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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송주의 좋은 글 나누기> 금불초
-문단야사-
문단 뒷이야기
- 광주지역 소설문단을 중심으로 -
이 광 남
만인이 만인을 적대하고, 말로써 말이 많은 시대에 ‘문단야사’를 쓰기가 불편하다. 그러나 사라져가는 사연들이라 어떤 형태로든 기록되어야 한다는 문협 편집진의 기획은 자못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실상 나는 이 야사기록의 적임자가 아니다. 문단에 머물렀던 시간보다 절필 후 문단을 떠났던 기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이 아닌 다른 장르의 뒷마당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말할 처지도 아니다. 다만 각 장르별로 야사를 일단 기록하고 다음에 종합하여 정리 할 것을 이 기회에 편집진에 제의하고 싶다.
야사의 기록이 의미 있는 일이라면, 이 기획은 퍽 늦었다는 느낌이 든다. 한 노인의 죽음은 도서관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빈손 들고 나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지만 그렇지 않다. 떠나는 노인은 빈손으로 가지 않고 그가 평생 모았던 모든 기억과 경험과 지혜의 보따리를 몽땅 가지고 가버린다. 기록해야 할 까닭이 거기에 있다.
문단 뒷마당을 들여다보니 마당발이었던 주동후 형이 먼저 보인다. 문단의 정사와 야사가 든 큰 보따리를 꾸렸던 그가 타계하였으므로 이제 그 보따리를 가진 이는 원로 소설가 이명한 선생이나 초창기 문협의 총무를 오래 했던 김신운 교수가 아닐까 한다.
뒷마당은 그늘지고 은밀한 곳이다. 그곳을 말하기 불편한 것은 자칫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고 경우에 따라서는 감추고 싶은 기억을 들춰낼 수 있어서다.
소설에서는 영웅이 있으려면 악당도 있어야 한다. 영웅을 탄생시키는 것은 악당이다. 모범생보다 악동들의 애기가 더 재미있다. 이야기의 재미는 성취보다 실패 속에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실패야 말로 인간적이고 문학은 실패한 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사(正史)는 승리자의 위사(僞史)요, 야사는 패배자의 정사’라는 말이 있다. 윤색된 정사보다 실패하고 숨어있는 야사에서 우리는 더 많은 진실과 부딪친다. 사연은 그 사람의 모습이고 사람은 떠나도 그 사연은 남는다,
조심스러운 사연을 쓰기 전에 이쯤에서 나를 밝혀야 할 듯싶다. 악역을 맡고서 숨어있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문단에 등록된 내 이름은 이지흔이란 필명이었다. 나는 이름에 관해 각별한 느낌을 지니고 있다. 이름은 사물은 규정한다. 풀에 불과한 난초에 ‘란’이라는 이름이 붙음으로써 향기를 얻게 되었고 대신 화분에 옮겨지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한때 필명을 사용했던 나 역시 예명, 필명, 익명, 아호. 자 등에 이르면 혼란스럽다. 1900년대 초의 문학사를 보면 태반이 필명과 아호여서 본명을 알 수 없는 필자가 많았는데, 내가 머물렀던 광주문단에도 필명을 쓰는 이들이 있었다. 시인 강인한은 본명이 동길이었고, 소설의 윤채환은 김윤숙, 송은일은 영란, 강우후는 순식, 광주 문단에 잠시 머물렀던 심상대는 나중에 ‘심 가르스시아스’ 였다. 소설가 김신운도 본명과 발음이 같은 다른 한자였던 것으로 안다.
모두 나름의 합당한 까닭이 있었을 것인데 내가 필명을 사용한데는 어줍잖은 사연이 있었다.
내 호적엔 출생지가 일본 나고야로 되어있다. 이름은 미야무라 미쓰오(宮村光男)였다. 하다못해 ‘가위 바위 보’를 해도 꼭 이겨야 할 상대가 일본이라서 일본 이름이 싫었고, 흔해서 더 싫었던 이름 대신 필명을 사용했다.
필명을 사용한 덕택에 숨어있을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불편했다. 그중에 하나로 1970년대에는 원고료를 ‘우편환’으로 보내오는 경우가 있었다. 주민등록상의 이름이 아니어서 본인임을 증명하기 난감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원고료를 보내왔다는 점에서 감지덕지 할 때였다. 웬만큼 알려진 잡지나 신문에서도 청탁한 원고료를 주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점잖은 표현이고, 막말로 하자면 주로 ‘떼먹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발표지면을 주었다는 것만으로 태연했는데, 지금도 그런 잡지와 신문이 일부 있는 것으로 안다. 농협이나 은행, 기타 기업체의 사보는 ‘소정의 원고료’를 주었는데 오히려 작품이 피땀에 의해 생산됨을 잘 아는 문필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원고료를 떼먹었다. 문인들도 피땀으로 만들어진 자신의 원고를 스스로 천대하는 일만은 없어야 한다. 그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문인들이 자존심에 관한 일이다. 물론 기꺼이 쓰는 ‘기고’가 없지 않지만 청탁원고는 그것이 아니잖은가.
변화를 원한다면 기록하고 증언해야 한다. 문인들에게 작품은 그들의 정신이다, 작가가 지면에 급급한 나머지 그 정신을 공짜로 던진다면 독자는 그것을 쓰레기로 취급한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내가 문협이라는 곳을 처음 구경한 것은 1972년이었다. 그 시절 광주문협 회원은 50여명이 채 못 되었던 것 같다. 문협의 명칭도 전남문협이었고, 73년에야 연간집인 ‘전남문협’ 창간호가 나왔다. 회장은 문화방송 사장을 하시던 허연 선생이셨다. 회원에 정소파, 범대순, 문도채, 박홍원, 이명한, 한승원 선생 등 이름만으로도 쟁쟁했던 분들이었다. 겨우 지방신문 신춘을 통과한 햇병아리인 나는 구석지에 않아서 죄진 것도 없이 눈치만 보았다. 공연히 주눅만 들고 불편해서 문협의 출입을 삼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문협에 대한 내 생각은 단순하다. 글 쓰는 일은 골방에 앉아 볼펜 한 자루와 원고지만 있으면 그만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문협이란 글 쓰는 이들의 침목단체일 뿐이었다.
희곡에 당선했지만 당선작을 무대에 올려준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 일로 희곡문단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서 이번엔 소설과 시를 쓰면서 다시 신춘을 준비했다. 76년에 같은 신문에 소설이 당선되었지만 발표지면을 얻기는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내가 광주문단에 출생신고를 한 것은 1978년, 조선일보 신춘에 당선한 해였다. 신춘에 당선되었다며 나 혼자 우쭐거렸지만 그 성취감은 곧 사라졌다.
실상 한국에만 있다는 ‘신춘문예’란 등단제도의 의미는 오래전에 퇴색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발표지면이 열악하던 시절엔 문인을 발굴하고 지면을 할애한 점은 인정하나, 그 후론 정초에 작품을 화려하게 선보인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실익이 없기 때문이다, 신문사 쪽에서도 그것은 해마다 되풀이 하는 행사에 불과하다, 신춘은 걸음마를 막 시작한 신출내기를 번화가로 데리고 나와 손을 놓아버린다. 혼자 가라는 것이다. 그때부터 미아가 되어버린 당선자가 없지 않다. 어차피 글 쓰는 작업은 혼자 가는 길이다. 각 장르별로 하나만 뽑는 신춘은 더 좋은 작품이 응모되지 않았다는 조건에서 당선작이 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더 좋은 작품이 있을 땐 낙선작이 되고 만다. 그 낙선작들이 좀 억울하다는 점에서 ‘낙선작품집’을 내는 출판사가 있었다.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작가라는 명찰을 처음 달아준 신문에 신작소설의 연재를 타진했더니 회신조차 없었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가 선수들과 함께 뛰겠다고 했으니 신문사에서도 웃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의 중심은 서울이었다. 서울의 신춘에 당선되자 벽지학교 교사였던 나에게 전보가 날아왔다. 소설연재를 거절했던 신문사였다.
-당사에 와서 상의 바람
그게 전부였다. 정말 맛탱이 없는 전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까이 있는 작가나 작품을 보는 시선은 소홀하다, 서울에서 인정을 받아야 지방에서도 고개를 끄덕여준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작가와 소설은 외국에서 상을 받아야 국내의 독자들이 박수도 치고 기억해준다.
대체로 독자들은 작품보다 상품을 먼저 집어 드는 성향이 있다. 출판사는 작품에 광고라는 분칠을 하여 상품으로 만든다, 비평가의 꿈보다 더 좋은 해몽을 달고 북치고 나발을 불어 만들어지는 것이 베스트셀러다. 베스트셀러란 잘 팔리는 상품이란 뜻이다. 출판사는 대개 상품의 조건을 가진 작품을 선정한다. 한때 일부 출판사에서는 30대 여성작가를 주목했다. 독자층이 주로 30대 여성이 많은 까닭이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 사재기를 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자, 소설이 잘 팔리지 않는 작가들도 기운들 내시라. 당신은 상품이 아니라 작품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문화부에 나와 이름이 같은 ‘김광남’ 기자가 있었는데 그는 모든 것의 중심이 서울이라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망아지는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는데 나도 기자 그만두고 서울로 가야겠어요.
후에 서울로 간 그가 방송극을 쓴다는 말을 들었는데, ‘전원일기’를 쓰는 ‘김남’ 씨를 그 분으로 알고 있다.
반대로 서울에서 내려와 전남대 교수였던 소설가 박양호는 ‘지방대학 교수’라는 소설을 썼다. 제목이 왜 그런지는 내용을 안 봐도 대강 짐작 할 수 있었다. 낚시터에서 입질이 뜸할 때 그는 말했다.
-지성인의 집단이라는 교수사회에서도 지방대학을 차별하니 원……아, 붕어도 안 잡히고 승질(성질)나네 참……
서울의 신춘에 당선한 며칠 후 한승원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광주에 ‘소설문학회’ 라는 동인회가 있으니 참석하라는 권유였다. 신춘에 당선한 것보다 그 소식이 더 반가웠다. 소설문학 동인회에 나갔더니 이명한. 주동후. 김재복. 김신운 정청일. 강순식 씨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참가한 동인지 ‘소설문학 3집’은 79년에 나왔다. 그 무렵에 한승원. 이계홍. 강순식 씨는 서울로 올라갔다.
모임이 끝난 후 술자리나 식당에서는 주로 주동후, 김재복 형들이 심부름을 도맡아서 ‘동순이’ ‘재순이’로 불렸다. 나중엔 그들도 서로를 그렇게 불렀는데 주동후 형은 문화방송 편성국장으로, 김재복 형은 아들을 서울의 소설가로 키운 후 광덕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70년대는 등단한 사람들이 특히 많았다. 78년 무렵에 전남문학상이 제정되었는데 재정은 사업가 현영국씨의 도움을 받아 소설가 승지행 씨가 1회 수상자가 되었다. 소문에 승지행 선생은 손이 떨려 글씨를 쓸 때 모든 글자의 획을 자를 대고 쓴다는데 그 속도가 놀랍고 글씨도 인쇄한 것처럼 매우 반듯했다고 한다.
1987년에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되자 전남문인협회는 해체되어 전남문협과 광주문협으로 갈라졌다. 각각 회원도 수백 명에 이르렀다. 문협의 주축은 수가 많은 시와 수필이었다. 희곡은 찬밥 신세였다.
나는 소설을 쓰는 동안 불행했다. 원래 불행해서 글을 쓰게 되었는지, 아니면 글을 쓰다 보니 그리 되었는지 애매했지만 내가 걸어온 80여년을 돌아보면 소설 탓에 더 불행하게 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나는 은사 서정주 시인의 ‘국화옆에서’를 지금도 가끔 읊조리는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전율이 느껴진다. 그 누님처럼 거울을 들여다보면, 소설을 쓰는 동안 끝없는 불면과 술과 담배와 스트레스에 무릎을 끓어버린 내 모습이 보인다.
가장 극심했던 스트레스는 무얼 모르고 시작한 신문연재소설이었다. 신춘을 갓 통과한 뜨내기가 전남일보와 대전일보에 동시 에 장편을 연재했는데 일주일분씩 소설을 써서 보냈다. 연재소설을 쓰기로 결정하는 자리에서 당시 편집국장이시던 최승호 선생께서 내게 당부했다.
-연재가 처음이니 참고로 들어두게. 특히 주의할 것은 체제와 종교와 문중의 이야기는 삼가게. 문제가 터지면 골치 아프거든. 허허.
활자를 일일이 문선하여 인쇄하던 때였지만 일주일에 한번이든가 문화면이 컬러판으로 나왔다. 공정을 알고 보니 색분해를 한다면서 일주일 전부터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일주일 후의 스토리를 먼저 써서 보내고 나머지 이야기를 적당히 맞추고 꿰매는 식으로 글쓰기에 쫓겼다. 원고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전화통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윤전기가 멈춰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원고마감을 앞두고 걸려오는 전화가 저승사자처럼 무서웠다, 전화코드를 아예 뽑아버리고 앉아도 글은 써지지 않았다. 어쩔 땐 담당기자가 집에서 가까운 다방에 와서 기다렸다. 다급해서 원고를 가지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글은 더 써지지 않았다. 피가 마른다더니 전신의 물기까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밤새워 집 앞 포장마차에 앉아 줄거리를 쥐어짜고 하루에 담배를 두 갑도 더 피웠다. 원고를 쓰다가 담배를 물려면 이미 담배가 물려있곤 했다. 그때 어찌나 혼이 났던지 신문연재라면 이가 갈렸고, 마감이 정해진 청탁원고는 지금도 되도록 사양하는 편이다.
당시에는 신문연재소설을 연속극 보듯 하는 독자들이 많아서 신문사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썼다. 내 독자들도 불평이 많은 모양이었다. 연속극처럼 아슬아슬한 대목에서 잘라 내일 신문을 기다리도록 해야 하는데 그런 맛이 없다는 둥, 옷을 너무 벗기지 않아 재미가 없다는 소리도 들렸다.
시작한지 몇 개월 후에 신문사에 문제가 터졌다. 편집국이 어수선했다. 대부분 신문들은 역사소설과 현대소설을 문화면 양쪽에 실었는데 재미있던 역사소설 쪽에서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소설에 등장한 스님이 여신도들의 옷을 너무 자주 벗겨서 스님들과 신도들이 들고 일어난 모양이었다. 웬 스님들이 문화부기자들과 심각한 애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학생을 타이르는 스승처럼 편집국장이 내게 말했다.
-자네도 잘 봐둬. 좋은 공부가 될 거네. 남의 실수에서 배우는 게 산교육이거든. 허허.
그때 쌓이고 또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술과 담배와 커피뿐이었다. 실제로 그것들을 마시고 피우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러나 의사는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라 되풀이 했다.
-당장 담배를 끊으시오.
내게는 항상 준비된 대답이 있었다.
-담배를 대신할 것이 담배밖에 없습니다.
원고를 대하는 내 생각은 단순했다. ‘글을 쓰려면 외로워야 하고 외로워야 정신이 맑다’ 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글을 써야할 자세일 뿐이었다. ‘외로워야 정신이 맑다’는 좌우명을 정성껏 써서 벽에 붙여두었지만 그 외로움을 견디기는 정말 어려웠다.
문단에 나가 사귄 문인들은 주로 술꾼과 골초들이었다. 원래 술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음식이었고, 담배는 인간의 영혼을 치료하는 주술의 연기였다.
글을 쓰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몸부림을 치는 문인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문화방송 주동후 형과 광주일보 한송주, 그리고 산속에서 소를 기르던 김유택을 자주 만났다. 서로 사는 물이 달라서 한꺼번에 모인적은 드물었지만 광주라는 좁은 방죽에 사는 붕어가 어디 한곳에만 머물렀을 것인가. 그때 광주는 금남로 1번지 전일빌딩과 7층 건물로 서있던 카톨릭센터, 그 사이에 동구청이 있었는데 그 주변이 있던 서너 곳의 다방에 들리면 아는 얼굴을 거의 다 만날 수 있는 작은 동네였다. 거기서 못 만나면 동구청 뒷골목에 주근깨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술집을 기웃거리면 틀림없이 만날 수 있었다.
마당발인 주동후 형은 술 마시자는 사람이 줄을 설 지경이었지만 술값이 푸지고 담배는 밥 먹으면서도 물 정도였다. 그와 함께 금남로를 걷자면 인내심이 필요했다. 조금 가다가 아는 이를 만나 얘기하고, 또 조금 가다가 누구와 악수하며 시간을 지체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소설문학회’였는데 첫 만남이 엊그제처럼 선명하다. 회원들이 어느 식당을 찾아가느라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버스 안에서 폭소가 터졌다. 좌석에 얌전히 앉아있던 그가 갑자기 통로에 나와 뱀장사를 시작한 것이었다.
-배암이 있어요, 뱀들 사씨요. 구랭이, 살모사, 늘맥이, 무자치가 있어요. 양기 부족헌 서방님, 허리 아픈 아짐씨, 삭신이 쑤실 때 보약 중에 보약 뱀들 사씨요……
술을 마시지 않고도 그는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 자주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레퍼토리도 다양했다. 엿장수, 굴뚝 청소부, 두부장수, 심심풀이 땅콩장수……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다가 통금시간에 행인을 단속하는 경찰을 피하려 어두운 골목길을 지날 때 그는 갑자기 외쳤다. 찹쌀떠억!
실제로 잠옷차림의 남자들이 대문을 열고 나오는 일이 가끔 벌어졌다. 그가 있는 곳에서는 늘 웃음이 넘쳤다, 주동후란 이름보다 주로 ‘술동우’로 불렸다. 술을 빼놓고 그를 말하기 어려운 데다, 어줍잖게 ‘술꾼’이라는 흔한 수식어를 그의 이름 앞에 붙이자니 하고많은 다른 술꾼들과 차별성이 없어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특유의 화술로 주변을 그처럼 즐겁게 하는 사람을 형이 아니고는 아직 본 적이 없다. 그것은 그가 취해 있거나 깨어 있거나 부지불식간에 나오는 언변이요 익살스러운 몸짓이어서 때로는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일신하여 활력을 주기에 충분했다.
형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그의 끈끈한 친화력이다. 체면치레와 격식을 싫어하는 소탈한 풍모를 지녔던 그는 자석처럼 사람을 가리지 않고 끌어당겼다. 그래서 그는 흔한 말로 ‘발이 넓은 사람’이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가 애주가였던 때문에 그가 있는 술좌석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문학을 얘기하고 인생을 논하는 등 담론을 즐겼다.
그는 원래 광양 출신으로 법학을 전공했다. 방송국 피디였고 소설가이자 시인이었고 수필도 썼다. 현재의 광주전남 소설가협회의 모태는 그가 한승원, 김신운 등과 함께 시작했던 ‘소설문학’이었다. 현대소설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이 고장에 소설의 씨앗을 뿌린 까닭에 소설문학회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는 광주전남 현대문학사의 산 증인이었다. 특히 문단의 야사를 그토록 많이 간직하고 있던 그가 여기저기 발표했던 얘기들을 한데 모으지 못하고 떠난 게 애석하다.
그는 문학을 사랑하고, 생활을 사랑하고, 고향인 광양을 사랑했던 사람이다. 날마다 술만 마시는 것 같아도 그는 글을 썼고, 아무리 과음을 해도 출근시간은 남보다 빨랐다고 한다.
술동우 형은 자신의 고향 광양이라면 꺼벅 죽는 사람이었다. 고향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다. 자연히 그를 따라 나도 동화를 쓰던 광양의 정채봉 씨를 알게 되어 한때 광양 출입이 빈번했다.
술과 담배에 탐닉했던 그는 결국 식도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서울대 병원으로 문병을 갔더니 목에 구멍을 뚫어 그곳으로 음식을 넘기는 형편이었다. 침대에 앉아있던 그가 나를 보고 반색했다. 화장실에 가자고 해서 휠체어를 밀었더니 부인이 없는 복도로 나오자 그가 말했다.
-어이, 담배 있지?
-으마? 형, 이번 기회에 담배 끊어. 연기가 그 목에 뚫린 구멍으로 나올 거 아니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담배나 내놔.
-나도 아산병원에서 담배 끊었는데?
-그럼 빨리 나가서 사와.
그의 음성이 너무 절실했고, 담배를 대신 할 것은 담배밖에 없다는 골초의 심정을 잘 아는지라 나는 담배를 사러 나갔다. 서둘러 돌아왔더니 그는 부인에게 붙들려있었다. 부인 몰래 화장실 안에서 슬쩍 담배를 전달했는데 그가 어떻게 그 답배를 피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퇴원한 후에도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나도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부인과 함께 병원에 다니던 그는 갑자기 감기증세로 병원을 한번 빼먹는 사이에 폐렴으로 안타깝게 타계했다. 무엇이 그리도 바빠서 새벽길을 재촉해 황망히 떠난 것일까.
준수하게 생긴 한송주는 광주의 소문난 술꾼이었지만 담배는 피지 않았다. 김유택과 나와 주동후 형이 차례로 알콜과 암으로 쓰러졌을 때도 한송주는 건강한 듯 보였다. 아마 쓰러진 우리들과 달리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으로 안다.
사료(史料)가치가 높은 ‘그리운 사람은 남행을 꿈꾼다’ ‘노래와 함께 역사와 함께’를 내놓은 그는 굳이 등단하지 않고 25년 동안 한 신문사에 머물며 향기 높은 글을 썼다. 주로 문화부 가자로 일하면서 장기연재물을 많이 썼는데 명산대찰을 순례한 ‘천년가람’ 호남유학의 본류를 찾아낸 ‘호남학’ 농민운동사를 정리한 ‘발굴, 전남농민운동사’ 남도문화를 다룬 ‘남도 재발견’등을 썼다.
광주일보 자매지였던 ‘월간 예향’은 가끔 광주 소설가들의 단편을 실었다. 그 공로자가 거기 기자였던 임동확 시인과 한송주로 안다. 나도 예향의 단골필진이 되어 ‘법정 뒷마당’ ‘삶터’ 등의 잡문을 장기 연재했다.
항상 현장을 쏘다녀서 ‘삿갓기자’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노년에도 ‘전라도 닷컴’이라는 잡지사에서 대기자로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눈이 내릴 때 노숙자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가끔 벗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는 쓰러진 후 다시 일어서기 위해 담양의 금성산 골짜기에서 10여년을 홀로 살았는데 한송주는 내가 지어놓은 정자를 좋아해서 자주 찾아왔다. 언젠가 예향에 연재했던 글을 엮었다며 그 남행을 꿈꾼다는 저서를 수줍은 듯 내밀었는데 그 속에 그가 쓴 시조 29편이 메모지에 적혀 있었다. 그가 왜 그 메모지를 책속에 넣어주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나도 그 시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 좋은 작품들을 발표하지 않았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동구청 뒷골목에 그와 나의 아지트나 다름없던 허름한 술집이 있었다. 간판도 없어 그냥 ‘실비집’라 부르던 그 술집을 읊은 시가 기억에 남아 여기 소개한다. 제목은 ‘실비집 아짐’이다.
술 덜 깨 해장 한잔을 청했더니
발치에 찬물 한 바가지 쫙 찌끈다.
정수리를 후려때리는 보살님 죽비사랑
실비집 아짐씨는 욕도 잘했지만 손맛이 그만이었는데 줄창 드나드는 우리들에게 ‘술 조까 작작 퍼마시랑께!’ 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실제로 찬물을 끼얹은 때가 종종 있었다. 한번은 내가 제자의 주례를 서려 가는 길에 한송주를 잠간 만나려 실비집에 들어서는 순간 물벼락을 맞았다. 시간이 없어 비 맞은 생쥐 꼴로 주례석에 올랐다. 아아, 언제나 누님 같았던 그 아짐씨는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한송주가 얼마나 술을 사랑했으며 술에 대한 호사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진도 홍주를 소개하는 그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붉은 빛의 홍주와 흰빛의 막걸리를 홍염과 백설로 마실 때, 그는 주선(酒仙)이었다.
-홍주를 접시에 부어 거기에 불을 밝힌다. 인공의 전기 불일랑 죄 거두고 독한 홍주가 타면서 이루어 내는 선경을 맞으면 취흥이 절로 인다, 그 다음에는 잔속의 홍주 위에다 물 좋은 진도의 순한 탁배기를 살짝 얹는다. 탁주는 홍주와 섞이지 못하고 홍주의 살결 위에 떠있게 되는데 그 어울림이 가히 동백과 백학 같아서 또한 풍치가 예사 아니다. 이제 잔을 들어 쭉 들이키면 된다. 그럴작시면 아아, 홍주는 혀끝을 휘감고 탁주는 입술을 적셔 홍염과 백설에 휩싸여 그대는 곧바로 날개를 달고 하늘로 오른다.
철학을 전공한 김유택은 일찌감치 고서에 있는 자신의 넓은 농장에서 목부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담배도 골초였고, 독특한 스타일의 술꾼이었다. 그는 혹독한 겨울에 난방 대신 술을 택했다. 몸을 덥히기 위해서 한 되들이 소주병을 밤새워 들이켜며 아침을 맞았다. 그에게는 술이 아니라 난방용 연료였던 셈이다. 동서문학상을 받은 그의 소설집 ‘어메이징 그라스(그레이스가 아님)’에는 그런 쓸쓸한 목부생활이 생생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의 문체는 특히 독특했는데 그를 문단에 내보낸 박완서 선생은 그를 각별히 아꼈다. 문학 강연 차 광주에 내려온 선생이 사석에서 내게 물었다.
-광주에 오면서 김유택 씨를 생각했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는가요?
그때 김유택은 알콜 탓으로 요한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대답할 말이 없어 내가 미적이는데 선생이 다시 말했다.
-요즘 발표하는 작품이 없어서 궁금한데……작품에 술 냄새가 나던데 건강이 어쩐지……
나는 둘러댈 말이 없어서 어물쩍 대답했다.
-원래 글 쓰는 사람들이 조용할 땐 작품에 몰두하고 있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한동안 선생은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무거워 나는 화제를 돌렸다. 실은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선생님은 원고청탁을 대비해 미리 작품을 써 두십니까?
선생이 특유의 그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아니예요. 원고 청탁을 받고 나서 마감이 임박해서야 바빠지던 걸요. 어서 써야지 하면서도 안 써져요. 마감이 다가올수록 초조하지만, 공연히 옷 정리를 하거나 부엌일을 하면서 미루거든요. 쓴다는 게 너무 힘들어서 피하고 싶은 거죠.
-선생님도 그러신다니 뜻밖입니다,
선생은 웃고 나서 다시 말했다.
-그러지만 그 과정이 중요한 듯싶어요. 다른 일을 하면서 피하는 동안 작품도 싹이 터서 성장하거든요. 그 과정이 없다면 마감에 임박해서 갑자기 수확이 되겠어요?
나는 두고두고 그 때 선생의 그 말씀으로 나를 위로했다.
-그래, 이렇게 술만 먹고 허송해도 내 소설은 자라고 있을 것이다,
나와 김유택, 한송주는 모두 알콜 치료를 받았다.
얼마 전 한송주가 나주에서 치료를 받으며 문자를 보내왔다. 금년에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품을 구해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가 다 빠져 발음이 정확치 않았고, 나는 청력이 시원치 않았다. 그 무렵에 나는 그의 부인과 통화했다.
-송주가 그렇게 된 것은 저에게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함께 줄창 마셨으니까요.
이백의 장진주(將進酒)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술고래들만 그 이름이 남아있네
술고래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한송주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없었지만, 고생하는 부인에게는 진실로 죽을죄를 지은 심정이었다.
김유택과 나는 사이좋게 같은 의사의 진료를 받았다. 그는 술을 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거듭했다. 단주클럽(AA)에 다니면서 마시는 것이라곤 커피조차 사양하고 맹물만 마셨다.
나는 술과 담배 탓으로 암에 걸려 방광을 떼어내고 소장으로 오줌통을 만들어 뱃속에 집어넣었다. 조물주가 만든 방광이 아니어서 기능이 신통치 않아 한동안 나는 가저귀를 차고 살았다. 그런 처지에 나는 한송주에게 말했다.
-우리는 취해서 살았으니 이제 깨어서 죽세.
-허허, 동끼호테였어라잉……그럽시다.
한송주도 동의했다. 함께 취해서 우리는 돈 키호테 씨를 자주 말했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속 인물인 돈 키호테의 묘비를 세웠다는데 그 비문이 우리에게는 자못 비장했다.
-라만챠의 기사 돈 키호테. 취해서 살다가 깨어서 죽다.
주동후 형과의 만남은 낚시터로 이어졌다. 광주바닥 낚시의 대부로 알려진 수필가 김수봉 형을 중심으로 희곡의 한옥근, 쓰레게 통에 버린 원고가 우연히 이어령 선생에게 발견되어 등단한 시인 송수권, 소설의 이삼교, 주동후, 김신운, 박양호 씨 등 내로라 하는 꾼들이 주로 어울렸다.
‘김수봉의 수필’을 좋아하던 참에 ‘물가에 놀러가자’는 그 형의 꾐에 빠져 나도 그 그룹에 끼어들었다. 낚시는 머리털 나곤 처음이라서 낚시선배들이 미끼를 끼는 법부터 나를 가르쳤다. 빗속에서도 낚시질을 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곧 그 지경이 되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악천후도 상관이 없는 무지막지한 꾼이 되어 불자들이 방생한 고기를 잡으러 간 적도 있었다.
고기가 좀 잡히면 그 방죽은 ‘물 반 고기 반’이고, 놓친 고기는 모두 월척이라 허풍을 떨던 이들이었지만, 김수봉 낚시그룹은 문인들이라는 점에서 전국적으로 꽤 알려졌다. 조선일보사에서 내는 ‘월간 낚시’라는 잡지가 우리를 자주 취재하고 컬러판 특집으로도 꾸몄다. 낚시소설을 써달라고 수시로 원고 청탁도 하고 원고료도 쏠쏠했다.
알려진 꾼들이었지만 낚시터에서는 악동들과 다르지 않았다. 가끔 술이나 저녁내기 낚시를 했는데 잡은 고기를 검척할 땐 은근히 잡아 늘였다.
언젠가 내기에서 골초 송수권 형이 월척을 낚았는데, 입을 다물었으면 단연 일등이었는데 그가 실토했다.
-거짓말 허기 싫은께 나 솔직히 고백허는디 요것은 릴로 잡은 거여.
릴은 규정위반이었으므로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고, 거짓말을 하기 싫다는 그의 말에 박수를 쳤다. 붕어만 해당된다는 규정에 따라 내가 잉어의 수염을 자르고 붕어라 내놓았다가 들통이 나던 날이었다.
김수봉 사부는 그런 꾼들에게 불만이 많았다.
-낚시터 소개는 헐 짓이 못되야. 고기를 못 잡으면 그래서 불평이고 잘 잡으면 낚시터 선정이 잘 되었다는 말은 안허고 자기들 실력이 좋아 많이 잡었다고 허고……
초심자인 내가 주암댐 물에 잠긴 보성 문덕에서 괴상한 놈을 거푸 두 마리나 잡은 적이 있었다. 생긴 게 흉측해서 버릴까 말까 하던 참이었다.
-이게 무슨 고기요?
내가 물었더니 사부님이 말했다.
-응, 그거 독이 있어서 먹으면 큰일 나네. 얼른 버려.
그때 박양호가 햐얀 이를 감추며 키득키득 웃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히 낚시터를 찾아다니는 그를 학생들은 ‘깜둥이 교수님’이라 불렀다. 얼굴보다 하얀 이가 먼저 보였다. 꾼들은 물에서 반사되는 빛까지 더 받아 모두들 새깜했다.
박교수 눈치가 이상해 괴상한 고기를 버리지 않았는데 한참 후에 사부님이 다시 말했다.
-안 버릴라면 내 붕어랑 바꾸세.
바꿀까 말까 하는데 그가 다시 말했다.
-에끼 사람, 낚시꾼이 쏘가리도 모르는가?
-매운탕엔 쏘가리가 최고지요. 가다가 그걸로 소주나 합시다.
박교수의 말대로 우리는 쏘가리 매운탕을 맛있게 먹었지만 대리운전을 시켰다. 낚시꾼이 된 후에야 나는 못생긴 고기가 맛있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고, 더불어 사람도 빈틈이 많아 못난 사람이 더 인간미가 풍부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택시도 낚시꾼들은 비린내가 풍긴다며 태워주지 않았다. 가족들도 질색이었다. 모처럼 늦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에도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야지, 다녀오면 빨래감이 수북하지, 매운탕 끓여서 친구들 불러들이지……
노모는 낚시에 미쳐버린 나를 자주 타일렀다. 싱싱한 지렁이가 아까워 냉장고에 숨겨 두었다가 그 놈들이 기어 나와 냉장고 가득 난리를 쳐서 내가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던 무렵이었다.
-지발 낚시 그만 둬라. 너는 전생에 업보가 많은 놈인께 날마다 방생을 해도 부족허다.
새벽에 낚시가방을 챙기며 장화 속에 소주병을 감출 때마다 노모는 그 말을 반복했다. 밤중에 도둑놈처럼 일어나 글을 쓰고, 낚시에 미친 내 삶을 ‘전생의 업보 탓’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낚시터로 달려갔다. 방죽 위를 솜이불처럼 덮고 있던 물안개가 스멀스멀 사라질 때 왕성하던 붕어들의 입질, 햇살이 번지고 입질이 뜸해질 무렵 나눠먹던 라면, 멀리서 들려오던 교회의 스피커 소리, 담배를 물고 그 잔잔한 찬송가를 들으며 마시는 한 잔의 진한 커피의 행복을 노모가 알 까닭이 없었다. 어느 날 노모가 다시 말했다.
-낚시 그만 둬라. 너에게도 나쁘지만 늬 새끼들한테 더 안 좋다. 엊그저께 나는 절에서 방생허고 왔어야.
그 후로 낚시터에 갈 때마다 껄적지근하게 그 말이 떠올랐다, 새끼들에게 안 좋다는 말이 이상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 나도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가 된 성싶었다. 건강이 나빠져 담양 금성산 자락으로 들어간 후에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집수리를 하러 온 이의 트럭에 애지중지 하던 낚시가방을 통째로 실어주었다.
1991년 4월에 ‘광주전남 극작가그룹’이 발족되었다. 문단에서 소외되어 찬밥을 넘어 쉰밥 신세였던 희곡문학을 새롭게 일구어 보자는 것이었다. 희곡작가들과 연극인들이 모였다. 한옥근, 함수남, 김영문, 강환식, 김영학, 배봉기, 설재록 등과 목포의 정순열, 순천의 정조, 여수의 이용희 해남의 김봉호 씨들이 그룹에 참가했다. 조선대 교수이던 한옥근이 회장에 추대 되었다. 낚시터에서 나란히 앉아 창작극이 빈곤하고 지역 연극이 침체 되어있는 현실을 개탄하던 참이었다. 그해 상반기 중에 우선 회원들의 등단작을 모아 ‘데뷔작품집’을 발간하고 지역극단을 통해 무대에 올려보자는 대목에서는 박수도 쳤다. 준비를 위해 회비도 조금씩 걷었는데 골초였던 한옥근이 덜컥 폐암에 걸렸다. 폐암 판정을 받고도 그는 담배를 달라고 몰래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담배는 대신할 것이 없는 마약이었다. 서울에서 폐암수술을 받고 와서 그는 다시 살아난 듯싶었다. 김신운, 강인한 등 후소회원들이 문병차 그의 집에 들렸더니 그는 활기에 차있었다. 수술이 잘 되었다며 가족들의 표정도 밝았다.
-수술도 잘 되었다니 담배 한 대 피우겠어?
내가 그렇게 농담을 할 정도로 분위기가 밝았다.
-이제 담배 끊고 운동이나 열심히 할 거야. 하하하.
그러나 며칠 후, 그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 들려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중심을 잃은 극작가그룹은 흐지부지 와해되고 말았다.
문학과 관련된 작은 모임에는 원로 소설가 이명한 선생을 중심으로 모였던 ‘행우회(杏友會)’와 시인 강인한과 전원범 선생이 참석했던 후소회를 들 수 있다.
법원 앞에 있던 이명한 선생의 한약방은 문단의 작은 사랑방이었다. 정초에 그곳에서는 해마다 ‘신년하례회’가 열렸다. 위증, 송선영, 김수봉, 성춘경, 문병란, 함수남, 이삼교, 이송형, 김재복, 주동후, 김신운, 심정섭 씨의 행우회원들과 소설문학 동인들이 그곳에서 서로 만났다. 목포대 송기숙 선생과 나주의 오유권 선생도 그곳에서 뵐 수 있었다.
좁은 지역사회라 양쪽에 참석하는 이들도 많았다. 지역사회의 장점은 서로 구별 짓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만나고 또 저기서 서로 만나는데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별과 장르의 나눔은 의미가 없었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니 서로 다름은 작품으로 말하면 될 일이었다. 어쩌다보니 문단도 보수와 진보로 나뉘었지만 그런 사정도 지역사회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광주의 5월 이후 현실의 충격이 너무 커서 글을 쓰지 못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79년에 3집이 나온 소설문학도 다음해를 기약했었지만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84년에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재창립되고 얼마 후 광주에서도 ‘민족문학 작가회의’가 발족되었다. 그 발기회에 이명한 선생을 중심으로 이삼교, 김신운, 주동후 형들과 함께 참가하고 민족문학 교실을 열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나는 문학단체의 실체에는 관심이 없다. 진보든 보수든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는 신년하례회 탓에 날마다 손님을 치루고 음식을 마련하느라 약방사모님은 항상 바빴다. 정초 신년하례회가 특별했던 것은 서로 모여 ‘물팍 꿇고’ 절하며 덕담을 나누던 이들이 술을 한잔씩 하고 격렬한 토론을 하다가 서로 죽일 놈 살릴 놈 하며 삿대질을 하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며칠 후 다시 만나 껄껄 웃던 모습은 더 선명하다. 발단은 모두 작품에서 시작되곤 했다. 죽일 놈은 덕담을 나누던 작가가 아니라 작품이었던 셈이다.
작품으로 속을 긁는 대표선수는 술동우 형이었다. 좌장이던 이명한 선생도 여러 번 당하는 일이었다.
-선생님, 그것도 소설이라고 쓰셨소?
선생은 처음엔 그저 껄껄 웃다가 막판에는 고성이 오갔다. 술동우 형의 화살은 정해진 방향이 없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당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었고, 내게도 자주 날아왔다.
-야, 이지흔이, 그것도 작품이냐? 너는 다시 촌에 가서 국어선생질이나 해 묵어라.
만좌중에 그 화살이 날아오면 나는 무조건 달아났다. 매에는 엄살이 약이고, 36계 출행랑은 꾀 중에 상수였다. 화를 내기엔 너무나 가까운 사람들이었고, 형의 그 비판이 애정의 표현임을 잘 아는지라 때로는 자괴와 자성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는 형도 역시 글을 쓰는 데는 다 같이 게을렀던지 작품을 드문드문 발표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인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바로 그 자신에게 퍼부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가 쓴 소설집 ‘혼의 소리’ 나 시집 ‘혼자 있을 때 혼자가 아니다’와 수필집 ‘미리 사는 사람’에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그에게도 작품을 쓰는 작업은 오로지 고통이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술동우 형은 문단 외곽에 있는 행우회에 관해 가끔 말했다.
-행우회를 결성할 때 자질 있는 사람들이 모였는디 덩치 큰 강순식이랑 나는 특별초대를 받았어. 남다른 재주가 있으니 영입하자고 박수를 쳤다데.
-남다른 재주?
-우리는 술 마시고 악을 잘 쓴다고 해서 회원이 됐거든.
후소회는 동년배의 문인들이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모임이었다. 전원범, 허형만, 강인한 시인, 희곡의 한옥근, 수필의 오덕렬, 소설의 김신운 씨들과 자주 만났다.
언젠가 한두 번 노래방에 갔었는데 강인한의 시들이 노래가 되어 있었고, 그가 생각지도 않았던 저작료가 쏠쏠하게 들어온다면서 웃었다. 그가 자신이 쓴 시를 노래로 부를 때 나는 진정으로 개탄했다. 아이고, 내가 골목길을 잘못 들었구나. 나도 시 쪽으로 갈 것을!
노래방에서도 틀림없이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을 술동우 형은 타계한 후여서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다.
북망산천 멀다더니 돌아올 줄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시집을 냈고 좋은 소설을 써서 천재작가로 알려졌던 무등산 자락의 김만옥은 힘든 삶을 쓰다가 자살이란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소설문학 동인으로 우체국에 근무하면서 소설을 썼던 강순식은 서울로 가 농민신문 기자로 활동하면서 원고청탁을 해오더니 간암으로 46세의 나이에 먼 길을 떠났다. 투병을 하면서도 그립다면서 그는 가끔 광주에 내려와 문인들과 술을 마셨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을 것 같다던 그가 세상을 뜨던 해에도 연하장을 보내왔다. 한지에 정성껏 손수 쓴 붓글씨였다.
-옛날에 한 아이가 있어
그 아이는 날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라
생각했답니다.
- 강 우후 -
우후(雨後)란 어느 유명인이 지어주었다는 그의 아호이자 필명이었는데 ‘오후’라고 놀렸다. 나는 필명을 버리고 본명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렇게 불러주지 않았고, 강순식은 아무도 그 필명으로 불러주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연하장을 받고나서 나는 혼자서 쓸쓸한 소주를 마셨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리라’는 그의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뜬지 몇 년 후, 소설문학회 주관으로 그의 문학비가 세워졌다. 나주 교동 맛재고개, 광목간 도로 곁에 있던 그의 묘지 앞의 제막식에는 이문구, 박범신, 곽의진, 한승원 씨등 서울에서도 문인들이 내려와 그의 문학정신을 기렸다. 1992년에 그의 유고집으로 ‘길 없는 마을’이 출간되었다.
속눈썹이 유난히 길어 눈빛이 맑았던 소설가 정청일 선생은 당신의 화랑 앞에서 항상 막걸리를 사주시더니 갑자기 유명을 달리했다. 부인이 그의 원고를 모아 유작으로 ‘13번 정류장’을 발간했다.
1992년에 광주문협(김수봉 회장)에서는 카톨릭센터 7층에서 문학의 밤을 가졌는데 문인극이 무대에 올랐다. 내가 ‘명함에 관한 단상’이란 극본을 쓰고 한옥근이 연출했는데 낚시터에서 연극을 해보자는 말이 있었다.
그때는 문협에 소그룹활동으로 낚시가 공식화 되어있었다. 조영일, 윤삼현, 이봉춘, 문은주, 최은정 씨가 참가의사를 밝혀 구체화 되고 주로 예원출판사에 모여 연습했다.
내가 개막을 알리는 징을 치고 나서 허겁지겁 의사로 분장했다. 주동후 형이 원로시인 진헌성 내과에 달려가 의사가운과 청진기를 빌려와 내게 던졌다. 다리에 털이 난 한옥근이 바지만 걷어 올리고 간호사의 가운을 입었다. 한옥근의 그 사진을 액자에 담아 걸어두고 나는 가끔 웃는다. 온통 준비부족과 실수의 연발이었다.
얼마 후에 민작(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도 5월 광주를 소재로 연극을 했다. 나는 술 취한 계엄군으로 분장했는데 맥주병을 들고 무대에 올라가 마셨다.
광주에서 문인극의 시작은 70년대 초 한옥근을 주축으로 생긴‘향토’라는 극단이 아닌가 한다. 창립공연으로 한승원 작 ‘이 억울한 파산’을 올렸다. 일인극인 이 연극은 주동후 형이 연출하고 파산당한 교사 역에 소설가 설재록이 출연했다. 설재록은 그 무렵에 광주공원 앞 어느 지하공간에 ‘레퍼토리’라는 소극장을 열었는데 그 배역처럼 파산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배우까지 초빙해 관객들을 모았으나 예술의 도시라는 광주지역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빚더미 속에서 광주 최초의 소극장은 문을 닫았다. 설재록은 부인의 교사퇴직금까지 털어먹었다. 그러고도 연극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못하고 순천에 내려가 살면서 83년에 경향신문 신춘에 희곡 ‘새’가 당선하자 자신의 카페에서 그것으로 또 연극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설집을 두 권이나 만들어 출판기념회를 한다 해서 광주의 문우들이 떼를 지어 몰려간 적이 있었다.
92년에 나는 느닷없이 바빴다. 그해에 대통령선거가 있었는데 광주일보에서 나를 부르더니 ‘객원기자’ 감투를 씌워줄 테니 유세장취재를 해보라는 거였다. 덕택에 나는 티비로만 보았던 김대중, 김영삼, 정주영 씨를 가까이서 취재할 수 있었다. 그해 김영삼 씨가 뽑혔는데 유세장에서 나를 노려보는 그의 시선이 어찌나 강렬하든지 어지간히 주눅이 들었던 기억만 남아있다,
공연한 짓을 했다가 나는 빗발치는 항의에 시달렸다. 특히 국민당 후보를 취재한 중에 ‘나는 정주영 후보에 관해 그가 부자라는 것 외에는 별로 알지 못 한다’ 하고, 현대에서 개발한 서산간척지 피해어민에 관해 쓴 글이 화근이었다. 지지자들의 항의전화를 받고 해명하느라 잠을 못잘 지경이었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나는 그렇게 작품도 아니고 시답잖은 잡문을 쓰다가 혼쭐이 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기 한 근’이란 칼럼이었다. 식당에서 파는 고기의 양을 도량형으로 정확히 표시하지 않고 ‘일인분’ ‘이인분’이라 할 때였는데 그 속에 저울눈을 속여먹는 속임수가 있다고 썼다가 식육조합과 요식업소에서 거센 항의를 받았다. 직장 앞에 모여 나를 잡으려고 퇴근시간을 기다리는 형편이어서 나는 어두워질 때까지 숨어 있다가 뒷문으로 도망 다녔다.
어디에도 하소연 할 데가 없어서 지면을 내준 신문사에 읍소했다.
-선생님, 이 신문에 글을 쓰다가 곤경에 처했으니 해결 좀 해주십시오.
최승호 선생은 그때 사장이었는데 네게는 스승이나 다름이 없어 나는 늘 선생님이라 불렀다.
사장이 껄껄 웃더니 내게 말했다.
-이 사람아, 우리 신문에 자네보다 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은데 왜 자네에게 지면을 줬겠나? 자네가 쓴 글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지.
뒤늦게 나는 정신이 들었다. 나를 문단에 내보낸 황순원 선생은 잡문은 단 한 줄도 쓰지 않는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로소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을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퇴직을 하고 나서 주동후 형이 내게 말했다.
-방송에 출연하고, 잡문쓰기 좋아하면 좋은 작품 못쓰는 법이여, 나도 잡문만 쓰다가 망했어.
발표지면은 항시 부족하고 원고료는 주로 떼어먹는 풍토에서 그것을 타개하려 방법을 모색했지만 어려웠다. 어느 날 문화부 지형원 기자가 아이디어를 주었다.
광주일보로 제호가 바뀌기 전 1957년부터 전남일보가 신춘을 통해 문인을 배출했으므로 그들과 함께 동인지를 만들면 신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지형원 기자의 도움으로 전남일보와 광주일보 신춘출신 문인들의 현주소를 찾아내었더니 거의 백여명이 넘었다. 이 고장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의 태반이 그 신춘출신들이었다. 현황을 들고 사장실에 갔더니,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지라며 도움을 거절했던 사장이 흔쾌히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동인이 ‘광주일보 신춘문학회’였고, ‘금남로 가는 길’이란 표제의 동인지가 탄생했다. 동인지의 제일 목표는 지면의 확보와 원고료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초대회장의 감투를 쓰고 동분서주하는 일은 원고료를 주기 위한 찬조금을 얻으려 다니는 일이었다. 넥타이를 맨 동냥치나 다름이 없었다. 몇 년 후 찬조금을 많이 얻어낸 이는 법무사였던 정을식 회장이었다. 그는 소설문학회도 법인으로 만들었다. 그 무렵에 무등일보 신춘문학회가 결성된 것으로 안다. 원고료도 주고 문학상도 만들고 그런대로 잘 나가던 광일문학회는 어느 건설사에서 광주일보를 인수하고 차츰 지원금이 끊기자 시들기 시작했다.
메세나 운동에 참가해 예술인들을 돕는 기업이 있다하고, 특히 지역문인들을 많아 도왔던 ‘마사회’도 있었으나 지원금은 늘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문학상과 원고료는커녕 출간비도 해결하기 어렵게 되자 광일신춘문학회는 10여년 후에 자진해산했다.
광주항쟁 후 흐지부지 하던 소설문학회는 1992년에 ‘광주전남 소설문학회’로 재 창립되고 후에 ‘광주전남 소설가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새롭게 김석중, 김유택, 박양호, 박혜강, 박호재, 백성우, 심홍섭, 양원옥, 이미란 , 이향란, 임철우, 정강철, 정명섭, 정해천, 채희윤, 허형권이 참가했다. 목포의 유금호 교수와, 조승기, 나주의 송하훈, 서울에서 잠시 광주에 내려와 살던 심상대도 회원이 되었다. 30여명이 넘어서 광주전남 지역 소설가는 거의 망라된 셈이었다.
이명한 선생을 회장으로 추대한 소설문학회에서는 임철우의 ‘포도씨앗의 사랑’ 김신운의 ‘베데스다로 가는 길’을 제호로 두 권의 동인지를 동시에 발간했다. 금호문화회관에서 성대하게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명인 양태옥씨의 진도 북춤 공연도 있었다.
유금호 씨는 목포대 국문과 교수였는데 방송극 전원일기의 김정수 씨와 부부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유교수는 학생들에게 전라도 소설가들을 찾아가 인터뷰 하고 서명을 받아오라는 과제를 곧잘 내주었다. 내가 사는 담양의 산속까지 방학 때면 학생들이 찾아왔다. 고구마를 구어 먹으며 하루 밤을 자고 간 학생들이 가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지만 그 중 몇이나 문단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혼자 알에서 깨어난 바다거북이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확률이 희소하다는데 등단 후 활동하는 작가들은 그보다 더 희소할 것이다. 때로는 수백 대 일의 경쟁이고, 수 없는 실패 끝에 폭포를 뛰어넘어 용이 된다 하여 등단을 등용문이라 하지만 좋은 작품을 남기는 일은 그보다 더 어려웠다. 좋은 작품을 남기지 못하면 작가는 사라진다. 국가고시는 한 번의 합격으로 평생이 보장되지만 모든 예술은 오로지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면 그는 사라진다.
그 예로 ‘화요회’라는 작은 모임이 있었다, 발단은 광주 YMCA 문학아카데미에서 시작되었다. 한반에 30여명으로 구성된 문학교실은 김종 교수가 시를, 정주환 교수가 수필을 내가 소설반을 지도했다. 한기 과정이 6개월 코스였는데 그 과정을 마치고 꾸준하기란 힘들었다.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싫었던지 수강생 6명이 ‘화요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소설을 지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어 주로 찻집에 모였다. 그들 중 윤채환이 광남일보 중편소설에, 박응순, 박훤희, 송은일이 소설로, 이수인이 시로 신춘을 통해 문단에 나왔지만 송은일, 박응순을 제외한 나머지는 활동을 하지 않았다. 법원에 근무하던 허형권도 무등일보와 광남일보 신춘소설에 동시 당선하였으나 역시 작품을 쓰지 않았다. 발표지면을 얻기는 어려웠고, 지면을 겨우 얻어도 원고료를 떼먹는 풍토에서 자존심이 먼저 상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었다. 송은일도 여성동아에 ‘아스피린 두알’ 이 당선한 후에야 작가로서의 길이 열렸다.
장성 광명사라는 암자에 머물렀던 용현스님의 예도 그렇다. 그는 어느 잡지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시인이었는데 승복을 입은 처지에 밤낮 술타령이었다. 시가 안 써진다고 술타령, 써놓은 시를 발표할 데가 없다고 술타령이었다. 추천해준 잡지에 투고하라 했더니 그의 대답이 기막혔다. 투고를 했더니 잡지를 백 권이나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원고료 대신인가 했더니 곧 책값을 보내라는 청구서가 날아왔다고 했다. 자신의 시가 실려 있다면서 그는 할머니 신도들에게 책을 팔았다.
-보살님, 제가 쓴 시를 한번 읽어보십시오.
-시님(스님), 나는 글자를 모르요.
-제 사진도 나와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그는 조용히 염불에만 힘썼더라면 그런 고통과 고충을 몰랐을 터인데 시를 쓰면서 불행해진 듯싶었다. 감성이 지나쳐 비가 오는 날 그는 어김없이 술자리에서 울었다.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조선대 앞에 있던 ‘월성국악사’라는 대금교습소였다. 대금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어난 쌍골죽이어서 한스런 소리를 낸다더니 스님의 대금도 참으로 한스러웠다. 나도 대금을 그처럼 불고 싶었지만 내가 좋아 한다고 이뤄지는 일은 아니었다. 손목 엘보에 걸려 병원에 치료비께나 납부하고 대금 배우기를 포기했다. 서로 문인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가까워졌다. 심성이 어린애처럼 연약했던 그였지만 함께 술을 마시고 돌아서면 어찌 된 일인지 유치장에서 연락이 왔다. 택시기사가 영업방해로 신고를 하더니 철도청에서 열차운행을 방해했다며 신고했다. 그는 죽고 싶어서 뛰어들었고, 건널목에 누워있었다고 진술했다. 내가 신원보증서를 제출하고 함께 경찰서를 나올 때 그는 말했다.
-전생에 나에게 빚을 많이 졌다고 생각하십시오. 이제라도 빚을 갚아야 할 게 아닙니까?
아담하게 생긴 용현스님과 붙어 다니다가 나는 공연한 구설수에 시달렸다. 어느 여승과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었다.
가난한 암자라 부처님 머리위로 비가 샌다고 걱정이 태산이더니 스님은 불사를 하겠다며 시집도 내고 시화전도 열었다. 열심히 발원하니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지만 시화전은 표구값도 건지지 못했고, ‘나는 눈뜬 개미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죽인 사람입니다’라는 긴 제목의 시집도 팔리지 않았다.
불심이 깊은 신도들이 많은 경상도로 가겠다며 그는 김천으로 떠났다. 떠나면서 하필 절집의 기둥에 붙어있는 주련을 죄다 뜯어갔다. 시인답게 주련의 선시가 좋아서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작품만 좋다면 발표지면은 넓다고 말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현실인식에서 ‘말똥도 모르고 마의(馬醫)노릇’을 하는 말씀이라고 나는 그들을 원망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작품을 일단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지방작가들이 왜 서울로 가는가, 지방에 남지 않고 일지감치 서울로 갔더라면 더 좋은 작품을 남겼을 지방작가들은 내 주변에도 많았다.
그 때에도 문예 진흥기금이란 게 있었는데 창작 의욕을 북돋기는커녕 경쟁은 심하고 신청절차가 어찌나 까다롭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던지 아예 단념하는 문인들이 많았다.
촛불시위 전에 예술인 불랙리스트에 선두그룹으로 점 찍혔던 비평가 황현산 고려대 교수는 나의 죽마고우였다. 문예진흥을 위해 만들어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문단현실을 하소연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학창시절 서울에서 하숙을 함께 했던 흉허물 없는 사이라 기탄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행여나 ‘말똥도 모르는 마의’가 될까싶어 걱정했는데 그는 문단 현실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었다. 이제는 숨통이 좀 트이려나했는데 부임한지 몇 달 후에 그는 간암으로 별세했다.
어느 해든가 전남북 출신 소설가들이 ‘절라도’라는 인연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첫 모임이 장성 백양사에서 열렸는데 최기인, 박범신, 윤흥길 씨등 전북 출신 소설가들이 많이 참가했다. 공교롭게도 백양사 입구에 ‘똠방각하’라는 간판의 노래방이 있었는데 최기인 씨의 동명 소설 ‘똠방각하’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똠방각하는 mbc의 인기 연속극이 되었는데 시청률이 높아 방영시간에는 택시를 잡기도 어려웠다. 최기인 씨와 함께 그 노래방 들어가 저작권위반이라 내가 소리치고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지금도 그 노래방의 간판이 그대로여서 그 옆의 화장실에 갈 때마다 가끔 들여다본다.
전남북 소설가 모임은 전남북을 오가며 친목을 다지고 부안에서는 세미나도 열었는데 최일남 선생이 회장을 하면서 모임은 ‘가시리’든가 뭔가 하는 명칭으로 불렀던 것 같다. 그 모임도 문단에서 지역끼리 뭉친다는 구설이 있어 흐지부지 흩어졌다.
곡성의 목사동에서 글을 쓰며 과수원 농사를 짓던 이재백 형도 뒤늦게 소설가협회에 참가했다. 청정지역으로 숨어있는 목사동에서 그의 소설역시 숨어있는 듯 하였는데 소설집 ‘돌각담’과 ‘목사동 느티나무’가 몇 년 만에 한 번씩 나왔다. 소설가협회 회원들이 그곳으로 야유회를 가자 커다란 상자를 주면서 과일을 가져갈 만큼 욕심껏 따가라던 형이었다.
항상 조용하고 숨어있었던 그는 전혀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었다. ‘목사동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150여 미터의 시골길에 경향의 문인들이 자필로 쓴 작품의 편린을 돌에 새겨 진열하였는데 그 산책로에 ‘돌비거리’라 이름을 붙였다. 그곳에 돌로 서있는 문인들은 평소 그와 친분이 가까웠던 천승세. 백시종, 차창룡, 이근배, 문순태, 공선옥, 이명한, 임철우, 한승원, 이생진 씨등 20여분으로 알려져 있다.
후에 목사동면에서 은서목 등 나무를 심고 다듬어 숨어있는 명소가 되었다.
1999년 초에 광주의 세종출판사에서는 김신운, 이삼교, 이지흔, 주동후의 꽁트를 한데모아 ‘네 사람이 쓴 일흔 두 편의 짧은 이야기’란 책을 만들어 서점에 내놓았다. 내가 산속에서 암 투병을 하는 동안 네 사람의 대표로 김신운 씨가 그 시절 우리 모습을 서문에 남겼다.
-우리는 30여 년 동안 광주에서 함께 소설을 써왔다. 우리는 그 동안 무수히 만나고 헤어지고 기다리면서 지내왔다. 더러는 짜증을 내고 흉을 보고 못마땅해 하면서 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서로의 표정이며 그 결함까지도 너무나 낯이 익어버린 사람들이다, 우정이라면 우정인 이것은 그러므로 요즘 세상에 썩 흔치않을 것이란 짐작이 간다.
자비출판이 대세였던 지역출판계에서 끝까지 기획출판으로 활로를 찾으려 악전고투했던 세종출판사는 끝내 사라지고 서상훈사장의 근황은 알 길이 없다.
자서전을 쓰는 작가가 드물다고 한다. 이상할 것이 없다, 작품 속에 그의 정신과 인생을 풀어놓았기 때문이리라.
정신이 깜박거리는 것은 쓸데없는 것을 기억하지 말라는 조물주의 뜻이라 하고, 나도 앞으로 결코 자서전을 쓰는 일은 없을 터이므로 여기에 털어놓을 말이 있다.
문단을 떠나면서 25년이나 중단했던 소설을 다시 쓰게 된 것은 순전히 김종 시인 때문이었다. 오래 만에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요새 어떻게 지내시오?
-복지관에 댕기면서 논어공부 조까 허네.
-아따, 소설을 써야제 뭔 논어공부요? 오늘 나좀 만납시다.
우리 동네로 찾아와 그가 말했다.
-내가 요새 안성현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는디 한송주랑 가끔 형님 얘기가 나옵디다?
안성현은 소월시 ‘엄마아 누나야’를 처음 작곡한 음악인으로 가족과 함께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1948년에 목포 항도여중에 근무하면서 동료 국어교사 박기동 시인이 쓴 시 ‘부용산’에 곡을 붙였다. 그 노래는 벌교, 순천, 여수 지방으로 퍼져 나가다 그해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초기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자 금지되어 지하로 숨어들었다. 광주의 5월 이후 황지우 시인이 광주에 내려와 처남인 김유택과 합석한 술자리에서 그 부용산을 불렀다. 나는 목포에서 성장해 그 노래가 어렴풋이 기억의 저편에 남아있었다. 어떻게 그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운동권 학생들과 민주투사들의 애창곡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한송주가 목포에서 열린 ‘소청 문학의 밤’을 취재하고 돌아와서 내게 말했다 소청은 당시 안성현과 박기동을 항도여중으로 영입한 교장 조희관선생의 아호다.
-미야무라 성님, 그 행사에 이을호, 차범석, 정종박사랑 원로들이 참석했는디 갑자기 부용산이란 노래를 부르자고 허등만 모두들 눈물을 흘리더라고. 내가 악보를 구해 왔응께 성님이 한번 써보씨요, 잉?
한송주와 함께 자료를 찾아 다녔지만 40년 넘게 금기시 되었던 노래의 사연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실제 부용산이 어디에 있는 산인지도 모르고 헤맸는데 안성현과 박기동을 잘 아는 선암사의 지허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지허스님의 증언으로 한송주는 94년 예향 10월 호에 금기시 된 부용산의 사연을 45년 만에 터뜨렸다. 내가 그 소설을 절반쯤 쓰고 있을 때, 광주 불로동에서 월북자 가족이란 연좌제의 누명을 쓰고 숨어살던 안성현의 가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소설을 중지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안성현 씨의 부인이 내가 부용산을 소설로 쓴다면서 자료를 찾아다니고 수소문 하는 등 아픈 상처를 자꾸 쑤시는 바람에 몸져 누어있다는 말이었다. 안성현씨가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는 자료만 믿고 천방지축 날뛰었던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충격 끝에 절필했다.
연좌제로 고통 받는 이들의 상처를 쑤셨다는 양심의 소리가 줄창 들려와서 그 후 나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내 소설이 상처받은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상처를 쑤셨다면 그 소설은 무엇인가. 이래저래 한송주와 나는 폭음을 일삼았다
그 후 4년 뒤, 한국일보의 김성우 칼럼을 통해 부용산의 사연은 전국적으로 떠들썩하게 퍼졌다. 전에 항도여중이었던 목포여고와 벌교의 부용산에는 부용산 노래비가 세워졌다. 안성현의 고향인 남평의 드들강변에는 ‘엄마야 누나야’의 노래비도 새워지고, 거기에는 남평이 고향인 김종 시인의 해설이 새겨졌다.
소설가로서의 내 삶은 중단되었는데 한겨레를 비롯한 몇몇 신문에는 내가 부용산을 완성하고 그것을 대본으로 만들어 연극무대에 올린다는 기사가 여기 저기 떠돌았다. 김종 시인은 그것의 진위를 묻는 것이었다.
-정말 연극 대본을 만들었읍디여?
-아니여. 나는 그런 것 써본 적이 없어. 부용산에서 손 떼기로 안성현 씨 가족하고 그때 약속했당게. 죄다 오보였어.
-그러면 내가 좋은 자료를 보내줄 테니 이제 소설을 완성하시오. 시방 뭣 허고 있어? 소설도 안 쓰고.
얼마 후 소설가 박신영의 상가에 조문을 갔더니 그녀가 김종이 보내온 자료보따리를 네게 전해주었다.
그 자료들을 뒤적이면서 절필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또 잠을 잘 수 없었다. 세상이 많이 변하고 숨어살던 안성현씨의 부인도 제막식에 참석한 지 오래였다. 붕어가 미끼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나는 눈앞의 새로운 자료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뭔가 써야 할 듯싶은 예감의 아침에 나는 낯이 좀 간지러웠지만 다시 소설을 시작했다. 장편 ‘부용산 오리길’ 은 그러구러 탄생했다. 나를 다시 소설의 길로 유혹한 김종 시인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원망을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한때 우리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행복을 맛보게 해주었던 술과 담배는 우리를 배신했다. 우리에게 주었던 행복은 잠시였고, 불행은 길었다.
나는 전형적인 알콜과 니코친 중독의 과정을 겪었다. 처음엔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셨는지를 모르다가 승용차를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경찰의 도움을 받았다. 머리를 밧줄로 동여매는 고통이 따르더니 끔찍한 악몽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있으면 방안 가득 나비가 날아다니는 환각이 나를 괴롭혔다. 정도가 지나쳐 새벽에 발가벗고 괴성을 지르며 아파트를 뛰어다녔다. 가족들까지 망신시킨 폐인이 되었다. 방광암 수술을 받고나서 성기능까지 잃게 되자 ‘내가 과연 남성인가?’ 하는 자괴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고, 절벽에서 투신도 했다.
그 폐인의 과정도 내 인생이었으므로 내게는 소중하다. 그 과정은 바다와 숲을 뒤집어 놓는 태풍과 같아서 그늘진 곳에 햇살이 들고 새싹이 돋았다. 산골에서 혼자 살면서 다시 일어서는 데 십년이 넘게 걸렸다. 그림을 그려보라는 의사의 권유로 미술학원에서 초등학생들 틈에 끼어 함께 그림을 그렸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만 붙들고 살아온 20여년, 비록 날마다 인슐린을 주사하지만 이제 마음은 평온하다. 소질 없는 그림과 악기와 커피만으로 내 노년은 평범하다. 나는 내가 뿌린 씨앗을 너무 풍성하게 거두었을 뿐이다. 뒤늦게 술과 담배를 대신할 것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거울 앞에 돌아와 늙은 주름살을 보는 누님의 심사가 이럴까 싶다. 시간에게 시간을 주었더니 그렇게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했다.
엊그제 능주에 있는 김유택의 집에 다녀왔다. 그는 독서삼매경에 빠져 산책으로 건강을 다지고 있었다. 장편 ‘보라색 커튼’이 나온 이후 그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으나 여전히 담배는 골초였다. 순천대학에서 문학강의를 하는 그에게 담배를 끊으라 언젠가 말했더니 그가 웃었다.
-아따, 성님, 술도 끊었는디 담배까지 끊으라고 허요? 허허허허.
그는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살얼음판을 걷듯 살았다. 새 차를 살 때 급발진아 두렵다며 수동변속기어를 살 정도였다.
서울로 올라갔다는 한송주로부터 어제 밤에 문자 한통이 날아왔다. 앞뒤가 없었지만 충분히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소식이었다.
-의사 ; 당신은 중독자임을 인정합니까
환자(나); 인정하지 않습니다
의사; 알콜 중독자들은 꼭 그렇게 말하지요
환 ; 의사들은 꼭 그렇게 말하지요
그 문자를 그냥 덮어버릴 수가 없어서 나도 돋보기를 찾아 콧등에 걸었다.
-어이 송주, 밥보다 희망이라네. 나도 유택이도 자네보다 더 심했지만 지금은 다 건강하잖은가? 제발 용기를 내게.
위로란 그런 것이다. 안타까워도 남의 죽을병이 내 감기만 못하다. 삶이란 어차피 혼자 겪어야 하고 그래서 남들의 고통은 한낱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행복하려면 이웃이 먼저 행복해야 한다. 행복은 소유가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더 많은 사연을 썼다가 차마 내놓을 수가 없어서 다시 지우며 혼자 미소 짓는다. 내가 기왕에 썼던 사연을 그렇게 다시 지움으로써 이 글을 읽으며 아마 나처럼 혼자 웃는 이들이 많을 줄 안다.
술과 담배를 요란하게 즐긴 탓으로 정신이 흐려 좋은 글은 쓰지 못했지만 지금도 나는 아슴아슴한 추억에 잠긴다.
-그래. 그들이 있어 그나마 내 인생이 풍요로웠지. ■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