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지났는데도 식을 줄 모르는 맹렬한 폭염 속에 둘째딸의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2년 전에 큰 딸을 시집보낸 경험을 살려 아내도 저도 확실히 첫째 때 보다는 여유로웠습니다만, 딸을 시집보내는 심정은 여전히 섭섭하고 허전하고, 표현키 힘든 울적함 같은 것이 밀려옵니다.
한 여름보다도 더 더운 날씨라지만 높은 하늘에는 가을빛이 묻어납니다. 올가을엔 더욱 심한 가을병을 앓을 듯합니다.
스물아홉! 요즘에는 이른 나이랍니다. 친구들 중에서도 두 번째로 빠른 결혼이라는군요.
젊은이들의 앞길을 가로막는 녹록치 않은 현실 탓일 겁니다. 때 맞춰 결혼을 해준 우리 딸들이 그저 대견스럽고 고맙습니다.
고슴도치 아빠로 제 눈의 안경일까요. 우리 딸들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합니다.
벌써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육아 휴직중인 첫째는 줌마 티가 난다고 불만이지만 내가 보기엔 더 할 나위 없이 예쁘기만 합니다.
세 살 터울의 자매는 자라면서 싸우기도 많이 했습니다. 주로 옷을 가지고 다퉜는데, 결혼식 드레스를 고를 때는 예쁜 옷을 골라 주느라 티격태격 또 시끄럽습니다.
결국 언니가 골라준 반짝이는 보석과 레이스가 달린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8월의 신부는 눈이 부시도록 예쁩니다.
저 예쁜 아이를 우리가 어떻게 키웠는데........ 29년! 그 동안의 일들이 스쳐갑니다.
독특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식순에 따라 친정아버지가 편지글을 읽어주는 순서입니다만 구구절절 사연을 풀다가 오늘 같이 좋은 날에 저 고운 얼굴에 눈물을 흘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울컥거리는 제가 더 걱정이 됩니다. 차마 편지를 읽어주지 못하고 첫째의 결혼식 때처럼 축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선시를 쓰는 스님이자 시인이신 형님께서 즐겨 쓰는 “시인은 시로써 말한다.”라는 말을 흉내 내어서 아마추어 시인도 하고 싶은 말을 졸시 한 수에 담았습니다. 수정한 최종 본입니다.
축시/ 결혼하는 딸과 사위에게
함께 가는 산
닮은 듯이 다른 듯이
다른 듯이 닮은 듯이
같은 곳을 향하여
나란히 달리는 산이 있어
서로의 눈길이 그윽하다
심장에서 솟는 샘물
뭇 생명의 갈증을 풀고
뜨거운 열정이 꽃을 피우다
너그러운 포용으로 골과 골을 보듬고
한들을 품어 안고도 여유로운 덕성
높이가 닿는 곳은 하늘일까
깊이는 바다에 이를까
나란히 나란히 함께 가는 산
푸를 땐 푸르름을 더하고
눈 내리면 순수로 돌아가라
채워도 넘치지 말라
비워도 부족하지 말라
아는 것은 같음이요
다름을 깨우쳐라
천왕봉 구상나무 덕유산 주목나무
풍우 폭염에도 뿌리는 깊어지고
북풍 눈보라에 나이테가 여물어져
산정(山頂)에 향림(香林)을 이루기
지자(智者)가 되는 일 준령을 넘는 일
현자(賢者)가 되는 일 고봉(高峰)을 오르는 일
덕자(德者)가 되는 일 아래로 임하는 일
사랑의 힘으로 이적을 이루는 일
웅혼 한 꿈 창대한 역사의 서막을 열며
명심하라 양보하는 미덕
평등한 어께 높이
경계하라 넘치는 의욕
함께 이루고
함께 거두라
잊지 말라
필연으로 이어진 뿌리
나란히 달리며 하나로 완성하는 산맥
축복하라 사랑의 이름으로
축복하라 오늘의 첫걸음을
병신년 성하
지금쯤 신혼여행을 즐기고 있을 딸을 생각하며 못다 한 이야기와 편지글을 쓰기 위해 차분한 마음으로 펜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딸 뫼람아
다 같은 하늘, 꼭 같은 산이라도 때에 따라서 느낌이 다르구나.
식지 않은 무더위 속에서도 가을 빛 하늘이 청명하기만하다.
그래, 우리 둘째가 드디어 시집을 갔구나.
콜로세움과 오벨리스크를 배경으로 찍은 너희들의 카톡을 보니 실감이 난다.
어느 날 퇴근을 했더니 걸음마 막 떼기 시작한 네가 반갑다고 아장아장 뒤뚱뒤뚱 걸어오는데 까치발로만 서면서 발바닥을 딛지 않아 얼마나 놀랬던지......... 하늘이 무너지듯 무서웠다. 종합병원 물리치료실을 한 달여 다녀도 차도가 없고 원인을 몰라 속을 끓이는데 이웃 할머니가 별 걱정을 다한다고 핀잔을 주더구나. 나중에 알고 보니 발꿈치로 보행기를 밀고 다닌 탓이었단다.
또, TV 뉴스에서 유괴사건을 보던 어느 날 오후엔 골목에서 놀고 있던 네가 갑자기 사라져 유괴당한 줄만 알고 하늘이 노랗게 찾아 헤맸더니 귀엽다고 사무실로 데려간 이웃 빌딩 회사 언니들과 과자를 먹으며 놀고 있었지.
모든 일들이 엊그제 같이 생생하고 아직도 철없이 귀여운 어린애로만 보이는데, 벌써 사회의 일원이 되고 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단 말이냐.
자랑스러운 딸 뫼람아.
언니의 영향을 받고 자란 탓에 언니에게 지지 않으려는 오기를 가진 너는 공부를 잘하는 딸이었다. 학기말이나 기회마다 상장을 한 아름씩 안고 와서 자랑을 했고 그렇게 받아온 상장이 두꺼운 서류철 채우고도 남았지.
미뤘던 숙제로 밤에 뚝딱 써낸 기행문이 중학부 전국 일등이 되고 장관상을 받으며 책으로 엮어져 나왔던 것을 보면 문재가 있었는데, 그 재능을 살려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한창 감수성 예민할 초등학교 3학년쯤인가. 못난 이 아빠가 사기를 당하고 방황을 하는 바람에 집안 형편이 엉망이 돼버렸지.
피아노를 팔고 보습학원을 끊고......... 앞날이 암담했던 와중에도 너희들은 티 없이 자라주었다. 너만의 공간 너만의 방을 갖기를 그렇게 원했건만 언니가 시집을 갈 때까지 그 소원을 들어 주지 못했구나. 작은집 좁은 방에서 함께 잠자고 함께 공부를 하며 자란 너희들에겐 정말 미안했다.
왜 이름을 특이하게 지었느냐? 왜 언니에게 치이고 남동생에게 받치는 둘째로 낳았느냐? 왜 아빠는 진보자인척 하면서 딸의 문제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보수냐?
왜 아빠는 엄마를 존중해주지 않고 무시하느냐?
고집 세고 주장 강한 너는 이 아빠에게 특히 불만이 많았지.
나중엔 허구가 탄로나 실망했지만 당시 인기가 있던 한비야의 책을 읽고 외교관이 되겠다며 진학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일도 생생하고 2장 밖에 없는 S대학 학교장 추천서에 대한 논의가 왔을 때 나의 무지와 고집으로 기회를 날려버린 것도 아쉬운 추억이다.
사람 일이 마음먹은 대로만 된다면 세상살이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마는 너의 인생에도 시련이 있었지. 컷을 상회하는 점수를 받고도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도전했던 행시도 실패했다.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도전이었으나 가난한 우리 살림에 부담을 느껴서 더 이상 꿈을 접고 취업의 길로 선회할 땐 차마 말은 못하면서도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단다.
때로는 행운도 있었지. 취업 스펙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번번히 고배를 마시던 중, 12월 31일 해가 저무는 섣달 그믐날 세모의 순간에 지금의 그 직장에 추가합격이 되었다는 전화를 받게 될 줄은 꿈엔들 알았었느냐.
예쁜 우리 딸 뫼람아.
언제부턴가 밤마다 집 앞 골목에 부둥켜안고 있는 연인들이 바로 너희들이었음을 알았을 때의 황당함은 잊을 수가 없다.
콧대 높은 네 가슴에 사랑의 화살을 맞추어버린 녀석이 누구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밤 집 앞 까지 바래다주는 지극정성 로맨틱 가이 저 녀석은 대체 누구냐?
언니의 행복한 연애과정을 지켜본데다, 고시를 접은 상실감이 컷을 것이란 생각에 이해를 하면서도 일부러 피해 주느라 밤마다 귀가길의 나도 고역이었다.
그런데, 여중 여고를 다니고 대학에서도 공부만 해왔던 너의 첫사랑 상대가 동갑에다 학생이라니, 솔직히 네 엄마와 난 속물적 본능에 걱정이 되었단다.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요즘 세상에 앞날을 알 수 없는 현역 학생을 뒤치다꺼리나 하겠다니 부모입장에서는 앞날이 걱정되지 않겠느냐 말이다.
ㅎㅎㅎㅎ 그런데 역시 사람 보는 너의 눈은 탁월했어!
졸업을 앞두고 떠억하니 대한민국 굴지의 S전자에 합격을 해버리더구나.
이처럼 교통 편리하고 시설 좋은 강남 사옥의 공간을 예식장으로 사용하게 특전까지 주니 얼마나 고맙고 좋은 회사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컴퓨터로 낙첨된 날짜가 하필 더운 8월이어서 하객들에겐 매우 죄송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넓고도 좁은 것이 세상이라더니 이런 인연이 있나. 상견례에서 인사를 나누니 사돈어른이 또 내 영원한 친구이자 사촌 형제와 서로가 막역한 사이라는 구나.
너희들의 사랑 이야기도 이젠 한 편의 에피소드가 되었구나.
[아직도 쌀쌀한 이른 어느 봄날의 밤. 12시가 가까워 올 무렵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기 2호선 신촌역 역무원실인데요. OOO학생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보호자께서 오셔야겠습니다.”
자동차를 급히 몰고 갔더니 맙소사! 입학 신고식을 치른 새내기가 멍청하게도 주는 술을 모두 받아 마시고 뻗어 버린 것이다.
지하철도 끊어지는 시각이라 일행들 모두가 자기 집으로 가버렸는데, 가방까지 챙겨서 끝까지 부축하고 지켜준 의리의 사나이 신입생 남학생이 한 명 있었다. 그의 집이 마침 우리와 같은 방배동이란 것이다. 신촌에서 방배동까지 같이 타고 오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던 그 친구가 바로 주인공은 아니고......... 그가 소개하고 엮어준 고등학교 절친 동창생이 지금의 우리 사위 정서방이란 이야기다.]
여행을 즐길줄 아는 여행 마니아 우리딸 뫼람아
지금쯤 로마의 어느 뒷골목을 걷고 있느냐? 바티칸 성당에서 미켈란젤로를 보느냐? 아니면 피렌체 두오모에서 메디치 가문의 숨결을 느끼느냐?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천재성을 보느냐?
인기 있는 신혼 여행지들을 마다하고 열흘씩이나 이태리를 도는 배낭여행은 역시 너 다운 계획이었다. 로마에서 그리 멀리 않은 중부지방에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가 발생했다는 뉴스를 보니 가슴이 철렁하는구나.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인도여행에 나설만큼 넌 용기와 패기가 있었지. 몸과 함께 배낭을 쇠사슬과 자물통으로 묶고 책자 하나 달랑 들고 떠나는 그 무모함을 막지 못하고 전전긍긍 불안에 떨었던 부모심정을 아느냐.
너 보다는 훨씬 어른스럽고 매사에 진중한 보디가드 정서방이 함께 하니 조금은 안심이 된다마는 그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무사히 잘 다녀 오거라.
오붓한 가족여행 제대로 한 번 못한 것이 너의 불만인 줄 알지만 앞으로 그럴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 아무래도 이젠 시집에 더 신경을 써면서 꼭 사랑받는 며느리가 될 것으로 믿는다.
누나들의 영향을 받은 동생 하림이도 대학생활 훌륭히 잘하고 있으니 우리가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느냐.
풍족한 형편이야 못된다만 모두가 건강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행복하면 네 엄마와 내가 행복하고 너희들만 잘 살면 밥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난다.
사랑한다 우리딸!!!!!!
우리 모두 행복하자!!!!
첫댓글 감동의 가족 스토리~~가슴이 찡~합니다
훌륭한 부모님을 두셨기에 자녀 분들도 부모님 못지않게 잘 살아갈겁니다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집니다^^감동 ^^
ㅎㅎㅎ 부끄럽습니다. 영감 냄새 풍기지 말아하는데, 못난 애비의 자식 사랑으로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선배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딸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목사님의축하 기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추석 지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