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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돌과 비비추
 
 
 
카페 게시글
동산*문학관* 스크랩 오월 외 / 송찬호
동산 추천 0 조회 15 09.07.25 12:0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before spring' storm

 

 

 

 

 

   오월 / 송찬호

 

 

 

 

   냇물에 떠내려오는 저 난분분 꽃잎들

   술 자욱 얼룩진 너럭바위들

   사슴들은 놀다 벌써 돌아들 갔다

   그들이 버리고 간 관(冠)을 쓰고 논들

   이제 무슨 흥이 있을까 춘절(春節)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염소와 물푸레나무와의 질긴 연애도 끝났다

   염소는 고삐로 수없이 물푸레나무를 친친 감았고

뿔은 또 그걸 들이 받았다

   지친 물푸레나무는 물푸레나무 숲으로 돌아가고

   염소는 고삐를 끊은 채 집을 찾아 돌아왔다

 

   그러나 그딴 실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돗자리 말아 등에 지고 강아지풀 꼬릴 잡고

   더듬더듬 들길을 따라오는 저 맹인 악사를 보아라

   저 맹목의 초록이 더욱 짙어지기 전에,

 

   지금은 청보리 한 톨에 햇볕과 바람의 말씀을 더

새겨넣어야 할 때

   둠벙은 수위를 높여 소금쟁이 학교를 열어야 할 때

   살찐 붕어들이 버드나무 가랑이 사이 수초를 들락

날락해야 할 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칸나 / 송찬호

 

 

 

 

   드럼통 반 잘라 엎어놓고 칸나는 여기서 노래를 하

였소

   초록 기타 하나 들고 동전통 앞에 놓고

   가다 멈춰 듣는 이 없어도 언제나

   발갛게 목이 부어 있는 칸나

   그의 로드 매니저 낡은 여행용 가방은

   처마 아래에서 저렇게 비에 젖어 울고 있는데

 

   그리고 칸나는 해질 녘이면 이곳 창가에 앉아

   가끔 몽롱 한 잔씩을 마셨소

   몸은 이미 저리 붉어

   저녁노을로 타닥타닥 타고 있는데

 

   박차가 달린 무거운 쇠구두를 신고 칸나는

   세월의 말잔등을 때렸소

   삼나무 숲이 휙휙 지나가버렸소

   초록 기티가 히히힝, 하고 울었소

   청춘도 진작에 담을 넘어 달아나버렸소

 

   삼류인생들은 저렇게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초

로(初老)를 맞는 법이오

 

   여기 잠시 칸나가 있었소

   이 드럼통 화분에 잠시 칸나가 있다 떠났소

   아무도 모르게 하룻밤 노루의 피가 자고 간 칸나의

붉은 아침이 있었소

 

 

 

 

 

 

 

 

 

 

 

 

 

 

 

   코스모스 / 송찬호

 

 

 

 

   지난 팔월 아라비아 상인이 찾아와

   코스모스 가을 신상품을 소개하고 돌아갔다

   여전히 가늘고 긴 꽃대와

   석청 냄새가 나는 꽃은

   밀교(密敎)에 한층 더 가까워진 것처럼 보인다

 

   헌데 나는 모가지가 가는 꽃에 대해서는

   골똘히 바라보다 반짝이는

   조약돌을 머리에 하나씩 얹어주는

   버릇이 있다 코스모스가 꼭 그러하다

 

   가을 운동회 같은 맑은 아침

   학교 가는 조무래기 아이들 몇 세워놓고

   쉼 없이 바람에 하늘거리는 저 꽃의 근육 없는 무

용을 보아라

 

   이제 가까스로 궁티의 한때를 벗어났다 생각되는

   인생의 오후, 돌아보면 젊은 날은 아름답다

 

   코스모스 면사무소 첫 출근 날 첫 일과가

   하늘 아래 오지의 꽃밭을 다 세는 일이었던,

   스물한 살 지방행정서기보

 

   바람의 터번이 다 풀렸고나 가을이 깊어간다

   대체 저 깊고 푸른 가을 하늘의 통점은 어디인가

   나는 오늘 멀리 돌아다니던, 생활의 관절

   모두 빠져나간 무릎 조용히 불러 앞세우고

   코스모스 길 따라 뼈주사 한 대 맞으러 간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복사꽃 / 송찬호

 

 

 

 

   옛말에 꽃싸움에서는 이길 자 없다 했으니

   그런 눈부신 꽃을 만나면 멀리 피해 가라 했다

   언덕 너머 복숭아밭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울긋불긋 복면을 한

   나무들이 나타나

   앞을 가로 막았다

 

   바람이 한번 불자

   나뭇가지에서 후드득 후드득,

   꽃의 무사들이 뛰어내려 나를 에워쌌다

 

   나는 저 앞 곡우(穀雨)의 강을 바삐 건너야 한다고

   사정했으나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땐 술과 고기와 노래를 바쳐야 하는데

   나는 가까스로 시 한 편 내어놓고 물어날 수 있었다

 

 

 

 

 

 

 

 

 

 

 

 

 

 

 

   살구꽃

 

 

 

 

   살구꽃이 잠깐 피었다 졌다

   살구꽃 무늬 양산을 활짝 폈다가

   사지는 않고

   그냥 가격만 물어보고

   슬그머니 접어 내려놓듯이

 

   정말 우리는 살구꽃이 잠깐이라는 걸 안다

   봄의 절정인 어느 날

   활짝 핀 살구꽃이 벌들과

   혼인 비행을 떠나버리면,

 

   남은 살구나무는 꽃이 없어도

   그게 누구네 나무라는 걸 눈을 감고도 훤히 알듯이

   재봉틀 소리 나는 곳이 살구나무 수선집이고

   종일 망치 소리 나는 곳이 살구나무 철공소라는 걸

 멀리서도 알고 있듯이

 

   살구나무와 연애 한번 하지 않아도

   살구나무가 입은 속옷이

   연분홍 빤쓰라는 걸

   속으로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 송찬호 시집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에서

 

 

 

 

* 아..., 송찬호 시인의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아침입니다 / 동산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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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25 13:35

    첫댓글 서울에서 꼬마들이 왔습니다...살구나무 속옷이 연분홍 빤스라는 매력적인 시편들을 조용할 때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 09.07.25 17:21

    송찬호님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행복하게 만드는 요술쟁이 인 것 같습니다. 꼬맹이들이 와서 바다에 다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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