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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5;11-32. 사랑이란? 2025. 3. 16.
오늘은 사순절의 2번째 주일인데 예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 줍니다. 15장의 세 가지 비유 중에 작은 아들의 삶을 위한 여행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는 양의 비유와 드라크마의 비유를 포괄적으로 정리하고 동시에 그 의미를 완성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영적인 깊이를 더해 주는 누가복음의 주제입니다. 잃은 양은 제도권 밖으로 나간 세리와 죄인들이고 드라크마의 비유는 제도권 안에서 잃어버린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주님을 의미하고 둘째 아들은 잃은 양으로, 큰 아들은 드라크마의 비유가 됩니다. 문제는 평온한 가정에 둘째 아들의 요구입니다. 12절,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나중에 받을 수 있는 자신의 분깃을 요구했습니다. 분깃은 유산인데, 유산은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나 세상을 떠날 때에 성립이 됩니다. 신21;17, 장자에게는 다른 아들보다 두 배를 받고, 둘째 아들은 그 유산의 1/3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계시는 아버지에게 요구하는 분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대로 그 몫을 주었습니다. 분깃을 챙긴 아들은 13-16,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자신의 분깃을 받은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간섭이 없는 곳으로 갔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는 귀소본능도 있지만, 아버지의 눈을 피하여 멀리 달아나고 싶은 도피본능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날 때 다시는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생각이 없이 자신의 삶을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문제는 즐겁고 기쁜 삶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꿈을 찾아 떠난 아들의 모든 재산과 능력을 다 소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버려진 인생으로,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17-19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스스로 돌이킨다는 표현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의미이고 정신을 차렸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위하여 떠났던 인생여정에 대하여 뒤돌아보고 뉘우치고 후회를 합니다. 잘못을 깨닫고 아들의 존재가 아닌 품꾼으로 생각을 하고 이전의 아버지의 그늘을 사모합니다. 여러분, 허물과 죄가 무엇일까요? 결핍된 상태입니다. 떠나면 궁핍하고 떠나면 적적하고 외롭고 삭막합니다. 그런데 떠났을 때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기대 때문에 기쁘고, 돌아왔을 때는 또 다른 자각 때문에 기쁩니다. 사람들은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그런 것을 반복합니다, 분깃과 유산과 능력과 젊음 때문에 인생 여정에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떠나는 그 순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뭇 사람의 표적이 되고 우는 사자의 먹이가 되고 악한 사탄 마귀가 달려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생명싸개가 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되는지요? 여러분,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고, 세월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소망하는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가 흔들려도 가야만 하는 사람에게 길이 열리듯이 자신을 기억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오늘 등장인물은 아버지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면 메시지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대부분 둘째아들을 주인공으로 생각하지만 큰아들을 주인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주인공을 아버지로 봅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이 있습니다.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분깃과 몫을 요구 하는 것은 지금 세상을 떠나시라는 뜻인데 살아계시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깃을 요구했는데도 그 분깃을 주셨습니다. 주시는 행위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생명과 바꾸는 물려받은 분깃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마침 그 때에 가뭄이 들었습니다. 겨우 얻은 일자리가 돼지를 키우는 일입니다. 유대사회에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수치를 무릎 쓰고 죽지 못해서 일을 했습니다. 받는 삯은 돼지가 먹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돼지가 먹는 열매를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종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로 살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종으로 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17절에서. 그가 아버지 앞에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생각해내고 리허설을 한 이후에 아버지께로 가기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돌이켰지만 아버지의 집 가까이에서 머뭇거립니다. 먹고 살기 위한 계산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맨발로 달려와서 아들의 목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당시의 문화는 가장이 맨발로 달려오는 것은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왜 이렇게 할까요? 무슨 일을 했으며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기 전에 입을 맞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요? 종들을 시켜서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벌이며 환영을 하는 아버지의 행동은 무엇인가요? 떠났던 작은 아들은 얼마나 기쁠까요? 마음속의 염려가 다 사르륵 녹았고 이제는~~ 하면서 안도의 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버지에 대하여 큰 아들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들어오던 장남은 화를 내고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에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왜 화를 내느냐? 애원을 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요? 큰 아들은 집에서 아버지를 위하여 평생 일을 했는데도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주지 않았는데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하여 소를 잡아 잔치를 한 이유 때문입니다. 공평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은 차별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큰 아들의 불만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합니까? 31-32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로되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다 큰아들의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었다가 살아난 동생을 위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할 잔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잔치가 둘째 아들만을 위한 잔치입니까? 죽었다는 아버지의 죽음이 무엇일까요? 집을 나간 것이 죽음이고 집에 돌아온 것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죽음의 자리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준비한 잔치는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잔치는 큰 아들을 위한 잔치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생각과 마음이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의 사랑입니다. 누가 더 불행한 처지입니까? 둘째 아들의 처지입니까? 큰 아들입니까? 잘못되면 큰 아들이 더 불행한 자리가 됩니다. 이유는 둘째는 이미1/3의 유산을 탕진하였으나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의 재산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물러 받지 않았으나 이 잔치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돌아올 재산을 상속받지 못할 경우가 됩니다. 그럼에도 잔치를 통하여 둘째아들과 큰 아들이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일까요? 거부하지 말고 기쁨에 참여하고, 감사함으로 그 사랑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면 본문이 주는 멧세지는 무엇입니까?
1. 아버지와 두 아들입니다. 본문은 어떤 사람에게 있는 두 아들로부터 시작이 되는데 이 두 아들은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과 배려와 보호에서 행복했습니다.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삶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유는 동생이 자신의 상속부분의 몫을 분배해 줄 것을 요구하며 결국 그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받아야 할 분깃은 간구하여 받은 물질의 축복입니다. 요구하는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이 됩니다. 재물과 능력이 주어지자 둘째 아들의 마음속에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가 올 세상에 대하여 파악을 못하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을 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떠난 여정이 세상으로 흘렀습니다. 지적을 해도 듣지 않았고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전하고 전혀 다른 환경인데 정작 본인은 모릅니다. 눅12;13-20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도 재물이 갑자기 많아지자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육신적인 안일과 향락과 즐거움으로 살았습니다. 간섭과 지도와 추궁과 꾸지람이 없는 먼 나라로 재산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들 아닙니까? 주님을 떠난 사람의 결국이 어떻게 되나요?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떠난 아들인데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비참함에서 끝나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자신의 삶을 위하여 떠난 아들을 누구보다도 기다리는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과 인내와 끝까지 찾아 나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결국에는 아들을 위하여 묻지도 않고 거리가 멀지만 다가가서 맞이하고 입맞춤을 합니다. 있을 때는 몰랐는데 빈 공간이 너무나 컸습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순종하면서 아버지 곁에서 살았습니다. 매일 같은 모습과 동일한 수고이었습니다. 의미가 없는 삶 같았지만 쌓여가는 삶을 살았는데 이 장면을 보게 되었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1-1 동생이 간 먼 나라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먼 나라입니다. 여러분, 몰입은 좋은 것입니다. 삶을 위한 몰입은 더욱 그렇습니다. 소유와 능력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소망이 됩니까? 그런데 먼 나라는 한번 들어가면 소유한 것이 다 없어져야만 하는 세상입니다. 가지고 있는 소유와 능력 때문에 처음에는 즐거움의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믿음에서 떠나게 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먼 나라가 되었습니다. 13-14. 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이후에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방탕했습니다. 다 소진되었고 소유가 없습니다. 없는 것에 더하여 때 마침 큰 흉년이 왔습니다. 우연일까요? 세상과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고 아들을 밟았습니다. 맛 잃은 소금으로 밟혔습니다. 세상적인 생활에 젖었고 육신의 정욕대로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닙니다. 손에 있는 그 무엇이 없습니다. 왜 요? 재물에 날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능력도 한 순간입니다. 그래서 비참한 삶이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돼지를 관리하는 돼지치기로 들어갔습니다. 가장 비참한 자리입니다. 왜 이토록 철저하게 비참하게 될까요? 왜 비참함으로 간섭하실까요? 무조건적인 사랑의 역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을 당할 때 깨닫지 못하면 계속적인 비참함이 이어지지만 가장 곤고한 가운데서 자신의 눈을 아버지의 집을 봅니다.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필요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품이 그리웠습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양식과 풍족한 품꾼이 보였습니다. 넉넉하여 부족함이 없는 것이 보였습니다.
1-2. 다시 돌아 온 아버지의 집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들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새로운 삶을 위한 여정이 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 갈 것을 결심하고 돌아가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돌아 서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미약한 사람입니다.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품꾼으로 사는 여정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들의 새로운 면과 변화의 모습입니다. 발걸음을 아버지께로 돌이켰습니다. 연락도 안했는데, 먼 거리에서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두 손을 들고 환대를 했습니다. 이전의 사랑했던 아버지와 평범했던 집이 눈에 들어오고 불안했던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큰 경사가 났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잔치가 열리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경사가 왜 났습니까? 아버지의 집 가까이 왔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삶의 여정은 없음에서 시작이 되었고 자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온전한 회개는 아니지만 자신의 삶의 처지에서 돌아섰습니다. 여러분, 마음이 허전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빈손이고 갈 곳이 없습니까? 반겨주고 기댈 수 있는 그 무엇이 없습니까? 도와 줄 사람도 없고 내 자신이 감당해야만 하는 아픔 뿐 입니까? 지나온 삶과 세월이 너무나 후회가 되십니까? 알지 못하는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만 하십니까? 그래도 이제는 이 현장을 꼭 떠나야만 하는, 쥐엄 열매조차도 받을 수 없는 그런 처지입니까? 내일과 미래에 대한 대안이나 답이 없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순간도 나를 찾고 찾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찾고 찾으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의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찾고 찾으시는 주님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요17;3,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여러분, 예배를 왜 드리십니까? 교회를 왜 나오시고 예배를 왜 드리십니까? 나를 끝까지 찾고 찾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를 지금 이 상황에서도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알아가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둘째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기억했고 아버지의 집을 찾았습니다. 가까이 할 수가 없어 서성거렸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한 새로운 여정에 그럼에도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이것이 사순절을 지나는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2. 찾고 찾으시는 아버지가 누구이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게 주님을 제대로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수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과 수많은 종교가 하나님을 정확하게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알려주기 위하여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쉬운 성경, 요1;18절.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 곁에 계시던 독생자이신 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요14;8 이하에 빌립이 예수님에게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시오. 그 때, 주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하려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알려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알려 주실까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은 무엇보다 먼저 바로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고 만나야 할 하나님은 다른 분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가르쳐줍니다. 구약에는 15번, 신약에는 414번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사복음서에만 274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170번이나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그분, 예수님의 아버지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찾고 찾으시는 아버지입니다. 고후6;18, 하나님은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잃은 아들을 찾는 아버지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성품이 어떠한지를 배우게 됩니다. 눅15;1-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왔습니다. 같이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고 비난을 했습니다. 왜요? 아니 예수님은 저 사람들이 세리들과 죄인들인 줄 모르나?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식사를 하지?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을 심판을 하실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고쳐주시려고 내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다. 아버지는 찾고 찾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셨는데, 바로 또한 예수님이 나를 찾고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비유가 양을 끝까지 찾고 찾으시는 목자인데 역할이 무엇입니까?
2-1. 찾고 찾지만 무엇이든지 허락하시는 아버지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깃을 일찍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당시 율법에는 두 아들이 있으면, 아버지의 재산 중에 2/3는 큰 아들에게, 그리고 1/3은 둘째 아들에게 유산으로 주어야 합니다. 둘째 아들이 이것을 알았고 이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부당한 요구입니다. 버젓이 살아계시는데, 유산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보고 빨리 죽으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아버지는 그냥 두지 않고 못된 아들을 혼내 주고 타이릅니다. 그런데 오늘 아버지는 그냥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는 찾고 찾으시지만 허락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왜요? 인격적인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만 주신 것이 아니라, 자유도 함께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요하시거나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고 허락하시는 인격적인 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영적인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허락하심은 다를 수 있습니다. 허락은 하시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습니다.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게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는 데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무엘을 찾아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주십시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아시고 허락하셨습니다.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고후6;14.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서 기도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잖아요? 철야기도와 금식기도까지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물론 고생을 시키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이고 믿어도 좋다고 베드로가 말할 때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그냥 두셨습니다. 왜요? 주님은 베드로가 그 실패를 통해 다시 일어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주셨는데, 예수님의 기대대로 실패한 이후에 베드로는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여러분,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인상을 쓰고 소리를 지르고 눈을 부릅뜨고 아니요. 아니요. 바로 지적을 했습니다만 이제는 허락하고 내 버려두고 눈을 감고 감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과 믿음과 기대는 여전합니다. 담즙이 올라오고 쓴 신물이 올라오고 어느 때는 잠시 떠나고 싶지만 그래도 허락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다시 축복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모든 의욕과 용기와 열정이 식고 기도가 막히고 아픔과 괴로움이 밀물처럼 쯔나미가 되어 다가오지만 교우들을 향한 기대는 주님의 심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찾고 찾으시되 모든 것을 허락하시는 주님을 바로 알고 깨닫고, 닮아 가는, 그래서 주님의 인격적인 부분을 품고 주님의 심장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잃어버릴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사랑을 덧입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유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가서 유산을 다 소비했고 그 땅에 흉년이 크게 들었습니다. 궁핍하게 되었습니다. 겨우 어떤 사람에게 빌 붙여 살게 되었는데, 들로 보내어져서 돼지를 키우는 일을 합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처량한 신세입니다. 품을 떠나면 이렇게 됩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옵니다. 여러분, 무엇이 이 아들을 아버지에게 돌아오게 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흉년 때문이고, 먹을 것이 없음이라고 합니다. 둘째 아들은 풍요를 꿈꾸면서 여행을 떠났는데 풍요가 아니라 흉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잔소리와 간섭이 없는 화려한 자유를 꿈꾸었는데 흉년을 만나 돼지를 키우는 노예로 전략했습니다. 뼈저린 추위와 외로움을 경험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흉년을 경험하셨습니까? 더 늪으로 빠지십니까? 눈물이 흐르십니까? 하지만 찾고 찾아야만 하는 확실한 때가 있고, 찾고 찾을 수 있는 터닝 포인트가 있습니다. 흉년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흉년이 비로소 아버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17절,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여러분, 인생의 흉년을 만나면 현실을 직시하고, 비로소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얼마나 많은가, 종들까지도 풍족하게 먹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영어성경은 스스로 돌이켜 He came to himself 라고 표현했습니다.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먼 나라로 가서 마음대로 살려고 했는데, 사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생각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래 나는 주님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어,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려도 주님을 잃어버리면 안 돼. 여러분, 이 아들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 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아버지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 돈과 건강을 잃을 수는 있어도, 능력을 소진할 수 있어도, 결코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와 주님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흉년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흉년을 만나면 그 흉년 속에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찾고 찾으시는 주님이시고 그 찾고 찾으시는 것 때문에 허락하신 흉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찾고 찾으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기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20절,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직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라는 표현은, 문자적인 거리와 함께 마음으로 느끼고 있을 심리적인 거리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나를 받아주실까?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내가 얼마나 비웃었는데. 이런 심정입니다. 18-19.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 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슴에 품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는 심리적인 거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누가 누구를 보았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보았습니다. 누가 먼저 발견했습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발견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아들을 발견했습니다. 누가 누구에게로 달려갔습니까? 아버지가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집나간 아들이 아버지를 먼저 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보았습니다. 측은히 여겨서 먼저 달려갔습니다. 주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아들의 회개하는 마음보다 더 빨랐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용서는 돌아서는 우리들의 발걸음보다 더 빠릅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그분이 기다리시는 주님입니다. 제일 좋은 옷인데 새 옷과 의의 옷을 입혀줍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는데 너는 내 아들이라는 언약의 반지를 끼워주셨습니다. 신발을 신겨주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무슨 잔치입니까? 십자가의 잔치입니다. 이 땅에 죄로 죽을 수밖에 없고 죽었던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미리 용서하신 내용입니다. 내가 받아야할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너의 모든 죄악과 허물은 다 해결되었다고 그래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잔치입니다. 여러분, 내 자신을 무너트리는 두 가지가 무엇일까요? 우월감과 열등감입니다. 어디서 나왔나요? 비교의식이라는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에서 우월감이 만들어지고, 거기에 미치지 못했을 때 태어나는 것이 열등감입니다. 그러면 집을 나간 아들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용서해놓고 기다리셨습니다. 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의 기쁨과 감격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너는 죽었다가 다시 산 내 아들이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내 아들이다. 주님은 아버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허락하시고 기다리시되 찾고 찾으시는 주님을 통해서 늘 일어나시고 늘 돌아오셔서 이전의 은혜의 울타리 안에서 의의 옷과 언약의 반지와 발의 신을 신고 잔치의 주인공이 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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