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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9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주일)
보혜사, 바람, 숨결
행2:1~13; 롬8:22~27; 요15:26~27,16:4하~15
여러분,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요? 우리는 무엇하려고 이 땅에 왔을까요? 우리가 사는 목적이 뭘까요? 한때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도 그 이 질문을 했지요.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그 책에서는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첫 번째 목적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라고 답합니다.
저는 요즘 제 스스로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지금 왜 사는 걸까?” 요즘 제 안에서 올라오는 답은 “잘 살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계획되었다”는 말의 제 나름의 해석이기도 합니다. “잘 살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톱 메옷” 하셨습니다. “참 좋다”, “와, 좋구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살면서 우리도 하나님처럼 참 좋다, 아 좋구나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 우리를 지어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면서 만들어 놓은 그 기쁨을, 그 온전함을, 그 행복을 우리가 그대로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요, 하나님의 온전함이요, 하나님의 행복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날 너무 두려워하고, 너무 긴장하고, 너무 눈치보고, 너무 뭔가를 이루려고 애쓴, 누리지 못한 삶이 아쉽습니다. 이때 가장 잘하는 회개는, 지금 편안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후회하느라 지금의 이 행복을 놓치면 어디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이제 실감합니다.
불교에도 이런 선문답이 있지요. 제자가 묻습니다. 도가 무엇입니까?(여기서 도는 궁극적 진리, 실재라고 보아도 좋습니다) 선사가 대답합니다. 평상심이 도다. 제자가 묻습니다. 평상심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합니다. “피곤하면 잠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이건 산중의 선사나 하는, 그야말로 도 닦는 얘기지, 지금 전쟁터 같은 세상을 사는 중생들에게는 너무 한가한 얘기 아니냐, 반문이 나올만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건 말도 안되는 얘기야, 세상은 전쟁터야, 그렇게 생각할수록 우리는 정말 우리 삶을 더 끔찍한 전쟁터로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문을 해볼 수 있지요? 내가 정말 평생을 이런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르려고 세상에 태어난 걸까? 그리고 우리의 이런 태도는 분명 우리 자녀들도 전쟁터로 몰아갈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얘기가 우리 쪽에도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헨리 나우웬이 캘커타의 마더 데레사를 만난 이야기입니다. 당시 나우웬은 여러 가지 많은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었던 터라 테레사의 조언을 듣기로 마음먹고, 그녀와 함께 지리에 앉자마자 자신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들을 쏟아놓기 시작하였답니다. 그녀를 납득시키려고 10분 정도 열심히 설명했는데,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데레사 수녀는 입을 열었습니다. “글쎄요, 당신이 하루에 한 시간씩 주님을 찬양하고 당신 생각에 나쁜 일은 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잘 될거예요.” 나우웬은 이 대답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너무 단순하고 너무 뻔해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대답이 “하나님 편”에서 온 것이고 “자신의 불평의 자리”에서 온 것이 아님을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하나님 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디 먼 데 있는 “도”가 아니라,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하게 존재의 중심을 뚫고 들어오는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흐리멍텅하던 정신을 확 깨게 하는 말이었다는 겁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실재의 말”이라고 했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이런 말을 듣거나 하는 일이 드뭅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천 년 전 일단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경험했던 성령강림의 경험을 되새기면서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는 전례주일입니다. 저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역사했던 그 성령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활동하고 있으며, 그 활동으로 인해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고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경험했던 제자들처럼 그렇게 강력하게 성령의 활동을 경험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지금 성령의 활동은 우리 가운데 활발하고도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고,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여서 예배들 드리고 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실 때쯤 되어 제자들은 이미 풀이 죽어 있었던가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대목에 나오는, 마지막 만찬 때의 예수님의 고별사는 이 장면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떠날 때가 되신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는, 하시고 싶은 남은 이야기를 간곡하게 전해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육신이 이 땅에서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남아있을 제자들을 위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이 읽혀집니다. 그리고 이 보혜사가 하는 일은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를 깨우쳐 “나”(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보혜사”라는 어렵고 생소한 단어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의 번역어입니다. 아마도 우리말은 아닌 것 같고 중국 성경에서 옮겨 온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보혜사”의 우리 말 뜻은 “보호하는 은혜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본래 “파라클레토스”는 “옆에, 곁에, 가까이에”라는 뜻의 전치사 “파라”와 “부름받은, 초대받은”이란 뜻의 <클레토스>라는 단어가 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름받아 곁에 가까이 있는 자” 혹은 “곁에 가까이 있도록 부름받은 자”라는 뜻이지요. 옛날에 도움이 필요한 어떤 사람이 자신을 도울 능력 있는 사람을 불러서 옆에 있게 두었는데, 이런 사람을 “파라클레토스”라 불렀습니다.
여러분, 영화 <변호인> 다 보셨지요. 그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을 떠올려 보면 확실하게 이해가 되지요. 공안검찰에 피소되어 재판을 받는 어리고 약한 피고인을 열렬히 변호하던 그 변호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이렇게 재판을 받고 있는데, 자신 옆에 있어서 전문적으로 변호해주는 사람, 이런 사람이 “파라클레토스”인 것이지요. 이때는 우리는 “파라클레토스”를 “변호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 어떨 때 “파라클레토스”는 옆에서 마음을 알아주고 힘을 주는 상담자가 될 수도 있고, 위로자가 될 수도 있고, 큰 도움을 주는 협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힘없는 약자들의 인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실제적인 의미에서 “파라클레토스”고,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는 사람 옆에서 마음을 들어주고 나눠주는 사람도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세월호나 이태원참사처럼 억장이 무너지는 유족들 옆에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파라클레토스”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파라클레토스들”에 의해 그래도 유지되고 조금이라도 회복되고 새로운 활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은 바로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고 기운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이것이 어디 사회만의 문제겠습니까? 바로 우리의 삶 곁에서 우리를 붙잡아 주고, 우리를 지지해 주고, 우리를 위로해 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요. 참된 파라클레토스인 성령의 기운을 받아 다들 “파라클레토스”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지금 여기까지 살 수 있었고, 회복할 수 있었고, 우리 자신도 누군가의 옆에서 그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을 하는 그 힘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입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보혜사 성령으로 인해 누군가의 “파라클레토스”가 되고 있으며, 또 여러분 옆에 있는 “파라클레토스”를 통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옆에서” 나를 지지하고 위로하고 상담하고, 어떤 때는 하늘의 소리로 일갈하는 그 성령의 활동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가까이에서 그 모든 선한 일들을, 살리는 일들을 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활동을 알아차리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보혜사 성령을 너무 좁은 의미에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교회”, 혹은 “기독교”라는 좁은 장소에서만 활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방언이나 신유은사나 어떤 특별한 뜨거운 부흥집회에서만 활동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들숨과 날숨 안에서 활동하시고, 나와 너의 모든 관계 속에서 활동하시고, 이 세상의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활동하십니다.
보혜사 성령은 지금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전쟁터가 아니며, 너는 전쟁하러 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 너는 행복하려 왔고, 행복이 너의 본질이다. 너는 사랑하러 왔고, 사랑이 너의 본질이다. 네가 어떤 사람으로 살든, 네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은 내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살아있는 동안, 크고 깊게 나를 들여마셔서 막힌 데 없이 시원하게 잘 통하고, 지금 여기서 네가 할 일을 두려움 없이 긴장 없이 평상심을 가지고 편안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너의 진짜 삶을 사는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것이 보혜사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이유이고,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이며, 지금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오늘 시편104편 말씀을 우리는 창조시편이라고 하는데, 세상의 창조사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님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루하카, 당신의 숨/바람)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 현상을 이렇게 묘사한 것 같습니다. 겨우내 죽었던 것 같던 대지에 따듯한 기운이 불면 다시 온갖 생명들이 솟아나 무성한 여름을 맞듯이, 하나님의 바람/기운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불어와 우리의 생명을 인도하시고 우리의 모습을 회복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여기서 성령은 “루하흐, 바람, 숨결, 기운”과 같은 말입니다. 물론 신약에서도 성령은 “바람, 숨결”을 뜻하는 “푸뉴마”입니다. 성령은 세상에 숨 쉬는 모든 것들이 그 숨을, 들숨날숨을 크고 깊게 쉬게 하고, 답답하게 꽉꽉 막혀 있는 곳에 시원한 바람이 불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숨도 쉴 수 없다고 할 때의 그 답답함을, 그 긴장감과 두려움을 잘 압니다. 숨은 단지 물리적이고 생물적인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전체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몸이 힘들고 병들었다면, 우리의 몸이 서로 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힘들다면, 우리의 마음이 꽉꽉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답답하고 힘들다면, 우리의 관계가 막혀 있기 때문이며, 우리 가정이나 공동체 사회가 답답하고 힘들다면, 우리 가정이나 공동체, 사회가 시원하게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바람이신, 숨결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창세기1장은 창조 전 태초의 모습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묘사하지요. 그리고는 “하나님의 영(루하흐 엘로힘)은 물 위에 움직이고 있었다(휘돌고 있었다)”(창1:1~2)고 합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어떤 것도 형체를 드러내지 않은 카오스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그 혼돈의 물 위를 하나님의 영(하나님의 바람)이 휘돌고 있었습니다. 창조는 그 뒤에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혼돈하고 공허하고 심연모를 어둠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마음을 가다듬어 보고 질서를 잡아보려 하지만, 늘 다시 빠르게 혼돈의 물 가운데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생각은 모두 한 덩어리로 붙어 있어 종잡을 수 없고, 마음은 그야말로 원숭이 마음이 되어 날뜁니다. 그리고는 위기 상황을 알리는 경고등이 켜지고 비상벨까지 울립니다. 여러분, 창조 때부터 그랬듯이 그 때에도 하나님의 바람은 여러분 위를 휘돌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삶은 그분 손에 달려 있고, 그분의 영은, 그분의 바람은 여러분을 휘돌고 있습니다. 그때는 그냥 고요히 숨을 쉬십시오. 크고 깊게 숨을 쉬십시오. 바로 그 숨 가운데 성령이 계십니다. 아니 그 숨결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그런 후에 우리의 삶을 다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여러분이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여러분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숨을 그치면, 여러분 옆에 있던 누군가가 다시 그 숨을 숨 쉬게 될 것입니다.
숨을 잘 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무슨 비유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숨이 얼마나 얕은가를 알아차리고 깊이에서부터 숨을 들고 내쉬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성령을 가장 잘 느끼고 알아차리는 첫 걸음입니다. 나머지 모든 성령의 역사는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내쉬는 숨이, 여러분의 숨결이 “파라클레토스”, 보혜사이며 위로자입니다.
오늘 다른 말씀은 더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잘(!) 살기 위함이고, 행복하게 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참 좋다” 하신 그 “좋음”을 우리도 누리기 위함입니다. 사실 이것은 종교적인 것도 아니고, 영적이거나 신비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냥 편안하게 숨을 쉬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그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고, 누구와도 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숨을 여러분이 쉬면 됩니다. 여러분의 숨을 남들이 쉬어 줄 것도 아니고, 또한 여러분도 누구의 숨을 대신 쉬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사랑하는 자녀들, 여러분들은 어떻게든 잘되게 하고 싶겠지만, 그 숨을 대신 쉬어 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숨을 쉬라고 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리 저리 간섭하는 것보다 답답해하지 않고, 훨씬 잘 쉴 것입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을 읽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켈트 영성 전통에 속하는 성녀 콜룸바는 일상의 삶 속에서 성령이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시는지 노래합니다.
나는 주님을 찬양 하였네/ 그분은 모든 것을 보호 하신다네/ 무한히 밝은 질서를 지닌 하늘, 땅, 바닷가, 그리고 밀물.
나는 영혼에 유익한/ 모든 책을 탐독하였네.
때로는 사랑스러운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고/ 때로는 시편을 노래하고/ 때로는 하늘의 왕, 거룩한 대주재를 관상하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일하였네.
이것은 나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네/ 때로는 암초에서 미역을 따고/ 때로는 낚시를 하고/ 때로는 가난한 자들에게 음식을 주고/ 때로는 고독한 암자에 머물렀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