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음식은 '가야금' 경상도 음식은 '거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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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음식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식의 요체를 알 수 있다. 한식 세계화의 첨병이 될 것으로 보이는 우리의 먹음직스러운 전통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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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로 된 최초의 요리서를 펴낸 정부인 안동 장씨의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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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은 너무 빠르고, 경상도는 너무 느렸고
안동·영주·영양.
경북 북부 세 고을 전통요리가 한묶음이 된다면? 솔직히 호남 음식은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할 겁니다. 알만한 한식 고수들은 내색만 하지 않을 따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호남의 음식 마케팅을 위한 팀워크는 눈이 부실 정도로 탁월합니다. 그에 비하면 경상도는 너무 겸손하고 점잖죠. 나대는 걸 무척 염치없어 합니다. 그틈에 호남은 비빔밥을 세계적 음식으로 발돋움시킬 수 있었습니다. 호남의 발빠름도 눈여겨 둬야 할 시점입니다.
지역 조리사들은 호남 음식에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타지 사람이 "경상도에 먹을 게 없다"고 하면 금세 맞장구를 칩니다. 안목이 없으면 잘 안 보이죠. 날이 선 경상도 음식을 구경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였을 겁니다. 경상도 반가(班家)음식은 조선 궁중요리의 축소판입니다. 반가 사람들, 참 자존심이 세죠. 좀처럼 담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합니다. 반가음식이 식당 메뉴로 팔리는 걸 문중 어른들이 허락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조상에 못할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아직 상당수 경상도 반가음식은 몇몇 한식 연구가에게만 공개되고 아직 베일에 감춰져 있습니다. 언론이 노크해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제 기지개를 켤 때가 왔습니다.
호남은 그 화려한 음식 가짓수만큼이나 식재료가 무궁무진하죠. 그래서 음식도 가야금 선율처럼 알록달록합니다. 하지만 경상도 음식 질감은 호남과 확연히 구분됩니다. 뭐랄까, '거문고 소리' 같습니다. 가짓수도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도 하나하나에 고졸질박한 기품이 담겨있다고나 할까요. 나는 호남 음식은 '초서체' 같고, 경상도 음식은 한석봉체처럼 반듯한 '해서체'같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경상도 전통 음식은 분명 우리 한식사에선 단연 우뚝합니다. 그 흐름 몇 자락을 정리해봅니다.
# 궁중요리 전문가 황혜성이 찾아낸 음식 디미방
1957년 국내 최초 궁중음식 소개서인 '이조궁정요리통고'를 펴낸 궁중요리 전문가 황혜성(2006년 87세로 작고).
그녀가 사라져가는 전통음식의 명맥을 잇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던중 진기한 한글 요리서 한 권을 발견합니다. 바로 조선조 숙종 때 안동에 살던 정부인 안동 장씨 부인(1598∼1680)이 지은 한국 최초 한글 요리백과서인 '음식 디미방(1670년 간행, 현재 원본은 경북대 고문서실에 보존)'이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식경(食經)'으로도 불립니다. 옛날 '임금님이 식사를 하는 장소'즉, '지미방(知味房)'을 소리대로 옮겨 놓은 디미방은 이름 그대로 '음식의 참 맛을 알게 해주는 책'이란 뜻입니다. 황혜성은 10년뒤 펴낸 '한국요리백과사전'에 146가지 요리 중 일부를 실었습니다. 그녀는 책을 만난 인연으로 매년 빠뜨리지 않고 장씨 부인 제삿날 안동으로 달려갔습니다.
장씨 부인의 얼은 현재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두들마을 재령이씨 집성촌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소설가 이문열도 이 가문 사람으로 소설 '선택'의 주인공도 바로 장씨 부인입니다. 장씨 부인은 또 다른 신사임당이었습니다. 낳은 아들 모두 입신양명했고 특히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은 퇴계의 학통을 잇는 영남학파의 거봉으로 후에 산림(山林·대학자급 처사를 조정에서 일컬음) 칭호도 받습니다. 이 집성촌엔 석계고택·석천서당 등 전통 한옥 30여채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석계고택은 조선 인조 때 유학자인 석계 이시명(1599∼1674)이 1640년에 지은 한옥입니다. 이시명의 아내인 안동 장씨가 이곳에서 음식 디미방을 편찬했습니다. 현재 두들마을에는 장씨 유물 전시관이 있으며, 정부인 장씨 예절관에서는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음식 일부를 맛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안동 군자마을의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도 한국 최고급 고요리서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550년전 그 마을에 들어 온 농수 김효로 선생의 둘째 아들 김유가 쓴 '수운잡방(需雲雜方)'입니다. 이 책에선 김치가 '침채(沈菜)'로 적혀있습니다.
# 디미방 브랜드 마케팅
지난 26일 오후 2시 장씨 예절관에선 경북도 주최 '경북 음식의 재발견과 마케팅 방안'이란 주제로 황금희 동강대 교수가 '남도 음식 개발 및 세계화 사례', 신라역사문화음식연구원 차은정 원장이 '영양 지미방의 역사적 의미와 마케팅 방안', 선재 스님은 '사찰음식과 경북 명찰의 연계 관광 방안'이란 주제발표를 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토론자로 참석했습니다. 무엇보다 도 공무원들이 음식 알리기에 고도의 글로벌 마케팅 전략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다는 사실, 바로 이게 지역 한식문화의 청신호를 의미합니다.
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일흔세살 생일을 맞아 풍산류씨 종택이 있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경상도식 반가음식을 생일상으로 받았습니다. 이 느닷없는 이벤트로 인해 하회마을은 전국적 관광지로 급성장했고, 덩달아 경상도 음식이 세계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후속타가 아쉬웠습니다. 경상도 음식에 대한 지속적 홍보전략이 부족했습니다.
아쉬움을 느낀 안동시가 적극 나섰습니다.
2004년 서울 삼성 코엑스에서 열린 제5회 세계 음식박람회에서 디미방에 나오는 요리 16가지를 재현했습니다. 양념을 한 소양을 중탕해 만든 '양숙편'과 멥쌀 가루에 막걸리를 넣어 발효한 뒤 고명을 얹어 찐 여름 떡인 '증편' 등이었습니다. 디미방에는 술과 식초 관련 54종, 국수·떡·과자 등 15종, 고기와 생선요리 등 46종, 채소와 과일 관련 조리법 31종이 섞여 있습니다.
안동에 뒤질세라 영양군이 디미방을 브랜드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요즘 전국 한식 고수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영양 두들마을을 찾아옵니다.
일차적으로 문중 사람들과 지역 주부들이 모여 지난해부터 디미방 요리책 속 음식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국의 삭품영양학과 교수와 한정식 주인 등이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디미방 음식 재현 시식회가 있는 날, 소문을 듣고 한국식생활문화학회(회장 양일선 연세대 식품영양학과 교수) 회원 50여명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날 집돼지 고기구이, 어만두, 연근채, 숭어전, 가지찜, 섭산삼(더덕에 찹쌀가루를 묻혀 튀긴 음식) 등 여섯 가지가 소개됐습니다. 그런데 음식에 붉은 기운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고춧가루가 빠진 탓이죠. 1614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처음 고추가 소개됐지만 당시에는 영양까지 고추가 보급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두들마을 초입 전통한옥체험관은 경북 음식 세계화의 전진기지입니다. 디미방의 조리법에 따라 맛을 재현하고 음식차림을 갖추어 놓았습니다. 디미방 관련 음식을 칠첩반상, 코스요리 등으로 묶어 팝니다. 1인분 3만~5만원선. 재료준비 관계로 미리 예약해야 합니다(054-680-6043·영양군청 관광개발계). 영양군은 '음식 디미방'을 브랜드로 상표등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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