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의 ‘푸른 꽃’
대학 다닐 때 나의 부전공은 독문학이었다. 딱히 독어를 잘했다거나 독문학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저 달리 특별한 재주가 없으므로 고등학교 때 배운 독일어나 좀 더 익혀볼까 하는 심산에서 택한 공부였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대학 생활 내내 영문학 못지 않게 독문학을 열심히 했거 또 내가 꽤 독어를 잘 한다는 환상 속에 빠져 살았는데, 그것은 당시 독문과 교수이셨던 이유영 선생님 때문이었다.
키가 자그마하고 불그스레한 얼굴에 늘 웃음을 머금고 계셨던 선생님의 강의는 항상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소리가 우렁차고 백묵을 교탁에 짓이기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씀하셔서 매시간 수업이 끝날 때쯤이면 교탁은 백묵 조각으로 수북했다. 그때 읽은 독문학 작품 중에 가장 내 기억에 남는 것은 노발리스(1772-1801)의 푸른 꽃(1802)이다.
스무 살 청년, 하인리히는 꿈에 푸른 꽃을 본다. 그가 푸른 꽃에 다가가자 꽃은 상냥한 소녀의 얼굴로 변한다. 그 소녀를 동경한 나머지 하인리히는 먼 여행을 떠난다. 마침내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시인인 그링스오르를 만나고, 그의 딸 마틸데에게서 꿈에서 본 푸른꽃의 모습을 본다. 그가 다시 꿈을 꾸는데 나룻배에 앉아 노를 젖는 마틸데를 거대한 풍랑이 덮친다. 꿈은 현실이 되어 마틸데는 죽고, 마틸데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녀의 죽음은 그를 시인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체험이 된다.
그러나 대충의 줄거리 외에 내가 이 작품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마치 안개 자욱한 꿈의 세계를 여행하듯 신비로운 푸른 꽃, 중세의 성곽들,기사들, 간간이 삽입되는 동화들, 이상하고 기묘한 거울, 미래가 그려진 그림 등 단편적인 이미지들만 기억할 뿐이다. 사실 이 정도나마 ‘푸른꽃’을 기억하는 이유는 순전히 이유영 선생님 때문이다.
독일 낭만주의 수업 시간에 선생님은 칠판에 거대한 원을 그려 놓고 ‘푸른 꽃’의 복잡다단한 상징세계를 설명하고 계셨다. 우리도 노트에 그림을 옮기느라 교실이 아주 조용했는데 누군가 뒤에서 길게 한숨 짓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선생님이 갑자기 획 돌아서더니 소리 질렀다.
“누구야, 지금 한숨 쉰 사람이 누구냐고!”
떠들어도 별로 야단치지 않으셨던 선생님의 반응은 너무나 이외였다.
“지금 몇 살이야. 예순? 일흔? 한숨 짓는 것은 포기하고 싶다는거야. 한숨 짓는 것은 싸움에 지는거라구!”
선생님은 화난 어조로 계속 교탁에 백묵을 짓이기시면서 말씀하셨다. ‘포기하고 싶어? 그럼 아예 포기해. 지금!’
그리고 나서 선생님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해 말씀하셨고, 그날 우리는 선생님이 함경도가 고향이라는 것, 혼자 남쪽으로 오셔서 독학으로 대학을 나오고, 오스트리아 유학 시절 때는 학비에 보태려고 이발 기술을 배웠을 뿐 아니라 배를 타고 가면서 항구마다 내려 막노동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무나 여러번 포기하고 싶었지만 나에게 포기하는 것조차 사치였지. 그런데 내가 가르치는 젊은 사람들이 포기하는 것은 정말 보기 싫어.”
그리고 선생님은 푸른 꽃을 낭만주의 작가들이 말하는 ‘무한한 동경과 시, 사랑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상향의 상징이라면서 우화 하나를 말씀해 주셨다.
“늘 이상향을 동경하는 힘든 현실로부터 해방되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 행복한 세계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며칠 동안 여행을 하고 잠을 자는데, 장난꾸러기 요정이 몰래 그의 신발코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고, 그의 꿈속에 나타나 앞으로 계속 가면 내가 찾는 곳이 나온다고 말해 주었다. 며칠 동안 여행을 한 그 사람은 드디어 자신이 동경하던 이상향을 찾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사실 그가 이상향이라고 믿은 그곳은 자신이 ’떠나온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으려고만 하면 ‘푸른 꽃’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포기하지 않는 자만이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은 무조건 건강해야 한다고. 괴테가 위대한 작가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오래 살았기 때문이고, 당신도 일생의 프로젝트로 ‘한-독문학 비교’를 10권까지 내시겠다던 선생님은 2권까지 쓰시고. 내가 유학하고 돌아오기전 해인 1984년 가을, 심장마비로 51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독일어를 접하지 않은 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이제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던 독일어는 겨우 인사말이나 할 정도이다. 그러나 나의 이상향, ‘푸른 꽃’을 찾는 삶의 여정이 녹록치만은 않아, 심신이 고달파 어느새 한숨이 나올 때마다 나는 이유영 선생님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