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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선생문집 제20권
※ 서산선생은 김흥락[金興洛, 1827(순조 27)~1899(광무 3)] 선생을 말합니다.
묘갈명(墓碣銘)
성균 진사 김공의 묘갈명(成均進士金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은 휘가 응규(應奎)이고 자가 숙문(叔文)이며 성은 김씨이다. 신라 왕자 흥광(興光)이 나라가 장차 혼란해질 것을 알고, 광주(光州) 평장리 (平章里)로 은둔하였는데, 자손들이 이로써 관향을 삼았다. 신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들로 빛나고 우뚝
하여, 시호가 내려지고 군君에 봉해진 분이 무릇 15세(世)에 달한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정(鼎)과 약채(若采)가 광성군(光城君)을 세습하였고, 열(閱1)은 형조 참의를 지냈는데, 호는 퇴촌(退村)이며 문장과 절행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용석(用石2)은 진사로 점필재(佔畢齋3)의 문인이며, 연산군 초에 안동 구담(九潭)으로 피신하였으니, 호는 담암(潭庵)이다.
둘째 아들 균(筠)이 언구(彥球4)를 낳았는데, 생원이며 호는 쌍벽당(雙碧堂)이다. 이분이 득려(得礪)를 낳았는데, 역시 생원이다. 여러 세가 지난 뒤 석중(錫重)은 호가 잠곡(潛谷)으로 경당(敬堂5) 장 선생張先生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경학을 깊이 연구하고 은거하며 뜻을 구하였는데, 이분이 공의 9세조이다.
4세 뒤에 광현(光鉉6)은 호가 삼사와(三思窩)이 고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분이 홍경(弘景)을 낳았다. 홍경이 백사(百師)를 낳았는데, 아들이 없어 아우 백선(百善)의 맏아들 해윤(海潤)을 후사로 삼았다. 또 아들이 없어 종제 동윤(東潤)의 맏아들 명희(命曦)를 후사로 삼았는데, 바로 공의 고조할아버지 ․ 증조할아버지 ․ 할아버지 ․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충재 선생(冲齋先生)의 후손이며, 찬도(纘度)의 딸이다.
공은 순조 정묘년(丁卯年, 1807, 순조 7)에 태어나 금상(今上) 정묘년( 丁卯年, 1867, 고종 4) 9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유지에 따라 본가 뒤 서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영특하여, 겨우 글자를 배우면서부터 이미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증숙조(曾叔祖, 작은 증조할아버지) 백겸(百兼)에게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고문(古文)을 익히고 질의하며 날마다 수십 쪽을 외우니,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공보다 앞서지 못하였다.
15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였지만,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어른처럼 하였다. 모친은 성품이 엄하고 자녀를 가르침에 법도가 있었는데, 공은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지극하게 갖추어 그 뜻을 받들어 따르면서 어긋남이 없게 하였다. 여러 아우와 누이들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고, 부지런하고 검소함으로 집안을 유지하였으며, 손님을 맞고 제사를 지내는 일에는 공손함과 엄숙함으로 행하였다.
친족들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도탑고 화목하게 하고, 죽은 이를 돌보고 살아 있는 이를 구휼하여 남들이 따라갈 수 없는 점이 있었다. 성품은 베풀기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의 궁핍함을 들으면, 자신의 것을 가지고 가서 구제해주었다. 향리에 있으면서는 곧고 바른 말을 서슴없이 하였고,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은 앞으로 나서서 자신이 떠맡아 하면서 남들의 말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남들의
탐욕스러운 비루함과 방자한 행동을 보면 그때마다 엄중한 말로 질책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840, 헌종 6) 사마시에 올랐는데, 동년(同年7)들이 모두 은문(恩門8)에 나아가 절하였지만, 공은 즐겨하지 않으면서 “과거에 오른 일을 빙자하여 귀하고 현달한 가문에 출입하는 것은 내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감추었고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세상에는 뜻이 없는 듯이 하였다.
집안에서도 조정에서처럼 엄숙하였는데, 집안사람들을 매우 엄하게 단속한 것은 허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또한 일찍이 친밀과 소원함, 후대와 박대에 경계를 두지 않았으며,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조용히 속내 를 토로하였고, 고금을 담론하며 끝없이 이어져 들을 만하였다. 때때로 꽃피는 아침 달 밝은 저녁이면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불러 경치 좋은 산과 계곡을 찾아 소요하고 편안하게 앉아 유연히 세속을 벗어난 듯하였다.
아! 공은 강개한 품성으로 시례(詩禮9)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자신을 검속하고 집안을 바르게 하였으며 육행六行10)을 모두 겸비하였다. 그의 자취의 시종은 옛 사람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지만, 끝내 불우하여 때를 만나지 못하고, 깊이 감춘 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애석하도다.
부인은 의인(宜人1) 풍산 류씨(豐山柳氏)인데, 통덕랑 병조(秉祚)의 딸이요, 서애 선생(西厓 先生)의 9세손으로 지아비를 섬겨 부덕(婦德)에 어긋남이 없었다. 2남을 두었는데, 성수(聖洙)와 태수(泰洙)이다. 딸은 사인 정선(鄭宣) ․ 황기원(黃基遠)에게 각각 시집갔다.
서자는 달수(達洙)와 진수(晉洙)이다. 성수는 3남을 두었는데, 용정(容正) ․ 용지(容止) ․ 출계한 용립(容立) 이다. 딸은 김익모(金翊模)에게 시집갔다. 태수는 1녀를 두었는데 김혁림(金赫林)에게 시집갔고, 용립을 양자로 들였다. 정선의 아들은 원섭(元燮)이고 딸은 홍승우(洪承禹) ․ 이수성(李壽星) ․ 김규칠(金奎七)에게 각각 시집갔다. 황기원의 아들은 노흠(魯欽)이다. 달수의 자녀는 어리다.
태수 씨가 나와 친분이 두텁다고 묘갈명을 부탁하였는데,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세상은 급히 내달려 가는데 世馳騖而往
공은 어찌 그리 고고하기만 하며 公何揭揭
뭇 사람들은 입 다물고 사는데 衆噎喑而生
공은 어찌 그리 직언만 하셨나 公何諤諤
옛 법도에는 맞으나 지금은 맞지 않아 諧於古不諧於今
산과 들에 시들어 떨어져 마땅하네 宜其枯黃而嵌澤
[脚註]
1) 김열(金閱, 1377∼1448) :
자는 자득(子得), 호는 퇴촌(退村),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총명 효우하고 문학이 일찍 성취하였으며 풍채와 위엄이 남달라 세상 사람
들의 추중을 받았다. 태종조에 음직으로 벼슬에 올라 형조도관 좌랑(刑曹都官佐郞)으로 재직하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향리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형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2) 김용석(金用石, 1453∼1523) :
자는 연숙(鍊叔), 호는 담암(潭庵), 본관은 광산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정여창과 같이 동문수학하였다. 1472년 진사
시에 합격하고 문과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3) 점필재(佔畢齋) :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호이다. 자는 효관(孝盥)·계온(季昷), 본관은 선산이다. 1459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참판·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항상 절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하였으며, 그 정신이 제자들에게까지 전해져 이들 또한 절의를 높이고 의리
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4) 김언구(金彦球, 1507∼?) :
자는 대명(大鳴), 호는 쌍벽당(雙碧堂), 본관은 광산이다.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학문이 고매하였다.
5) 경당(敬堂) :
장흥효(張興孝, 1564∼163)의 호이다. 자는 행원(行源), 본관은 안동이다. 처음에 김성일(金誠一)·류성룡(柳成龍)을 사사하고, 뒤에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문명이 높았다. 평생을 처사(處士)로서 학문과 강학에만 전념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 하였다. 특히
역학 (易學)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뒷날 지평에 추증되었다.
6) 김광현(金光鉉, 1685∼172) :
자는 옥이(玉耳), 호는 삼사당(三思堂), 본관은 광산이다.
7) 동년(同年) :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榜目)에 함께 적힌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8) 은문(恩門)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자신을 뽑아준 시관(試官)을 은문이라 한다.
9) 시례(詩禮) :
대대로 시(詩)와 예(禮)를 가르침으로 전하는 집안이라는 말로, 논어 「계씨(季氏)」에 “내[鯉]가 종종걸음으로 뜰을 지나는데, ‘시를 배
웠느냐?’라고 물으시기에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 없다.’라고 하시므로 내가 물러가 시를 배웠노라.
[鯉趨而過庭 曰學詩乎 對曰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라고 한 것과 “‘예를 배웠느냐?’라고 물으시기에 ‘못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라고 하시므로, 내가 물러 나와 예를 배웠노라.[學禮乎 對曰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
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10) 육행(六行) :
여섯 가지의 선행(善行)으로, 효(孝)‧우(友)‧목(睦)‧인(婣)‧임(任)‧휼(恤)을 말한다.
11) 의인(宜人) :
외명부(外命婦)의 봉작으로, 정‧종 6품의 문무관 아내와 정‧종 6품의 종친(宗親)의 아내 봉작으로 아울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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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成均進士金公墓碣銘 幷序。
諱應奎字叔文姓金氏。羅王子興光。知國將亂。遯于光州之平章里。子孫仍貫焉。由羅及麗。珪組燀爀。贈諡封君。凡十五世。入我朝。有諱鼎,諱若采。世襲光城君。諱閱秋曹參知。號退村。以文章節行名世。諱用石進士。佔畢齋門人。燕山初。避地于安東之九潭。號潭庵。第二子諱筠。是生諱彥球生員。號雙碧堂。是生諱得礪。亦生員。數世諱錫重號潛谷。遊敬堂張先生門。沈潛經學。隱居求志。於公爲九世。四世諱光鉉號三思窩。壽僉樞。生諱弘景。生諱百師。無嗣。以弟諱百善長子諱海潤後。又無嗣。以從弟諱東潤長子諱命曦後。是公高曾祖考。妣安東權氏。冲齋先生後。纘度女。公生純廟丁卯。卒今上丁卯九月十日。葬家後負庚原。從遺意也。公幼俊爽聰穎。甫學字。已出驚人語。稍長。從曾叔祖百兼學。講質古文。日誦數十板。同學者。皆莫之先焉。成童。遭先公憂。哀慕如成人。母夫人性嚴。敎子女有法。公愛敬備至。承順無違。友諸弟妹甚篤。持家勤儉。謹於賓祭。處族親。一於敦睦。庇化恤生。有人不可及者。性喜施。聞人匱乏。推其有以濟之。其在鄕閭。直言讜議。義所當爲。向前擔夯。不顧人言。見人貪鄙自恣。輒嚴辭切責。庚子中司馬。同年皆往拜恩門。公不肯曰憑藉科名。出入貴顯之門。吾所恥也。自是杜門屛迹。優遊林坰。若無意於世者。門庭之內。肅然如朝廷。曰家人嗃高。所以爲無咎。然亦未嘗以親疎厚薄置畦畛。遇會心人。從容披露。揚扢古今。纚纚可聽。有時花朝月夕。招呼同志。逍遙盤礴於溪山勝處。悠然有出塵之想也。於乎。公以剛介之稟。襲詩禮之傳。飭身正家。六行皆備。跡其終始。可求諸古人。而卒落拓不遇。沈晦以歿世。惜也。配宜人豐山柳氏。通德郞秉祚女。西厓先生九世孫。事君子無違德。生二男聖洙,泰洙。女適士人鄭宣,黃基遠。餘男達洙,晉洙。聖洙三子容正,容止,容立出。女金翊模。泰洙生一女金赫林。嗣子容立。鄭男元燮。女洪承禹,李壽星,金奎七。黃男魯欽。達洙子女幼。泰洙甫以事契之厚。責以牲石之文。義有不敢辭者。銘曰。
世馳騖而往。公何揭揭。衆噎喑而生。公何諤諤。諧於古不諧於今。宜其枯黃而嵌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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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사 류공 묘갈명(處士柳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의 휘는 진우(進瑀)이고, 자는 하형(夏亨)이다. 류씨는 풍산(豐山)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은사 급제(恩賜及第12)한 백(伯)이 먼 조상이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휘 종혜(從惠)는 공조 전서(工曹 典書)를 지냈으며, 5세 뒤 중영(仲郢)은 관찰사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니 호는 입암(立巖)이다.
이분이 성룡(成龍) 시호 문충(文忠)을 낳았는데, 성대한 덕행과 큰 업적으로 백세의 스승이 되었으니, 바로 서애 선생(西厓先生)으로 공과는 7세의 간격이 있다. 이분이 여(袽)를 낳았는 데 찰방을 지냈고 장령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원지(元之)를 낳았는데 현감을 지냈고, 두터 운 덕망과 심오한 학문으로 세상의 중망을 받았으며, 호는 졸재(拙齋)이다.
고조부는 성오(聖五), 호는 만휴(晩休)이다. 증조부 규 는 경학과 행실로 부름을 받아 관직이 도정(都正)에 올랐으며 호는 임여재(臨汝齋)이다. 조부는 약춘(若春)이다. 부친은 운조(雲祚)이고, 모친은 풍산 김씨(豐山金氏)로 종호(宗鎬)의 딸이며 죽봉(竹峯) 간(侃)의 후손이다. 공이 태어나서 겨우 이를 갈 만한 나이였을 때, 임여공의 명으로 출계하여 중부 학조(鶴祚)의 후사가 되었다. 어머니 는 진성 이씨(眞城李氏)로 생원 상기(尙璣)의 딸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중후하고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삼종숙 눌와공(訥窩公) 강조(岡祚13)에 게 나아가 공부하였는데, 과정을 독려하느라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 노력할 줄 알았다. 당시 정간공(貞簡公) 상조(相祚14)와 학서공(鶴棲公) 이태좌(李台佐15)가 일족 가운데 종주가 되어 문교(文敎)를 관장하였다. 공은 약관의 나이로 따라 공부하여 문예가 문득 선두를 차지하였으며, 지취와 숭상함이 범상하지 않아 두 공이 기대하고 허여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840, 헌종 6)에 아우 진휘(進徽16)와 함께 성시(省試)를 보았는데, 공만 홀로 낙방하였으 나 태연한 듯 안타까운 기색이 없이, “부모님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에 아우와 나 사이에 어찌 간극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을사년(乙巳年, 1845, 헌종 11) 봄에 향시를 보러 갔다가 선친의 부고를 들었기에,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을 평생토록 애통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벼슬에 나아가려는 뜻을 버리고, 기거하는 곳을 ‘송주일거(松洲逸居)’라고 이름하고, 낮에도 문을 닫고 고요하게 거처하면서 독서로 뜻을 구하였으며, 후진들을 장려하고 이끄는 데 뜻을 두어 교육의 조목을 세우고 과정을 부지런히 가르치니 자못 진작되어 점차 흥기됨이 있었다.
병술년(丙戌年, 1826, 순조 26) 정월 4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태어난 무진년(戊辰年, 1748, 영조 24)으로부터 79년 뒤이다, 명동(命洞)에 있는 부인의 묘 앞 사향(巳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덕유(德裕)의 딸이며, 추월당(秋月堂) 산두(山斗)의 후손이다. 현숙한 부인으로서의 덕에 어긋남이 없었고, 갑자년(甲子年, 1744, 영조 20)에 태어나 공보다 17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둘을 두었으니 진사 도직道直과 도평道平이고, 두 딸은 권성權鋮 ‧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낸 강호姜濩에게 각각 시집갔다.
도직의 아들은 수영(守榮)이고, 딸은 이석일(李錫一) ․ 이종대(李鍾岱)에게 각각 시집갔다. 도평의 아들은 대영(岱榮)이고, 딸은 전재수(全在銖)에게 시집갔으며, 둘째 아들은 어리다. 권성의 아들은 준헌(準憲)과 준덕(準悳)이고, 딸은 정원섭(鄭元燮)에게 시집갔다. 강호의 아들은 학원(鶴元)과 귀원(龜元)이고, 딸은 이민화(李敏和) 와 진사 이시호(李是鎬)에게 시집갔다.
공은 타고난 품성이 온화하고 의지가 굳세었으며, 대대로 전해오는 가훈으로 사숙하여, 간결하면서도 엄중하였고 온화하면서도 아담하여 덕기가 일찍 갖추어졌다. 어버이를 모심에 항상 기쁜 낯빛으로 하였고,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렀으며, 상제(喪制)를 마치고도 슬픔이 남아 잊지 못하였다. 3형제가 모두 칠순의 나이를 누렸는데, 한 집에서 기거하며 화기애애하여 이불을 같이 덮고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고아가 된 조카를 자신 의 자식처럼 돌보고, 친족을 대할 때는 항상 장공예(張公藝)의 백인계(百忍戒)를 마음에 지녔다. 친구와 사귈 때는 구차한 농담을 일삼지 않고 정성을 다하면서 오래되어도 정성이 쇠하지 않았고,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나면 곳간을 다 기울여 대접하였다.
다른 사람의 선행을 널리 드러내었고,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인도하고 가르치되 가혹하고 너무 심한 말로 따지지는 않았으며, 환란에 처한 급박한 사람을 보면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다. 집이 가난해도 재물을 늘리는 데 힘쓰지 않으며 “나는 재산을 남기려 하지 않고, 다만 곤궁해도 힘써 면학하여 선대부터 전해 오는 법도를 잃지 않기를 원하니, 재산을 남겨 위태롭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자제들에게 삼가 본분을 지키도록 신칙하고,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분별을 살피도록 하였다. 여러 아들이 연이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공은 그것을 영화롭게 여기지 않았으며, 작은 것을 얻고서 크게 여기는 마음이 있을까 경계하였다.
만년에 염락주퇴(濂洛朱 退17)의 글에 뜻을 두고, 매일 고요한 새벽과 밤이면 여러 편을 낭송하였다가 배우는 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평생토록 임기응변의 기교나 궤변과 격앙된 행동을 하지 않았다. 풍모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논의가 충성스럽고 올발랐기에 공사(公私)간에 의문되는 어려움이 생기면 공의 한마디 말을 기다려 결정하였다.
시문(詩文)에는 문장 다듬는 것을 일삼지 않고 전아하고 청소(淸疎)함을 따랐으니, 그 사람 됨됨이와 유사하였다. 아아, 명성과 이로움이 사람을 유혹하니 쫓아가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이와 같이 넘쳐나거늘, 공은 과거(科擧)의 구덩이에서 벗어나 맑음과 담박함으로 집안의 계책을 삼고 명교(名敎18)를 즐거움의 바탕으로 삼아 생을 다할 때까지 이를 기쁘게 행하여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것을 맛보았다.
옛 규범을 계승하여 지키며 향리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이른바 문자를 알고 도리를 지키어 세상의 법도를 유지한 자는 공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겠는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아! 빛나도다 하회여 於赫河東
대대로 그 명성 드날렸도다 世颺厥聲
공은 남겨진 가르침 이어받아 公襲餘敎
엄히 하지 않아도 이루어졌네 不肅而成
효도와 우애에 정성을 다하고 懇懇孝友
성현 말씀에 부지런히 힘썼으며 亹亹聖言
팔순에도 덕을 좋아하여 八旬好德
작위가 없어도 존귀하였네 匪爵而尊
나의 묘지명 부끄럽지 않으니 我銘不媿
후손들이 이를 징험하리라 庶徵來昆
[脚註]
12) 은사급제(恩賜及第) :
과거에서 정원 외에 특별히 급제를 허락하던 일로, 대개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한 사람에게 특별히 등외의 급제를
허락하였다.
13) 류강조(柳岡祚, 1763∼1783) :
자는 일성(日成), 호는 눌와(訥窩), 본관은 풍산이다.
14) 류상조(柳相祚, 1763∼1838) :
자는 이경(爾敬), 호는 일우(逸愚), 본관은 풍산이다. 류성룡의 8대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병조 판서‧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올랐으며 풍안군으로 봉군되었다.
15) 류이좌(柳台佐, 1763∼1837) :
자는 사현(士鉉), 호는 학서(鶴棲), 본관은 풍산이다. 1794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로 관직을 시작하여 홍문관 교리‧동부
승지‧호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학서집( 鶴棲集)이 있다.
16) 류진휘(柳進徽, 1814∼181) :
자는 순형(舜亨), 호는 와서(瓦西), 본관은 풍산이다. 1840년 사마시 합격하였고, 고원 군수를 역임하였다.
17) 염락주퇴(濂洛朱退) :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頤)․ 정자(程子)․ 주자(朱子)․ 퇴계(退溪)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18) 명교(名敎) :
유가가 정한 명분과 교훈을 준칙으로 하는 도덕 관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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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處士柳公墓碣銘 幷序
公諱進瑀字夏亨。柳氏出豐山。高麗恩賜及第伯。其遠祖也。入我朝。有諱從惠工曹典書。五傳而諱仲郢觀察使。贈領議政。號立巖。生諱成龍諡文忠。以盛德大業。爲百世師。卽西厓先生。於公間七世。生諱袽察訪。贈掌令。生諱元之縣監。以厚德邃學重於世。號拙齋。高祖諱聖五號晩休。曾祖諱。以經行召。官都正。號臨汝齋。祖諱若春。考諱雲祚。妣豐山金氏。宗鎬女。竹峯侃之後。公生纔齔。以臨汝公命。出爲仲父諱鶴祚後。妣眞城李氏。生員尙璣女。公幼重厚有器度。從三從叔父訥窩公岡祚學。不煩程督。而自知勉勵。時貞簡公相祚,鶴棲公台佐。主宗盟掌文敎。公弱冠從遊。詞藝輒居前列。趣尙不凡。二公期許之。庚子與弟進徽。同赴省試。而公獨抱屈。夷然無恨色。曰慰悅親心。弟與我奚間。乙巳春赴鄕試。聞先公喪。以未及臨訣。爲終身痛。自是倦於進取。命其軒曰松洲逸居。日杜門靜處。讀書以求志。奬率後進。立敎條課勤慢。頗有作興之漸。丙戌正月四日終。距其生戊辰七十九。葬命洞夫人墓前巳向之原。夫人淸州韓氏。德裕女。秋月堂山斗之後。媲德無違。生甲子。先公十七年歿。有二男道直進士,道平。二女權鋮,姜濩文科正言。道直男守榮。女李錫一,李鍾岱。道平男岱榮。女全在銖。次幼。權男準憲,準悳。女鄭元燮。姜男鶴元,龜元。女李敏和,李是鎬進士。公天稟和毅。淑以世訓。簡重溫雅。德器早就。事親色養。善於居喪。制除。餘哀未忘。兄弟三人。年皆七旬。怡愉一室。共被分味。撫孤姪如己子。處族親。常持張公藝百忍之戒。朋友之際。不苟言笑以致款。久而不衰。遇會心人。倒盡囷廩。揚人之善而誨誘其不及。未嘗爲刻核已甚之言。急人患難。能盡其心力。家貧不營殖。曰吾無以貲業遺之。但願固竆力學。無失先故遺模。則不猶愈於遺之以危者乎。敕子弟謹守本分。審於內外輕重之別。諸子相繼陞庠。則公不以爲榮。而有得小爲多之戒。晩年留意濂洛朱退書。每晨夜虛靜。朗誦數篇。因擧似學子。陳說其義。平生無機變之巧詭激之行。風儀整肅。議論忠讜。公私疑難。待公一言而定。所爲詩文。不事雕繢。而率典雅淸疎。類其爲人。於乎。聲利誘人。往而不返者。滔滔是也。而公能脫出科臼。冷淡爲家計。名敎爲樂地。竆老衎衎。味人所不味。嗣守舊範。爲鄕里之模楷。所謂知文字識道理。扶持世道者。非公之謂歟。銘曰。
於赫河東。世颺厥聲。公襲餘敎。不肅而成。懇懇孝友。亹亹聖言。八旬好德。匪爵而尊。我銘不媿。庶徵來昆。<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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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행 청송 부사 이공의 묘갈명(通訓大夫行靑松府使李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의 휘는 교영(敎英)이고 자는 화여(華汝)이며 성은 이씨(李氏)이니, 세계(世系)가 진보(眞寶)에서 나왔다. 생원으로 밀직사에 추증된 석(碩)이 그의 상조(上祖)인데, 이분이 송안군(松安君) 자수(子脩)를 낳았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는 우(堣)가 호조 참판을 지냈으며 호는 송재(松齋)이다. 6세 뒤 동표(東標)는 경학과 문장으로 숙종 조에 이름이 높았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왕비가 폐위되자19) 직간의 항의 소를 올렸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시호가 충간공(忠簡公)이니, 바로 나은 선생(懶隱先生)이다. 둘째 아들인 제겸(濟兼)은 교관(敎官)에 천거되었고, 과거에 급제하여 율봉 승(栗峯丞)을 지냈으며 호는 두릉(杜陵)이다.
이분이 중연(重延)을 낳았 는데 첨지중추부사를 지냈고 호는 누실(陋室)로, 공의 5대조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진규(鎭奎)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한기(漢綺)이다. 할아버지는 의상(宜相), 호는 화하(華下)이고, 아버지는 득로(得魯), 호는 정와(靜窩)인데, 대를 이어 문장과 덕행이 있었다. 어머니는 풍산 김씨(豐山金氏)로 참판에 추증된 중하(重夏)의 딸과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사인(士人 ) 동설(東卨) 의 딸이다.
공은 순조 계사년(癸巳年, 1833, 순조 33)에 태어났는데, 윤씨 소생이다. 6세에 서당에 들어갔으나 재주와 사고가 노둔하여, 하루는 윗사람이 공을 질책하였다. 그러자 공은 척연히 분발하여 부준(不準)의 서적을 열심히 읽었다.20)
일찍이 각화사(覺華寺)에 들어가 죽을 나누어 먹는21) 고생을 무릅쓰고 학문을 연마하였고, 밤에는 모발을 천장에 매달고 졸음을 참으면서 이치를 터득할 것을 기약하였고, 과거공부에 있어서도 날마다 과정을 정해놓고 힘썼다.
부모가 연로하고 집안이 가난하였으므로 몸소 잡다한 일들을 감당하였고, 밭 갈고 김매며 분주한 가운데서도 공부에 대한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계해년(癸亥年, 1863, 철종 14) 어머니가 돌림병으로 세상을 떠나 염습을 마치자, 사람들이 시신에서 멀리 피하라고 권하였지만 공은 듣지 않았다.
계유년(癸酉年, 1873, 고종 10) 정와공(靜窩公)이 병들어 눕자, 공은 변을 맛보고 신령에게 기도하는 등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애훼(哀毁)가 지나친 나머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향시(鄕試)에서 발탁되어, 병자년(丙子年, 1876, 고종 13)에 사마시에 올랐고, 무인년 (戊寅年, 1878, 고종 15)에 익릉 참봉翼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해마다 관직을 옮겼는데, 내직으로 사옹원 봉사(司饔院奉事) ․ 의금부 도사‧사재감 봉사(司宰監奉事) ․ 태릉 직장․ 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 사헌부 감찰․ 호조 좌랑 ․ 사직서 영(社稷署令)과 경모궁 영(景慕宮令)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는 군위(軍威) ․ 직산(稷山) ․ 안산(安山) ․ 청송(靑松) ․ 풍기(豐基) ․ 영해(寧海) ․ 영덕(盈德) ․ 하양(河陽)의 수령을 맡았다.
직산에서는 녹봉을 덜어 백징(白徵2)의 조세를 충당하였고, 풍기에서는 부역을 파하고 돌려보냈으며, 영덕에서는 굶주린 백성들을 식구를 헤아려 식량을 공급 하여 구휼하였고, 어물전을 습격하여 어지럽히는 왜상(倭商)들을 다스렸으며, 하양에서는 방(榜)을 붙여 백성들을 일깨워 사교(邪敎)에 현혹되지 못하게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894, 고종 31)에 사대(使臺23)를 사직하는 글을 올렸는데 세 번을 보내고 되돌려지고 한 뒤에야 비로소 체직되었는데, 그때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재주 없이 차지했던 십 년의 벼슬길 不才叨冒十年間
스스로 돌아보니 식자의 꾸지람 두렵네 自顧瞿瞿識者訕
화산을 바라보니 옛 모습 그대로라 回首華山依舊在
새장을 벗어난 새처럼 기쁘게 돌아가네 籠禽放却好知還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곳간에 남은 재물을 흩어 궁핍한 백성을 돕고, 단출하게 한 필의 말에 하인 한 명과 길을 나셨다. 돌아와서는 스스로 호를 화산귀은(華山歸隱)이라 하고, 초막을 수리하여 소제하고 도서로 벽을 가득 채웠다. 매일 아침이면 주역 「계사(繫辭)」를 한 번 암송하고, 의관을 갖춘 뒤 가묘를 배알하고 물러나와 책상을 마주하고 때때로 시사(時事)에 감응이 있으면 「출사표(出師表)」 ․ 「귀거래사(歸去來辭)」 ․ 주자봉사(朱子封事) 등의 여러 편을 암송하곤 하였다.
하루는 꿈속에서 양친을 뵙고, 이로 인해 눈물을 흘리더니 감기가 들었다. 병세가 심해지자 두릉(杜陵)의 선정(先亭)으로 자신을 옮기게 하고, 자식과 조카들에게 근검하여 유업을 실추시키지 않도록 경계하였다. 그리고 부녀자들을 물리치고는 유유자적하듯 눈을 감았으니, 을미년(乙未年, 1895, 고종 32) 2월 3일로 향년 63세이다. 소천(小川) 둔곡(屯谷) 남쪽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배위는 숙인(淑人) 풍산 김씨(豐山金氏)로, 망와(忘窩) 영조(榮祖)의 후손이며, 중위(重威)의 딸이다. 경인년(庚寅年, 1830, 순조 30)에 태어나서 갑인년(甲寅年, 1854, 철종 5)에 돌아갔으며, 묘소는 어로동(漁老洞) 자좌(子坐)에 있다. 1녀를 두었는데, 김낙범(金洛範)에게 시집갔다.
계배위(繼配位)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문충공(文忠公) 성일(誠一)의 후손으로 기수(祺壽)의 딸이다. 신축년(辛丑年, 1841, 헌종 7)에 태어나 공보다 2일 뒤에 돌아갔다. 묘소는 공의 무덤 앞에 있다. 1남은 종대(鍾岱)이고, 2녀는 이현채(李鉉埰) ‧ 김형칠(金衡七)에게 각각 시집갔고, 측실 소생의 1남은 어리다.
공의 타고난 품성은 순박하고 건실하였으며, 위의는 엄중하였다. 말수는 어눌한 듯했지만 정성이 마음속에 가득하였고, 모습은 고졸한 듯했지만 충심과 선함이 겉으로 드러났다. 물러나 손순한 가운데서도 견고하고 확고함이 감추어져 있었고, 노둔한 가운데에 총명한 지혜가 숨어 있었다.
사특함과 올바름을 분별하고, 존숭하고 물리치는 의리는 본래부터 가슴속에 정해져 있었다. 서책에 있어서도 읽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특히 주자와 퇴계의 글을 좋아하여, 소리 내어 읽고 마음속으로 되새겼다. 이로부터 말미암아 일상의 행위로 드러나는 것들을 모두 확실하게 실행해나가 시종토록 변화가 없었다.
성품은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어려서부터 부모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비록 병이 들었어도 아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시절 과일을 만나면 반드시 제상에 올린 뒤에 맛보았고, 먼 조상과 방계의 친족 제사까지 모두 제수를 보내어 도왔다.
아우가 재주는 있었으나 일찍 죽자, 항상 마음속으로 슬프게 여기며 조카를 극진히 돌보아주고, 심지어 책을 사서 학문을 권하기도 하였다. 종족들이 흩어져 지내고 때때로 모이지도 못하자 화수회(花樹會)를 설립하였고, 종자(宗子)에게 “종자에게는 군주의 도가 있으니 자손들을 신칙하여 감히 태만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친척과 친구들의 사이에서 경조사를 두루 돕고, 은혜와 예의를 모두 지극하게 하였다. 관직에 올라 정사를 행할 때는 대체로 어려운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였으며, 조적(糶糴 24)을 삼가고 가르침을 베푸는 정사를 우선으로 하였다. 성심으로 백성들을 따르게 하면서 항상 사납게 하기 보다는 관대한 정사를 폈다.
따라 노닐던 친구들은 대부분 한 때의 명성과 덕망을 갖춘 사람들로, 사모하고 숭상하면서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듯하였고, 부집父執25)을 만나면 마치 부친을 섬기듯이 하였다. 사람들과 사귐에는 경계를 짓지 않았으며 선행을 보면 널리 드러내어 알리고, 과오가 있으면 밝혀 깨우쳐 주되, 또한 각박한 말을 하지 않았다.
아래로 하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은혜로 어루만지고, 오래도록 복服을 입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먼저 안부를 묻고 위로하였다. 자신을 받드는 일에는 검소하여 여러 고을을 맡아 다스리면서도 옷차림이나 음식은 유생 때와 다를 바 없었고, 이따금 평상복으로 산기슭이나 밭두둑으로 나서기도 하였다.
자식들에게 부박하고 화려함을 금하게 하면서, 유언으로 자신의 장례에 수를 놓은 비단으로 후하게 치르지 말게 명하였으니, 모두 글로 써서 전할 만하다. 하루는 종대(鍾岱) 군이 승선(承宣) 이만도(李晩燾)가 지은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지명 을 부탁하였다. 마침내 행장에 의거하여그 가장 뛰어난 점만을 모아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명철한 조상이 남긴 계책 喆祖貽謨
대대로 훌륭한 덕행 있었네 世有令德
공은 그 굳건함 계승하여 公繩厥武
노둔하나 확실하게 하였네 魯而能確
진실된 마음으로 행했으니 以實心做
어딜 간들 아름답지 않으리오 安往不糓
여러 고을의 수령이 되어 歷試字牧
훌륭한 명성 쌓으셨네 厥有聲績
불쌍한 이에게 곳간 기울이고 會値傾屯
여러 관직 두루 거쳤네 冠裳位易
부석26)처럼 표연히 날더니 鳧舃飄然
돌아와 초복을 입으셨네 返我初服
멀리 저 화산을 바라보니 窅彼華山
동산에 소나무 국화 가득하네 滿園松菊
분적을 즐겨 읽고27) 芻豢墳籍
가학을 공경히 계승했네 敬述家學
어찌 조금 늦추어 胡不少延
환히 밝히지 못하게 하는지 以究炳燭
공은 실로 온전히 돌아갔지만 公實全歸
후인들은 애통해하네 後人之慽
19)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왕비가 폐위되자 :
1689년에 숙종의 후사(後嗣) 문제로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위되고 숙인 장씨가 왕비가 된 일을 말한다.
20) 부준(不準)의……읽었다 :
고문(古文)을 열심히 읽었다는 뜻이다. 부준의 서적은 중국 진(晉)나라 급군(汲郡) 사람 부준(不準)이 위양왕(魏襄王)의 무덤을 열어
얻었다는 10여만 언(言)의 선진(先秦) 고서(古書)를 말한다.
21) 죽을 나누어 먹는[畫粥] :
송(宋)나라 재상 범중엄(范仲淹)이 사찰에서 공부할 때, 매우 가난하여 처음에는 매일 곡식 2홉으로 한 그릇의 죽을 끓여 먹다가, 나중
에는 이마저도 칼로 4등분 하여 조석을 해결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宋朝事實類苑)
22) 백징(白徵) :
백지징세(白地徵稅)의 준말로, 조세(租稅)를 면제할 땅이나 납세 의무가 없는 사람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을 말한다.
23) 사대(使臺) :
감사(監司)나 사신(使臣)으로서 풍기(風紀)를 단속하는 직임을 띠고 있거나 사헌부 관원의 임무를 겸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외대
(外臺)라고도 한다.
24) 조적(糶糴) :
관아의 양곡을 춘궁기에 백성에게 대여했다가 추수 후에 일정한 이자를 붙여서 회수하는 환곡 제도를 말한다.
25) 부집(父執) :
아버지의 친구나 나이가 비슷한 어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26) 부석(鳧舃) :
지방관이 되어 정사에 부지런함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後漢) 명제(明帝) 때 왕교(王喬)가 섭현(葉縣)의 현령(縣令)으로 있었는데, 신
선술을 익혀 초하루와 보름이면 항상 섭현에서 조정으로 날아가 명제를 알현하였다.
명제가 그가 자주 오는데도 수레가 보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태사(太史)를 시켜 엿보게 하였더니, 태사가 “그가 올 때마다 한
쌍의 들오리가 동남쪽에서 날아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날아오기를 기다려 그물로 잡았는데, 한 쌍의 신발 만 얻었을 뿐입니다.”라고 하
였다.(後漢書「王喬傳」)
27) 분적을 즐겨 읽고[芻豢墳籍] :
책을 즐겨 읽었다는 의미이다. ‘분적’은 삼분(三墳) 오전(五典)을 일컫는 말로, 삼분은 삼황(三皇)의 일을 기록한 책이고, 오전은 오제
(五帝)의 일을 기록한 책이다. ‘추환’ 은 맛있는 음식을 이르는 말로, 맹자 「고자상(告子上)」에 “의리가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마치 맛있는 음식이 나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義理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原文]
通訓大夫行靑松府使李公墓碣銘 幷序
公諱敎英字華汝姓李氏。系出眞寶。生員贈密直使碩。其上祖也。是生松安君子脩。入本朝。有諱堣戶曹參判號松齋。六世諱東標。以經學文章。顯于明陵世。己巳坤殿遜位。抗章直諫。贈吏判諡忠簡。卽懶隱先生。第二子諱濟兼薦授敎官。登第爲栗峯丞。號杜陵。生諱重延僉樞。號陋室。於公間五世。高祖諱鎭奎。曾祖諱漢綺。祖諱宜相號華下。考諱得魯號靜窩。連世有文行。妣豐山金氏。贈參判重夏女。坡平尹氏。士人東卨女。公以純廟癸巳生。尹氏出也。六歲入學。才思魯鈍。一日被長者督責。惕然憤勵。課讀不準筭。嘗人覺華寺。畫粥攻苦。夜則懸髮警寐。期於通透。治擧子業。日有程度。親老家貧。躳親細務。而耕耘行走。念不忘書。癸亥先夫人歿于忌疾。旣殯。有勸之出避者。公不聽。癸酉靜窩公寢疾。公嘗糞禱神。靡極不用。及至大故。哀毁幾滅性。服闋發鄕解。丙子中司馬。戊寅除翼陵參奉。自是歲有遷除。內則司饔院奉事,義禁府都事,司宰監奉事,泰陵直長,尙衣院主簿,司憲府監察,戶曹佐郞,社稷署景慕宮令。外則軍威,稷山,安山,靑松,豐基,寧海,盈德,河陽,稷山。捐俸金以補白徵之布。豐基罷役只還。盈德賑飢民。計口給食。治倭商之侵撓漁戶者。河陽出榜諭民。令勿爲邪敎所詿誤。甲午呈辭使臺。三往返始得遞。有詩曰不才叨冒十年間。自顧瞿瞿識者訕。回首華山依舊在。籠禽放却好知還。散廩餘恤竆民。一馬一僮。蕭然登道。旣歸。自號華山歸隱。修掃園廬。圖書滿壁。每朝誦繫辭一過。冠櫛拜家廟。退對書案。有時感念時事。誦出師表,歸去來辭,朱子封事等諸篇。一日夢拜兩親。因涕泣感疾。病篤。命移席于杜陵先亭。戒子姪勤儉。勿墜緖業。屛婦女。逌然而逝。卽乙未二月三日也。享年六十三。葬小川屯谷丙壬之原。配淑人豐山金氏。忘窩諱榮祖後。重威女。生庚寅。卒甲寅。墓漁老洞子坐。一女適金洛範。繼配義城金氏。文忠公諱誠一後。祺壽女。生辛丑。歿後公二日。墓在公墓前。一男鍾岱。二女適李鉉埰,金衡七。側室一男幼。公資稟朴實。儀觀沈凝。言若訥而懇悃充於中。貌若拙而忠善著乎外。堅確藏於退遜。聦慧隱於遲鈍。邪正之分。尊攘之義。素定於胷中。於書無所不讀。而尤好朱子退陶書。口誦心惟。由是而見諸日用事爲者。皆確實做去。終始不變。性孝友。自幼不離父母側。雖病不見痛楚色。遇時果。非祭不噉。遠祖旁親之祭。皆有助需。季氏有才無命。常念之於邑。厚庇其孤。至買書冊以勸學。念宗族散處。會合不以時。爲之設花樹會。謂宗子有君道。敕諸子無敢慢。親戚朋友之間。周恤慶弔。恩禮周至。居官爲政。大抵以恤民隱,謹糶糴,修學政爲先。誠心率物。常令寬勝於猛。所從遊。多一時名德。傾慕愛尙。如恐不及。見父執。事之如父。與人交。不設畦畛。見善則揚之。有過則開曉。亦不爲刻覈之言。下至僕隷。撫之以恩。服事久者。問遺必先。奉身儉約。歷典郡邑。而服食無異儒生時。往往黃冠野服。出入阡陌。禁子弟浮華。遺命勿用錦繡厚葬。皆可書而傳也。日鍾岱君。以李承宣晩燾之狀。問銘於興洛。遂按狀而最其大者。敍而銘之曰。
喆祖貽謨。世有令德。公繩厥武。魯而能確。以實心做。安往不糓。歷試字牧。厥有聲績。會値傾屯。冠裳位易。鳧舃飄然。返我初服。窅彼華山。滿園松菊。芻豢墳籍。敬述家學。胡不少延。以究炳燭。公實全歸。後人之慽。<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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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행 병조 판서 권공의 묘갈명(嘉善大夫行兵曹參判權公墓碣銘) 서문 병기
공은 휘가 영하(泳夏)이고 자는 순필(舜弼)이었는데 뒤에 성유(聖游)로 고쳤다. 권씨는 안동(安東)에서 나왔으니 고려 태사(太師) 행幸이그 시조이며, 태사 이후로 높은 벼슬이 대대로 혁혁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벌橃이 이상(貳相28)을 지냈고 시호는 충정(忠定)으로, 성대한 덕과 큰 절의를 지녀 백세토록 스승이 되었으니 바로 충재 선생(冲齋先生)이다.
5세 뒤에 정침(正忱)은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궁의 관료로, 임오년(壬午年, 1762, 영조 38) 사도세자가 죽은 해) 이후 절의를 품고 세상을 떠났으니, 호는 평암(平庵)으로 바로 공의 고조할아버지 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사면(思勉)으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항도(恒度)는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재대(載大)는 약관의 나이에 임금의 명을 받아 벼슬하여 관직 이 공조 참판에 이르렀으니, 호는 정산(晶山)이다. 어머니 정부인 풍산 김씨(豐山金氏)는 지원(之源)의 딸이다. 공은 친족에게 양자로 갔는데, 양부는 재원(載轅)으로 동중추(同中樞)를 지냈고 양조부는 심도(心度)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양증조부는 사문(思問)으로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양어머니는 함창 김씨(咸昌金氏) 귀환(龜煥)의 딸이다.
공은 순조 경오년(庚午年, 1810, 순조 10)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품이 단정하고 순수하였으며, 눈망울이 맑고 빛났다. 15세에 양자로 갔는, 두 집안이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나고 들면서 혼정신성(昏定晨省)하여 오직 정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정산공(晶山公)을 모시고 전옥서(典獄署29)에 나아갔었는데, 때마침 심한 더위와 장맛비까지 내렸지만, 공은 극시(棘寺30)의 문 밖에서 마음을 다하여 받들었다.
철종 경술년(庚戌年, 1850, 철종 원년) 등과하여 창려(唱臚31)하던 날, 성상의 전명(傳命)에 이르기를 “옛 설서(說書)의 자손이 과거에 급제하였기에 특별히 정언正言에 제수한다. 직함을 띠었으니 역마에 올라 귀근(歸覲)할 것을 명하노라.”라고 하였다. 다음해 홍문관 수찬에 제수되었다가 교리(校理)로 옮겼다.
공은 왕의 은혜가 거듭 내려질 때마다 더욱 삼가고 두려워하였다. 정산공은 주자봉사(朱子封事) 32)를 읽어 경서를 강독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권했다. 임자년(壬子年, 1852, 철종 3)에 검토관(檢討官)에 임명되어 나아가 사은숙배하고, 인하여 사직 상소를 올리면서, 임금의 덕목에 힘쓸 것을 진달하였는데, 왕이 관대한 비답을 내렸다. 경모궁(景慕宮3) 대제(大祭)에 참석하고 감읍하여 다음과 같이 시를 지었다.
영예로운 자리 올라 열흘 대궐에 나아가 登瀛十日詣宮園
시강원의 후손이 대축관에 임명되었네 侍講孫爲大祝官
이 밤 운향34)에도 응당 감응이 있으리니 此夜雲鄕應有感
촛불 아래 붉은 충심 눈물이 앞을 가리네 丹心燭下淚闌干
그리고 다음날 사직하는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계축년(癸丑年, 1853, 철종 4) 섣달에 봉화현감(奉化縣監)에 제수되고, 곧이어 영해 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지만 선부인의 상을 당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을묘년(乙卯年, 1855, 철종 6)에 왕이 경모궁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 특별히 정산공을 공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당시 정재(定齋) 류공(柳公)이 호남의 지도(智島)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정산공은 뒤를 이어 대의(大義35)를 진술하여, 마침내 임도(荏島)로 귀양가게 되었다.
공은 천 리 길을 모시고 가면서 극진한 봉양을 다하였고, 그해 겨울에 해배가 되어 눈보라를 헤치고 돌아왔는데, 정산공의 건강은 예전보다 더 좋았다. 정재공(定齋公)도 뒤이어 돌아왔는데, 정산공이 80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 없이 돌아온 것을 매우 기뻐하며, 이는 학사군(學士君)이 극진한 효성으로 돌본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해 부교리에 제수되었다.
기미년(己未年, 1859, 철종 10)에 정산공이 세상을 떠나 삼년상을 마치자 교리에 제수되었다. 당시 동추공(同樞公)의 나이가 70이 넘었으므로, 대신들이 진달하여 통정대부의 품계가 내려졌다. 7월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제수되었는데, 공은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 마지못해 관직에 나아가서, 세금을 줄이고 재앙을 구휼하며 많은 선비들에게 학문을 권장하여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863, 철종 14) 철종이 승하하자, 갑자년(甲子年, 1864, 고종 원년) 분문(奔問 36)하고 곡반(哭班37)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이달에 장령으로 승차되고, 얼마 뒤에 동부승지로 승차되었다가 을축년(乙丑年, 1865, 고종 2)에 병조 참지에 제수되었다. 병인년(丙寅年, 1866, 고종 3)에 동추공의 상을 당하였고, 삼년상을 마치자 대사간(大司諫)에 제수 되었다.
경오년(庚午年, 1870, 고종 7)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제수되었는데, 체직을 구하는 소를 올렸다. 9월에 또 대사간에 제수되고, 임신년(壬申年, 1872, 철종 9)에 이조 참의에 제수되고, 계유년(癸酉年, 1873, 고종 10)에 다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판서 허전(許傳38)이 치서(致書39)를 전하면서 “고고한 선비는 세상에 나오기를 즐겨하지 않는데, 늙은 나는 수레에 기름 먹여40) 따를 수가 없네.”라고 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876, 고종 13) 10월에 다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는데, 왕이 역마를 타고 오라고 명하여, 공은 신하된 직분과 의리로 감히 또 어길 수 없어 마침내 부름에 달려갔다.
이미 조정에 나아가 왕을 뵙고 강연(講筵)에 들어가니, 왕이 ‘영남 백성들의 사정과 수령들이 고을을 잘 다스리는 여부’에 대해 묻고, 또 “고향에서 지낸 지 얼마나 되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이미 13년이 되었으며, 스스로 현거(懸車 41)에 임박한 나이에 이렇듯 특별한 은총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대궐의 수라간에서 타락죽 42)이 베풀어졌다.
강목(綱目)을 진강(進講)하자, 왕이 “외진 시골 사람으로, 귀하게 여길 만한 순박한 이를 보았도다.”라고 하고, 옷감을 하사하고 사옹원 부제조(司饔院副提調)에 제수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877, 고종 14) 정월 추상존호(追上尊號 43) 때, 옥책(玉冊) 대거관(對擧官 4)으로 가선대부에 올랐고, 바로 동지의금부사 ‧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병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대신들의 주청으로 본생삼세(本生三世 45)에 은총이 내려지자, 마침내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니, 서울의 사대부들이 모두 ‘공의 진퇴는 영남의 고풍이다.’고 여겼다.
이미 돌아와서는 종당과 고을의 연로한 이들과 날마다 정자와 누대에서 노닐면서 노년을 보낼 생각을 하였는데, 무인년(戊寅年, 1878, 고종 15)에 또 대사관과 경연관에 제수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879, 고종 16) 2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0세로 봉화현 북쪽 가미산(可味山) 추곡(楸谷) 계좌(癸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정부인 풍산 홍씨(豐山洪氏)로 석호(奭浩)의 딸이며, 모당[慕堂, 이상(履祥)]의 후손이다. 부인의 덕행과 어진 어머니의 의범을 잘 갖추었다. 4남을 두었는데, 이연(履淵 ․ 부연復淵) ․ 태연(泰淵) ․ 생원인 돈연(敦淵)이고, 두 딸은 이중명(李重明) ․ 김술모(金述模)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연은 태연의 아들 상필(相弼)을 후사로 삼았고, 부연은 상락(相洛)을 후사로 삼았다. 딸은 성영식(成永植)에게 시집갔다. 태연의 딸은 이성렬(李性烈)에게 시집갔다. 돈연의 아들은 상교(相敎)와 상☐(相☐)이다. 이중명의 두 아들은 성구(性求)와 덕구 (悳求)이다.
김술모의 네 아들은 출계한 승환(承煥) ․ 계환(啓煥) ․ 영환(瑛煥)이고, 막내는 어리다. 상필의 세 아들은 정섭(鼎燮) ․ 진섭(震燮) ․ 화섭(和燮)이고, 딸은 이인호(李鄰鎬)에게 시집갔다. 상락은 우섭(友燮)을 후사로 삼았다.
공은 온화한 자질로 문헌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듣고 익힌 것이 전훈(典訓)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의리(義利)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는 칼로 자른 듯이 분명하였기에 관직에 있던 30년 동안 언제나 물러날 수 있음을 견지하면서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에 구애됨이 없었다.
비록 조정에서의 거동에서 바야흐로 촉망 받았으나 급히 나아가려는 욕심이 없었다. 직책에서 물러나서는 바로 도성을 나왔기에 명예를 탐하려는 생각이 없었고, 이미 시속을 따라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들과 다른 모난 행동을 하고자 하지도 않았다. 평생토록 몸가짐과 처세에는 한 점 흠이나 어긋남이 없었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온전하게 명성을 보전한 사람’으로 살았다.
집안이 본래 청렴하고 빈한하였으나 벼슬하여 봉양하는 마음에는 급급하지 않았고, 말년에 수령으로 나갔어도 재물을 늘리려는 마음은 먹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사귈 때는 조화롭기에 힘썼고, 사람들이 혹 거스름이 있더라도 장단점을 따지지 않았다.
친족과 친구 중에 비록 거리가 멀거나 가깝거나 친분이 친하거나 소원한 차이는 있었지만 한 사람도 잃은 이가 없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비록 늘 아끼는 물건이라도 구하는 자가 있으면 인색하지 않았다. 평소 표방하는 호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마을 이름으로 기거하는 곳에 편액을 달아 퇴일당退逸堂이라고 하였다.
족제 이재(頤齋) 연하(璉夏)가 공의 비문(碑文)에 “행함은 작으나 결실은 크고, 신념은 굳건했으나 융통성이 있었다. 방정하나 국한되지 않았고, 부드러우나 집념이 있었다. 조정에 나아가고 관직에 부임하면 몸가짐을 엄숙히 하고 매사에 응하였기에, 그 두 가지가 다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공을 잘 표현한 말이라 이를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충정공 세계에 忠定之世
훌륭한 자손 이어졌으니 代有鴻哲
절의 지킨 평암공은 平翁秉義
그 광휘가 열렬했고 其光烈烈
시랑공에 이르러서는 爰曁侍郞
바른 말로 임금을 놀라게 했네 危言動宸
공은 가법을 사숙하여 公淑世範
그 몸을 깊이 갈고 닦았네 濬發其身
성군의 조정에서 옛일을 기억하사 聖朝記舊
은혜 내리심이 유독 특별하였으니 恩遇逈倫
이에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迺歷淸華
이에 삼공의 반열까지 올랐었네 迺躋台班
공은 더욱 겸손하며 公愈逡廵
물러나긴 쉽고 나아가긴 어려워했네 退易進難
산림에서 자취 감추고 斂跡丘園
거친 음식과 갈옷도 편안히 여기며 蔬褐是安
시종 그렇게 지내어 循厥終始
한 점 티끌 없이 맑았었네 皭然無滓
화락한 군자여 豈弟君子
정신은 진실로 수고로웠지만 神實勞止
칠순토록 강건하며 七旬康彊
편안히 생을 마치셨네 優游令終
오직 대대로 지켜온 惟其世守
대의는 하늘에 서리고 大義蟠穹
변하지 않는 뜨거운 피 腔血未化
후인들에게 전하였네 後人之詒
이에 공경히 돌에 새기어 敬列于石
천추 뒤를 기다리네 千秋以竢
[脚註]
28) 이상(貳相) :
삼정승(三政丞)의 다음가는 벼슬이라는 뜻으로, 의정부의 좌찬성(左贊成)과 우찬성(右贊成)의 별칭이다.
29) 전옥서(典獄署) :
원문의 대리(大理)는 조선 시대의 전옥서에 해당된다. 고려 시대에 감옥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의 이름으로, 조선 문종 때 전옥서
로 이름을 고쳤다.
30) 극시(棘寺) :
조선조 때 의금부(義禁府)를 말한다.
31) 창려(唱臚) :
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가 의식의 절차를 고저장단에 맞추어 부르면서 창도(唱導)하는 것을 말하나, 여기서는 과거에 입격하여 고향
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32) 주자봉사(朱子封事) :
주희(朱熹)의 상주문(上奏文)을 모아 놓은 책이다. 중국 송(宋)나라 효종(孝宗) 15년에 임금에게 올린 글로, 그 내용은 첫째 태자를
바르게 인도하고, 둘째 대신(大臣)의 적임자를 선택하며, 셋째 강유(綱維)를 일으키고, 넷째 풍속을 변화시키며, 다섯째 백성의 힘을
기르고, 여섯째 군정(軍政)을 바르게 하며, 끝으로 임금이 마음이 바르면 천하의 일이 모두 바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33) 경모궁(景慕宮) :
조선 2대 정조의 아버지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장조(莊祖)로 추숭하기 전에 그 신위를 모셨던 궁을 말한다.
34) 운향(雲鄕) :
옥황상제가 산다는 백운향(白雲鄕)으로, 여기서는 승하한 장헌세자를 가리킨다.
35) 대의(大義) :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추존(追尊)을 청하는 상소를 말한다.
36) 분문(奔問) :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서 문후(問候)하는 것을 말한 것으로, 여기서는 임금의 상에 조문한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양왕(襄王)
이 난리를 피해 정(鄭)나라 시골 마을인 범(氾)에 머물면서 노(魯)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자, 장문중(臧文仲)이 “천자께서 도성 밖의 땅
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서 관수에게 문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라고 대
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春秋左氏傳 「僖公」 24年)
37) 곡반(哭班) :
국상 때 망곡(望哭)하던 백관의 반열(班列)을 뜻한다.
38) 허전[許傳, 1797(정조 21)∼1886(고종 23)] :
자는 이로(以老), 호는 성재(性齋),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황덕길(黃德吉)의 문인이다. 1835년(헌종 원년) 문과에 급제하고, 1860
년(철종 11) 병조 참의가 되었으며, 1862년(철종 13) 삼남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조세 및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
혁을 통해 농민항쟁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삼정책(三政策)」을 올렸다. 그 뒤 동지의금부사·한성부 좌윤·예문관 제학·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39) 치서(致書) :
임금이 신하에게 보내는 서신을 말한다.
40) 수레에 기름 먹여[膏車] :
‘고거’는 산림에서 유유자적하며 지내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당나라 한유(韓愈)의 「송이원귀반곡서(送李愿歸盤谷序)」에 “내 수레
에 기름칠하고 내 말을 먹여, 그대 따라 반곡에 들어가서 삶을 자적하며 마치리라.[膏吾車兮 秣吾馬 從子于盤兮 終吾生以徜徉]”라
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1) 현거(懸車) :
벼슬에서 물러날 만큼 연로함을 이르는 말이다. 한(漢)나라 때 설광덕(薛廣德)이 나이가 들어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갈 적에,
황제가 그에게 안거(安車)와 사마(駟馬) 등을 하사하였다. 고향 패군(沛郡)에 이르자 태수(太守)가 군(郡)의 경계 지점까지 나와서 영
접하였으며, 온 고을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이에 하사받은 안거를 매달아 놓고 자손 후대에 전하였다고 하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漢書 「薛廣德傳」)
42) 타락죽(駝酪粥) :
쌀을 물에 불려 맷돌에 갈아서 절반쯤 끓이다가 우유를 섞어서 만든 음식이다. 내의원(內醫院)에서 10월 1일에서 정월까지 타락죽을
만들어 진상한 풍습이 있었으며, 기로소(耆老所)에서도 10월에서 정월 대보름 사이에 재상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43) 추상존호(追上尊號) :
선왕(先王)․선후(先后)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
44) 옥책(玉冊) 대거관(對擧官) :
옥책은 제왕(帝王)․후비(后妃)의 존호(尊號)를 올릴 때, 송덕문(頌德文)을 옥(玉)에 새겨 놓은 간책(簡冊)을 말하고, 대거관은 옥책을
마주 드는 임시 직책을 말한다.
45) 본생삼세(本生三世) :
양자(養子) 간 사람의 본가에 증조․조부․부친을 뜻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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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嘉善大夫行兵曹參判權公墓碣銘。
公諱泳夏字舜弼。後改聖游。權氏出安東。麗太師幸。其始祖也。太師之後。冠冕赫世。入我朝。有諱橃官貳相。諡忠定。盛德大節。爲百世師。卽冲齋先生。五傳而諱正忱。莊獻世子宮僚。壬午後。抱苦節以終。號平庵。是爲公高祖。曾祖諱思勉贈吏議。祖諱恒度贈吏參。考諱載大。弱齡承傳入仕。官至工曹參判。號晶山。妣貞夫人。豐山金之源女。公以族家子入系。考諱載轅同中樞。祖諱心度贈吏參。曾祖諱思問贈吏議。妣咸昌金氏。龜煥女。公生純廟庚午。幼姿相端粹。眉眼明瀅。十五移天。兩闈居稍間。出入定省惟謹。嘗侍晶山公。就大理。時方盛暑潦雨。而於棘寺門外。殫心調供。哲廟庚戌擢第。唱臚之日。傳曰。故說書孫登第。特授正言。命帶職乘馹歸覲。翌年授弘文修撰。移校理。公以恩旨重沓。愈懷兢惕。晶山公勸讀朱子封事。爲講對之資。壬子以檢討官趨肅。因辭章。陳勉君德。上下優批。參景慕宮大享。感泣有詩曰登瀛十日詣宮園。侍講孫爲大祝官。此夜雲鄕應有感。丹心燭下淚闌干。翼日呈辭歸。癸丑臘月。除奉化縣監。旋移寧海府使。未就任。丁先夫人憂。乙卯。上行酌獻禮于景慕宮。特拜晶山公工曹參判。時定齋柳公責湖南之智島。晶山公繼陳大義。竟有荏島之命。公千里陪往。盡其調養。是冬賜環。衝冒風雪。髭髮勝昔。定齋公聯輿後先。深歎以爲大耋利返。是學士君賢孝所致。翼年除副校理。己未。晶山公下世。服闋。除校理。時同樞公年踰七十。因大臣陳達。授通政資。七月除比安縣監。公爲祿養勉赴。寬賦恤灾。勸課多士。邑人頌之。癸亥。哲廟賓天。甲子奔問。參哭班而歸。是月陞掌令。尋陞拜同副承旨。乙丑除兵曹參知。丙寅丁同樞公憂。服闋。除大司諫。庚午除成均館大司成。封章乞遞。九月又拜大司諫。壬申除吏曹參議。癸酉復除同副承旨。皆不赴。許判書傳致書曰。高士不肯出。老夫不能膏車而從之。丙子十月。復除同副。命乘馹上來。公以分義。不敢屢違。遂趨召。旣登對入講筵。上問嶺外民情。守宰治否。又問鄕居今幾歲。對曰。已十三年矣。不自意年迫懸車。蒙此異數。自內厨宣酪粥。進講綱目。上曰。今見鄕曲之人。淳樸可貴。因賜衣資。除司饔院副提調。丁丑正月。追上尊號。以玉冊對擧官。陞嘉善。卽除同義禁,同春秋。尋除兵曹參判。因大臣陳達。推恩本生三世。遂呈辭尋鄕。洛中士大夫皆以爲公之進退。有嶺中古風。旣歸。與宗黨及鄕鄰諸老。日徜徉亭臺間。爲送老計。戊寅又除諫長及經筵官。己卯二月卽世。享年七十。葬奉化縣北可味山楸谷癸坐原。配貞夫人豐山洪氏。奭浩女。慕堂履祥後。婦德母儀甚備。有四子履淵,復淵,泰淵,敦淵生員。二女適李重明,金述模。履淵以泰淵子相弼嗣。復淵嗣男相洛。女適成永植。泰淵女適李性烈。敦淵二男相敎,相▣。李重明二男性求,悳求。金述模四男。承煥出。啓煥,瑛煥。一幼。相弼三男鼎燮,震燮,和燮。女適李鄰鎬。相洛嗣男友燮。公以恬和之資。生文獻之門。自少擩染。不出典訓之內。其於義利之分。見得截然。故策名三十年。退然自守。去就不苟。雖朝儀方屬望。而無驟進之念。解職卽出都。而無沽名之意。旣不隨俗掀倒。而亦不欲與人崖異。平生行己處世。無一玷一疵。世之論完名者歸之。家素淸寒。而不汲汲以祿養爲心。晩得一麾。亦不爲營殖計。與人交。和意藹然。人或有忤。不較絜長短。門親知舊。雖遠邇疎戚之不同。無一人相失者。性好施與。雖常所愛惜者。有求不吝。素不立標號。以坊名扁其堂曰退逸。族弟頤齋璉夏撰公墓碑。而稱其小而實大。介而能通。方而不局。柔而有執。立朝莅官。持己應物。俱可以警世。亦可謂知言矣。銘曰。
忠定之世。代有鴻哲。平翁秉義。其光烈烈。爰曁侍郞。危言動宸。公淑世範。濬發其身。聖朝記舊。恩遇逈倫。迺歷淸華。迺躋台班。公愈逡廵。退易進難。斂跡丘園。蔬褐是安。循厥終始。皭然無滓。豈弟君子。神實勞止。七旬康彊。優游令終。惟其世守。大義蟠穹。腔血未化。後人之詒。敬列于石。千秋以竢。<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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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훈대부 양양 부사 홍공의 묘갈명(通訓大夫襄陽府使洪公墓碣銘) 서문 병기
홍우진(洪祐鎭) 군이 그의 증조할아버지 승지공(承旨公)의 묘갈명을 나에게 부탁하며 “우리 할아버지 부사공(府使公)의 행적에 대해 묘지명을 지어 현양해 주셨으니, 감히 이어 다시 청하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운모(運謨)이고, 자는 미회(眉會)로, 풍산 홍씨(豐山洪氏)이다. 고려 국학에서 직학(直學)을 지낸 지경(之慶)이 상조(上祖)이며, 직학 이후 대대로 아름다운 의범이 드러났으며, 대사헌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이상(履祥), 호 모당(慕堂)에 이르러서는 경학과 덕행으로 우리 선조(宣祖) 임금의 시대에 중용되었다.
판돈녕(判敦寧)으로 영의정에 추증된 만조(萬朝), 호 만퇴당(晩退堂)은 청렴과 덕행으로 중망이 있었다. 이분이 중인(重寅)을 낳았으니 음직으로 도정을 지냈고,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과 도의의 교분을 맺었으며 공에게는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증조할아버지 정보(正輔)는 문과에 올라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약호(若浩)는 음직으로 현령을 지냈고,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아버지 희필(羲弼)은 대사간을 지냈고, 어머니 숙부인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진선군(晉善君) 석빈(碩賓)의 현손이며 학생 세선(世選)의 딸로, 단정하고 정숙하며 여사(女士)의 행실을 갖추었다.
공은 정조 병오년(丙午年, 1786, 정조 10)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준수하고 빼어났다.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수고로이 독려하거나 바로잡을 필요가 없었다. 겨우 8세에 강목(綱目)을 통달하고 견해도 밝고 정밀하니, 동추공이 기뻐하며 “나중에 일을 맡을 만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성하면서 문사(文辭)가 날로 진보하여 화려한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다. 순조 임오년(壬午年, 1822, 순조 2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경인년(庚寅年, 1830, 순조 30)에 혜릉 참봉惠陵參奉에 제수 되었다. 임진년(壬辰年, 1832, 순조 32)에 관례에 따라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에 승차되었고, 계사년(癸巳年, 1833, 순조 33)에 태릉 직장(泰陵直長)으로 자리를 옮겼다. 돈녕부 주부(敦寧府主簿)를 거쳐 감찰로 자리를 옮겼다가, 갑오년(甲午年, 1834, 순조 34) 여름에 외직으로 나가 창평 현령(昌平縣令)이 되었다.
을미년(乙未年, 1835, 헌종 원년) 봄에 대간공(大諫公)이 현사(縣舍)에서 세상을 떠나자, 공은 천 리 먼 길을 관을 모시고 돌아오면서 통곡소리를 끊이지 않았다. 여막에 거처하며 그곳을 ‘불매(不寐)’라고 이름하였으니, 유회이인(有懷二人 46)의 뜻을 취한 것이다.
임인년(壬寅年, 1842, 헌종 8)에 사도시 직장(司䆃寺直長)에 다시 제수되었고, 형조의 좌랑과 정랑․ 태묘비궁영(太廟閟宮令) ․ 경조 판관(京兆判官) ․ 장녕전 영(長寧殿令)을 두루 걸쳤다. 정미년(丁未年, 1847, 헌종 13)에 고을 수령에 차임하는 명을 받아, 공이 문천 군수(文川郡守)가 되었다. 고을에는 포탈된 환곡이 4만여 곡(斛)이나 되어, 십수 년간 큰 병폐가 되어왔다.
전후로 부임한 수령들은 이를 감추어 사실대로 고하지 않았고, 아전들도 전례에 따른 형식적인 조사만을 청하였는데, 공은 듣지 않고 사실에 의거하여 감영에 보고하였다. 관찰사가 공이 관직을 그만두어야함을 안타까워하여 여러 차례 물리쳤으나, 공은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며 스스로 잘못을 힘써 탄핵하였다.
계문(啓聞 47)이 진달되자 당시 재상이 공의 치적을 알고, ‘죄를 묻지 말고 임기를 마칠 수 있게 해 줄 것’을 주청하니, 성상께서 윤허하였다. 이어 ‘견포(蠲逋’ 48)의 명을 내렸다. 이에 유랑하여 도망했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들어 온 고을이 안정되었고, 뒤에 고을 사람들이 동비(銅碑)를 세워 그 은덕을 칭송하였다.
경술년(庚戌年, 1850, 철종 원년)에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차되어, 동해묘(東海廟 49)를 수리하고 어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기던 폐단을 막았다. 이 과정에서 상관의 뜻을 어기게 되어, 고과(考課)에서 제일 낮은 점수를 받아 50)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로부터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날마다 서사書史를 보는 것으로 스스로의 즐거움을 삼았다.
계축년(癸丑年, 1853, 철종 4) 7월 8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8세로, 같은 고을 통정리(通井里) 남향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뒤에 부인도 그곳에 합장하였다. 공은 자품은 민첩하고 성품은 통달하였고 몸가짐이 아담하고 단정하였으며, 더욱이 효성과 우애가 돈독하였다.
부모님이 병들었을 때 손가락에 피를 내어 입에 흘려 넣었고, 상을 치르면서는 상복을 벗은 적이 없었다. 기일(忌日)에는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고, 처음 초상을 당한 날처럼 통곡하였다. 두 아우와 함께 같은 상에서 밥을 먹고 잠잘때는 한 이불을 덮었으며, 조카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돌보았다. 자식이 없는 늙은 작은 어머니를 지극함을 갖추어 봉양하였고, 종친들과 화목하게 지내며 친소(親疎)의 간극을 두지 않았다.
관직에 있을 때는 일의 대체(大體)에 힘쓰면서 공로에 가까이 가려고 성급해하지 않았다. 세밀히 살피지는 않았지만 아전들은 공의 명철함을 두려워하였고, 따사로이 하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은 그의 은혜를 가슴에 새겼다. 상관을 섬길 때는 공손하되 아첨하지 않았고, 동료들과 함께할 때는 조화롭되 편당을 짓지 않았다.
평소 거처할때는 간결하고 엄중하였으며, 종일토록 단정히 앉아 게으른 모습이 없었고, 비속한 말을 귀에 가까이하지 않았다. 문장은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의미만 전달되면 충분하다고 여겼고, 시 또한 전아(典雅)하여 두보杜甫와 육유(陸游)의 남긴 뜻이 있었다. 서적은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역사서를 더욱 좋아하여, 요순의 시대로부터 명(明)나라에 이르기까지 상하 수천 년의 치란의 연혁과 우리 동방의 역사와 씨족에 이르기까지 꿰뚫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충신, 열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절의를 지키다 죽은 대목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세 번 무릎을 치며 슬픔에 목이 메며 감개하였다.
이것이 바로 공의 시종 행적으로 기록하여 전할 만한 것들이다. 배위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진사로 이조 참판에 추증된 광교(廣敎)의 딸이며, 영의정 산해(山海)의 후손이다. 순천 이씨(順天李氏)는 사인(士人) 국진(國鎭)의 딸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주(貞周) ․ 출계한 경주(畊周)는 전부인의 소생이고, 금부 도사 유주(有周)와 권영서(權永序) ․ 이승기(李承耆)에게 각각 시집간 딸은 후부인의 소생이다.
측실 소생의 딸은 이회승(李晦承)에게 시집갔다. 정주는 우종(祐鍾)을 후사로 삼았다. 경주는 아들 우종이 입후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게 되어 우진(祐鎭)을 후사로 삼았다. 4녀는 신경휴(申景休) ․ 참봉 정경호(鄭敬好) ․ 신승구(申昇求) ․ 진사 박용섭(朴容燮)에게 각각 시집갔다.
유주의 2남은 출계한 우진과 하나는 어리다. 2녀는 신정우(申貞雨) ․ 정호봉(鄭鎬鳳)에게 각각 시집갔다. 권영서는 욱채(旭采)를 입후하였다. 이승기의 아들은 영식(寧植) ․ 완식(完植) ․ 정식(定植)이고, 딸은 한범동(韓範東) ․ 한우동(韓宇東)에게 각각 시집갔다. 이회승의 아들은 무과에 급제한 근원(根元) ․ 근중(根中)이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외진 강호에 훌륭한 분 있음이여 若有人兮湖之涘
찬란한 선조의 유훈 받들었네 佩先訓之陸離
잡다한 뭇 말들 씻어냄이여 漱羣言之瀝液兮
성정을 다스려 몸에 지녔네 㫌性行而爲衣
장중함으로 자신을 닦음이여 及余飾之方壯兮
고삐를 잡고 달려가기를 바랐네 冀撰轡而高馳
아! 아름다운 기약이 늦음이여 嗟佳期之晼晩兮
이에 가시밭길에서 서성거렸네 迺栖栖乎枳棘
세상과 내가 서로 다름이여 世與我而殊好兮
물러나 다시 초심을 닦으리로다 退吾復修此初服
마음으로 아름답다고 믿음이여 苟中情其信姱兮
무슨 병통인지 내 알지 못하네 不吾知其何病
오직 영혼이 여기 있음이여 惟陟降之在玆兮
후세 사람들의 공경을 받을 것이네 庶來世之起敬
[脚註]
46) 유회이인(有懷二人) :
부모를 잊지 않고 늘 생각한다는 뜻으로, 시경 「소아(小雅)․소완(小宛)」에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부모 두 분을 생각하네.
[明發不寐 有懷二人]”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47) 계문(啓聞) :
관찰사나 절도사, 또는 지방에 출장 중인 봉명사신(奉命使臣)이 문서로써 임금께 아뢰는 것을 말하며, 계품(啓稟)이라고도 한다.
48) 견포(蠲逋) :
체납된 조세의 일부를 감면해 준다는 뜻이다.
49) 동해묘(東海廟) :
양양읍 조산리에 위치한 제단으로, 나라에서 풍농풍어(豐農豐魚)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동해신묘라
고도 한다.
50) 고과에서……받아[課殿] :
‘과전’은 가장 낮은 점수를 뜻한다. 조선 시대, 지방에서 근무하는 문무 관리의 근무 상태를 조사하여 성적을 매겼는데, 감사(監司)가
자기가 관할하는 고을 수령의 치적을 선(善)․최(最)․악(惡)․전(殿)의 4등급으로 나누어 해마다 6월과 섣달에 중앙에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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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訓大夫襄陽府使洪公墓碣銘 幷序。
洪君祐鎭。以其曾大父承旨公墓銘屬不佞。且曰吾祖府使公事行。宜亦有敍銘以表顯。敢繼而請。按狀。公諱運謨字眉會。豐山之洪。以高麗國學直學諱之慶爲上祖。直學之後。代有顯懿。至大司憲贈領議政諱履祥號慕堂。經學德行。重于我昭敬世。判敦寧贈領議政諱萬朝號晩退堂。有淸德重望。是生諱重寅蔭都正。與李星湖先生爲道義交。於公爲高祖。曾祖諱正輔文科正言。贈吏參。祖諱若浩蔭知縣。壽躋同樞。考諱羲弼大司諫。妣淑夫人晉州姜氏。晉善君碩賓玄孫。學生世選女。端莊靚肅。有女士行。公以正廟丙午生。幼而俊邁。旣就學。聰悟強記。不勞繩督。甫八歲。通綱目。見解精明。同樞公喜曰他日付托有人。及長文辭日進。華聞藉甚。純廟壬午。中司馬。庚寅除惠陵參奉。壬辰敍陞長興庫奉事。癸巳遷泰陵直長。由敦寧府主簿。移監察。甲午夏。出爲昌平縣令。乙未春。大諫公棄代于縣舍。公千里返櫬。號哭不絶。廬居。名其軒曰不寐。取有懷二人之意也。壬寅甄除司䆃寺直長。歷秋曹佐正郞,太廟閟宮令,京兆判官,長寧殿令。丁未。命擇差守令。公爲文川郡守。邑有逋糶四萬餘斛。爲十數年巨瘼。前後守宰。掩匿不以實聞。吏請循例虛勘。公不聽。據實報營。監司惜公去。屢卻之。公牢執。且自劾甚力。及啓聞。時相知公治績。奏勿罪俾竣事。上允之。繼下蠲逋命。於是流亡還集。一境按堵。後豎銅頌其惠。庚戌陞襄陽府使。修東海廟。防漁戶誅求之弊。由是忤上司意。課殿以歸。遂絶意世事。日以書史自娛。癸丑七月八日終。享年六十八。葬同郡通井里枕午之原。後夫人祔焉。公姿性敏達。儀度雅整。尤篤於孝友。親癠。血指以灌。居喪。不去絰帶。忌日。坐以待晨。號哭如始喪。與二弟食則同案。寢則共被。撫諸姪如己子。季母老而無子。奉養備至。睦於宗黨。無間親疎。居官。務存大體。不急近功。不察察而吏畏其明。不喣喣而民懷其惠。事上官。遜而無諂。處同僚。和而不比。平居簡嚴。端坐終日。惰慢不設於容。鄙俚不經於耳。爲文不喜雕飾。取辭達而止。詩亦典重雅實。有杜陸餘意。於書無所不讀。而尤閒於史志。自唐虞。迄于皇明。上下數千年間治亂沿革。以至我東國乘氏族。無不貫穿。至忠臣烈士殉身死節事。必三復擊節。感慨悲咽。此公之始卒。可書而傳者也。配韓山李氏。進士贈吏參廣敎之女。領議政山海之後。順天李氏。士人國鎭女。有三男二女。貞周,畊周出。前夫人出。有周禁府都事。女權永序,李承耆。後夫人出。側室女李晦承。貞周嗣男祐鍾。畊周男祐鍾入承公祀。以祐鎭嗣。四女申景休,鄭敬好參奉。申昇求,朴容燮皆進士。有周二男祐鎭出。一幼。二女申貞雨,鄭鎬鳳。權永序嗣男旭采。李承耆男寧植,完植,定植。女韓範東,韓宇東。李晦承男根元武及第根中。銘曰。
若有人兮湖之涘。佩先訓之陸離。漱羣言之瀝液兮。㫌性行而爲衣。及余飾之方壯兮。冀撰轡而高馳。嗟佳期之晼晩兮。
迺栖栖乎枳棘。世與我而殊好兮。退吾復修此初服。苟中情其信姱兮。不吾知其何病。惟陟降之在玆兮。庶來世之起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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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 생원 성공의 묘갈명(成均生員成公墓碣銘) 서문 병기
창녕 성씨(昌寧成氏)의 선대로는 고려 시대 태위(太尉) 개부삼사(開府三司)를 지낸 송국(松國),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사홍(士弘), 판도 판서(版圖判書)를 지낸 만용(萬庸)이 있다. 우리 조선에 이르러서는 명망 있는 석학들이 뒤를 이었고, 18현을 모신 사당에 모셔져 있다.
부용당(芙蓉堂) 안의(安義)가 바로 그 가운데 한 분으로, 우승지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때 영주(榮州)의 처가에서 살면서 이성(以性)을 낳았는데, 응교(應敎)를 지내고 부제 학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계서(溪西)이다. 이 두 분은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현(灦)에 이르
러서 비로소 순흥(順興) 가구리(可丘里)로 이사하였다.
이분이 언극(彥極)을 낳았는데, 대산(大山) 이 선생(李先生)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호는 전백당(傳白堂)이다. 이분이 종로(宗魯)를 낳았는데, 호는 검와(黔窩)이다. 이분이 주교(胄敎)를 낳았는데, 의성 김씨(義城金氏)에게 장가 들었으니 처사 희욱(煕郁)의 딸이자 수찬 여건(汝鍵)의 증손녀이다.
순조 기사년(己巳年, 1809, 순조 9)에 공을 낳으니, 휘는 종진(鍾震)이고 자는 경구(景九)이다. 어려서부터 단아하고 조용하여 장난치거나 가볍지 않았다. 글자를 배우면서부터 유사한 것을 추론하여 널리 통하였고, 8∼9세에는 놀랄 만한 어구를 구사하여 문장을 지으니, 장로들이 기이하게 여기며 칭찬했다.
족조(族祖) 면졸옹(勉拙翁)에게 가르침을 받아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노력하여, 약관의 나이에 이미 과거장에 명성이 자자했다. 을미년(乙未年, 1835, 헌종 원년) 성균관으로 들어갈 때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길 떠나기에 앞서 축하하였는데, 선공(先公)이 경계하여 말하기를 “유가(儒家)의 사업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하나를 얻은 것으로 다행으로 여기지 말라.”라고 하였다.
선공의 성품은 엄격하여 자질들에게 작은 과오가 있을지라도 질책하며 조금도 너그러움이 없었다. 공은 선공의 뜻을 받들고 따르면서 어긴 적이 없었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면서도 신중하게 행동하며, 말과 웃음을 삼가고 교제도 신중히 하였다.
기미년(己未年, 1859, 철종 10) 선공의 상을 당하였는데, 당시 공도 이미 노년에 들었지만 예법에 맞게 제도를 지켰으며, 항상 선공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애통하게 여겼다. 집 동쪽에 작은 서재를 열어 문중 자제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으며, 회산(檜山)이라는 편액을 하고 이를 자호로 삼았다.
후진들을 가르치며 재능에 따라 성취시켰고, 여가가 생기면 제자들과 더불어 명승지를 찾아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읊기도 하고, 산림의 그윽하고도 널찍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생을 마치도록 여유롭게 노닐었다.
병술년(丙戌年, 1886, 고종 23) 12월 1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고을 동쪽 감산(弇山) 동편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의 타고난 성품은 온화하고 신념은 굳건하였으며, 체격이 보통사람을 넘지 않았지만 정신은 무쇠처럼 단단하였다. 다급한 경우를 만나더라도 용모와 말에 변함이 없었고, 어지러운 곳에 처하더라도 한 번 먹은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돈독히 하면서 남들만을 따르지 않았고, 내면으로 온전히 하면서 외물에는 힘쓰지 않았다. 논의가 분분히 일어나는 중에도 경위(涇渭 51)를 스스로 분별하고, 여러 가지 일들이 뒤섞인 중에도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일찍이 기괴한 일을 도모하지 않았고, 또한 시속을 따라 스스로를 잃은 적도 없었다.
항상 깊이 생각하고 삼가 지키면서 한결같이 절도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배위는 의성 김씨 통덕랑 희복(煕復)의 딸이자, 관찰사 한동(翰東)의 손녀이다. 1남을 두었는데 진사 대형(大瀅)이다. 계배위는 선성 김씨(宣城金氏)로 영욱(永頊)의 딸이자, 문절공(文節公) 담(淡)의 후손이다. 1남은 한익(漢翼)이고, 2녀는 김병길(金秉吉) ․ 홍성유(洪聖裕)에게 각각 시집갔다.
대형의 2남은 영식(永植)과 한익(漢翼)에게 출계한 완식(完植)이고, 2녀는 김인영(金寅永) ․ 김응락(金應洛)에게 각각 시집갔다. 한익은 1녀를 두었는데, 권상종(權相宗)에게 시집갔다. 영식 군이 나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였는데, 늙고 쇠약한 몸이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침내 행장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선비가 학문하는 것이 士之積學
입신양명에 뜻이 있었다면 志在立揚
험로에 빠져 조화롭지 못한들 迍邅不諧
누가 푸른 하늘을 힐난하리오 孰詰蒼蒼
처한 상황을 편히 여기고 所遇而安
굽혀진 것을 펴진 것처럼 보며 視詘如伸
독서에 뜻을 두고 圖書翫意
산림에서 정신을 기르셨네 林園頤神
한 점 티끌 없이 맑은 듯이 皭然無塵
조화를 이루며 기뻐하였네 與化而嬉
이미 순응하며 편안하였으니 旣順且寧
온전히 돌아가신 것이리라 是爲全歸
[각주]
51) 경위(涇渭) :
중국의 두 물줄기 이름으로, 청탁(淸濁)을 비유하는 말이다. 경수(涇水)는 탁하고 위수(渭水)는 맑은데, 이 두 물줄기가 서로 한 곳으로
흘러들어가도 청탁이 섞이지 않고 분명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原文]
成均生員成公墓碣銘 幷序
昌寧之成。祖高麗太尉開府三司松國。贊成事士弘。版圖判書萬庸。至本朝。名碩相望。有十八賢俎豆祠。芙蓉堂諱安義。卽其一也。官右承旨贈吏判。龍蛇之難。贅居榮川。生諱以性官應敎。贈副提學。號溪西。兩世錄淸白選。至諱灦。始移順興可丘里。生諱彥極。遊大山李先生門。號傳白堂。生諱宗魯號黔窩。生諱胄敎。娶義城金氏處士煕郁女。修撰汝鍵曾孫。以純廟己巳生公。諱鍾震字景九。自幼端詳沈靜。戱嬉不輕。學字。能推類旁通。八九歲。屬文出警語。長老奇賞之。受業於族祖勉拙翁。篤志勤勵。弱冠已有聲場屋間。乙未陞上庠。所識皆以前塗賀。先公戒之曰。儒家事業。有大於此者。勿以一得爲幸。先公性嚴。子姪有微過。切責不少饒。公承顔順適。無所違拂。遊太學。謹重寡言笑。審交際。己未丁外艱。公年已向衰。而守制如禮。常以未副先公期望爲至慽。闢小齋於家東。爲門子弟肄業之所。扁之曰檜山。因以自號。敎養後進。隨材成就。暇與諸名勝觴詠。追隨於山林幽曠之地。優遊以卒歲。丙戌十二月十一日終。葬府東弇山向庚之原。公資稟安和。神守凝定。體不踰中人。而精固如鐵。値急遽而容辭不變。處紛豗而志帥不動。篤乎己而不循於人。全於內而不騖於外。論議朋興而涇渭自辨。事會坌集而繩尺不失。未嘗爲嶢崎之行。而亦不以流循自失。常以沈默謹約。爲一副節度也。配義城金氏。通德郞煕復女。觀察使翰東孫。有一男大瀅進士。繼配宣城金氏。永頊女。文節公淡後。有一男漢翼。二女適金秉吉,洪聖裕。大瀅二男永植。完植爲漢翼嗣。二女適金寅永,金應洛。漢翼有一女適權相宗。永植甫托不佞以銘公墓。辭以衰陋而不可得。遂按狀而書之如此。銘曰。
士之積學。志在立揚。迍邅不諧。孰詰蒼蒼。所遇而安。視詘如伸。圖書翫意。林園頤神。皭然無塵。與化而嬉。旣順且寧。
是爲全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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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정 남공의 묘갈 후지[許 亭南公墓碣後識]
공의 묘소는 광연산(光淵山) 선영 오좌(午坐)의 언덕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3백여 년 전에 오래된 작은 비석이 있어 세계(世系)와 생몰연대, 과명(科名)이 있는 자손들만을 대략 서술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 이르기를 “공은 효성으로 이름나서, 여러 차례 포상하는 명을 받았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지석(誌石)에 있으며 학사[鶴沙, 김공(金公)]이 지은 것52)으로 여겨진다.
지금 옛 비석이 오래되고 갈라져 장차 큰 돌로 바꾸고자 하니, 옛 비석의 음기에 근거하고 감히 한 글자도 더하지 않았다. 나 흥락은 계분(契分)을 나누던 집안의 후손인 데다, 또 내가 자출(自出)하게 된 곳이기에 음기(陰記)의 기록에 자세한 이력을 더할 것을 청하였다.
내가 스스로 생각건대, 껍데기만의 식견을 지닌 늦게 태어난 후생으로 외람되게 새로운 사실을 모색하는 것이 어찌 선배들의 훌륭한 기록을 근거하는 것만 같겠는가. 삼가 공의 손자 승지공(承旨公)의 지문(誌文)과 소산[小山, 이공(李公)]의 정려비(旌閭碑) 음기(陰記)를 참고하였다. 공의 타고난 성품은 매우 순수하였고 기국은 엄정하고 굳세었으며, 체격이 우람하고 목소리도 컸다.
그 웅혼하고 호걸스런 기상은 수많은 사람 중에 우뚝 뛰어났고, 사람들이 바라보면 엄연儼然하여 두려워하였다.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님을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였고, 부모님이 병들었을 때는 곁에서 모시고 탕약을 달이는 데 극진한 정성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슬피 곡하기를 예제(禮制)보다 더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모친상을 당해서도 부친의 상과 같이 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나서는 묘소가 마주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종신토록 그리워하는 마음을 붙였다. 평소에는 사당을 깨끗이 청소하고 아침저녁으로 참배하였으며, 비록 급박한 일이 생기더라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장사를 마치고 나서도 여막에서 죽을 마셨고, 마음가짐과 일을 행할 때는 한 점 흠이 없었으니, 이는 신명에게 증험할 수 있다. 만력(萬曆) 연간에 고을 사람들과 서원의 유생들이 공의 효행에 대해 서장(書狀)을 올려 아뢰고, 전임 후임 감사들도 차례로 계문(啓聞)하니, 선조대왕이 거듭 상찬과 물품을 하사하고, 서용(敍用)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숙종 을묘년(乙卯年, 1675, 숙종 원년)에 공의 손자 생원 자磁가 조정에 상소하여 특별히 정려(旌閭)의 은전이 내려졌다. 뒤에 증손 천택(天澤)이 존귀하게 됨에 따라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으니, 은혜가 황천에까지 미치고 교화가 세교(世敎)를 부지하였다. 꿩이 날아와 제사를 받든 기이한 일과 전란 중에도 이곳은 조용했던 등의 일화는 공의 대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므로 둘 다 생략하였다.
학봉[鶴峯, 김 문충공(金文忠公)]이 일찍이 공의 행의(行誼)를 조정에 천거하였고, 또 공을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자 시를 남겨 말하기를
나그네 이르러 무슨 마음으로 ‘봉’ 자53)를 썼던가 客到何心題鳳字
아금 한 곡조는 옛날의 벗이로다 牙琴一曲舊知音
라고 하였으니, 칭송하고 허여하여 중히 여김을 받음이 이와 같았다.
순조 병자년(丙子年, 1816, 순조 16)에 사림에서 봉암사(鳳巖祠)에 배향하였다. 그의 세계(世系)는 영의공(英毅公)의 후손으로, 익(翼)은 영양군(英陽君)에 봉해졌고, 시중 비(備)․ 판서 성로(星老) ․ 판서 유손(有孫) ․ 판서 휘주(暉珠) ․ 참판 민생(敏生) 등이 있다.
3대를 내려와 팔개(八凱)는 사직(司直)을 지냈고, 처곤(處崑)은 참봉 등을 지냈는데, 공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이상이다. 두 아들은 흥달(興達) ․ 좌승지로 추증된 융달(隆達)이고, 딸은 김상계(金三戒)에게 시집가고, 서자는 삼달(三達)이다.
손자는 13명인데 옥(砡) ․ 입(砬) ․ 할(硈) ․ 생원 정(矴)․ 굉(硡) ․ 참판에 추증된 집(磼) ․ 현감을 지낸 급(礏) ‧ 문과에 올라 도승지로 추증된 연(碝) ․ 생원 자(磁) 등이다. 증손은 24명인데 문과에 올라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천한(天漢) ․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에 추증된 천택(天澤) ․ 호군 천주(天澍) ․ 생원 천로(天老) ․ 생원 천우(天祐) ․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典籍)을 지낸 천상(天祥)․ 생원 천각(天覺) 등이다
. 아! 공은 두터운 덕과 지극한 행실로 이미 성군으로부터 포상과 총애를 받았으며, 장수하고 강녕하여 오복(五福 54)을 누렸다. 본손과 지손이 번성하여 관직에 오른 이가 집안에 가득하였으니, 하늘의 도에 거짓이 없음이 또한 이와 같으니 이 얼마나 위대한가. 앞서 두 공의 기술은 가정에서 실제 본 바에서 나온 것이며, 향리에서 높이 받들어 외우던 말에서 나온 것으로 우선 다 갖추어 실었다.
비석의 간략함을 보충하기에 충분하며 후대에 귀하게 여기기에 충분하니 무슨 군더더기 말이 필요하겠는가.
52) 학사(鶴沙)……것 : 학사는 김응조(金應祖, 1587∼167)의 호이다. 김응조가 허영정 남응원(南應元)의 아들인 남융달(南隆達)을 위해 지은 묘지명에서 “鄕人再以孝聞 命敍爵賜米布以褒之”라고 말한 바 있다.(鶴沙集 卷8 「折衝將軍南公墓誌銘)
53) ‘봉(鳳)’ 자 : 세설신어(世說新語) 「간오(簡傲)」에 “혜강(嵇康)이 여안(呂安)과 더불어 친하게 지냈는데, 생각이 날 적마다 천 리 먼 길을 찾아왔다. 어느 날 여안이 왔는데 마침 혜강은 집에 없고 혜강의 형인 혜희(嵇喜)가 나와서 맞이하였다. 그러자 여안이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위에다가 ‘봉(鳳)’ 자를 써 놓고 갔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許亭南公墓碣後識
公之葬。在光淵山先兆午坐原。距今三百有餘載。舊有小碣。略敍世系生卒子孫有科名者。且云公以孝聞。屢承褒命。語在誌石。以爲鶴沙金公所撰。石久而泐。將易而大之。仍篆舊石陰記。不敢加一字焉。今以興洛契家後人。又忝爲自出。請識其後而致加詳焉。興洛自惟。晩生識膚。猥有模索。曷若先輩信筆之爲可據也。謹按公之孫承旨公誌文及小山李公㫌閭碑陰記。公生稟甚粹。器局嚴毅。體大聲洪。其䧺偉魁傑。秀出千百人中。儼然人望而畏之。孝性出天。竭誠奉養。親癠侍湯。靡不用極。及喪。哀毁過制。幾至隕命。旣葬。廬墓歠粥。遭後喪。一如前喪。服闋。築室墓山對處。以寓終身之慕。平居淨掃家廟。朝夕瞻謁。雖急遽。未嘗廢也。處心行事。無一瑕玷。可質神明。萬曆間。鄕人及院儒以狀報前後道臣。次第啓聞。宣祖大王再下賞賜。有敍用之命。肅廟乙卯。公之孫生員磁上言于朝。特命棹楔之典。後以曾孫天澤貴。贈通訓大夫司僕寺正。恩及泉壤。化扶世敎。若其雉飛供祭之異。臨亂從容之蹟。非公大體所關。故幷略之。鶴峯金文忠公。嘗以公行誼薦于朝。又訪公不遇詩曰。客到何心題鳳字。牙琴一曲舊知音。其見稱與之重如此。純廟丙子。士林俎豆鳳巖祠。其世系則英毅公之後。有曰翼封英陽君。曰備侍中。曰星老。曰有孫。曰暉珠皆判書。曰敏生參判。三世而諱八凱司直。諱處崑參奉。公之祖曾以上也。二子曰興達,隆達贈左承旨。女適金三戒。餘男三達。孫十三人。砡,砬,硈,矴生員,硡,磼贈參判,縣監,碝文科贈都承旨,磁生員。曾孫二十四人。天漢文大司諫,天澤文科贈參判,天澍護軍,天老生員,天祐生員,天祥文典籍,天覺生員。嗚呼。公厚德至行。已有聖朝之褒寵。而壽老康寧。享有五福。本支繁衍。鞾笏滿門。天道之不可誣又如此。何其偉哉。二公之述。出於家庭實見。鄕里尊誦之言。姑終該備。足以補舊碣之略。而取重於來世。容何贅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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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형 승지공의 비갈 음기(族兄承旨公碣陰記)
공의 휘는 용락(龍洛)이고 자는 여운(汝雲)이며, 의성 김씨로 문충공(文忠公) 학봉 선생(鶴峯先生) 휘 성일(誠一)이 그의 1세조이다. 세마 집(潗) ․ 좌랑 시권(是權)을 거쳐, 인찬(麟燦) ․ 항수(恒壽)는 모두 은덕(隱德)이 있었고 진국(鎭國)은 생원으로 정릉 참봉(貞陵參奉)을 지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증조할아버지 ․ 할아버지 ․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예안 이씨(禮安李氏)로 교관(敎官) 정국(楨國)의 딸이다.
공은 을묘년(乙卯年, 1795, 정조 19)에 태어났다. 기묘년(己卯年, 1819, 순조 19)에 병과丙科에 올라 내직으로는 장녕전 별검長寧殿別檢 ․ 사간원 정언 ․ 헌납 ․ 홍문관 수찬 ․ 교리 ․ 사헌부 장령 ․ 집의 ․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다. 산릉(山陵)을 옮겨 모실 때 개봉(開封)한 공로로 통정대부의 품계가 더해지고, 병조 참지 ․ 참의 ․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홍문관에 있을 때, 순조실록을 미리 정비할 것을 경연 자리에서 주청하였는데, 그 말이 절실하면서도 강직하였다. 외직으로는 율봉 찰방(栗峯察訪) ‧ 은산 현감(殷山縣監)을 지냈는데, 큰 흉년을 만났을 때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864, 고종 원년) 2월 29일에 정침에서 세상을 떠났고, 3월에 고을 북쪽 조골산照骨山 동쪽 기슭 묘향卯向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타고난 재능이 완후(完厚)하였으며, 성품의 바탕은 성실하였다. 집에 거처할 때는 효도하고 우애로웠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마음을 다하여 직책을 받들었다. 전후로 관직을 옮기면서 물러나는 것은 쉽게 나아가는 것은 어렵게 여기며, 일찍이 하루도 직책 없이 서울에 머문 적이 없었다.
병이 심해지자 곁에 있는 사람에게 “나는 평생 크게 잘하고 잘못한 점이 없고, 사람들은 내가 40년 벼슬살이하면서 서울에 올라가 내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고 여기니, 거의 부끄러움을 면하였다.”라고 하였다. 항상 퇴계 선생의 글을 읽고 음미하며 즐겼고, 자식들에게 먼저 올바로 행한 뒤에 문예에 힘쓰도록 가르쳤다.
배위 숙부인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통덕랑 주헌(周憲)의 딸이다. 1남을 낳았으니 병모(秉模)이고, 네 딸은 이만유(李晩逌) ․ 이집李 ․ 김휘태(金輝泰) ․ 도사 권상직(權相稷)에게 시집갔다. 계배위 안동 권씨(權氏權氏)는 학생 영진(永震)의 딸로 아들 술모(述模)를 낳았다.
병모는 승환(承煥)으로 후사를 삼았고, 딸은 정기섭(鄭箕燮) ․ 류정희(柳鼎煕) ․ 이수경(李壽卿)에게 각각 시집갔다. 술모의 아들은 출계하여 공의 제사를 받드는 승환과 종환(瑽煥) ․ 영환(瑛煥) ․ 경환(璟煥)이다. 이만유의 아들은 참봉 중식(中軾) ․ 중철(中轍) ․ 중보(中輔)이고, 딸은 김수황(金壽璜)에게 시집갔다.
이집의 아들은 종하(鍾夏) ․ 종기(鍾夔)이다. 김휘태의 아들은 경규(慶奎) ․ 필규(弼奎)이다. 권상직의 아들은 인섭(仁燮) ․ 창섭(昌燮) ․ 영섭(永燮)이고, 딸은 김홍림(金弘林)에게 시집갔다.
54) 오복(五福) : 서경 「홍범(洪範)」에 “오복은 첫째가 장수함이고, 둘째가 부유함이고, 셋째가 강녕함이고, 넷째가 덕을 닦는 일이고, 다섯째가 늙어 천수를 다하는 것이다.[五福 一曰壽 二曰富 三曰康寧 四曰攸好德 五曰考終命]”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原文]
族兄承旨公碣陰記
公諱龍洛字汝雲。金氏出義城。文忠公鶴峯先生諱誠一。其十一世祖也。歷洗馬諱潗,佐郞諱a321_385b是權。有諱麟燦,諱恒壽。俱有隱德。諱鎭國生員貞陵參奉。是公三世。妣禮安李氏。敎官諱楨國女。公生乙卯。己卯擢丙科。內則長寧殿別檢,司諫院正言,獻納,弘文館修撰,校理,司憲府掌令,執義,宗簿寺正。用遷陵時開封勞。加通政階。兵曹參知,參議,承政院同副承旨。其在玉堂。預修純廟實錄。經筵奏對。言多切直。外則栗峯察訪,殷山縣監。値大歉。悉心賑濟。甲子二月二十九日。考終于寢。三月葬府北照骨山東麓向卯原。公稟賦完厚。性質誠愨。居家篤孝a321_385c友。立朝盡心奉職。前後遷除。率易退難進。未嘗一日無職而滯都下。病革。語在傍者曰。吾平生無甚短長。而人以朝衣四十載不上長安泥挽我。庶可無媿。常讀退陶夫子書。味而樂之。敎諸子。必先行誼而後文藝也。配淑夫人固城李氏。通德郞周憲女。生一男秉模。四女李晩逌,李,金輝泰,權相稷都事。安東權氏。學生永震女。生一男述模。秉模嗣男承煥。女鄭箕燮,柳鼎煕,李壽卿。述模男承煥入承公祀。瑽煥,瑛煥,璟煥。李晩逌男中軾參奉,中轍,中輔。女金壽璜。李男a321_385d鍾夏,鍾夔。金輝泰男慶奎,弼奎。權相稷男仁燮,昌燮,永燮。女金弘林。
[출처] 서산선생문집 제20권 묘갈명墓碣銘|작성자 류병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