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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7. 왕의 도망 실패와 그 전후
라파예트는 이날의 승리자 같았다. 그러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지방에서 상경한 군중의 갈채를 받았다. 혁명파 계통의 신문들도 “국왕 만세!” 소리가 “의회 만세!” 소리나 “국민 만세!” 소리를 압도했다고 보도하였다. 루이 16세는 폴리냐크(Polignac) 공작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부인, 모든 것이 절망적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국으로 쫓겨났던 오를레앙 공이 이날 귀국하여 대축제에 참가했으나 별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루이 16세가 오를레앙 공을 두려워할 것도 없고 또 모든 것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면 그것은 대부분 라파예트 덕분이었다. 왕은 국민 방위대를 쥐고 있는 라파예트가 필요했고, 라파예트는 왕의 신임이 필요하였다. 라파예트의 권력을 시기하고 경멸하면서도 항상 아첨과 협력을 약속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왕과 의회의 조정 역할을 맡고 있는 미라보였다. 이 두 사람은 서로 왕의 신임을 질투했으나 이 무렵에는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이 두 사람이 왕과 헌법을 수호하여 의회의 과격화와 왕의 반동화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의회 밖에서 의회의 영향을 미치는 가장 유력한 정치 집단은 ‘헌법의 벗(Amis de la constitution)’과 ‘1789년 협회’ 및 ‘입헌 왕정 클럽’의 셋이었다. ‘헌법의 벗’은 국회의사당 근처에 있었던 자코뱅 수도원의 도서관을 집회 약소로 정했다고 하여 자코뱅파라고 불렸는데, 이 자코뱅 클럽은 가장 혁명적이고 이론적인 분자들의 집단으로서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어가고 있었다. 이 클럽이 앞으로 프랑스 혁명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게 된다. 자코뱅 클럽을 좌익이라고 한다면 우익에 해당하는 것이 ‘입헌 왕정 클럽’인데, 이 클럽은 명칭과는 달리 입헌군주국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입헌군주국가의 실현을 방해하고 될 수만 있으면 절대왕권과 귀족의 봉건권을 회복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국민의회의 헌법 제정을 방해하여 혁명의 진행을 분쇄하려는 숨은 의도를 왕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 숨은 의도가 왕의 반동과 함께 드러나면서 민주주의 세력의 규탄 대상이 되자 1791년 봄 부터는 집회조차 중지하게 된다. ‘1789년 협회’는 라파예트 중심의 사교적 살롱으로서 좌익과 우익의 중간노선을 걸었다. 왕과 헌법을 둘 다 지키려는 당시의 집권파였다. 이 협회는 왕의 입장에서는 혁명을 일으킨 세력이기 때문에 미운 존재였지만 의회의 과격화(좌경화)를 막아주고 왕위를 지켜주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이 협회의 조정적 기능이 없으면 의회도 국민도 극좌와 극우의 정면충돌을 면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좌익이 승리할 공산이 컸다. 그러한 형편이기 때문에 왕으로서는 밉지만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이 이들의 주장을 끝까지 따랐더라면 프랑스 혁명은 당시의 영국과 유사한 입헌주의국가로 정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왕과 그 측근은 역사적 감각에 우둔하여 이 협회의 노선에서 이탈할 길이 없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왕은 겉으로는 혁명파에게 양보하는 체하면서 헌법적 법률들의 효력이 발생하는 것을 무디게 하고, 입으로는 국내의 반혁명 세력을 비난하면서 은밀히 외국과 연락하여 독일의 왕군들이 프랑스로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인지라 바스티유 함락 1주년 기념 대연맹제의 열광과 갈채는 프랑스의 통일과 단합을 과시한 것 같았으나, 실은 한낱 환상에 불과하였다. 그 환멸을 입증하는 사건들이 곧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남부 지방에서 귀족이 봉기하여 폭동을 일으키는가 하면 군대도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다. 1790년 8월 17일을 기하여 2만 명의 왕당파 방위대가 남부의 작은 마을 잘레스에서 수개월간이나 무력 항쟁을 시도했는데 이를 조정한 사람은 이탈리아에서 망명한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었다. 이 왕당파 반란군은 해산되기 전에 ‘왕에게는 영광을, 성직자에게는 재산을, 귀족에게는 명예를, 고등법원에게는 옛 권한을 회복시킬 때까지 우리는 무기를 버리지 않으리라’고 선언하였다. 또 하나의 사건이 역시 1790년 8월에 낭시에서 일어났다. 망명하지 않은 장교들과 혁명파 사병들 사이에는 도처에서 자주 충돌이 일어나곤 했는데, 부대의 히계 관리권을 요구한 사병들과 이를 거부한 데서 낭시 부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서는 사병들의 요구가 정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파 사병화의 과격화를 막으려는 라파예트의 강압 정책은, 현지 사령관인 그의 사촌 부이에(Francois Bouille) 장군으로 하여금 낭시 일대를 공포정치로 다스리게 하고 관련 사병 20명을 교수형에 처하는 한편 41명에게 중노동형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처사는 반혁명파에게 용기를 준 동시에 라파예트의 인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라파예트의 인기 하락은 왕을 불안하게 하였다. 그런데 10월들어 왕이 라파예트의 표리부동함을 간파하고 드디어 반혁명으로 달음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몇몇 대신의 경질 사건이다. 파리 시는 지난 6월, 행정구를 60구에서 48구로 개편했는데, 새로운 자치구들이 혁명에 불성실한 대신들을 규탄하여 그들의 파면을 국민의회에 요구하였다. 10월 20일 의회는 그들의 요구를 부결했으나 찬부의 표차가 근소했으므로 해당 대신들은 자진 사임하였다. 왕은 대신 선임의 헌법적 권한이 침해당했음을 분통히 여기면서 라파예트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자라고 단정하였다. 이제 왕이 택할 길은 망명 귀족들과 손을 잡고 외국의 군사 간섭을 끌어들여 혁명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왕은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외국으로 도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왕은 왕비를 통하여 왕비의 친정 오스트리아 황실과 비밀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마침 오스트리아 황제는 프랑스에 쳐들어갈 좋은 구실을 발견하였다. 알사스와 로렌 지방에는 독일 귀족들의 봉건 영지가 있었는데 그 봉건권이 8월 4일 선언에 의하여 침해되었던 것이다. 1790년 12월 14일 오스트리아 황제는 정식으로 프랑스 왕에게 항의 각서를 보냈다. 한편 루이는 국경 지방에 숨어 있다가 오스트리아 쪽으로 도망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는 “먼저 여러 나라의 협조를 실현해야 한다”면서 매부의 도망 계획보다 국가이익을 우선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의 국제 간계에서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는 매우 현명하고 현실적인 정치가로서 프랑스 왕실의 도망과 프랑스와의 전쟁이 가져다줄 결과를 냉철히 계산하고 있었다. 다음 해 5월 루이의 도망 계획이 거의 다 짜여졌을 때에도 1만 5,000명의 군대 동원을 청한 여동생의 밀사에게 “군대를 보내기는 하겠으나 루이 16세와 왕비가 파리를 탈출하여 헌법 거부 성명을 발표한 후가 아니면 군사행동을 개시할 수 없다”는 뜻을 명백히 하였다. 그만큼 레오폴트는 냉철하고 치밀한 군주였다.
루이 16세의 국외 탈출 계획은 본인보다도 망명 귀족들이 더 활발히 서둘렀다. 왕의 국외 탈출은 전쟁을 의미하였고, 그 전쟁은 외국군에 의한 혁명정부의 타도를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국민과 국민의회는 왕의 탈출 계획을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다. 1791년 초 벌써 파리 신문들은 왕의 탈출 계획을 시사하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언론 출판의 자유를 규정한 인권선언 11조에 따라 일간지만도 140여 종이 발행되었다. 특히 각종 권력의 남용과 온갖 종류의 인권침해를 세론의 법정에 고발하는 것이 창립 목적이라고 언명한 혁명파의 코르들레에(Cordelier) 클럽이 여론 형성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그 주요한 발언자들은 마라(Jean Paul Marat), 당통(Georges Jacques Danton), 데물랭(Camille Desmoulins), 에베르(Jacques Rene Hebert), 모모로(Antoine Francois Momoro), 데들랑팅(Fabre d’Eglantine) 등인데, 이들은 1793년에 이름녀 혁명의 주역이 되는 사람들이다. 1791년 1월 말에는 자코뱅 클럽과 코르들리에 클럽에서 왕의 도망 계획이 폭로되고, 국민의회는 국경 경비의 강화를 결의한다. 왕의 도망을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의회는 2월 21일부터 망명 금지법을 토의하기 시작하여 헌법이 정한 지위를 버리는 왕은 퇴위로 간주할 수 있다든가, 여자를 섭정에 취임할 수 없게 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섭정의 길을 봉쇄한다든가 하여 왕이 도망했을 때에 일어날 사태에 대비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왕과 의회의 교량 역할을 해왔던 미라보가 4월 16일 급사하였다. 좌익의 입장에서는 왕의 앞잡이가 사라졌고 왕의 입장에서는 의회의 앞잡이가 사라진 셈이지만, 객관적 입장에서는 중도 세력의 중심인물이 사라진 것이었다. 국민 방위대 사령관 라파예트의 일반적 인기가 급속히 떨어지고 있고, 우익의 반혁명 공세가 왕의 도망 계획을 중심으로 국제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시기에, 미라보의 급사는 좌우 양익의 간격을 메울 수 없게 만들었다.
4월 이후 루이 16세는 혁명 지지를 자주 표명했으나 이는 국민과 혁명파의 의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완전한 위장 전술이었다. 왕은 외국에 밀파한 첩자들을 통하여 프랑스로 쳐들어올 것을 재촉하는 한편 도망 계획을 은밀하고 치밀하게 진행시키고 있었다. 6월 20일 밤 왕과 왕비, 두 왕자 및 왕의 누이 엘리자베트(Elisabeth Philippe Marie Helene)가 왕궁을 몰래 빠져 나왔다. 그들을 실은 마차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샬롱과 몽메디를 향해 달렸다. 이 지역 일대에는 낭시 사건 당시 사령관이었던 부이에 장군이 고용한 용병들이 미리 배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왕이 안전하게 도망하도록 돕고 있었다. 그런데 21일 아침 6시 튈르리 궁에서 왕의 도망 사실이 발각되었다. 의회와 시청은 당장 경포를 올리고, 파리 각 구 코뮌 의회는 24시간 개회를 선언하고, 수색대와 전령이 사방으로 뛰고, 군중은 왕궁에 난입하여 루이의 초상과 왕실의 문장을 찢고 공화국을 선언하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한편, 국경 지대의 주민들은 그 일대에 배치되어 뭔가 기다리고 있는 듯한 용병들을 수상쩍게 여기고, 일부 지방에서는 국민방위대를 소집하기까지 하였다. 마침내 큰 마차 두 대가 지나가는 것을 수상히 여긴 드루에(Jean Drouet)라는 시골 역장 아들이, 아시냐에 새겨진 왕의 초상과 대조하여 마차에 탄 남자가 왕임을 확인하였고, 샛길로 마차를 추격하였다. 이때 왕은 클레르몽을 지나 바렌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때에는 벌써 왕의 도망 소식이 이곳에도 전해져서 마을이 발칵 뒤집혀 있던 참이었다. 바렌에서 왕을 기다리고 있던 부이에 장군의 아들은 왕의 도착이 예정보다 다섯 시간이나 늦어지자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왕의 일행이 바꿔 탈 마차는 강 건너로 이동하여 왕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왕은 거기서 주저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드루에는 주민과 국민 방위대의 힘을 빌려 왕이 건널 다리 위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무장한 방위대를 다리 밑에 대기시켰다. 왕의 마차가 다리로 다가왔다. 일행은 6만의 바렌 시민과 1만의 국민 방위대에게 포위되었다. 잠자고 있던 부이에 장군의 아들은 도망치고 장군도 부하들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도망쳤다.
왕과 일행은 민중의 포로가 되어 25일 저녁 수십만 파리 시민의 분노 속에 총을 거꾸로 메고 두 줄로 도열한 군인들 사이를 지나 튈르리 궁으로 되돌아왔다. 총을 거꾸로 메는 것은 초상의 표시로서 왕정의 장례를 의미하였다. 당시에 뿌려졌던 한 전단지에는 “누구든 루이를 모욕하는 자는 매를 맞을 것이고 그를 갈채하는 자는 목을 달아매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왕의 도망 사건은 그의 본심을 만천하에 드러내보였다. 왕이 외국과 통모하여 혁명을 분쇄하고 조국을 팔아넘기려 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왕은 도망할 때 왕궁에 글을 써놓았는데, 그 글은 국민의회의 일을 비난하고, 왕당파의 도움을 청하고, 왕만이 왕의 백성을 행복하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왕은 이제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조국과 국민을 배반하고 혁명을 일체 부정했던 것이다. 국민은 이제 왕과 왕의 지지세력을 철저히 불신하고 그들을 감시하고 또 필요하면 감금하였다. 왕도 이제는 국민의 감시와 감금하에 놓였다. 코르들리에 클럽과 혁명적인 파리와 민중은 왕의 퇴위와 처벌을 요구하고 왕정의 폐지와 공화정의 건설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회는 신중하였다. 왕위 퇴위하면 섭정을 세워야 하는데 과연 누구를 섭정으로 한단 말인가? 오를레앙 공? 아르투아 백작이나 프로방스 백작? 이들은 루이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할 것인가? 공화국의 수립은 유럽 군주국들과의 전쟁을 의미하는 동시에 국내적으로 내란을 의미하였다. 의회는 신용과 권위가 땅에 떨어진 무력한 왕을 그대로 두어 왕정을 보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왕에 대한 재판도 면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르나브는 7월 15일 의회에서 로베스 피에르(Maximilen Franc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행하였다.
나는 지금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우리는 혁명을 끝맺으려는가, 아니면 혁명을 다시 시작하려는가? 우리는 모든 사람을 법 앞에 평등하게 하였다. 또 시민적, 정치적 평등을 확립하였다. 주권을 인민에게 돌려주고 모든 권리를 국민에게 다시 회복시켜주었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불행한 죄악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자유의 선을 한 걸음 더 넘어서면 왕정의 파괴가 될 것이고, 평등의 선을 한 걸음 더 넘어서면 재산의 파괴가 될 것이다.
모든 혁명에서 혁명이 일단 성공하면 정치적 변혁으로 만족하는 보수파와 그 정치적 변혁을 사회적 혁명의 첫걸음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과격파의 대립과 충돌이 일어난다. 프랑스혁명도 마찬가지였다. 혁명 세력은 점차 분열하여 보수파는 혁명에 의해 타도된 낡은 세력과 힘을 합하여 과격파에 대항했다. 혁명 세력 우파의 보수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왕의 도망 사건을 계기로 명백히 불거졌다. 바르나브의 연설은 혁명은 이제 정치혁명으로 끝났다는 우파의 생각을 명확히 표명한 것이었다. 그것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려는 좌파의 과격한 사회혁명적인 태도에 단호히 맞선 것이었다.
여기서 혁명파의 자코뱅 클럽이 둘로 나뉘었다. 의회에서 바르나브와 행동을 같이한 라메트(Alexandre Theodore Voctor Lameth) 일파는 16일 자코뱅 클럽에서 분리하여 라파예트 일파와 함께 이른바 푀양(Feuillants) 클럽을 따로 만들었다. 이제 자코뱅은 로베스피에르와 페티옹(Jerome Petion)같은 과격파만의 클럽이 되었다. 이들은 17일 샹 드 마르스에 모여 조국의 제단에서 공화정을 요구하는 진정서에 서명하였다. 의회는 질서 유지를 이유로 파리 시장에게 샹 드 마르스의 집회 해산을 명하였다. 오후 7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장한 국민 방위대가 집회 장소에 침입하여 사전 경고도 없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약 50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수백 명의 민주주의자가 재판에 회부되고, 민주주의적인 신문들이 폐간되고, 코르들리에 클럽이 폐쇄되었다. 권력은 푀양 클럽의 수중으로 옮겨졌다. 의회를 좌우하는 힘은 이른바 삼두파 -라파예트, 바르나브, 뒤포르(Adrien Jean Francois Duport)-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러나 자코뱅파와 파리 민중은 샹 드 마르스의 학살을 결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았다. 이들은 1년 뒤, 이 일에 대해 철저히 보복하며, 또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여 공화국을 세우고야 만다.
역사가들 가운데는 왕정 몰락의 근본 원인을 왕의 도망 사건과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사실 왕의 도망 사건이 있기 전에는 국민 거의 전부가 왕의 본심을 의심하지 않았고, 왕에 대한 뿌리 깊은 신앙과 개혁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왕정의 폐지나 공화정의 수립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혁명에 소극적이었던 민중도 왕과 왕의 지지 세력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공화정과 민주주의를 자기들의 이익에 일치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민심이 이렇게 돌변하고 있을 때 민중의 마음을 더욱더 돌아서게 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것은 1791년 8월 25일의 필니츠 선언과 9월 3일에 발포된 헌법의 반민주성이다.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필니츠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성명은 루이 16세의 왕위를 위협하는 혁명에 반대한다는 뜻을 천명하면서, 프랑스에 대한 무력행사에 유럽 각국 군주들이 협력해 줄 것을 호소하는 한편 프랑스왕은 자기들의 군사행동을 거부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성명을 발표한 당사자들로서는 프랑스 혁명 정부에 대한 하나의 협박 정도로 가볍게 생각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프랑스 국민에게는 심리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왕의 도망 사건과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의 기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프랑스 국민과 파리 시민이 어떤 기분으로 필니츠의 성명을 받아들였겠는가를 이해하기는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심리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여 9월 3일 드디어 헌법이 제정 발포되었는데, 삼두파가 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 이후 원안을 상당히 개악한 채로였다. 개악의 내용은 프랑스 국민을 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으로 양분하여 참정권과 국민 방위대의 입대 자격을 재산이 있는 능동 시민에게만 한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푀양파의 보수적 혁명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자코뱅 클럽을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에게 거센 반격의 근거를 제공했다. 이리하여 바렌 사건과 샹 드 마르스 사건에다. 헌법의 반민주성이라는 요인이 하나 더 덧붙어 민중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게다가 왕은 이 잘난 헌법마저도 비준을 늦추고 있었다. 삼두파는 필사적으로 왕에게 헌법 비준을 권했으나 왕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삼두파는 정치적 생명마저 위태로워졌다. 그러한 가운데 9월 10일 망명 중인 왕의 동생들이 루이에게 헌법을 비준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주일 뒤인 18일 왕은 헌법에 서명했지만 국민은 누구도 왕의 행위를 성실하게 봐주지 않았다.
바스티유를 함락시킨 지 2년 2개월 사이에 프랑스 국민은 새국민으로 변하였다. 그 새 국민의 마음속에 지난 6월 이후 3개월 사이에 갑자기 분노와 불만이 쌓였다. 지금까지 왕당파를 노려보던 프랑스 민중의 눈은 혁명을 반역하고 민중을 배신한 푀양파로 돌려지고 있었다 .민중의 분노와 불만은 막 제정된 결함투성이 헌법을 그대로 두지 않을 태세였다. 그 헌법을 진정한 민주주의 헌법으로 새로 만들고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는 앞으로 1년이면 족하였다. 혈통의 특권적 지배를 무너뜨린 민중은 이제 돈의 특권적 지배를 오래 참고 견딜 생각이 없었다. 푀양파와 같은 보수적 부르주아는 헌법의 제정으로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민중은 혁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혁명은 계속 민중의 힘에 의해 추진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