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반도의 역사 (3)
4. 러시아의 남하
이반 뇌제 사후 혼란을 겪던 러시아는 17 세기 후반 로마노프 왕조는 물론이고 러시아 역사상 가장 걸출한 군주인 표트르 대제 (Pyotr Alexeyevich, Пётр Вели́кий, Pyotr Velikiy) 시대에 이르러 주변으로의 강력한 팽창 정책을 수행했다. 표트르 대제의 팽창 정책이 이전의 러시아의 팽창과 가진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바로 서방과의 창을 원했다는 점과 바다의 통제권을 가지기 희망했다는 점이다.
본래 러시아는 육군 위주의 육지 국가이다. 비록 러시아가 강을 중심으로 발달했다고 해도 이점은 분명했다. 이와 같은 역사에서 변화를 시도했던 인물은 바로 이반 뇌제로 이전에 설명한 리보니아 전쟁이 바로 그 첫번째 시도였다. 즉 발트해로의 진출을 노리고 25 년에 걸쳐 러시아의 국력을 짜내 스웨덴,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 전쟁을 치뤘던 것이다. (이 과정은 이전 포스트를 참조 http://jjy0501.blogspot.kr/2013/03/9.html )
그러나 이 전쟁은 러시아의 처참한 패배로 마무리되었다. 주변국의 적극적인 반대로 말미암아 러시아는 바다로의 통로를 차단 당한채 봉쇄되었으며 이 고립상태는 표트르 대제가 북방전쟁을 승리로 이끌 때 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사실 표트르 대제는 북해 뿐 아니라 흑해로의 진출도 고려한 바 있었다. 물론 러시아의 명운을 걸고 전쟁을 벌인 건 아니었지만 표트르 대제 본인이 이 전쟁에서 직접 끼어들 만큼 중대한 전쟁이었다.
1686 년에서 1700 년 사이 있었던 러시아 - 투르크 전쟁 ( Russo-Turkish War of 1686–1700) 에서 표트르 대제는 크림 반도 서쪽의 아조프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실제로 1 차 아조프 전투에서는 해군이 없어서 패배했지만 2 차 아조프 전투에서는 급조한 해군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차르 표트르 대제 -Jean-Marc Nattier (1685–1766) 작 )
그러나 사실 이 시기 크림 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러시아의 일차 목표가 아니었다. 어차피 흑해로의 접근이 가능하다고 해봤자 당시 흑해 주변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둘러싸여 있다. 레판토 해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시까지 흑해에서는 투르크 해군을 당할 자가 없었는데다 오스만 제국과의 교역은 러시아의 주된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이반 뇌제 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주 목표는 서방으로의 창이 되는 북해로의 접근이었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 시절에는 크림 한국은 주된 공격 목표는 아니었다.
러시아가 흑해를 향해 다시 기세 좋게 남하한 것은 18 세기 후반이었다. 이 시기 이후의 러시아 - 투르크 전쟁은 19 세기 후반에 일어난 전쟁까지 포함해서 총 1 - 6 차 러시아 - 투르크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이전 표트르 대제의 전쟁은 간보기 수준이었다) 1차 러시아 - 투르크 전쟁은 예카테리나 여제 (Yekaterina Alexeevna, Екатерина II Великая) 시절인 1768 년에서 1774 년 사이 일어났다.
이 시기 러시아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를 분할하고 약해지고 있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와 인구를 흡수하기 위해 분주히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러시아는 남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코카서스 지방에 이르는 남쪽 영토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크림 한국은 이 시기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하게 되는데 사실 크림 한국이 오스만의 위성 국가였던 만큼 사실상 독립이 아니라 러시아으로의 합병을 준비하는 수순에 불과했다.
사실 18 세기 이후 크림 한국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코자크 (Cossack) 들이 크림 한국의 영토에서 약탈을 하는 경우도 크게 증가했으며 러시아 정규군 역시 폴란드 분할 이후에는 우크라이나까지 포함하게 되었으므로 과거 같은 어부지리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크림 한국의 마지막 칸인 사힌 기라이 (Şahin Giray) 는 그리스와 베네치아에서 공부해 터키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에 능통한 수재로 예카테리나 2 세는 그를 가리켜 자신이 본 가장 신사적인 타타르족이라 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1777 년 마지막 칸이 된 사힌 기라이는 크림 한국을 근대화 시키기 위해 수도를 무역항인 카파 (Caffa) 로 이전하고 크림 한국의 마지막 재건 노력을 진행해봤지만 결국 강제로 크림 한국을 러시아에 합병하는 조건에 합의할 수 밖에 없었다.
크림 한국은 1787 년 러시아의 타우리다 주 (Taurida Governorate / Таврическая губерния) 에 일부가 되었다. 이 지역은 지금의 크림반도 전체와 그 북쪽 지역에 해당되며 주도는 현 크림 자치공의 수도인 심페로폴 (Simferopol) 이었다. 타우리다 주는 1917 년까지 존속 했으며 약 6만 제곱킬로미터 넘는 지역으로 지금의 스위스보다 조금 큰 정도의 지역이었다.
(타우리다 주의 지도 This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in Russia according to article 1256 of the Civil Code of the Russian Federation. )
(신 러시아 혹은 노보로시야의 지도 Dim Grits at wikipedia)
당연히 크림 타타르들에게는 통한의 역사였지만 러시아에는 새로운 신천지가 열린 셈이었다. 크림 반도를 비롯해서 그 북쪽의 흑해 연안 지역에는 신 러시아 (Novorossiya, Новоро́ссия, New Russia) 라 불리는 지역에 생기는데 수많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남하해서 도시와 정착지를 건설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오데사 (Odessa), 세바스토폴 (Sevastopol) 같은 도시가 그것으로 앞서 설명했듯이 크림 반도 남쪽의 세바스토폴은 그리스 시절 부터 개발된 흑해의 중요한 항구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시대의 유적과 가까운 위치에 세바스토폴이라는 러시아 군항이 개발된 것은 1783 년으로 예카테리나 2 세는 그리고리 포템킨 (Grigory Potemkin) 에게 명하여 여기에 요새를 짓고 그 명칭을 세바스토폴이라고 부르게 했다. 본격적인 크림 반도의 러시아 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는 물론이고 프랑스, 영국, 프로이센 등 서방 강대국들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다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때문에 여기에 끼어들지를 못했을 뿐이었다. 러시아가 결국 오스만 제국을 합병하고 지중해까지 남하하게 되면 다른 열강과의 힘의 균형에도 큰 변화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오스만 제국이 잘 나가던 시절이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지만 서방 열강들은 은근히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주기를 바랬고 러시아는 크림반도와 흑해 북부는 물론이고 더 남쪽까지 노리고 있었으므로 19 세기 중반 대규모 국제전으로 비화하게 된다. 즉 크림 전쟁 (Crimean War, 1853 - 1856) 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출처] 간략히 보는 크림 반도의 역사 (3)|작성자 고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