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흥순 吳興順 (1901 ~ 1950)】 "서울 탑골공원 만세시위 참여"
1901년 7월 12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광천면(廣川面) 옹암리(瓮岩里)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8년 서울의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진학하여 수학하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1919년 만세운동이 시작되기 전날인 2월 28일 밤, 한문(漢文)교사 김진호(金鎭浩)의 연락을 받고,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의한 김동혁(金東赫) 등 배재학당 학생들 몇몇과 함께 정동(貞洞)에 위치한 김진호의 자택에서 모였다. 그 자리에서 김진호로부터 밀봉된 봉투를 러시아영사관(露國領事館)에 전달하라는 임무를 받아 3월 1일 오후 2시경 이를 실행하였다. 밀봉된 봉투 안에는 “한국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의 독립선언서가 들어 있었다.
이후 러시아영사관에 해당 독립선언서를 무사히 전달한 후, 즉시 종로(鐘路)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던 시위대와 우미관(優美館) 앞에서 합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 3월 3일 밤 배재학당의 기숙사 뒤편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같은 학교의 학생으로부터 “한국 병합에 반대하여 조선은 독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내용의 「국민회보(國民會報)」 20여 매를 전달받았다. 그 즉시 종로로 가서 탑골공원 동쪽에서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 6~7명에게 「국민회보」를 배포하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배포 후 남은 「국민회보」는 익선동(益善洞)에 거주하는 같은 학교 학생 오영근(吳榮根)에게 전달하였다. 3월 5일에는 낙원동(樂園洞)에서 허신(許信)으로부터 『조선독립신문』 5매를 수령하여 오영근에게 전달하는 등 서울에서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고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고,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일부가 취소되었음에도 동일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상고를 포기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식민지 한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일제가 1920년 4월 28일 시행한 ‘은사령(恩赦令)에’ 따라 조기 출옥하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의 릿쿄대학(立敎大學)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유학 생활 중에도 김시현(金始顯)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의 학생 운동을 주도하면서 지속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