 동안 행하신 표적을 보고 자기와 몇몇의 동료 바리새인들이 깊이 생각하여 결론 내린 판단을 예수님께 말하고 또한 궁금한 것인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해서였습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한 이야기는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표적을 행하신 것을 보고선 자신들은 표적으로 행해진 기이하고 놀라운 능력 자체나 나타난 현상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표적에서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표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니 필연적으로 표적을 행하신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생님<선지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님으로서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시는 것인지, 선생님이 행하신 표적이 어떤 진리를 말씀하여 주고자 하는 것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행하신 표적을 보았지만 그것을 보고서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리를 받아 믿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라고 지적하신 적도 있듯이 행해진 표적에 의해 나타난 육적인 혜택을 입고자 해서였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서 표적을 행하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니,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들<유대인>의 선생, 곧 선지자로 보내셨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라는 의문의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어 무엇인가를 자신들에게 말씀해 주고자 하는 어떤 계시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고 그와 함께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의 시작을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그러자 니고데모는 참으로 난감해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질문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지금까지 알고 있어 온 것은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모태에서입니다. 어머니의 복중에 잉태하여 있다가 출생하는 것이 사람의 태어남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알고 있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있는 유대인은 그렇게 해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들에게서는 공식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으로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의도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에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물과 성령으로' 있게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그리고 그를 존경하며 따르는 유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잘못된 ‘천국관’(天國觀)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이는 말이죠.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않으면, 곧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에서의 ‘물과 성령’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난다’는 것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과는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를 보며, ‘그 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오직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 나라를 보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며,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으나 바람 부는 소리는 듣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 능력으로서 되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바람은 온 사방에서 임의로 붑니다. 그 바람이 부는 것을 사람은 그 소리를 들어서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서 불어오는 것이며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 신비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 큰 능력이 작용되고 있습니다. 그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성령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육에서 난 육의 사람에게서 있는 일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영적인 사람에게서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것은 성령에 관한 문제이지 니고데모가 생각하고 있는 대로 육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물과 성령으로의 거듭남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니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나라를 보고, 들어가는 것은 전혀 기이한 일이 아닙니다(참조 요1:12-13). 하지만 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그 신비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아직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의 진리, 곧 하나님 나라와 거듭남의 관계가 다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 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면 예수님이 지금까지 니고데모에게 해 준 말씀을 통해서 메시야가 하시는 일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그래서 메시야가 자신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자기 백성에게 세워 나가시는 일을 하시기 위해 어떤 일을 당하실 것인지에로 관심의 초점이 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하늘 일로서 하늘에서 내려 온 자를 통해서만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민수기 21:9에 있는 놋뱀 사건을 들어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을 들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하실 것인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서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세상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생명의 빛입니다. 그런데 그를 믿지 않는 것은 빛보다는 어두움을 더욱 사랑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들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하나님의 의)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행하고 있으심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십니다.
그런데 장대에 달려 높이 들려진 놋뱀과 같이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지는 일을 당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에 있는 자마다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에서의 ‘물’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물과 성령으로’라야 되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시면서 이를 성령의 주권적 사역으로 설명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며, 이것은 땅의 일이 아닌 하늘의 일이라고 하시면서 장대에 달린 놋뱀 사건을 들어서 예수께서도 높이 들려야 할 것이라고 하며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내용의 전개에서 ‘물’을 독자적으로 말씀하신 바가 없으며, ‘물과 성령으로’ 말씀하셨고, 이것은 ‘물’과 ‘성령’ 각각이 지닌 독립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물과 성령’을 하나로 해서 이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듭남의 진리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물과 성령’은 ‘성령’ 하나의 용어로 말씀되고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을 6절에서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는 말씀으로, 또는 8절에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여기서의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의 의미는 이와 함께 말씀하신 ‘성령’에 의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물’ 그 자체로서는 독자적인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라는 말이 있음으로 해서 ‘물’이라는 말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에서의 ‘물과 성령’은 ‘물, 곧 성령’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랬을 때에 ‘물’은 비로소 의미를 지니며 또한 ‘물’이 지니는 의미는 구약성경에서의 예언에 의한 연관성에서 비로소 살아납니다. 그것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의 신(神)을 부어주시겠다고 한 표현인 “내가 …부어주리니”(욜 2:28)가 하나님께서 물을 쏟아 붓듯이 붓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신, 곧 하나님의 영이 하나님께로부터 물이 끊이지 않고 쏟아져 내리는 것과 같이 계속해서 주어질 것인데, 이것이 만민에게<모든 육체에> 부어져 그들에게 임함으로 하나님의 신(영)이신 성령께서 그들을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도 ‘물’은 곧 ‘성령(의 부어주심)’과 가장 잘 부합됩니다.
해서 말입니다. 요한복음 3:5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에서의 ‘물’이 본문에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있어서는,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 3:5에서의 ‘물’이 본문의 내용에서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서는 그 직접적인 답변은 ‘성령’, 또는 ‘성령의 부어주심(성령세례)’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물’이 지닌 의미가 본문의 내용과의 연관에서 무엇인지를 말할 수 있는가 할 때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는 일은 구약 예언에 의해서 있는 일인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심(성령세례)으로 성령께서 임하여 거듭나게 하시는 주권적 사역에 의해서 되어지며 이것에서 일어나게 되는 성령의 사역이 있는 사실에서 볼 때 앞에서 언급한 여러 견해에서 보게 되는 ‘세례’와 함께 ‘이것(세례)이 하는 일’의 설명을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구약 예언의 성취로 있게 될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에 의해서 모든 믿는 자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한몸이 됨으로써 그분으로부터 공급되는 믿음의 은혜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로 믿어 죄 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나라를 보며 그분과 함께 그분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은 이 질문에 해당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세례의 기원까지 궁금하군요. 이스라엘의 온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의 의식 속에서의 세례란 무슨 의미였을까? 하는 궁금함입니다. 구원의 서정 가운데 거치는 어떠한 한 단계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성령님의 임함으로 중생케 되는데, 굳이 물이 필요한가? 라는 단순무식? 한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성령님의 인치심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부차적인?( 단어가 좀 그렇습니다) 물, 곧 은혜의 다른 방편이 필요 하겠는가? 입니다….”
‘세례’란 말이 제일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세례 요한’으로 불려지는 마태복음 3:1에서의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가로되”입니다. ‘세례 요한’이라고 불려지게 되는 것은 (사도 요한이 아닌)요한이 행하는 사역과 관련해서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 길의 준비에 있게 하는 것에서 회개케 하려고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마 3:11). 그에 따라서 사람들에게서는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요한)에게 세례를 받더니”(마 3:6)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택정하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세례 요한’이 행하는 물로 세례를 주는 것에서입니다. 이때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그의 뒤에 오실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실 ‘세례’인 ‘성령(으로 베푸시는)세례’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그의 뒤에 오실 분이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 곧 '성령세례‘의 표징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는 구약적 배경을 갖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는 그 기원을 구약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가까이에서는 요엘 2:28에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만, 요엘 2:28이 있게 되는 것은 또한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에 따른 것입니다. 이 모두를 설명할 수 없기에 세례의 기원을 어디에서부터 보게 되는 것인가 할 때 이는 어느 시대를 한 기점으로 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구약 시대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서 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구약적 배경에서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이 있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라고 하였는데, 예수께서는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셨으며”(마 3:13), 그러한 예수님에 대하여 세례 요한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마 3:14) 라고 말하며 만류하였으나, 예수님은 요한에게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 3:15) 라고 말씀하시며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와 같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셨습니다(마 3:16).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설명이 필요합니다만 여기서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님께서는 세례의 기원에 대해서도 궁금해 하시기에 세례란 용어의 처음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등장에 앞서 세례 요한이 행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에서 보게 되는 것이지만 이것의 배경은 구약성경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한편, 님은 세례와 관련하여서 “이스라엘의 온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의 의식 속에서의 세례란 무슨 의미였을까? 하는 궁금함입니다. 구원의 서정 가운데 거치는 어떠한 한 단계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성령님의 임함으로 중생케 되는데, 굳이 물이 필요한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성령님의 인치심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부차적인?( 단어가 좀 그렇습니다) 물, 곧 은혜의 다른 방편이 필요 하겠는가?” 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온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의 의식 속에서의 세례란 무슨 의미였을까? 하는 궁금함입니다.” 라고 하였는데, 유대인에게서는 ‘세례’를 행하는 의식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요.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행 2:38), 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가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의식에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교회에서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세례가 행해지기 이전에 이스라엘 온 역사 가운데서 유대인에게 있어온 것은 ‘세례’가 아닌 ‘할례’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교회의 ‘세례’ 이전에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의식으로는 ‘할례’였던 것입니다. 이 할례가 행해져 온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이루어 가시는 것에서 할례를 하게 하신 것에서입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시(표징)으로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게 하시는 것에서 아브라함이, 그리고 또한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에 속한 할례 받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는 표징이 그들의 살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영원한 언약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에 그에게 속한 사람들도 함께 할례를 받게 하여 아브라함과 함께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언약의 공동체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는 말이죠. 아브라함을 통해서 있게 하시는 천하 모든 민족에게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함께 복을 받는 후손이 약속되는 것에서입니다(창 12:1-3, 17:1-14). 그래서 할례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의 공동체’가 예언적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으며,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아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김을 통하여 이루신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불러 모으신 자들을 자신과 함께 받는 세례를 통하여 세례 받은 자들이 그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의 한 부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게 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실 때 함께 우리도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가 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함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새생명으로 얻어 다시 산 자가 되어서 장차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롬 6:3-5). 이렇게 ‘세례’는 구약에서의 아브라함과 맺은 할례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언약의 공동체’가 언약의 후사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의해서 그분과 함께 연합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영생의 복에 있게 되는 ‘새언약의 공동체’에 있게 하시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때 ‘새언약의 공동체’에 있게 하시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 곧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이며, 교회에서 의식(儀式)으로 행해지는 ‘물세례’는 ‘성령세례’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가입(加入)됨을 나타내는 ‘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주로 받는 믿음의 형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몸의 지체됨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에 있는 것이죠.
이렇게 이스라엘 온 역사 가운데서 있어온 것이 할례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세례로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인데, 아브라함의 후손된 것에서 민족적 유대인으로 머물러 있는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함에 있으면서 구약에서의 ‘할례’에 머물러 있지 결코 ‘세례’로 나아가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님은 이 세례에 대한 이해를 가짐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 가운데 거치는 어떠한 한 단계라고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라고 생각하면서 “성령님의 임함으로 중생케 되는데, 굳이 물이 필요한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고 하는데, 그 증거로 성령님의 인치심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부차적인?( 단어가 좀 그렇습니다) 물, 곧 은혜의 다른 방편이 필요 하겠는가?” 라고 의문을 갖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서’에서의 ‘물’을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세례’ 또는 ‘은혜의 방편’ 이란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구원 받으며, 성령으로 인침을 받으면 그것으로 된 것인데 ‘세례’이니 ‘은혜의 방편이니’ 하는 성령 외에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여 ‘물’이란 말을 하고 있는지 의문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답변해 드리는 것에서 설명을 드린 바와 같이 ‘성령’ 외에 또 다른 무엇, 곧 세례이니 은혜의 방편이니를 의미하는 것에서 ‘물’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동의적 개념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임을 이해하면 님이 갖는 의문은 해결될 것입니다.
끝으로, 세 번째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은 “참고로 여전히 저는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저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으며, 구원의 완료성과 이루어 나감의 진행성의 공존이 저의 단순한 사고 체계 속에서 명확하지 않고, 어떤 형체만을 감지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님이 하시고 있는 이 말에서 님이 말하고자 하는 진의가 무엇인지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제 나름대로 님이 하고 있는 말을 이해하는 선에서 답변을 드립니다. 그러기에 혹 동문서답하는 것이 되었으면, 이는 님이 하는 말을 제가 잘 파악하지를 못하고 또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서 답변을 드리다보니 그러한 답변을 하게 된 것임으로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님은 우선 “저는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대한 이해에 있어 저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으며” 라고 하였는데, 선택과 예정의 교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의도인지요. 만일 그렇다면요. 선택과 예정의 교리는 님의 이해를 요구하는 것에서 성경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려 드립니다. 선택과 예정의 교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해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시는 선택을 하심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말이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며,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운 언약에 근거하여 자비를 베푸시려고 온갖 불순종을 참아 오신 것에서 말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이죠. 온갖 불순종에 있음에도,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임에도 “이제는 너희가 내 백성이다” 라며 그들의 주님이 되심은 하나님께서 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소멸시키기로 이미 작정하신 것에서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택한 자신의 백성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시는 것에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말이죠. 혹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이 불공평하다는 말을 합니다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예정은 말이죠.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일에 대한 영원한 작정과 이것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심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실 것을 정하심에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 대한 작정과 선택과 구원의 예정에 있으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시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셨으며, 첫 사람 아담과 그를 좇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죄로 말미암아서 정죄를 받고 죽음의 형벌의 심판에 있는 것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따라 난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있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이 없는 인간의 실상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이 없는 인간은 육에서 나오는 본능에 따른 욕망으로 말미암아서 죄 그 자체 밖에 없으며, 죄 값은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서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이 없는 인간의 실상의 모습은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서 죽음에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영원한 죽음의 세계에 내던져질 것이 인간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한데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만을 하나님의 약속을 잇는 후사가 되게 하시고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을 믿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저주의 심판을 하시는 분이신데,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차별하지 않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선택과 구원의 예정에 우리를 두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이해 못하여 이상하게 여기며 비난할 수 있겠는지요. 한 예로 쉽게 말해보고자 하겠습니다. 여름 내내 비가 내림이 없이 땡볕의 가뭄으로 땅의 모든 곡식이 다 말라 죽음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러한 하나님을 온 세상에 드러내게 하시기 위하여 땅의 말라 죽는 죽음에 있는 곡식에서 생생하게 살아있고 잘 자라 열매를 맺는 곡식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곡식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을 인하여 하나님을 비난하시겠습니까? 아니지요. 온 세상에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말하며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높여 찬양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말이죠. 이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이것에 따른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완료형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은 말이죠. 완료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가 완료된 것입니다. 해서 말이죠. 이것은 변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 그대로 이루어져가 성취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 그대로 이 땅에서 펼쳐져 진행되어 나갑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것에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이 나타나집니다. 사람의 약속은 완료적 진행형이란 것이 없습니다. 가령 오늘 내가 누군가에게 내일 저녁 6시에 만나서 떡만두국을 사주겠다고 약속하였으면, 그 약속한 내일 저녁 6시에 떡만두국을 과연 사주어야 약속한 대로 성취가 비로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한 내일 저녁 6시에 떡만두국을 사주지 않으면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것이 되고 그래서 그 약속은 성취에 있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성취란 것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구원을 받아서야 비로소 그 약속의 성취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주신 그때에 약속을 주시는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하신 백성에게 주실 구원으로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으로 오셔서 그 구원에 우리의 믿음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은 우리의 머리 속에서 계산되어 돌아가는 이성적이거나 우리의 입에서만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말 장난이 될 수 있는 사변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라고 하는 우리의 마음과 입에 있는 신앙고백의 이 믿음은 이성적이고 사변적인 것에서는 결코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요. 우리에게서의 이 신앙고백의 믿음은 혈통이나 육체적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에서, 곧 우리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를 따라 한없는 복을 받은 것에서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그 믿음에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변을 마칩니다.
본 답변의 글이 님이 궁금해 하며 알고자 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혹, 그렇지 못할지라도 이 답변의 글로 인해서 님이 앞으로 더욱 자세하며 분명히 알게 되는데 도움과 유익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서 님과 함께 하시는 진리의 영께서 지혜를 공급하여 도우실 것을 구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물,곧 성령" !!!!!감사합니다. 문자의 병렬적 구조에 한계를 갖은 모양입니다. 선택과 예정의 대한 말씀도 잘 받겠습니다. 단지 제자신의 한계란 어떤 숙명, 운명의 생각이 자꾸 떠올라서요^^; 잘 알겠습니다. 구원의 완료성 역시 분명합니다. 다만 제자신의 탄식으로 이해해 주십시요ㅠㅠ 아! 나의 죄성이 이리도 깊은 것일 줄이야...... 어린아이같은 자의 궁금증에 이토록 여러가지로 할애해 주시고 다시한번 거듭 감사를 드리며, 이와 같이 저의 발길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단 한방울의 피로도 온 인류의 죄를 씻기우고도 남을 터인데,
주님께서는 갈보리의 십자가위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리시어 피와 물을 쏟아부으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단번에 씻겨주셨습니다. 이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
주여, 홀로 영광 받으소서.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내내 떠오른 생각을 적어봅니다.
언제나 목사님의 답글은 이 소경에게는 주님께서 목사님을 통해 비춰주시는 한줄기 빛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가 목사님께 충만하시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