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일 火(음력 3월 19일)
[1966년] ‘한국의 쿠베르탱’ 이상백 박사 별세
← 민족시인 이상화씨의 동생으로 ‘한국의 쿠베르탱’으로 불렸던 이상백 박사. 우리나라 체육계의 선구자이자 한국 사회학의 개척자였던 이상백 선생이 1966년 4월 14일 별세했다. 해방 직후 조선체육동지회를 창설해 초대 위원장을 지낸 그는 1946년 조선체육회이사장, 1951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제2대 IOC위원을 역임하며 한국체육의 발전을 주도해 ‘한국의 쿠베르탱’으로 불리기도 했다. 특히 제15∼18회 올림픽대회에 한국대표단의 단장 또는 임원으로 잇달아 참석하며 특유의 ‘인물외교’를 통해 한국체육의 국제화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03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 1924년 와세다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으며 일본농구협회를 결성(1930년)하면서 일본에 농구를 처음으로 보급해 ‘일본 농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교수·사회학과 주임·박물관장을 역임하면서 사회학의 기틀을 세웠으며 조선왕조사 연구에 남다른 발자취를 남겼다.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동생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1964년 대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평생을 체육인이며 학자로 보내다 이날 별세했다. 문화체육부는 이상백 박사를 1994년 ‘6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다./조선
[2006년] 2006 경남고성 공룡세계엑스포' 개막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과 지구, 그리고 생명의 신비를 체험할 ‘2006 경남 고성 공룡세계엑스포’가 14일 막이 올라 오는 6월 4일까지 휴일 없이 계속된다.
올해 처음 개최하는 고성공룡엑스포 행사장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선 57척을 섬멸한 당항만을 끼고 앉은, 고성군 회화면 당항포관광지의 13만평이다. 개장식은 오전 8시30분 메인게이트 간이무대에서 열린다.
공룡엑스포는 고성군에 산재한 5000개 넘는 공룡발자국 화석의 가치를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한 것. 고성은 미국 콜로라도 및 아르헨티나 서부 해안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발자국 산지(産地)다. 1982년 하이면 덕명리에서 처음 발견됐고, 회화면에서는 최대 115㎝짜리 등 무더기로 확인됐다. 발자국 밀도로 따지면 세계 최고라고 한다.
필수 관람코스는 ‘발굴체험관’ ‘로봇공룡관’ ‘영상관’ 등으로 이뤄진 주제관. 그리고 캐나다 로열티렐 박물관 등 세계 3대 공룡박물관에서 보낸 공룡 전신 등 60여점을 전시한 세계공룡대교류관이다. 주최측이 권하는 관람 동선은 2.5㎞로, 4~5시간은 걸린다고 한다. 행사장에서 35㎞ 떨어진 하이면의 공룡발자국 화석지도 빼놓을 수 없다. 하이면에는 티라노사우루스와 같은 공룡 화석 93점을 전시한 공룡박물관도 있다. /조선
[2004년] 동해를 ‘동쪽 바다’로 적은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공개
‘동방견문록’의 저자로 원(元)나라를 여행한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가 활동했던 13세기에 서양인들이 동해를 ‘동쪽 바다(Eastern Sea)’로 불렀음을 시사하는 18세기 영국 지도가 발견됐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사료조사실장은 고(古)지도 수집가인 모경국씨가 최근 프랑스에서 입수한 이 지도를 2004년 4월 14일 공개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여행 지도’라는 제목의 이 지도는 가로 30cm, 세로 19cm의 크기이며, 1744년 영국의 지도 제작자인 해리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에서부터 아라비아·인도·중국·보르네오와 한국·일본까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하고 있으며, 한반도를 ‘고려 왕국(K. of Corea)’,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바다를 ‘동해(Eastern Sea)’라고 표기했다.
이 실장은 “이 지도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의거했다는 점으로 보아 지금 전해지지 않는 ‘동방견문록’의 판본이나 그 당시의 다른 자료에서 ‘동해’라고 적힌 부분을 근거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고 말했다. /조선
[2002년] 동티모르 대선투표 종료, 투표율 86%
21세기 최초 독립국가 탄생을 앞둔 동티모르의 초대 대통령 선거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 높은 투표율을 기록하며 14일 오후 4시(현지시간)에 마감됐다.
카를로스 발레주엘라 선거위원장은 유권자 44만명 가운데 86.3%가 투표했다면서"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번 투표가 최고 투표율로 간주될 것"이라고 말했다.
발레주엘라 위원장은 또 282개 투표소 가운데 단지 한 곳에서만 경미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고 덧붙였다.
동티모르과도행정기구(UNTAET) 세르지오 비에이라 데 멜로 수석 행정관은 이번 선거를 "진정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찬사를 보내면서 "이번 투표는 새천년 새국가 탄생을 축복하기에 앞서 마지막 중요 단계"라고 말했다.
당선자 윤곽은 15일 오후께 밝혀질 것으로 보이며 최종 공식 집계 결과는 오는 21일 발표된다. 그러나 독립 영웅 사나나 구스마오와 사비에르 도 아마랄(65) 티모르사회민주연합(ASDT) 총재가 출마한 이번 선거에서 후보자 전력과 최근 여론 등으로 미뤄 구스마오가 80% 정도의 득표율로 압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스마오와 아마랄은 이날 주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수도 딜리에 설치된 투표장에 나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으며 투표에 앞서 서로 포옹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유권자들도 향후 5년 간 신생 독립 국가를 이끌 지도자 선출을 위한 권한 행사를 남보다 빨리 행사하려는 듯 이날 오전 5-6시부터 주거지 인근 학교 등에 마련된 투표소로 몰려들었다.
한편 투표장에는 2천여 외국인 및 현지 감시단이 투표상황을 감시했다.
유럽연합(EU) 감시단 대표인 존 보위스는 "현지 직원들이 딜리 투표장 안팎에서 매우 잘 대처했다"고 평했다. (자카르타 AP.AFP/연합뉴스) /한겨레 2002-04-14
[1986년] 프랑스 작가 보부아르 사망
← Simone de Beauvoir, Jean-Paul Sartre og Che Guevara. Cuba, 1960
1908. 1. 9 ~ 1986. 4. 14
여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프랑스 작가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1986년 4월 14일 사망했다. 소르본대에서 수학했으며 철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29년 실존주의를 주도한 사르트르(Sartre, Jean-Paul, 1905~1980)와 '계약결혼'을 시작했으며, 1945년부터는 그와 함께 월간지《레탕모데른 Les Temps Modernes》을 편집했다.
그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여성해방문학의 고전이라 불리우는《제2의 성(性) Le Deuxième Sexe》(2권, 1949)을 통해 '전통적인 여성상'을 강조한 기존의 관념에 반기를 들었을 때부터였다. 이 책에서 그녀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녀의 또 다른 역작《레 망다랭 Les Mandarins》(1954) 은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본 다양한 철학서적과 평론을 썼으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생활을 분명하게 드러낸 여러 편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조선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 당시 모습
세종문화회관이 1978년 4월 14일 개관됐다. 불타버린 시민회관 자리에 1974년 착공해 4년 만이었다. 2백21억원의 공사비에 대지 5천6백평 지하3층 지상6층의 건물이었다. 4천2백석의 초대형 대강당은 1백만달러짜리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됐고 무대는 5백평이 넘는 회전식이었다. 건축양식은 한국의 옛 건축양식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변용하여 웅장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갖도록 하였다.
그러나, 화려한 외관과는 달리 서울특별시의 운영으로 ‘‘관료주의적인 운영이다.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1999년 7월1일 재정은 서울시가 지원하고 운영은 시가 아닌 민간이 책임지는 체제인 ‘재단법인 세종문화회관’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이는 세종문화회관 관장직이 ‘구청장 대기소’라고 불릴 정도로 예술과는 무관한 공무원으로 자주 교체되어 전문적인 기획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관주도 행사 위주로 운영되어 시민의 문화공간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평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선
[1930년] 러시아의 혁명시인 마야코프스키 자살
← 마야코브스키
1893. 7. 19 ~ 1930. 4. 14
러시아 시인 블라지미르 마야코프스키(Mayakovskii, Vladimir Vladimirovich)가 현실에서의 혁명과 예술에서의 혁명을 동시에 밀고 나가다 1930년 4월 14일 권총자살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신의 시가 가슴이 불타는 매춘굴과 같고, 자신의 시어는 불길이 이는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창녀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런가하면 ‘내 심장은 꽃피는 5월까지 살아본 적이 없소. 내 삶에는 오로지 백번의 4월만 있을 뿐’이라는 시행들을 통해 여린 가슴을 내보이기도 했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10대 시절부터 러시아의 차르 체제에 항거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의 형식파괴를 통해 새로운 시를 현실에 세우려고 했다. 그는 현실의 지배계급인 부르조아의 미학을 파괴하는 실험시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인간의 내면을 토해냈다. 그는 레닌이 성취한 혁명을 찬양했지만, 혁명가들이 현실의 지배자가 된 상황에서 항상 더 많은 혁명을 요구했다. 그래서 정작 레닌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러시아 미래파의 전통 거부와 기술 중시의 영향이 두드러지고, 동시에 독특한 시형과 격렬한 비유, 그리고 풍자와 내성이 나타나 있으며, 서정과 서사의 기적적인 결합이 엿보인다. 그는 그 후의 소련의 시인뿐 아니라 금세기 세계 각국의 시인에게도 영향을 끼쳤으며, 현대시에 신선한 영역을 개척해 놓은 시인이다. /조선
"사랑의 나룻배는 현실생활에 부딪쳐 부서져 버렸다" -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1917년] 폴란드의 안과의사, 에스페란토어 창시자 자멘호프(Zamenhof, Lazarus Ludwig) 사망
← 자멘호프
1859. 12. 15 ~ 1917. 4. 14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는 1859년 12월 15일 유럽 리투아니아의 비얄리스토그(당시 폴란드령)의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안과 의사가 되었다. 그 곳은 당시 러시아가 점령한 폴란드의 일부였는데 산업 혁명 무렵 직물업의 중심지였다. 1861년 당시 러시아의 농노 제도가 폐지당할 때 러시아 제국주의가 폴란드 말을 금지시키고, 리투아니아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독일인, 유태인들이 혼합해 거주하는 도시들에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일어나는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그것을 매일처럼 보고 자란 자멘호프가 여러 민족의 공통어가 있으면 이와 같은 싸움이 없어진다고 느꼈고, 그 자신이 유태인이어서 유랑민이란 편견과 차별 대우를 받아왔다. 1881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알렉산더 11세 암살 사건의 범인이 폴란드인이었으나 러시아 정부가 유태인의 소행이라고 소문을 퍼뜨려 전국에 유태인 대학살 바람이 불어 하루에 만오천 여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했다.
1881년 12월 25일, 폴란드 바르샤바에 불어닥친 대학살에 자멘호프 일가는 지하실에 숨어서 공포의 밤을 지냈었다.
1878년 이미 국제어 의 초안을 완성했던 그는 이런 현실에서 언어만으로 민족 차별을 없애기는 어렵다고 느껴서 이스라엘을 만든 시오니즘운동에 한때 몰입했다가 팔레 스타인과의 적대감을 알고 손을 떼었다.
1887년 7월 14일에 <에스페란토 박사>라는 필명으로 국제어의 창안을 발표하고 톨스토이 등 많은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국제어의 사상인, 민족간의 우애와 정의를 추구하는 동호인들이 확산되어 1905년에 프랑스의 브로뉴 수메르에서 제1회 에스페란토 세계 대회를 열었는데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 만으로 사이좋게 교류하는 현실을 보면서 결의가 점점 확고해졌다. 중립언어만으로 각 종교간의 중계 역할인 <히레르주의>를 완전히 수행할수 없다고 판단되어 <민족주의>를 그냥 두고 자멘호프는 1906년 <인류인주의>를 부르짖었다. 자기는 인류의 일원이고, 타민족의 어떤 편견이나 차별도 하지 말자는 사상이다. 세계 평화를 바라며 모든 민족의 편견과 차별에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언어와 종교의 면에 전력을 기울여 투쟁한 자멘호프는 에스페란토로 된 방대한 저작을 남기고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17년 4월 14일에 바르샤바에서 58세를 일기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12년] 타이태닉호 빙산과 충돌 침몰
← 타이태닉호
1912년 4월 14일 영국 사우스샘프턴에서 미국 뉴욕시티를 향해 처녀항해하던 호화여객선 타이태닉호[Titanic]가 빙산과 충돌해 침몰했다. 뉴펀들랜드에서 남쪽으로 640㎞ 떨어진 지점에서 일어난 이 침몰사고로 1,515명이 사망했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사고지점에서 32㎞가 채 안 되는 곳에 레이랜드 정기선인 '캘리포니안호'가 있었지만 조난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침몰 후 커나드 정기선인 '카파시아호'가 사고지점에 도착해 인명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이 사고로 런던에서 최초의 국제해상안전협정이 체결되기도 했다. 사고가 일어난 지 73년 후인 1985년 9월 1일 타이태닉호의 잔해가 해저 4,000m, 북위 41˚26', 서경 50˚14'의 위치에서 발견되었다. 미국·프랑스 과학자의 감독 아래 무인잠수정 탐사 결과, 충돌의 충격으로 선체 판재 이음새가 벌어져 선체로 바닷물이 유입되면서 침몰한 것으로 밝혀졌다. /브리태니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막
프랑스의 20세기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L’Exposition de Paris de 1900]의 개막과 함께 그 문을 열었다.
샹 드 마르스 공원에서 열린 이 축제에 8만 3천에 달하는 전시자가 참여했고 200여 일에 걸쳐 약 5천만 명이 관람했다.
니콜라이 2세로 명명된 큰 길 양편에는 막 완공된 그랑 팔래와 프티 팔래가 호화로운 예술의 전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프티 팔래에는 ‘기원에서 1800년까지’를 보여주는 약 5천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그랑 팔래에는 프랑스 미술 ‘100년전’이 열렸다.
이 ‘100년전’의 마지막 전시 벽면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되었다.
이 인상주의 전람회에는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쇠라, 시슬레, 바질, 부댕, 드가, 기요맹, 모리소 등 고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인상주의 주요 화가들이 참여했다.
고갱은 그 때 타히티 섬에서 외롭게 생활하고 있었다.
동양학파의 일원이며 프랑스 한림원의 회원이기도 한 레옹 제롬은 인상주의 전시장 입구를 두 팔을 올려 막으면서
“대통령 각하, 멈추십시오. 이것은 프랑스의 치욕입니다” 하고 말한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이 에피소드에서 그 때만 해도 인상주의가 프랑스인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점은 훗날 근대 조각의 아버지로 불리운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1840~1917)이 60세의 나이로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이미 명성이 높은 조각가로 알마 광장에 사비를 들여 별도로 건립한 개인전시장에서 조각품 150여 점을 소개했다.
그의 개인전은 성공했는데, 코펜하겐, 함부르크, 드레스덴, 부다페스트 등 유럽의 뮤지엄뿐 아니라 미국 필라델피아 뮤지엄도 그의 작품을 다투어 사들였다.
그는 이 전람회를 위해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겨둔 <지옥문>을 석고로 완성시켜 전시했다.
<지옥문>은 로댕이 타계한 후에 청동으로 뜰 수 있었다.
사람들이 석고로 된 <지옥문>을 보고 미완성이라고 말하면 로댕은 “그럼 프랑스의 대성당들은 완성작이란 말이오?” 하고 대꾸했다.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지 3년 후에 개최된 이 박람회에 우리나라도 참여했다.
고종은 학무대신 민병석을 총재격인 박물대원에, 민영찬을 실무 담당 박물부원에, 그리고 프랑스인 안예백Alple을 사무부원에 임명 파견했다.
프랑스 건축가 에밀 페레Emile Ferret가 지은 왕궁 접견실 형태의 대한제국관은 샹 드 마르스에서 떨어진 슈프렌 가에 위치했다.
『파리 박람회 L’Exposition de Paris』에 조선관이 소개되었다.
“조선관은 화려한 색채로 칠해진 목조건물로 극동 건축의 특징적인 위로 치솟은 처마와 큰 지붕으로 덮여 행인들의 관심을 끈다. 독특한 구조의 건축은 왕궁의 알현실에서 영감을 받았다. 벽은 7세기에 만들어진 비단으로 장식되었으며 들어갈 때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패널에는 탈과 연극적인 물건들이 걸려 있다. 진열장에는 황제가 직접 보낸 값비싼 물건들과 대한제국에 가 있던 몇몇 프랑스인이 소장한 것들, 그리고 국가에서 제작한 물건들의 견본이 … 이 모든 것은 조선의 산업 자산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준다.”
[1889년] 영국의 역사가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출생
← Arnold Toynbee, 1974
1889년 4월 14일 태어남 / 1975년 10월 22일 죽음
"타성을 깨고 돌진하려는 창조적 소수에 의해서 역사는 도약하고 문명은 발전하게 된다." - 아널드 토인비
토인비는 역사의 기초를 정치가 아닌 문명에 두고 인류의 문명을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파악한 문명사관으로 유명한 영국의 역사가이다. 19세기 경제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조카로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런던대학교에서 비잔틴과 근대 그리스 교수(1919~24)를 지냈으며, 런던에 있는 왕립 국제관계 연구소의 연구 책임자(1925~55)로도 활동했다. 역사철학을 확립한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12권, 1934~61)에서 역사의 연속성과 반복성에 대한 인식 아래 26개 문명의 발생과 성장, 해체 과정을 비교 분석했다. 토인비는 문명이 엘리트 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물리적·환경적 도전이 아닌 도덕적·종교적 도전에 대응하지 못할 때 생존에 실패한다고 결론지었다.
[1894년] 에디슨이 발명한 영사기 '키네토스코프'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선보임
초기 사진들의 연결수준에서 어느 정도 현재의 촬영기와 같은 개념을 부여할 수 있는 기계들은 발명왕 에디슨과 영화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개발되었습니다.
1892년 촬영장치인 키네토그라프(kinetograph)를 만든 발명왕 에디슨은 1894년 필름을 볼 수 있게 만든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것은 영사기가 아니라, 단지 확대경 뒤로 단조로운 움직임을 보여주는 필름이 든 상자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화 필름 영사기의 시초로 작은 이미지들이 들어 있는 그 상자는 한 번에 한 명의 관객만이 볼 수 있었습니다. 즉, 1명씩 동전을 넣고 보는 '들여다보는 영화'였는데, 약 15초 동안 실물과 똑같이 움직이는 사람과 물체의 필름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www.edufree.co.kr
[1865년] 미국의 링컨 대통령, 극장에서 저격 당함 (다음날 사망)
← 부스
1865년 4월 14일 미국의 링컨(Lincoln, Abraham, 1809~1865) 대통령이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 관람 도중 남부출신의 배우 J. W. 부스(Booth, John Wilkes)에게 저격당했다. 링컨은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암살범 부스는 미국 최남부 순회공연에서 폭넓은 인기를 얻었으며, 남부를 열광적으로 지지해 공공연하게 노예제를 옹호하고 링컨을 비난했다. 그는 1859년에 노예제폐지론자 존 브라운을 교수형에 처했던 리치먼드 민병대에 자원했으며, 남북전쟁 중에는 남부의 비밀첩보원으로 활동했다. 처음에는 링컨 납치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자 암살을 결심했다. 연극의 3막이 진행되는 동안 관람석에서 링컨의 머리 뒤쪽을 향해 총을 쏘고는 "남부는 복수했다"라고 외치며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12일 뒤 연방군이 버지니아의 한 농장 담배창고에서 부스로 알려진 시체를 찾았다. 암살이 성금요일에 이루어져 링컨은 사후에 성인으로 더욱 추앙받았다. /브리태니커
[1702년] “백두산 화산 폭발” 조선시대 네 차례 기록
“정오께 천지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때때로 붉고 노란 불길이 먹구름과 더불어 솟아나는데 유황내가 코를 찌르고 그 열기가 난로같았다. 이튿날 일어나보니 회우(灰雨·잿비)가 산야를 덮어 별천지 같았다. ” 1702년(숙종 28년) 4월 14일, 백두산에서 폭발한 화산을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문헌상에는 백두산 화산폭발이 1413년·1597년·1668년·1702년 네 차례 기록돼 있지만 지질학자들은 277만년 전 이후 모두 358회나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때 ‘해동성국’으로까지 불렸던 발해가 거란 침공 불과 1개월 만에 쉽게 무너진 원인을 백두산 화산폭발과 이에 따른 기후의 한랭화로 해석한 일본 학자의 주장이 몇년 전 국내에 소개돼 관심을 끈 적이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926년을 전후해 백두산에 대규모 화산폭발이 있었고, 화산재가 약 1000km나 떨어진 일본 혼슈 북부 및 홋카이도 일원에까지 날아가 약 1∼5cm 쌓였다고 한다. /조선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일어남
1592년 4월 14일 선조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한국과 일본은 이웃나라로써 우호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으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동아시아를 정복하겠다는 계획으로 동아시아의 출입구인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7년간의 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십만 병력의 일본군은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하고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두달 만에 평양과 함경도까지 점령하여 급기야는 선조임금이 의주로 피난하게 되었다.
1593년 1월 명나라에서 원군을 보내주어 조선군은 평양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해상권을 장악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은 직산까지 점령했으나 조선군에게 다시 패했다. 이런식의 소모전이 계속되었으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전쟁이 끝났다.
전쟁의 결과, 일본은 도요토미 정권이 멸하고 도쿠가와 정권이 세워졌으며 도자기, 활자 등의 활발한 제작으로 새로운 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중국은 조선으로의 무리한 원군 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진 명이 멸하고 청나라가 세워졌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해지고 많은 문화유산을 일본에 빼앗기게 됐다. /조선
[2004년] 통일신라 7세 어린이 유골 발견, ‘인신 공양’ 제사 가능성 제기
2004년 4월 14일 1300년 전 통일신라에 어린이를 산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의 제사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날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이 박물관 미술관 신축 예정지의 왕궁터 우물에서 7~8세 가량의 인골이 출토됐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고대의 어린이 유골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 인골은 깊이 10.27m의 우물 안 뻘층에서 머리를 바닥 쪽으로 향한 채 거꾸로 박혀 있었다.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 김재현 교수는 “유골의 손이 머리보다 아래 쪽에 있었던 것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렇다면 떨어질 때 아직 의식이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 어린이가 추락사했을 가능성과 어떤 제사의식의 희생양이었을 가능성 두 가지 경우를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인골 옆에서 머리가 위쪽으로 향한 소의 상반신 유골 등 동물뼈가 함께 출토됐고, 강돌로 이 우물을 인위적으로 메운 흔적이 드러났다”며 제사의 희생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조선
[1962년] 드브레 프랑스 내각 총사퇴. 후임에 퐁피두 수상
드브레(Debré, Michel, 1912~1996)는 해방 후 드골 장군을 만나 1945년 드골 임시정부에서 활약하다가 1948년 상원의원이 되었다. 일찍이 제4공화정에 대한 반대 진영으로 알려졌으며, 1958년의 드골 복권을 위하여 열심히 활동하였다. 제5공화정 헌법 기초의 중심인물이고 1959∼1962년 제5공화정 초대수상이 되었으며, 1966∼1969년 재무장관·외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1969년 6월 개방정책을 들고 나선 G. 퐁피두 대통령 때 순수·강경파 드골주의의 제동적 존재로 국방장관에 취임하였다. 1972∼1973년 P. 메스멜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yahoo
그밖에
2004년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도가 철새 이동의 핵심경로라고 규명
2004년 국내 최초로 경인교회 직원들, ‘노동조합(노조)’ 설립 신고서 제출
2004년 애국지사 강동석 선생 별세
2004년 한국항공우주산업, 수출용 아파치헬기 동체1호기 출하
2002년 하누치, 마라톤 세계기록 수립
2001년 일본 적군파 해산 공식 선언
1999년 나토 전투기 오폭으로 코소보내 알바니아계 난민 75명이 사망했다고 유고 정부 발표
1995년 배우 겸 가수 벌 아이브즈 85세의 나이로 사망
1992년 독일 적군파 테러 포기 선언
1983년 대도 조세형 탈옥
1982년 중국, 대만에 대한 무기판매 반발. 미국에 항의 각서
1980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임명
1979년 강원도 함백탄광서 화약폭발사고로 26명 사망
1979년 정효주양 두번째 유괴
1977년 미국 정부, 재미영주권 외국인에 북괴지역 여행제한 철폐
1977년 부산-제주 카페리호 취항
1970년 남예멘 내전 종결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국내에서 발효
1967년 한국-스위스 무역협정 체결
1966년 파키스탄 눈사태로 469명 사망
1966년 아프레 이라크 대통령 탑승기 사고로 사망
1964년 동파키스탄에 돌풍. 1천여명 사망
1963년 한국 독립운동가 민필호 사망
1962년 드브레 프랑스 내각 총사퇴. 후임에 퐁피두 수상
1961년 재일교포 북송 재개
1955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의전 병합
1948년 일본 오사카의 교포학교 등 19개교에 폐교령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
1929년 제1회 모나코 그랑프리 대회 개막
1924년 미국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설리번 사망
1907년 14년간 장기 집권한 아이티 대통령 장 클로드 뒤발리에 출생
1875년 일본 입헌정체 수립 공포
1458년 해인사 대장경 50 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