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는 정사유(正思惟) 혹은 정지(正志)라고도 부르며, ‘바른 생각’ ‘바른 뜻’ 혹은 ‘바른 마음가짐’ 정도로 해석된다. 여기에서도 ‘바른’은 연기와 중도, 무아와 자비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상에 대해 사유할 때 실체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생각이다.
정사유란 생각하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하되 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것인가? 그 생각이 인연 따라 잠시 왔다가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아는 연기적인 지혜다. 그러니 저절로 생각을 인연 따라 쓰기는 하되, 실체 없음을 자각하기에 그 생각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생각을 하되 생각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정사유다.
그렇기에 정사유는 특정하게 사유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정사유’라고 정해진 것은 없다. 그 생각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의 본질이 연기이며 무아이기에 허망함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이를 선(禪)에서는 생각이 나오기 이전 자리를 확인한다는 표현을 쓴다.
이렇게 되면 올라오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고, 생각이 올라온다고 해서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붙잡아 나와 동일시하지도 않을 것이다. 좋은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를 때 ‘내가 똑똑하다’고 여기거나, 이기적인 생각이 올라올 때 ‘나는 이기적이다’라고 여김으로써 그 올라오는 생각을 나와 동일시하는 것은 정사유가 아니다.
연기와 무아, 중도적인 사유라면 그 생각 또한 무아임을 알아서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실체화하지 않으며, 그 생각이란 앞에서 오온과 십팔계에서 공부했듯이 십팔계가 촉함으로써 수상행이, 즉 생각과 느낌과 의지작용이 일어나는 것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온과 십팔계의 교리에서 본 것처럼 생각도 느낌도, 의지도 모두 인연 따라[緣起] 생겨난 것일 뿐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으며[無我], 그렇기에 어떤 특정한 생각에 치우쳐[中道]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정사유란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때에도 그것이 비실체적인 줄 알아 집착하지 않고, 그렇기에 누구도 과도하게 미워하거나, 애착하는 생각을 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봄으로써 진정한 자비로움으로 상대방을 대하게 된다. 정사유를 실천하게 될 때 비로소 모든 대상에 대해 참된 자비심이 피어나게 된다.
『잡아함경』에서는 “어떤 것이 정사인가. 탐욕을 뛰어넘은 생각, 성냄을 없앤 생각, 해침이 없는 생각이다”라고 설한다. 즉 정사유를 실천하면 과도하게 애착하여 탐욕을 일으키지도 않고,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성내지도 않으며, 그 누구도 분별이나 차별하지 않고 평등한 자비로써 대하기에 해치려는 생각이 없다.
신구의 삼업 가운데 가장 중요하면서 근원이 되는 것이 바로 의업(意業)이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말과 행동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른 생각이야말로 현실을 창조하는 삼업 가운데 근원적이며 강력한 힘을 지녔다. 그래서 바른 사유가 중요하다. 사유가 바르지 못하면, 연이어 말과 행동 또한 바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사유는 매우 중요한 ‘수행’이다. 이제 팔정도를 올바로 사유하고 공부한 수행자라면, 염불하고 독경하고 좌선하는 것 못지않게 바르게 생각하는 것, 중도적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분명한 수행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좌선도 오래 하고, 절이며 염불, 독경, 사경 수행도 많이 했지만 삿된 생각을 일으키고, 탐욕과 성냄과 남을 해치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 사람의 수행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바른 생각의 수행’ 다음에 오는 중요한 수행법은 ‘바른 말의 수행’ 즉 정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