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곡리(桂谷里)
계곡리는 안동군 임북면에 속하였으며 계일, 또는 계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마곡, 전시곡, 장성백리를 병합하여 계곡동(리)를 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안동댐 건설에 따라 월곡면이 폐지됨으로서 예안면에 속하였으며, 1995년에는 안동군을 안동시에 통합함에 따라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계곡리는 압시골, 찰앞시골, 웃게일, 장성백이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수는 30여호이다.
◎ 기사리
아마리 아마리골 아휴리(阿休里) 조선 숙종 15년 昌寧人 曺圭承이 개척했다고 전해지며, 연대 미상이나 채정승이라는 분이 벼슬을 하여 이 곳을 지나다가 경치가 좋아 쉬어갔다 하여 아휴리로 불리어졌다고 하며 지금은 아마리로 부른다. 선암골 선암동(仙岩洞) 永川 李氏인 李公이 전사했는데 그가 탓던 말과 말방울이 이 곳에 돌아 왔다. 이에 仙岩堂을 지어 그의 영혼을 모셨으므로 동명을 선암골로 부르게 되었다.
▶ 서당골 서당곡(書堂谷) 고려가 망하자 기사에서 은거 생활을 한 佐司諒 權 正이 이곳에 서당을 짓고 훈학을 하였기에 후일에 서당골로 부르게 되었다. 안동 權 氏의 동족 부락이다.
▶ 기실기 기시러기 기사리(棄仕里) 고려말 安東府臨河縣 玉山洞 桃木村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부터 棄仕里가 되었다. 산기슭에 위치하므로 기실기라 하였으며, 1974년에 월곡면에서 예안면으로 편입되었다. 또 權司諫 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곳에서 기사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대밭말 대밭골 죽전곡(竹田谷) 대밭을 개척하여 이룩하였다 하여 대밭말이라 한다. 개간지가 많으며 사과밭을 갖고 있는 5호 외에는 모두 고추·깨·땅콩 등의 특수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 주진리(舟津里)
주진리는 낙동강 가의 나루터가 되므로 배나드리, 배나들, 또는 주진(舟津)이라 하였다. 행정구역상 안동군 동후면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노천리와 임북면의 박곡리와 예안군 읍내면의 천전동 일부를 병합하여 주진동(리)이 되고,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월곡면에 편입되었는데, 1937년 안동댐의 시설로 인하여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 월곡면이 폐지됨에 따라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주진리는 현재 행정구역상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70여호이다. 주진 1리에 속한 마을로는 배나들이 있으며, 주진 2리에는 삼산, 오른데, 노천 등의 마을이 있다.
▶ 배나들·주진(舟津) 고려시대 소금 장수들이 소금을 팔거나 물물교환을 위해 나룻배로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부산에서 출발하여 안동을 지나 이곳까지 넘나들었는데 이 때 이곳의 나룻터가 선착장 역할을 하던 곳이라 하여 배나들이라고 하였고 한자로는 주진이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100여 호를 헤아리는 큰 마을이었으나 모두 수몰되고 현재 새로 조성한 마을에 진주강씨 7집과 밀양박씨(密陽朴氏) 7집을 포함하여 약 17호의 주민이 살아간다.
▶ 삼산(三山) 오른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살았는데 조선 숙종 때 전주인(全州人) 류석구(柳錫龜, 1673∼1737) 공이 개척하였다고 전한다. 이 마을에서 공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이 분이 영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류정원(柳正源) 선생이다. 선생의 아호는 삼산(三山)인데, '삼산'이란 현재 삼산종택 안마루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앞산이 세 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다하여 부르는 것으로 류정원 선생이 이름을 떨치면서 이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현재 마을 가구수는 약 30여호로 밀양박씨가 17집이살며, 전주류씨가 2집이며, 나머지는 각성이다.
◇ 대사간터:대사간을 역임한 류정원 선생이 살았다하여 그렇게 부른다.
▶ 오른대·오은대(五隱臺) 배나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안동에서 정산리 방면으로 진행하다가 주진교에서 오른편 산중턱을 바라보면 산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로 뒤에 오로봉이 있다. 마을 이름을 오른대, 오른데 혹은 오은대라고 하는데 오른대라고 부르는 유래는 이 마을이 노천 마을 보다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오룡동 밑이 된다. 수몰 전에는 15가구가 있었으나 지금은 8가구가 살고 있다.
▶ 갈대밭·노천(蘆川) 오른대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안동에서 정산리 쪽으로 가다가 주진교를 건너자말자 교각 아래도 우회전하면 현재 주진-천전간 도로확장공사가 진행중인 길이 물가를 따라 서쪽으로 나있다. 여기서 조금 들어가면 갈대밭 마을인데 이곳은 옛날 낙동강변에 갈대가 많아 갈대밭을 이루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한자로는 노천이라 한다. 수몰 전에는 25가구의 큰 마을이었으나 현재는 10집만 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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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산리(鼎山里) 정산리는 구한말 안동군 임북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정정리(上鼎井里), 하정정리(下鼎井里), 등산리(登山里), 계곡리(桂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정정(鼎井)과 등산(登山)의 이름을 따서 정산동(리)가 되었고, 1934년에 다시 행정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월곡면에 편입되었다가 1974년 7월 1일 월곡면이 폐지되면서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정산리는 1리와 2리로 나누어지며 전체 가구수는 190여 가구로 예안면에서 가장 많은 주민이 산다. 정산 1리는 시장, 등재, 상활지, 하활지, 마골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산 2리는 샛터, 오리실, 중마, 솥우물로 이루어져 있다.
▶ 시장(市場)·억산(億山) 정산 시장이 들어선 자리를 말하는데 약 50여호가 산다. 예전에는 억산(億山), 억새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옛날 이곳에 억(億) 부자(富者)가 살았다고 한다.
▶ 등(登)재·등현(登峴)·등산(登山) 새터 남쪽에 있는 큰 마을로 이 마을의 위치가 주위의 다른 마을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오를 등(登)'자를 써서 등재, 등현 혹은 등산이라 한다. '고개를 오른다', '재를 오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괘등형(掛燈形)의 명당 두 곳이 있다고 하는데 한 곳은 흥해배씨의 묘소이며, 다른 한 곳은 진성이씨의 묘소라 전한다. 이 마을은 흥해배씨와 광산김씨가 거의 동시에 들어와 정착한 곳이라고 하는데 현재 각성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활지(活地)·살지(薩地) 활지는 새터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새터에서 등재를 지나 동남쪽으로 가다가 동다리 마을을 조금 못 미쳐 있다. 상활지(上活地)와 하활지(下活地)가 있는데 상활지는 하활지에서 북쪽으로 1km남짓 더 들어가면 있으며, 하활지는 길거리에 있다해서 거리활지라고도 부른다. 현재 상하(上下) 활지를 합해 약 10호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영가지에 따르면 '속명은 살지(薩地)라고 하며 현(縣)의 40리에 있다고 하였다. 삼한(三韓) 대에 왜적이 쳐들어오니 사람들이 많이 여기로 피난하여 면하였다. 그러므로 이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마을 북쪽 2리쯤에는 왜적과 싸워 이긴 곳이 있으며 아직까지 왜적의 무덤이 여러 겹 쌓여있다'고 기록하였다. 또 구전되는 말에 따르면 이 마을은 매우 아늑해서 삼한(三韓) 때 왜란을 피하여 난민들이 이곳에 와서 살았다하며, 고려 공민왕 때는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온 난민들의 정착지로 난을 피하여 살터라는 의미로 '활지' 또는 '살지'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 활 지 탕:활지에 있는 샘물로 약수로 유명하며 고려 공민왕이 청량산에 왔을 때 이 물을 가져 다 마셨다고 한다. ◇ 두들활지:활지 앞 벌판을 말하며 활지를 중심으로 웃활지와 아랫활지로 세분하기도 한다. ◇ 항 거 리:하활지 서쪽에 있는 한(큰) 거리를 말하며 변하여 항거리로 부른다.
▶ 마골·마곡(麻谷, 磨谷) 등재의 남쪽, 등재에서 기사동으로 넘어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등재마을 건너편에 있다. 옛날 이곳에 삼〔麻〕밭이 있어서 삼밭골 혹은 마골로 불렀다고 한다. 현재 6집이 살고 있다.
▶ 샛터·신기(新基) 오리실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선조 때 의성인(義城人) 조성당(操省堂) 김택룡(金澤龍, 1547∼1627) 선생이 처음 마을을 개척한 후 새로 생긴 마을이란 의미로 새터, 샛터라 하였으며 한자로는 신기라 한다. 의성김씨의 집성촌으로 마을의 규모가 컸으나 도시 진출 등으로 지금은 가구가 많이 줄어들어 4가구가 산다.
▶ 오리실(梧里室, 梧里實)·오곡(梧谷) 솥우물 남쪽 골짜기에 있는 형성된 마을로 생성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마을에 구전되는 말에 따르면 고려시대 때 이미 이 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건너편의 샛터 마을이 생길 무렵 이 마을의 호수가 50여 호를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마을은 유씨가 먼저 살다가 떠나고 그 뒤 마을 주민 최덕균(63)씨의 증조부 때부터 경주최씨가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마을의 동구 앞에 원(院)이 있었다하고 지금의 동구 부근은 오동나무 숲이 우거져서 마을 안을 볼 수 없을 정도였는데 마을 안에 들어오면 바람이 없어 마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따스하다고 하여 동리 이름에 '집 실(室)'자를 붙였다고 하며, 동구에 오동나무가 무성하다하여 하여 '오리실' 혹은 '오곡'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마을의 어딘가에 오리를 닮은 형국이 있어 오리실이라고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마을에는 경주최씨를 비롯하여 각성 6가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안에 1990년에 창건한 사찰인 천봉사(天奉寺)가 있다.
◇ 원 앞 들:오리실 동구 앞 들판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옛날 이곳에 원(院)이 있었다고 하여 지 금도 이곳을 원앞들이라 한다. ◇ 섬 밭:옛날 이 마을에는 늪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조그마한 섬이 있었다고 하여 섬밭이라 한다.
▶ 중(中)마·중정(中鼎) 이곳의 지세가 솥 부뚜막형같이 생겼고, 그 가운데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중정(中鼎), 중마, 중마을이라고 한다. 안동권씨, 안동김씨를 포함하여 약 10호가 살고 있다.
▶ 솥우물·정정촌(鼎井村) 정산시장에서 북서로 1.5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8가구가 살고 있다. 이 마을은 땅 밑에서 솟아나는 지하수가 명천(名泉)이라 정산(鼎山)의 '정(鼎)'자와 우물 '정(井)'를 취해 지명을 정정(鼎井)이라 하고 우리말로는 솥우물, 소두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솥우물은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세분해서 부르기도 하는데 이 때 윗마을을 윗솥우물, 아랫마을을 아랫솥우물로 부른다. 윗솥우물 북쪽 산에는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묘와 재실이 있다. 영가지의 기록에는 '정정촌은 현(縣)의 북쪽 50리에 있으며 마을 가운데 옛 우물이 있어 낙동강과 5리 떨어져 있는데, 낙동강 물이 흐리고 맑음에 따라 우물 역시 흐리고 맑았다'고 하였다. 이 우물은 원래 3개였으나 하나를 메워버려 현재 2개만 전하는데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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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시골·전시곡(前是谷) 계일 건너 동쪽으로 1.5㎞쯤 되는 긴 골짜기에 형성된 마을로 계일 앞 골에 있다하여 앞시골 혹은 압시골로 부르며, 한자로는 전시곡이라 한다. 동리가 길어서 골짜기 안쪽에 있는 마을을 상앞시골 혹은 내전실이라하며, 거리에 있는 마을을 거리앞시골 혹은 걸앞시골이라 부른다.
▶ 걸앞시골·거리앞시골 앞시골 거리에 있는 마을로 걸앞시골 혹은 거리앞시골이라 부른다. 전주류씨 4집을 포함하여 10 가구가 살고 있다.
▶ 웃게일·윗계일(윗桂日) 계일(桂日)은 장성백이 마을 남쪽 안동호가에 있는 마을로 풍수지리적으로 계화낙지(桂花落地)의 형국이라 하여 계일이라 불렀으며 윗계일과 아랫계일로 나눈다. 주로 전주류씨(全州柳氏)가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안동댐으로 인해 아랫계일은 모두 수몰되고 윗계일에 전주류씨 7가구만 남아 있다. 옛날 규중 처녀가 저녁에 머리를 감다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뒤 당(堂)을 짓고 동제(洞祭)를 지냈다하며, 당(堂)터는 좋은 묘자리로 사람들이 욕심을 부렸지만 묘를 쓸 경우 동리가 망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갈매골, 갈마골, 갈마곡(葛馬谷):계일 남동쪽 강 건너편에 위치한 골로서 골 입구에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의 큰 바위가 있다고 하여 갈마골이라 불렀는데, 지금은 안동댐으로 인하여 물이 줄면 드러나고 만수가 되면 수몰된다.
▶ 장성백이·장성배기·장성백리(長城百里) 계일 북쪽 500m 지점 산기슭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로 하할지 마을에서 동다리로 가다가 마을부근에서 우측의 작은 다리를 건너 약 400m쯤 들어가면 장성백이 마을이다. 동구에 이정(里程)을 알리는 장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장승이 있는 이 마을의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장승이 서있는 대백’이라는 뜻으로 장성백이, 장성배기라하며, 또 장성백리라 표기하기도 한다. 현재 수몰로 농사지을 경작지가 많지 않아 얼마 남지 않아 주로 담배와 같은 특용작물을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 앞은 댐 물이 호수를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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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소리(羅所里) 예부터 안동부(安東府) 동(東, 1710), 안동부 동후(東後, 1786), 안동부 동후면(東後面, 1832) 나소곡리(羅所谷里)·미남리(美南里)·요촌리(蓼村里), 관찰부(觀察府, 1895) 동후면 나소곡리·미남리·요촌리, 안동군(安東郡, 1896) 동후면 나소곡리·미남리·요촌리, 안동군 동후면 나소동, 안동군 월곡면(月谷面, 1934) 나소동, 안동군 와룡면(1974) 나소동, 안동군 와룡면 나소리, 1988), 안동시(1995) 와룡면 나소리로 동리명이 변경되었고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전에는 현(現) 방잠내(芳岑內) 오천(烏川) 1리가 나소곡리 구역이였다. 현 나소리는 와룡면의 동북에 위치해 있고 면적은 8.972 km2에 6개반이 있으며 와룡면 30개리 경지면적 중, 약 13%가 나소리 경지면적이다. 동서 직선거리는 약 5.4km이고 남북 직선거리는 약 2.8km이다. 나소리는 현재 점골(요촌), 미남, 방잠, 연산, 도장골, 나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구수는 약 100호 정도가 산다.
▶ 점(店)골·요촌(蓼村) 이 마을은 옛날 요촌부곡(蓼村部曲)이 있었던 마을로 낙동강변 10여 리에 한해살이풀인 여뀌〔蓼〕가 무성한 것을 개척하고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요촌(蓼村)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또 질그릇 점(店)이 있었다고 하여 점골 혹은 요촌(窯村)으로도 칭하게 되었다.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와 안동군읍지(安東郡邑誌)에 동후면(東後面) 요촌리(蓼村里)로 또 고부곡칠(古部曲七)에 요촌부곡(蓼村部曲)으로 각각 등재되어 있다. 영가지(永嘉誌) 필사원본(1602∼1607)에 요촌(蓼村)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에는 요촌탄(蓼村灘), 요촌부곡으로 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1)에도 요촌탄, 요촌부곡으로 각각 등재되어 있다."(羅別誌) 현재 요촌 마을은 안동댐 건설로 인해 저지대에 있던 마을이 수몰되어 높은 지대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 나소리 1반이며 각성 5가구가 살고 있다.
▶ 미남(美南)·미나무 이 마을은 월곡면에 속해 있다가 1974년 행정 구역 변경으로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마을 주위 산세가 매우 아름답고 남쪽으로 맑은 낙동강 물이 주야(晝夜)로 그치지 않아 산수의 아름다움을 따서 미남 또는 미나무라고 한다. 현재 이 마을은 나소리 2반이며 가구수는 예전에는 40여호를 헤아렸으나 지금은 20호로 반남박씨가 15집, 경주최씨 5집이 살고 있다.
▶ 방잠(芳岑)·방잼이 나소리 3반으로 방잠 또는 방잼이라고 부르며, 일부는 오천 1리에 속해있다. 안동군 월곡면에 속해 있다가 1974년 행정 구역 변경으로 와룡면에 편입되었으며 수정산(水晶山)의 아름다움을 따서 방잠으로 했다고 전해진다. '방잠은 꽃같이 아름다운 산 작고 높은 곳이란 의미로 현 영산못의 교회 뒷산을 선성지(宣城誌, 1619)에 방잠산(方岑山)으로, 한티재 아래 고개는 방잠고개(方岑古介)로 등재되어 있다. 즉, 선성현(宣城縣)의 남방에 산 작고 높은 산이라서 방잠산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보는데 이 산에서 수정(水晶)이 출토되어 수정산이라고도 하며 절이 있었던 산 대백을 절터 대백이라고도 한다. 또 산 작고 높을 잠(岑)자로 산 이름을 지은 이유는 오천, 미남 지대와 비교해서 방잠 지대가 더 높으며 방잠 수구(水口)에서 낙강(洛江)까지 급속히 지대가 낮아진다. 그래서 낙천(洛川)이라고 지었다고 보며, 또 낙천의 낙(落)자를 따서 낙강으로 강 이름을 지었다고 본다.'(羅別誌) 이 마을에는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여덟 군데의 아름다운 경치가 있어 이를 방잠팔경(芳岑八景)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다.(羅別誌))
◇ 峴楠:한티재 옛 느티나무로 지금은 없다. ◇ 九水龜岩:물이 많이 모이는 곳에 거북 바위. ◇ 雲巖夜月:雲巖山과 달. ◇ 聖堂老松:聖堂谷 老松으로 지금은 없다. ◇ 부처목:佛頭岩. ◇ 靈山朝霧:靈山에 아침 안개. ◇ 靈山朝霞:靈山에 아침 노을. ◇ 白虎嶝:앙고바우 골 - 左山嶝.
▶ 연산·영산곡(靈山谷)·영산(靈山)못 원래 안동군 월곡면에 속해 있다가 1974년 와룡면에 편입된 마을로 나소리 4반이다.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 때 영산사(靈山寺)라는 사찰이 있어 영산(靈山) 또는 영산모치, 연산 등으로 불리어지게 되었으며, 방잠산(方岑山)과 영산곡 뒷산에 옛 기와 조각과 주추돌이 현재도 발견된다고 한다.
▶ 도장골(刀藏谷)·한천소(寒泉所) 나소리 5반으로 8집이 살고 있으며 대부분이 광산김씨이다. '예부터 차가운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서 한천소(寒泉所)로 불러 왔으나 지금은 없다. 또 마을 서쪽 상처(上處)에 흡사 도(刀)자 형상의 산이 있고 그 양(兩) 하처(下處)로는 산이 곡(谷)을 감싸 놓아서 도장곡(刀藏谷)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 신촌(新村) 앞산에 초당(草堂) 김용(金鏞, 1657∼1732) 선생의 육유재(六有齋)가 있다.'(羅別地)
▶ 나별(羅別)·나소곡(羅所谷)·원나소(元羅所) 이 마을은 마을 지형이 소라 같이 생겼다 하여 나소곡으로 불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동시에 나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또 '영가 사십리 고동소라(永嘉 四十里 古洞召羅)'라는 곳을 찾아가면 난(亂)을 피할 수 있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 현재 나별을 분류하면 양지마을과 골마을, 음지마을로 구분되며, 다시 세분하면 골마을을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구분하여 4개 마을이 된다. 나별 안에 나소곡이 있고 나소곡 안에는 소라곡(召螺谷)이 있는데,『정감록(鄭鑑錄)』에 이르는 '고동소라(古洞召羅)'는 바로 이 소라곡을 이르는 말이라 하며 소라곡 안에는 골마을과 음지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 소라곡(召螺谷):'소라곡은 지형이 소라를 닮아 소라곡으로 곡명(谷名)을 지었다는 말이 전해 지는데 소라곡 전면(前面) 지형을 보면 소라 입 형상이며 평장포(平章浦)에 뾰족뾰족 나온 산 의 지형은 껍데기 외부와 흡사하다고 한다. 소라의 구조는 골이 내부 중심 맥(脈)을 기준하여 상부로 올라가면서 6∼7회 회전하는데, 회 전반경은 차츰 상부로 올라가면서 좁아 들어 6∼7층의 탑 모양을 하고 있다. 탑의 제일 높은 부분에 해당되는 산 대백(등성이)을 독지곡(獨知谷) 대백이라 하며, 독지곡 대백 아래 양(兩) 곡을 각각 독지곡이라고 부른다. 또 독지곡 대백의 서북쪽은 나탑(螺塔) 상(上) 외부를 봉(封) 해 올라간 모습과 같다고 하여 개봉곡(介封谷)으로, 소라껍데기에 접(接)해 있던 물고기가 평 장포로 힘차게 솟아오르는 형상의 골짜기를 어부곡(魚浮谷), 소라껍데기에 기어오르는 바닷 게 형상의 바위를 모암, 큰 자라 형상의 산을 오산(鼇山)이라 하였다. 소라는 돌에 붙어 서식 (棲息)하는데 돌이 많아서 산을 이룬 석산(石山; 돌뫼)이 서남쪽에 접해 있으며, 소라, 물고 기, 바닷게, 큰 자라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으므로 이들이 위치한 중간 야지(野地)를 평장포 로 포명(浦名)을 지어 이곳의 산, 골짜기, 바위 등을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보고 생기(生氣)를 불어넣으려고 한 것 같다. 옛 사람들은 골뱅이가 천년을 살면 고둥이 된다고 말했는데 소라곡은 장생물(長生物)인 소라 고둥이라는 것이 확연하며, 동북쪽에 일자형(一字形) 산인 일현(一峴)을 향해 먹이를 찾고 있 는 형상을 하고 있다. 예언서인 '정감록(鄭鑑錄)'에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안동화곡(安東華谷)"으로 등재된 곳도 이곳 소라곡이다. 그러므로 풍수지리학적으로 길지(吉地)·생지(生地)인 것만은 사실이다.(羅 別誌)' ◇ 양지마을:골마을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남향이어서 종일 햇빛이 비치는 양지이다. ◇ 음지마을:골마을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동, 남, 서방 가까이 산이 있어서 늦게 햇볕이 들어오고 일찍 그늘이 생기므로 음지이다. ◇ 골마을:양지마을의 서남쪽에 있으며 음지마을에서는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골이 깊게 있으 므로 골마을이라 하며 수구암(水口岩)을 기준으로 그 위를 윗마을(上處), 그 아래를 아랫마을 (下處)이다. ◇ 모암:바닷게 형의 암(巖)으로 평장포 내 어부곡(魚浮谷) 상처(上處)에 있으며 소라고둥 껍데 기에 기어오르는 형을 하고 있다.(羅別誌) ◇ 어부곡(魚浮谷):평장포 남면에 접해 있는 골짜기로 한 마리의 물고기(숭어) 모습이다. 아주 옛날에는 한 마리의 물고기가 곡 가득하도록 살쪄있다는 뜻으로 '어부곡(魚富谷)'이라 표기했 으나 1938년에는 이 물고기가 평장포의 물을 만나 떠다닌다는 의미로 '어부곡(魚浮谷)'이라 불렀다고 한다.(羅別誌) ◇ 평장포:소라의 북면(北面) 가야리(佳野里)양지마을과 무덤곡, 큰 자라산, 게바위, 어부곡 (魚浮谷), 앞 들 일대를 가리킨다. 이곳을 흐르는 냇물이 소라곡의 서에서 북, 동방으로 완전 히 빙 둘러 흘러가고 있는데, 소라고등, 물고기, 큰 자라, 바닷게 등은 물이 많아야 잘 살아가 므로 이들이 위치한 중간 야지(野地)를 '대수유(大水有)'의 뜻인 '포(浦)'자를 붙여 평장포로 부른다고 한다. 근래에는 정주(定住) 생활권 사업으로 평장포 둑을 본래보다 높이 쌓았고 또, 소구별통(小口 別通)의 뜻인 암반 지하수 개발로 실재로 평장포에 물이 많이 담수(湛水)되어 '대수유'의 의 미에 부합되는 지명이 되었다한다.(羅別誌) ◇ 오산(鼇山):예부터 자라 형(形)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이 자라는 작은 자라가 아 니고 큰 자라라고 한다. 자라 형국은 가야리 산 4림과 오천이리 산 106-9림에 속해있는데, 자라 머리, 양 앞발 등은 가야리에 있고, 꼬리와 양 뒷발은 오천 2리에 속해있다. 평장포에 큰 자라가 머리와 양 앞발, 배, 등을 담그고 엎드려 남향해 있는 형이다. 1941년경 인근마을에서 인력으로 자라 머리 부분의 산맥 10여m를 끊은 후 그 마을에 흉사가 일어났다고 한다.(羅別 誌) ◇ 장현(長峴):해발 229.5 m의 긴 재이다. 나소리 산 225림과 산 226림, 평장포 하 북산(北 山), 건냉골과 접해 있다. 돋은 재 산 등성이, 지경(地境) 뒷골 산등성이, 묘곡(墓谷) 산등성 이, 양지마을 뒤 산등성이, 장현, 건냉골 산등성이, 심곡( 谷)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긴 현 (峴)이므로 예부터 부동(府東)·동선(東先)·동후(東後)와 예안현의 경계였고 그 중간에 긴 현이 있으므로 장현이라 하였다.(羅別誌) ◇ 건냉골:마을의 건너에 곡(谷)이 있기 때문에 건너곡, 건냉골이라 한다. 청풍김씨(淸風金氏) 가 1500년대말부터 시거하여 1865년경까지 약 20호가 세거했다고 전해 내려온다. 청풍김씨 는 11∼19세까지 세거하였는데, 가후장후(家後葬後) 또는 우물에 여우가 빠져 죽어 우물을 메우고 떠났다는 말이 전한다. ◇ 화산지(花山志:영가지)에 나소곡(羅所谷)으로 등재된 곡이며, 나별(羅別), 나소동(羅所洞), 나 소곡리(羅所谷里)도 나소곡(羅所谷)의 나(羅)자를 따서 지은 지명들이다.(羅別誌) ◇ 일현(一峴):건냉골과 재넘구렁 간의 산으로 소라의 동북에 있는데 북에서 남으로 뻗은 산맥 이 흡사 일(一)자와 같다고 한다. 일(一)자를 쓸 때 처음에는 힘이 들어가고 중 간은 덜 들어가 며 끝은 다시 힘이 들어가는 것 같이 실재로 산맥이 처음에는 크고 높고 중간은 작고 낮으며, 끝은 다시 크고 높다고 한다.(羅別誌) ◇ 분현곡(山分峴谷), 분(山分)티골:재넘구렁 하곡(下谷;하현)을 나누어 놓은 곡(谷)이다. 영 (嶺)을 분(山分)하면 현(峴)이 되고 현(峴)을 분(山分)하면 티가 된다. 그래서 분(山分)티골로 이름을 지었다고 본다. 현재 분(山分)티골로 부르고 있다.(羅別誌) ◇ 심곡(甚谷), 오동곡(梧桐谷), 심곡(오디골):1786∼1832년간에는 부동후(府東後) 오동곡이 라 했는데, 현재는 오동나무도 없고 이름이 바뀌어져서 오디골이라고 부른다. 청풍김씨재사 가 1907년경까지 있었다고 하며 1925∼1935년경에 오디가 많아서 인근마을에서까지 와서 따갔다고 하는데 현재는 뽕나무가 없다.(羅別誌) ◇ 솔모티, 송(松)모롱이:음지마을 앞 - 너래방들과 백곡으로 가는 길목으로 솔이 많은 산모퉁 이에 길을 휘어 돌린 곳이다. 예부터 소나무가 많던 모티이며 음지마을을 감싸주는 백호등(白虎嶝)이며 음지마을, 골마을, 양지마을의 가옥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현재 23채를 볼 수 있다.(羅別誌) ◇ 수구암(水口巖), 너래바위:나별 어귀의 거랑 바닥에 있는 바위이다. 분현곡 - 분(山分)티골 앞 옛 거랑 바닥에 수구암(너래바위)이 있었다고 한다. 그 바위 名(명)을 따서 너래바위 들(너리방 들)이라 불러왔으며, 현재 거랑이 새로 내기 전과 같이 흘렀을 때는 나별에 큰 부자가 났다고 예부터 전해 내려오고 있다.(羅別誌) ◇ 자물쇠바위, 쇄암(鎖岩):자물쇠형의 바위로 너래방 들에서 울결가는 길 옆 거랑섶에 있었다. 1922년경까지 자물쇠 형의 암(岩)이 있었다고 하며, 자물쇠암이 있을 때는 나별에 큰 부자가 났다고 전해 내려온다. 너래방 들에 곡식을 저장해 자물쇠로 잠가 놓은 형상이었다.(羅別誌) ◇ 우거곡(于去谷), 위거곡(蔚巨谷), 울결(蔚結):소라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예전에 숫쑥 - 모호 (牡蒿), 청호(靑蒿) = 제비 쑥이 많았던 골이라 하여 우거곡, 위거곡이라 하였으며 곡내에 산 림이 울창해지면서 울결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라 한다.(羅別誌) ◇ 쟁기바위골, 재인바위골:나별의 우측 제일 하곡(下谷)이며 도장곡과의 지경이고 현재 재인 바위골로 부르고 있다.곡내의 전답이 흡사 쟁기 측면과 같으며 쟁기의 보습 - (쇠) 바위가 나 소리 958번지)밭 옆의 거랑에 있었다. ◇ 백곡(白谷), 백골, 배곡(背谷):곡(谷)이 소라의 제일 높은 부분인 나탑꼭대기 즉, 독지곡 대 백 옆에 있으므로 밝고, 높은 산 대백에 있는 곡이란 의미로 백곡이라 하였는데 백곡과 서당 백곡(書堂白谷)이 있어서 두 곡이 서로 배(背)하여 입(立)해 있는 형이므로 배곡이라고도 했 었다. 산 대백까지 밭이 있으며 백곡서 가야(佳野)로 넘어가면 유일재 김언기 선생의 가야서 당이 있었던 서당백곡이 또 있다. 백곡과 서당백곡 사이 옆 산이 독지곡 대백이다.(羅別誌) ◇ 부처바위골, 부치바우골:부처님 형상의 바위가 있는 골짜기이다. 백곡의 부처 바위곡과 울 결(蔚結) 부처 바위곡 사이에 산맥을 하나 두고 양곡이 꼭 맞게 배(背)해 있다.(羅別誌) ◇ 찬물네기 정(井):백곡 상처(上處) 동쪽 산 아래에 있었다. 우물 위에 옻나무가 있었고 물이 매우 차가웠으나 1992년 경지정리시 없애 버렸다.(羅別誌) ◇ 개봉곡(介封谷), 개바위골:귀중한 것을 꿰매 또는 싸서 봉(封)해 놓은 형의 곡으로 1827년에 도 부동선(府東先) "개봉곡(介封谷)이라 했다. 상(上) 개봉곡과 하(下) 개봉곡이 있다. 산이 상 곡, 하곡을 빙 둘러 입구만 조금 남겨 놓고 싸 놓았다. 상하 개봉곡 간에 있는 산맥 끝 산 모양이 호랑이 머리와 닮아서 호두혈(虎頭穴)이라고 한다. 호랑이가 양 앞발을 땅에 짚고 머리를 숙여 개고기를 먹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며, 다른 바위 (개바위) 남면에 앞쪽 오른발로 썩 긁어내린 것 같은 발톱 자국이 있다. 호랑이(범)는 개고기 를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하개봉곡과 산 등성이를 개바위谷(곡), 개바위(다른바위)곡 대백이 라고도 한다.(羅別誌) ◇ 호감양지(虎監陽地), 범감양지:상하 개봉곡 앞산(가야리)에 있다. 범이 보고 살피는 양지(陽 地)라는 뜻인데 범이 보고 살피는 것은 먹이 즉, 개(개바위)가 있기 때문이다.(羅別誌) ◇ 독지곡(獨知谷), 독자동(獨自洞), 독치골, 도치골:홀로 높은데 이른 골이란 뜻으로 음지마을 과 골마을의 윗 골을 각각 독지곡이라 한다. (羅別誌) ◇ 독지곡(獨知谷) 산등성이:양 독지곡보다 더 높은 곳이 독지곡 산등성이이다. 소라(소라곡)의 나탑(螺塔) 가운데 제일 높은 꼭대기(해발262.5m) 부분에 해당되므로 홀로 높다. 야산이면서 도 인근에서 제일 높고 석산이 서남방에 접해 있으며 암(巖)이 많다. 소라곡 사람들은 예부터 독지곡 산등성이에 검은 구름이 넘어오면 눈, 비 설거지를 해 왔다. 정월 대보름 망월(望月)하 기 위해 나별, 석산 사람들이 예부터 1975년경까지 독지곡 산등성이에 올랐다. 독지곡 산 등성이에서 보면 나별, 석산, 눌곡, 도장곡, 영산못, 방잠이 훤히 잘 보이며 예부터 안동부 동선과 동후, 동선면과 동후면·월곡면의 계(界)였고 지금의 가야·나소리의 계(界)이 다.(羅別誌) ◇ 석산(石山), 돌뫼:와룡면 가야리의 돌미를 이르며 독지곡 산등성이 넘어 나별의 서남방에 있 어‘석산나배(石山羅背)’해 있다. 소라와 소라고둥은 돌에 붙어서 서식하는데 석산과 나별은 실재로 인접해 있다. 소라는 돌이 없으면 살 수 없으며 나별이 소라라는 것도 석산이 있으므 로써 더욱 확실하다.(羅別誌) ◇ 삼태암(三台巖):윗마을 상처(上處)에 있는 큰 별 세 개와 같은 암(巖)이다. 독지곡(獨知谷)은 고곡(高谷)이므로 암 세 개가 나란히 있는 것을 하늘에 떠 있는 삼태성(三台星)과 견주었다. 1974년까지 암 세 개가 상중하로 나란히 있었는데, 현재는 제일 아래쪽에 있는 암만이 남아 있다. 하암 위에 사람 10여명이 앉을 수 있어서 예부터 하절 야간에 마을 사람들이 더위를 피 해 암에 올라 얘기꽃을 피우다가 잠을 자기도 하였다.(羅別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