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기술이 본격 적용되는 첫 분야는 은행간 송금 영역이 될 전망이다. 지금은 해외로 송금할 때 국제은행간 통신협회인 'SWIFT'의 중개를 거쳐 자금이 이동한다. 사용자, 국내 은행, 해외 은행 등 여러 기관을 거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수수료도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암호화폐를 통한 해외 송금이 시작되면 은행끼리 디지털로 연동돼 자금을 직거래하는 은행 대 은행 (B2B)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따라서 자금이체가 실시간으로 이뤄진다. 이에 따라 지금보다 수수료가 30% 이상 저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외 은행과 정보기술(IT) 기업들은 합종연횡하며 블록체인 송금망 플랫폼 선점에 나섰다. 맥킨지 최근보고서에 의하면 블록체인 도입으로 크로스보더 페이먼트(국제송금)에서 전 세계 은행권이 연간 50조~60조원의 이익을 보게될 것으로 내다봤다. 'VISA B2B Connect'는 VISA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미국 벤처기업 체인과 공동 개발한 국제 송금 서비스다. 현재 시범사업 프로젝트가 진행 중인데 미국 컨슈머뱅크, 신한은행, 싱가포르, 필리핀 등 4곳이 개발에 참여하고 있으며 내년 상용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영국 바클레이스, 미국 US뱅크 등 글로벌 은행 22곳도 R3라는 이름으로 공동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국제 자금 이체 시스템 구축에 나선다. 국내외 은행 총 22곳이 참여하는 이 프로젝트는 '아전트'이며 최근에 개발을 완료하여 상용화를 준비중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KB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KEB하나은행도 참여했다. 시대변화에 둔감하기로 악명 높은 일본 금융사까지 블록체인 기술 도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일본 3대 대형 은행을 비롯해 60여개 금융사가 블록체인을 활용한 금융 거래 실증시험을 마쳤다. 온라인은행과 지방은행 등을 중심으로 블록체인을 활용한 서비스를 내놓은 금융사는 수수료를 최대 현재의 10분의 1 수준으로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블록체인을 활용하면 거래 기록이 복수 컴퓨터에 분산·관리되는 덕분에 거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비용 등을 크게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영국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을 비롯해 스페인 산탄테르은행 등 대형 은행들이 속속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현재 100개국 이상에서 금융사가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했다.
블록체인 30년의 역사, 550조 거대시장으로 급성장한 암호화폐
블록체인의 시작은 미국을 중심으로 사이버펑크(Cyper Punk) 운동이 벌어진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이버펑크족은 정부로부터 사생활 보호를 극도로 중요시했다. 금전 거래 내역 역시 보호돼야 할 사생활의 일부로 봤다. 이를 위해 고안한 개념이 암호학자 데이비드 차움의 '디지털 캐시'다. 비트골드, 비-머니, 해시캐시 등 암호화폐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당시 이 기술은 시장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동안 잊혔던 이 프로젝트들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였다. 중앙정부나 제3의 거대 기관의 통제가 오히려 경제를 붕괴시키자 금융권을 중심으로 대안을 찿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암호화폐는 거래를 신뢰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때 등장한 게 '나카모토 사토시'가 개발한 비트코인이다. 거래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거래정보를 분산해 공동 보관하는 블록체인 개념을 적용했다. 2011년 미국의 IT 개발자 제드 매케일럽이 온라인에서 공개적으로 비트코인을 구입할 수 있는 암호화폐 거래소를 만들면서 비트코인은 투자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2013년 불법 마약거래소가 비트코인을 결제수단으로 삼으면서 뉴욕시는 이듬해 암호화폐에 대한 첫 규제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는 오히려 공론화를 이끌었고 더 큰 투자자와 개발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015년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의 힘이 보태지며 이더리움, 리플 등 새로운 암호화폐가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작년말 암호화폐 시장은 550조원 규모로 커졌다.
사기 판치던 85조 다이아몬드 시장, 블록체인 거래로 신뢰 회복
블록체인은 기존 비즈니스를 혁신할 수 있는 아이디어와 실행력을 갖추면 세계적 기업이 될 가능성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다. 세계 최초로 블록체인 기반 다이아몬드 거래소인 '세덱스(Cedex)'를 만든 사르 레비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도 그중 한 사람이다. 다이아몬드 산업의 가장 큰 문제는 신뢰였다. 가짜 다이아몬드가 많고 사고파는 것도 산업 규모에 비해 투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가 자산으로 인정받아 보유하는 부자가 많지만 이에 투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에 착안해 창업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다이아몬드 거래를 포함한 금융 전문가였던 레비 CEO는 무려 800억달러(약 85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다이아몬드 사업 규모에 비해 사기도 많고 투명하지 못했던 거래 관행을 블록체인으로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레비 CEO는 리먼 브러더스, 바클레이스 등 금융기관에서 15년간 지낸 경력과 예술 거래소 CEO로 재직했던 경험이 있다. 그는 다이아몬드 산업과 금융시장 간 거리를 줄이는데 중점을 두고 투명한 다이아몬드 거래뿐만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보유 자산에서 투자 자산으로 인정받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투자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려는 다이아몬드 소유주와 다이아몬드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들을 연결하고 있다. 다이아몬드 보유자가 거래용 다이어몬드를 이더리움 기반 스마트 계약으로 공개하면 보석 데이터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기반으로 거래도 가능하다. 세덱스는 아직 스타트업에 불과한데 어떻게 거대한 다이아몬드 시장을 혁신하고 믿음을 줄 수 있을지엔 앞으로 지켜 볼 일이다.
블록체인 민주주의 시대로
스페인 마드리드 동부 카니예하스에 사는 직장인 마리벨 에스테반(44)씨는 출근 전 포데모스 정당 앱에 접속하는 것으로 일상을 시작한다. 싱싱한 활어처럼 매일같이 올라오는 당내 투표안건을 확인하고,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재미가 적지 않다. 지역 지지자들이 모인 ‘서클’의 대표자를 뽑는 일부터 국회의원 신임투표, 각종 정책 당론을 결정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안건의 종류는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에스테반씨는 “과거 내게 정치란 4년에 한 번 투표장에 가는 것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이 모든 게 2014년 1월 포데모스가 창당된 이후 4년간 나타난 변화들이다. 신생정당 포데모스는 시민ㆍ정당 민주주의를 앞세워 스페인 정치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의원이나 당직자는 아고라보팅 결과를 왜곡 없이 현실 정치에 반영하는 것으로 역할을 한정할 정도로 국민주권을 강조한 게 주효했다. 의원ㆍ당직자의 역할을 줄이자 지지자들이 반응했다. 일상적으로 모이고, 토론하고, 공부하면서 시민 스스로 정치적 힘을 모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총리 탄핵도 당대표 재신임도 대중들 손으로 '아고라보팅' 혁명
2018년 5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광장은 탄핵 열기로 뜨겁게 달궈졌다. 한쪽 편에선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집권 7년 만에 불명예 퇴진 위기에 몰렸다. 여당인 국민당(PP)의 부패 스캔들이 도화선이었다. 다른 한쪽 편에선 총리 탄핵에 결정적 역할을 한 좌파정당 포데모스(Podemos)의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대표 탄핵 논란이 뜨거웠다. 말총머리를 한 급진좌파 정치인이어서 ‘스페인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로 불리는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서민층을 대변한다면서 마드리드 인근에 우리 돈 7억7,000여만원 상당의 고급빌라를 매입한 사실이 알려져 ‘위선자’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블록체인 기술을 바탕으로 한 포데모스의 ‘아고라보팅(Agora Voting)’이 벼랑 끝에 선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라호이 총리는 하원이 6월 1일 불신임안을 가결하면서 스페인 역사상 첫 탄핵된 총리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탄핵안은 안건을 발의한 사회당(84석)에 제3당인 포데모스(67석)가 가세하면서 전체 350석 중 찬성 180표로 통과됐다. 포데모스는 하원 표결에 앞서 사회당의 탄핵 추진에 동참할지를 묻는 아고라보팅을 실시했다. 50만명에 가까운 지지자가 참여해 99%의 압도적 찬성 의사를 표했다. 반면 이글레시아스 대표는 스스로 재신임을 묻는 아고라보팅을 자청하는 정치적 승부수를 띄워 기사회생했다. 5월 28일 치러진 재신임안 표결에서 68.4%가 지지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스페인 정치의 한 단면을 보면서 블록체인 민주주의 시대가 성큼 우리 앞에 닥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현실은 남북이 대치되어 있고 좌·우 이념 대립이 극심한 가운데 블록체인 민주주의가 뿌리 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블록체인 정당 포데모스
대표 불신임도, 총리 탄핵도 시민 손으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블록체인 정당 포데모스는 민주주의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포데모스에서는 지지자가 원한다면 어떤 문제든 당의 공식 안건이 될 수 있다. 선거에 나설 후보를 공천하는 문제나 당 지도부를 포함한 당직자 선출은 기본이다. 주요 정책 현안과 관련한 당론도 철저하게 지지자의 의사에 따르는, 말 그대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다. 포데모스가 가진 힘의 원천은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한 온라인 투표시스템 아고라보팅이다. 16세 이상 국민이라면 당원 가입 여부에 상관 없이 신분증 사본을 제출하고 유권자로 등록할 수 있다. 최초 등록 이후부터는 간편한 로그인·SMS 인증 절차만으로 투표창 접근이 가능하다. 블록체인 기술로 구현한 보안성과 탈 중앙화된 시스템이 신뢰를 높여준다. 구체적으로 당원 투표 내용은 암호·익명화 과정을 거쳐 서버에 저장되고, 투표자 개개인에게는 자신의 표를 추적할 수 있는 무작위의 코드가 부여된다. 이 코드를 입력하면 투표자는 자신이 참여한 투표가 어느 단계까지 진행됐고, 참여자는 몇 명인지, 내가 던진 표는 현재까지 해당 선택지에 몇 퍼센트나 기여하고 있는지 등의 통계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투·개표 전 과정이 유권자에게 투명하게 공유되는 것이다. 은행에서 근무하다 1년 전 정년 퇴임하고 포데모스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후안 안토니오 모렐로(67)씨는 “투표함이 통째로 바뀌곤 했던 과거에 비해 투표 전 과정이 투명하다”며 아고라보팅 시스템을 훨씬 더 신뢰한다고 말했다. 해킹 가능성에 대해서도 “세금 등 각종 행정민원은 이미 전자화시켜 잘 운영하고 있으면서 투표만 겁내는 건 모순적”이라고 반박했다. 유권자가 일상적인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블록체인 기술이 쓰인다. 포데모스는 ‘투명성’ 홈페이지를 따로 개설해 소속 의원 별 활동 일지, 정치자금 사용처 등을 소상히 공개하고 있다. 지지자들은 잘못을 저지른 의원을 신임위원회에 직접 신고할 수도 있는데, 신고가 접수되면 위원회 차원에서 진상 조사를 진행해 징계 여부를 결정한다. 에스테반씨는 “아고라보팅으로 재신임 투표에 부치는 것이 가장 일반적 처분”이라고 말한다. 드루킹 여론 조작으로 탄생된 정권이 아닌가로 특검이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블록체인에 기반한 아고라보팅 혁명이 일어날 수는 없을까 묻고싶다.
‘내가 만든 정당’ 정치적 후원금도 선뜻.
자신들의 의견이 당의 운영과 정책에 반영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시민들은 지속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강력한 동기를 부여 받는다. 특히 탄핵 등 대형 이슈를 거치며 이들이 느끼는 정치적 효용감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포데모스 지지자 카르멘 캄포스(66)씨는 “당 대표든, 총리든 내가 그 사람에게서 마음을 거두면 언제든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것에 참여해 전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포데모스는 ‘내가 만든 정당’ 같다”면서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 된 듯한 소속감을 준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투표로 증진된 정치적 효용감은 보다 적극적인 정치참여로 이어진다. 아고라보팅 참여자들이 금전적 후원에도 적극적인 이유다. 정책 크라우드펀딩 등을 통해 소액의 후원금을 내고 있다는 캄포스씨는 “나는 당직자도, 정치인도 아니지만 스스로 포데모스의 모든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돼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블록체인 기술이 가져다 주는 미래 세상은 우리의 정치 생활 안방에 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 어디에도 블록체인 세상을 준비하고 만들어 가는 모습은 찿아보기 힘들다. 아직도 과거만 파헤치고 뒤로 돌아가기만을 보여주는 영상만 우리네 안방에서 펼쳐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