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건과 예루살렘 입성 사건의 순서가 바뀐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강조점이 다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기름 부음 받음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에 일어나고 머리에 기름 부음 받음이 일어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순서가 바뀝니다. 예수님의 기름 부음 받음이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일어나고 또 발을 기름으로 씻깁니다.
강조점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기름 부음이 예루살렘 입성 전에 일어난 것은 왕으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의 강조입니다. 예수가 왕으로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왕으로서 빌라도에게 재판받습니다. 재판 과정에서의 논제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입니다(요한복음 18:33, 37). 예수님이 그렇다고 하십니다(요한복음 18:37). 세상의 왕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왕입니다. 예수가 왕 되심이 강조됩니다. 요한복음 18:37절을 보면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8:36절을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하나는 마가복음은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았는데, 요한복음은 발에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이것은 장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예루살렘 입성이 이루어집니다. 장례가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높임 받음, 영광 받는 자리임을 강조합니다.
순서를 보면 대제사장에 의해서 죽음이 예고되고(요한복음 11:45~53), 마리아에 의해서 죽음이 예고되고(요한복음 12:1~8) 예루살렘 입성(예수가 왕으로서의 등극을 상징하는)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예수의 고별사와 수난사에서 밝히게 될 예수의 역설적인 하나님에로의 높임 받음, 그의 왕으로서의 취임, 주로서의 취임 과정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림으로써 그의 낮아짐, 그의 죽음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십자가에 들리고 장사 되고 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죽음이 그가 영광 받는, 그가 왕으로서 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입성입니다. 여기서 나귀 새끼를 타고 군중들이 환영하는 가운데 입성하는데, 구약 스가랴 9:9절이 직접 인용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구약 본문을 직접 인용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예수의 수난사에 들어와서 본문을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에 강조점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13절에 왕 곧 메시아적인 왕으로서 환영받습니다. 이 주제가 예수의 수난사에 줄곧 흐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예수”라는 주제가 요한복음 18:33-40, 19:1-6, 12-16, 19절 등에 줄곧 흐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메시아적 왕으로서의 예수님입니다.
다른 하나의 강조점은 제자들이 16절을 보면 당시에는 예수의 메시아적인 왕으로서 입성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나중에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 빛에 비추어 봐서 예수의 왕 되심, 왕으로서의 입성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왕이 됩니다. 죽음 이전에는 예수의 왕 되심이 감추어져 있고 모릅니다. 십자가에 들림을 받은 후에 드러나서 깨닫고 알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구약과 유대교의 주된 메시아사상이 전사적인 전쟁영웅, 정복하는 왕 메시아입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을 환영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환영할 때 무리가 사용했던 구호는 “호산나”입니다. 이 말은 본래 히브리어로 “호쉬아나”인데 헬라식으로 히브리어를 발음한 것입니다. 그 뜻은 “지금(혹은 제발) 구원을 주소서”입니다. 시편 118:25절에 이 말이 그대로 사용되었고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 “호산나”라는 말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달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에 모인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그를 맞이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레위기 23:40절에 따르면 종려나무 가지는 초막절에 사용되는 식물입니다. 그러나 유대 전통에 따르면 초막절이 아닌 다른 절기에도 종려나무가 사용되었고, 특이 승리를 상징하는 식물이 되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종려나무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이한 이유는 바로 승리의 왕, 메시아를 환영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오시기 200년 전 즈음 마카비 유대인들이 시리아의 셀류시드 왕조를 몰아낼 때, 그래서 마카비의 하스모니안 왕조를 세울 때에 열렬하게 환호하던 모습이기도 합니다.
셋째는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해방해 줄 사람을 “이스라엘의 왕(호 바실류스 투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메시아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표현은 본래 명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객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시편 118:26). 사람들은 서로 축복하면서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리는 이것을 예수님에게 사용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메시아를 뜻하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구원해 줄 메시아였습니다.
반면에 스가랴 9장~13장에서는 평화의 왕으로서 메시아사상입니다. 이사야에도 메시아를 평화의 왕으로 말씀합니다(이사야 2:2~4). 그런데 스가랴에는 찔림을 받는 목자 장으로서의 평화의 왕 메시아, 이사야에는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고난받는 이스라엘의 종으로서의 평화의 왕 메시아, 이렇게 스가랴서와 이사야서의 메시아사상이 상통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53장도 예수님의 수난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스가랴 9장~13장도 예수님의 수난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핵심이 스가랴 9:9절인데, 본문을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라”라고 말씀합니다. 메시아가 평화의 왕으로서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했습니다(전사로서가 아니라). 그러니 세상의 판단에서 그가 왕인 것을 모릅니다. 제자들까지도 모릅니다. 그의 십자가 죽음,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류를 화평케 한 뒤에야 그의 왕 되심, 평화의 왕 되심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19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하니라” 바리새인들은 냉소적으로 말하나 사실입니다. 사실이 될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평화의 왕 되심이 드러날 때 온 세상이 그를 따를 것입니다. 온 세상이 따를 것이라는 바리새인들 역설의 성취가 벌써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평화의 왕으로의 등극은 십자가의 죽음과 장례입니다. 그의 죽음과 장례가 하나님에로의 높임 받음, 그의 왕으로서의 취임, 주로서의 취임 과정입니다. 영광의 사건입니다(16절). 죽음과 장례가 그가 영광 받는, 그가 왕으로서 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 모든 일을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 장례를 통하여 담당하여 주심으로 우리가 진정한 치유와 회복과 평화를 누리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