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목을 베라
로마에 ‘네미의 숲’이란 성소가 있다. 숲의 신을 숲의 왕이라 불렸다. 누구든 나무에 붙어 자라는 ‘황금가지’를 꺾은 이는 쇠약해진 사제를 해치우고 사제직, 즉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이 시절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는 방식은 주술이었다. 문자가 발명되고 문명이 시작돼도 주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왕의 목을 베는 관습은 ‘희생양 제의’의 요소가 있다. 지금도 ‘코르나’가 발병하자 원인이 아니라 범인부터 찾는다. 범인은 대통령이다. 중국을 봉쇄하지 않은 탓이란다. 해법은 왕의 목을 치는 것이다. 대통령 탄핵이 동의하자 곧 10만을 넘어 상임위에 회부되었다. 문제는 이 주술적 사유가 과학적 해결을 방해한다는 데 있다. 정치적 주술은 방역을 방해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거의 표를 늘리는 정치적 주술이 아니다.
희생양을 ‘파르마로 코스(pharmakos)라 불렸다. 중세의 파르마로 코스는 여성이었고, 나치 시절은 유대인, 관동대지진엔 ’조센징‘이다. 희생양 제의에는 대게 희생자에게 죄를 전가하는 이야기가 따른다. 코르나 보안법의 문제는 사태의 이성적 해결을 추구해야 할 정치권이 대중의 감정에 편승했다는 것이다. 정세균 총리가 ’그 판사가 잘못된 집회 허가를 했다‘라 하니, 국회는 그 판사의 이름을 따서 ’박형순 금지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법무부는 시위를 금지하겠다고 했으니 저자는 다들 미쳤다고 주장했다.
진보에 도덕성은 생명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노회찬 의원이 거기에 흠집이 났을 때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현재의 민주당은 도덕성을 승리에 방해가 되는 ‘걸림돌’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민주당은 진보적 가치를 실현하는 싸움을 ‘소모적 논쟁’이라 부른다. 그래서 ‘촛불 세력 대 토착 왜구’라는 프레임으로 사회를 갈라치는 일이나 하는 것이다. 요즘은 검찰 음모론을 퍼뜨리느라 분주하다. 사극 프레임까지 동원해서 조국이 조광조이고 윤석열이 윤임이란다. 5공 프레임도 동원한다. 청와대의 감찰 무마와 선거 개입에 대한 수사가 ‘검찰의 쿠데타’라는 것이다. 검찰의 반란을 일으킨 검사 열네 명의 이름이 공개되고 그들에게 ‘검찰 하나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검찰 쿠데타라는 프레임은 ‘검찰이 대통령의 인사권에 개입하려고 조국 일가를 내사’했다는 유시민 씨의 주장에서 출발했다. 이 미친 프레임으로는 중도층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요즘 민주당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바로 고발한다. 대안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쪽을 찍을 것이냐? 세상을 진영논리로 갈라 친구의 잘못은 덮고 상대는 절대 악으로 만든다. 이유는 민주당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란다. 젊은 386이 자기 철학이 없이 주류가 된, 586이 되어 대통령을 옹립하고 관리하여 나라를 쥐고 흔든다. 이들 586은 학창 시절 ‘국가주의’교육을 받고 독재정권에 맞서 민족주의의 색채의 다른 전체주의 이념으로 무장했다.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를 통해 이견을 해소하는 정치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념이 없단다. 586은 여전히 ‘적폐 청산’ 세력과 ‘토착 왜구’를 때려잡는 민족해방전쟁의 연속이다. 전쟁터에서 유일한 정의는 승리뿐, 승리를 위해 적에게 이로운 적폐는 은폐되고 아군의 범죄는 용서되고 비판자는 ‘내부총질’로 군법회의에 회부될 뿐이란다.
히틀러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그는 의회를 장악하고 다수의 힘으로 민주주의부터 파괴하기 시작했다. 야당은 해산되고 노조는 금지되었다. 민주주의가 민주적으로 자살을 해버린 것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補足的 관계로 본다. 즉 다수결의 원칙이 다수의 폭력으로 흐르지 않도록 그것을 자유주의로 수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민정수석이 SNS에 죽창가를 올리고 ‘한일전’이 총선 슬로건으로 내걸린다. ‘토착 왜구’가 존재하지 않으니 친일파 국립묘지 파묘법안 발의는 무덤에서 죽은 친일파라도 꺼내 보여줘야 했던 것이리라. 당은 군대 조직과 같아, 당과 다른 의견을 냈다고 징계를 받고 당 대표는 의원에 함구령을 내린다. 의원들은 176대의 거수기, 다수결 무기로 전락했다.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하고 검찰과 법원, 자기들이 세운 검찰총장을 ‘공수처 수사 대상 1호’로 꼽는다. 이수진 의원은 법정에서 제게 불리한 증언을 한 판사를 ‘법관탄핵 1순위’로 꼽았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 최강욱 의원의 말에는 승자의 오만이 철철 묻어났다.
소련의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 반혁명이 된다. 권력을 잡은 혁명은 그 권력으로부터 먼저 혁명가들부터 제거하기 때문이다. 1939년의 예를 보자
“이제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하였기에, 당신이 지금 지도되었다는 것을! 고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음모론 교주는 이용수 할머니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고 우겼다. ‘물에 빠진 할머니를 구했더니 보따리(의원직)를 내놓으라 한다. ‘ 보따리는 원래 할머니 것이 아닌 운동가의 것이니 그것이 혁명의 일반적인 법칙이다. 혁명은 인민을 위한 것이나, 후에는 인민이 혁명을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국민을 지키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지켜줘야 할 대통령‘이다.
무능하나 순결했던 진보는 어느새 유능하나 부패한 보수로 변신했다. 이는 ‘예외’가 아니라 새로운 ‘정상’이다. 정권은 바뀌어도 권력은 바뀌지 않는다. 상상인은 그전에 부산저축은행이었고, 환경부 블랙리스트는 그전엔 문화부 블랙리스트였다, 추미애의 아들은 그전에 황교안의 아들이었고, 방송에서 하차당한 양희은과 박미선은 그전에 김미화와 김제동이었다. 얼마 전에 봤던 장면마저 순환의 고리를 돌아 기어코 회귀하고야 말 것인가? 저자는 주장한다.
민주화 세대가 조국을 두둔한 것은 그것이 한 ‘개인’이 아니라 한 ‘세대’의 특징임을 시사한다. 그들은 진보가 아니라 실은 보수다. 산업화 추억에 갇힌 미련한 보수를 제치고 정보화 흐름에 적응한 노련한 보수가 등장한 것이다. 최근의 비리와 성추행 사건은 주로 이들이 일으키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비리를 덮고 기득권을 지키는 데 정계와 관계, 방송과 신문, 시민단체와 지식인층을 망라하는 거대한 커넥션을 구축했단다. 최근 20대의 정치적 성향이 노년층과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아버지 세대를 불신한다고 할아버지 세대를 신뢰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무당층으로 남아 부유하고 있을 뿐이다. 대안이 없을 때 남는 것은 냉소적 태도뿐, 이들은 결과의 불평등은 용인해도 최소한의 과정의 공정성은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진보가 가능하다면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저자는 주장한다.
황석영은 1,276명의 문인의 서명을 모아 ‘조국 지지’ 성명서를 주도했다. 이게 요즘 지식인들의 앙가주망이다. 보편적 가치 위에서 민중을 위해 발언하던 지식인은 사라졌다. 이 혹한기에 살아남은 비결이 있다. 즉 이마에 ‘어용’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것이다. 오는 날 어용이 아닌 지식인은 거의 멸종됐다. 사회학에서는 지식인을 어느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浮游 層으로 분류하곤 한다. 그들은 자기 계급만의 지식인인, 유기적 지식인으로 분류한다. 절대적 진리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제작’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지식인으로 사회적 발언을 해봐야 잔소리나 하는 ‘씹선비’, 사회를 제작하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는 ‘입만 산 진보주의자’로 여길 뿐이다.
박원순의 죽음은 진보 전체의 죽음이라 저자는 주장한다. 권인숙 성고문 변론으로 사회에 이름을 알린 박원순은 우교조의 무료 변론으로 ‘성희롱’이 사회에 심각한 범죄로 등록된다. 우근민 제주지사 성추행 사건의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던 그는 서울시장이 된 후 “성평등 선거캠프“도 꾸렸다. 최장수 서울시장으로 살면서 남긴 것은 빚 밖에 없이 청렴한, 그는 헌신성의 상징이자 진보 순수성의 증명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진보 전체의 죽음으로 느껴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그가 하필 성추행 혐의로 고소를 당했다. 공 든 삶이 일시에 무너진 것이다. 그의 한계가 그의 개인적 한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위선은 우리 세대의 위선이고, 그의 어리석음은 우리 세대의 어리석음이다. 그러나 진보는 반성하지 않고 그에게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50만 명이 넘는 국민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을 느낀다고. 저자 진중권 씨는 주장한다.
2020.12.27.
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2
진중권 지음
천년의 상상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