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대
⊙ 54세.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작품집 《묵호를 아는가》 《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덟편의 소설》
《명옥헌》 《망월》 《심미주의자》 《떨림》.
⊙ 중편소설 <단추>, 장편소설 《나쁜 봄》, 산문집 《갈등하는 神》 《탁족도 앞에서》.
⊙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수상.
⊙ 54세.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동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 1990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작품집 《묵호를 아는가》 《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덟편의 소설》
《명옥헌》 《망월》 《심미주의자》 《떨림》.
⊙ 중편소설 <단추>, 장편소설 《나쁜 봄》, 산문집 《갈등하는 神》 《탁족도 앞에서》.
⊙ 현대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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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기고 간 말 중의 하나다.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다.’ 행운과 재앙은 언제나 불시에 찾아온다. 지금 북미 한파는 재난영화 <투모로우>의 예언이 맞는 것 같다며 경전을 찾듯 진리를 찾으려고 한다.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인간의 무지몽매를 일깨울 수 없던 전능한 관찰자는 이젠 날씨로써 그들과 소통하기를 원하는 듯하다.
<읽고 있던 책갈피에 손가락을 끼운 채 전화하면서 민우는 줄기차게 자신의 꿈을 변호했다. 단추는 한강에 던져 버렸고 단추 떨어진 코트 입은 꿈을 다시 꾸게 됐고, 그래서 행복하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이 두렵지 않고, 가난이 두렵지 않으므로 탐욕에 빠지지 않아도 되며, 자신이 탐욕하지 않으므로 타인의 탐욕에 조롱당하거나 지배받을 이유가 없을뿐더러 자신은 저항할 이유도 상대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누군가는 자신의 가난을 탐욕에 대한 저항이라 여기겠지만 사실은 저항이 아니라 자립조건이라고.> —본문에서
김유정 문학상 중편소설 <단추>는 그 모양이 둥근 태양과 같다. 검색 창에 원이라는 단어를 치면 ‘기대를 가지고 바라다’로 시작해서 무려 34개나 되는 뜻이 있다. 주머니 속에서 딸랑거리는 동전의 형태도 ‘원’이다. 중편소설 <단추>는 팔만대장경을 새겨 외세를 물리치려는 중생들의 염원처럼, 한 작가가 가난을 물리치려는 수양이 담긴 경전과도 같은 글이다.
한 남자는 현실에서 단추를 줍고, 한 남자는 꿈속에서 잃어버린 단추를 찾아다닌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가난이라는 현실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단추를 주운 남자는 인문학 시간강사를 하며 지적 수준이 가난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단추를 잃어버린 남자는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계약직 노동을 선택한다. 그는 밤마다 끝없는 꿈속을 헤매고 다니면서 그때마다 단추가 떨어진 외투를 입고 있는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다 단추를 주운 남자의 도움으로 자신이 찾던 단추를 찾게 된다. 하지만 단추를 소유하고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은 깨어지고 단추 없는 옷을 다시 입고서는 평안을 찾는다.
이 소설은 자전적인 것을 비켜 가기 위해 허구라는 갑옷을 입었지만, 작가가 개인의 현실 반영을 너무 멀리하는 것도 금물임을 일깨워 준다. 무엇이 근원일까 물을 수 없으나 작가의 말을 빌려 보면 작가는 가난을 경험했고 현재도 그러하다. 어쩌면 그가 베이글 빵 같은 금덩이를 품은 작가라면, 폭발한 태양의 흑점처럼 금도 사라질 것이기에, 무정한 신은 오묘한 섭리를 부렸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단추’라는 경전이 탄생했다.
일기 대신 인상적인 꿈의 장면을 메모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 중편 <단추>는 상징이 강한 소설입니다. 백 원짜리 오백 원짜리 동전을 상상한 것도 맞겠죠.
“독자 입장에서는 단추의 숨은 이미지를 주화라는 재물로 볼 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저는 이 소설에 있어서 단추란 ‘결핍’이라는 생의 조건을 상징하는 구체적 물질이었습니다. 젊은이와 각자(覺者)에게 ‘결핍’이란 생의 조건은 어쩌면 ‘축복’이라는 메시지를 단추라는 상징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꿈 이야기가 작품의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현대소설에서 흔치 않은 구성이고 세밀한 꿈 묘사에 감탄했습니다. 평소 꿈을 많이 꿉니까.
“당시 꿈을 많이 꿨습니다. 아마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던 모양이죠. 그만큼 현실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고 다른 직업이 없었으며,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생활비를 벌지 못했어요. 완벽한 실업자였으니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꿈을 꾸고 다 기억했다는 겁니까. 따로 메모를 해 뒀겠죠.
“네. 일기를 쓰는 대신 인상적인 꿈의 장면을 몇 가지 메모해 뒀습니다. 당시엔 현실보다 꿈이 저의 일상이었으며 삶의 진솔한 흔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소설 주인공이 20대니만큼 제 꿈을 그대로 소설에 적용할 수는 없었어요. 소설을 쓸 땐 제 꿈을 주인공의 꿈으로 각색했죠.
저는 이 소설을 구상하면서 서사의 절반은 비현실적 상황, 즉 꿈과 상상의 상황으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민우야말로 자신의 존재양상에 관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깊이 번민하는 젊은이입니다. 이런 인간을 파악하려면 꿈의 상징성을 세밀히 살릴 필요가 있지요. 또 한 명의 주인공 지섭은 지속적으로 상상합니다. 상상 또한 꿈과 같이 비현실적 상황에서 벌어지는 자기위안이며 자기규명입니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 꿈과 상상은 인간의 정신활동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무의식 작용일 뿐만 아니라 자기치유 방법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개인적 제례(祭禮)입니다.”
10년 만에 소설가 복귀

—소설을 다 쓰고 현실을 어느 정도 극복했겠습니다.
“10년 만에 소설가로 귀환해 부유하던 생활에서 탈출했으니 현실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이 소설을 쓸 당시 많은 동료 소설가가 저를 ‘다시는 소설 쓸 수 없는 사람’이라 진단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40대 10년을 통째로 소설과 등지고 살았으니 그렇게 단정할 만했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어요. 저는 ‘난 언제든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소설가로서의 제 운명을 믿고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자신을 이 세상 최초의 인간이라 굳게 믿었어요.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 어떤 역사, 그 어떤 가치에 주눅들 이유가 없지요. 오늘 내가 소설이라고 쓰는 글이 인류 최초의 소설이라 여긴다면 남의 이목이나 평가 따윈 두려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제는 이미 타인의 역사입니다. 나의 역사는 오늘 이 순간뿐입니다.”
—네. 맞습니다. 작중에서 <단추>에 대한 심리적 압박은 작가의 현실적인 문제와 무관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환상이 현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추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구상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아요. 실로 가치 있는 그 어떤 것은 ‘그 어떤 것’일 뿐 실체를 드러내지도 않고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시인류가 사후세계를 상상하게 된 계기가 꿈을 꾸고 그 꿈을 기억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니 꿈이라는 무의식 작용과 상상이라는 비현실이 현실과 의식을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는, 꿈과 상상 없이는 현실과 의식의 존립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이 우선합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가끔은 꿈이 허무맹랑한 희망의 메시지로 현실의 자신을 속이며 일어나라고, 가능하다고, 위로하고 격려한다는 사실을 경험했을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고등한 문화를 구축하면서 종교와 예술이라는 영역을 마련하지 않았겠어요?”
“이렇게 무식하게 살다 죽겠다”
—프로이트를 좋아합니까.
“이름과 직업은 알지만 그분의 학문은 몰라요. 그분의 책을 읽어 보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에머슨 수상록》을 읽었습니다. 그곳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어요. ‘지금 네 생각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곧 자신의 책에 적을 것이다.’ 뭐, 대개 이런 말이었는데, 그래서 전 남의 책을 골똘히 읽지 않습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생각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하는 말도 이미 동서양 고금의 학자 누군가의 책에 적혀 있을 게 뻔합니다. 그러니 내 생각을 남의 책에서 확인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지요. 프로이트가 꿈을 어떻게 분석했든 저하곤 상관없어요.
옳든 그르든 제가 자신의 생각을 또렷또렷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쓸데없이 남의 책을 열심히 읽지 않은 탓입니다. 전 이렇게 제 생각을 말하고 제 소설을 쓰면서 무식하게 살다 죽겠어요. 나중에 저승에서 프로이트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비슷한 생각이 있다면 그분의 등을 두드리며, 저도 그런 생각을 제 소설에 적었다고 말하겠습니다.”
—김유정 문학상은 29세로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을 기리는 문학상입니다. 김유정 작가는 어떤 분입니까.
“가난과 질병과 실연이라는 소설가 인생 구성의 3대 요소는 아마 김유정 선생님의 경우에 기인한 듯합니다. 그래서 선생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삶의 태도에 있어 옳고 그름의 분별로부터 자유로울뿐더러 그 어떠한 부도덕한 행위에 대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죄 받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행태는 유머와 아이러니, 풍자와 해학의 수법을 통해 드러나는데, 그 이면에는 늘 짙은 우수가 깔려 있습니다. 저는 이 ‘우수’야말로 김유정 선생님의 짧은 삶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낱말이라 생각합니다.”
—애정관계가 복잡한 소설가였나요.
“바람둥이가 아니라 짝사랑이나 하는 가난뱅이 소설가 청년이었지요. 당시 선생님은 박록주와 박봉자라는 두 여성을 열렬히 사모했습니다만, 결국 딱지를 맞았어요. 그 여파로 질병이 도지고 요절하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그중 박록주라는 명창에 대한 선생님의 연정은 역사가 됐습니다. 비누와 수건을 손에 들고 목욕탕에서 나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한 선생님은 검은 휘장으로 들창을 가린 어두운 방에서 날마다 한 통씩 편지를 써 부쳤다고 합니다. 그래도 뜻이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혈서로 된 협박편지를 보냈다고 해요.
김유정 선생님을 존경하는 저는 선생님의 실연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그까짓 소리기생의 기둥서방 노릇 하는 인생보다는 소설가로 살다 간 생이 낫다는 생각이니까요.”
소설 속 삶은 현실에 대한 저항
—오랜 방황을 접고 10년 만에 쓴 소설입니다. 에로틱한 욕망의 화살보다는 구도자적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10년간 산전수전 겪은 작가의 성스러운 산물이기도 하죠.
“2001년 단편 한 편을 발표하고 10년 만에 쓴 중편입니다만, 그 가운데 존재하는 기간은 방황이나 일탈이랄 순 없습니다. 그동안 심도 있고 유쾌한 공부를 했으니까요. 구체적으로 밝히자면,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고 정치연구소에 적을 두고 각종 선거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느라 10년을 보냈어요.
이 작품을 쓸 때쯤 저는 세상과 사람에 지쳐 밖에 나다니기 싫었고, 돈도, 직업도, 친구도, 할 일도 없었습니다. 할 일이라곤 다시 소설을 쓰는 수밖에 없었으니 제가 아니라 운명이 저를 소설 앞으로 끌고 온 셈이지요.
그래서 저는 <단추>라는 중편소설을 통해 청년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라’ ‘젊은 시절의 번민은 차라리 축복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어요. 어느덧 50이 넘은 어른이 됐으니 제 신세를 한탄하며 치졸하고 야박한 세상을 향해 투정 부릴 처지가 아니었죠.”
—작중에서 지섭이 버스를 타고 혼자서 생각하는 부분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대한민국에서 지적으로 우월하면서도 가난한 직업인으로서 으뜸은 소설가, 다음은 대학 시간강사, 그 다음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라고. 현실도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돈을 꽤 번 작가도 소설가이죠.
“대개 그렇습니다. 소설로 돈을 번 소설가도 몇 있습니다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지속적으로 연수입 1억원 이상인 소설가는 10명도 안 되니 소설가는 여전히 가난한 직업인입니다. 이는 우리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소설가의 운명 아니겠습니까. 소설가가 그려 내는 삶은 현실에 대한 저항이며 문명 발전 방향에 대한 의문인만큼, 세속의 인간으로선 돈 내고 경험할 만한 삶이 아니죠.
실용적 권력이나 실질적 유흥물이라면 모를까, 누가 불편한 이상과 마주하려고 돈을 내겠습니까. 앞으로도 소설가는 지속적으로 가난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대학 시간강사와 영화 시나리오 작가의 가난에 대해서는 깊이 동정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이들을 도와주세요.”
“소설만이 소설가 구제할 수 있어”
—많은 정치가의 슬로건인 ‘복지’ 정책이 소설가에게도 한 줄기 빛이 됐으면 좋겠어요. 문학인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없다 할 순 없지만, 몇몇에 한정되어 있잖아요. 대한민국 소설가가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요. 외국과도 많이 다르잖아요.
“좁은 시장과 수준 낮은 독자도 문제고, 이기적이고 저급한 출판업자도 문제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저를 비롯한 소설가 자신의 자질 부족입니다.
앞에서 대답했듯이 독자들이 돈을 낼 만한 권력과 흥미가 부족하다면 그럴듯한 이상과 미학이라도 갖춘 소설을 내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만한 소설을 쓰려면 독보적인 이상을 제시할 만한 인생과 운명이 필요한데, 그러한 인생과 운명을 갖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소설도 쓰지 못하고 시장에 영합하지도 못한다면 가난은 당연하지 않겠어요?
소설가를 구제할 사람은 없습니다. 소설가를 구제할 기관도 없죠. 소설가를 구제할 방법은 소설가의 인생과 그의 운명뿐입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과 운명으로 써 낸 소설만이 그를 간신히 먹여 살릴 수 있어요. 겨우 소설을 쓸 수 있을 만큼.”
—어쩐지 답답하고 가여운 현실로 여겨집니다.
“현재 소설 원고료가 200자 원고지 한 장당 만 원쯤 합니다. 월수입 1000만 원이 되려면 원고지 1000장을 써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합니다. 또한 한 해 한두 권 책을 출간한대도 그 책이 10만 권 팔려야 인세가 1억원쯤 합니다. 이 또한 불가능합니다. 둘 다 이 불가능한 기대치의 1할 정도가 가능한 수칩니다. 그러니까 원고료는 월수입 100만원, 인세 수입으로는 연수입 천만 원, 합산하면 연수입 2200만원이로군요.
그런데 이렇게 연수입 2200만원을 벌어들이려고 인생을 포기하고 시장과 통속에 굴복하는 소설가가 한둘이 아닙니다. 소설가가 아니라 글품팔이랄 수밖에 없는 이런 사람에게는 소설가로서의 운명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떡해야겠어요? 제대로 된 소설가 노릇을 하자면 가난을 견디거나 극복하는 방법이 필요하지요.
견디기보다는 극복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방법으로 권장할 만한 직업은 강도나 절도입니다. 강도나 절도를 직업으로 유지하면서 발각되거나 체포되지 않는다면, 한 달에 하루나 이틀 일하고도 가정경제를 유지하며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비상한 재주와 체력과 담력을 타고나야 할뿐더러 쉼 없이 직업적 훈련을 연마해야겠죠.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쩌면 소설쓰기보다 더 힘들죠. 한밤에 복면을 하고 칼을 찬 채 남의 집 담을 넘나드는 담력으로 세상과 맞짱 뜨는 소설가라면, 그 기질만으로도 문호(文豪)의 칭호를 받을 수 있지 않겠어요? 세상에 쉬운 일이 없어요.
그러니 도둑질도 한 번 해 보지 못한 소설가가 가난하네 마네 엄살을 떨어선 안 됩니다. 그는 소설가가 아니라 ‘소설가 비슷한 비렁뱅이’입니다. 소설가의 궁핍은 그 자신의 유약함과 무능 탓이지 소설이나 이 사회 탓이 아닙니다. 당대는 많은 소설가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비좁은 백과사전에 자신의 소설 제목을 올릴 만한 소설가라면 가난 따위의 장애로 징징대지 않지요.”
소설 쓰려고 목욕탕 때밀이, 웨이터 경험
—수많은 아르바이트 자리가 생기고 사라지는 시대입니다. 젊은 시절 아르바이트로 목욕탕 때밀이도 하고 웨이터도 했다고 들었어요. 누구나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니, 참 열심히 살았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남에게 권할 일도 아니고, 자랑할 일도 아니며, 부끄러워해야 할 일도 아닙니다. 그런 경험을 할 때 제 나이가 겨우 열아홉, 스무 살이었으니 지금 뭐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설을 쓰기 위해 선택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었죠. 폼 잡고 잘난 척하는 자들도 다 똥구멍을 가지고 있다는 점과, 그 어떤 자도 술 취하면 별 볼일 없는 망나니나 겁쟁이가 된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수컷론에서 예전 작품과 비교를 하자면 이 소설에서는 성에 대해 굉장히 청교도적이었습니다. 그런 장면이 거의 없어서 조금 서운했다고 할까요. 무슨 변심(?) 때문이었습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과 이 소설이 대상으로 하는 독자는 고독과 불안을 안고 현실에 저항하며 이상을 꿈꾸는 청년입니다. 그들에게 성(性)이나 쾌락이 무슨 위안이나 대안이 되겠습니까?”
—먼 길을 돌아 이제는 소설가의 삶(길)을 선택하신 거죠.
“현직에 있지 않을 때에도 정치가는 정치가입니다. 강도나 절도도 마찬가지죠. 남의 집 담을 넘지 않는 날에도 그는 강도나 절도예요. 마찬가지로, 어디서 무얼 하든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 전 언제나 소설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동안 알량하나마 가진 재능을 낭비했다는 후회와 함께 장차 소설 쓸 시간이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강을 유지한대도 한 20년 정도 더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죽기 전에 반드시 써야 할 작품만 쓰려고 합니다.
저는 국민학교 3학년 때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우리나라 신화를 쓰겠다는 꿈을 가지고 소설가를 지망했습니다. 그 ‘한겨레 신화’는 환갑이 지난 나이라야 제대로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여겨 이리저리 살피면서도 입때까지 미뤄 두고 있었습니다. 몇 년 뒤 환갑이 되면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나라 신화를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프리미엄 조선에 장편 연재중
—현재 《조선일보》 인터넷 ‘프리미엄 조선’에 《선생님을 위하여》라는 장편을 연재중인데, 이 소설을 쓰게 된 특별한 동기라도 있습니까.
“이 연재소설은 오래전부터 꼭 써야 한다는 소설가로서의 부채로 간직하고 있던 작품입니다. 다행히 이번에 시작했는데 엄청 힘들더군요.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제가 소설을 쓰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한겨레신화’를 쓰기 위한 연습이거든요. 그러니 저는 《선생님을 위하여》와 같은 대중소설하고는 정서가 통하지 않아요. 누군가 써야 할 소설이라 시작은 했으나, 남이 해야 할 일을 망치는 꼴은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어쨌든 이 소설의 주제는 ‘사제지정(師弟之情)’입니다. 최근 공교육 현장의 피폐함과 사제 간 도덕성 붕괴가 우리 사회 중요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지 않습니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패덕과, 교사와 학부모 간의 불신과 반목이 언론 보도에 넘쳐납니다. 문학과 영화를 비롯한 문화현장에서도 비리를 고발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 대중을 불러 모아 볼썽사나운 모양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어요.
언론과 문화계의 이러한 고발과 비판이 한편으로는 사제 간의 불화를 상품화한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쯤 우리는 사제지정을 제재로 한 소설 한 편쯤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이 무너져 가는 사제지간의 윤리를 다시 확립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문제가 있으니 고민도 있어야죠. 연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소설이나, 어버이와 자식이 주고받은 애정을 극화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존재의미를 재고합니다.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에 있어서도 양자 간의 자애와 공경은 그 사회의 건강성을 증명하고 북돋웁니다. 때론 이성이나 혈육 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유대의 가치를 환기하지요. 더욱이 우리는 조선 500년간 성리학이란 학문적 실천적 이데올로기를 통해 스승과 제자라는 고급한 인간관계의 친밀도를 지극히 고양한 민족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걱정스럽죠? 소설이 사회문제 해결의 도구는 아니지만 적어도 당대를 반영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서사의 중심이라는 측면에서, 사제지정을 다룬 이 소설은 위기에 처한 교육현장과 모두 스승의 제자인 우리에게 전하는 건강한 제안으로 기능하리라는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토리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재 3분의 1 정도 진행된 이 소설의 내용은 주제만큼이나 단순합니다. 듀오 인디밴드 ‘아홉 번째 파도’ 멤버 서문호와 박연도는 명문대학을 졸업한 서른여섯 살 동갑내기 뮤지션입니다. 둘 다 총각인데, 미학을 전공한 박연도는 기타레슨으로 돈을 벌면서 아마추어 첼리스트 김민정과 연애중이고 미술사학 석사인 서문호는 그의 학문적 가능성을 아끼는 권기철 교수님으로부터 박사학위를 하라는 종용을 받고 있어요.
확실한 장래를 뿌리치고 음악을 선택한 그들은 홍대 앞을 전전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공연장을 떠돌며 음악에 대한 순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현재 그들은 질병과 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서문호의 대학 은사님을 위해 한 가지 계획을 추진 중입니다. 내년 봄 개최되는 방송사 가요제에서 ‘아홉 번째 파도’가 그랑프리를 차지해야 하는 이유가 그 계획에 포함돼 있지요. 그들이 가요제에 출품한 ‘선생님을 위하여’란 포크팝 계통의 자작곡이 일차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의 제자”
—뮤지션의 성공담을 다룬 소설이라고 봐야 할까요.
“아닙니다. 이 소설은 스승과 제자의 사랑을 다룬 소설입니다. 뮤지션 세계의 이야기는 배경일 뿐입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삼돌이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짜리 청소년입니다. 그는 사인조 혼성 인디밴드 ‘남지석밴드’ 객원멤버지만, 그보다는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고 있어요. 삼돌이는 올해 초 세상을 떠난 담임선생님을 잊지 못해 일주일에 한 번씩 인천시립공설묘지의 선생님 무덤을 찾아가 노래를 부릅니다. 자신의 음악성과 반항심을 보살펴 주시던 스물여덟 살 처녀 선생님의 사망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는 가요제에 솔로로 출전하려고 자작곡 ‘선생님을 위하여’를 준비했지요.
그런데 가요제 운영팀은 둘 중 하나 는 곡명을 바꿔야 한다고 요구하고 삼돌이는 거절합니다. ‘아홉 번째 파도’도 제목을 바꿀 수 없는 사정이 있지요. 소속사가 그 제목으로 녹음한 CD가 발매직전이고 이 제목으로 지원금을 약속했으니까요.
이들 둘이 ‘선생님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통해 마주치고, 각자 연습하고, 스승의 요양원과 무덤을 찾아가고, 연애를 하고, 사고를 치고, 라이브클럽과 이런저런 행사장에서 공연을 하고, 가요제에 출전해 그랑프리를 차지하고, 그런 뒤 각자 제 갈 길로 인생을 새로이 시작하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기본 얼개입니다. 이러한 날줄에 사제 간의 신뢰와 사랑, 존경과 사모의 오브제가 씨줄로 엮입니다.”
—책으로 출간했을 때 문학상이나 서점 대박의 감이 오나요.
“이 소설은 대중소설이라 문학상 심사대상이 아닙니다. 대신 매년 스승의 날 선물로 100만 권씩 팔리리라 예상합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의 제자입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스승을 존경해야 할 이유와 의무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지나가면 모자를 벗어 들고 머리를 숙여 공경을 표하는 사회야말로 진정 올바른 사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결혼을 한 것으로 압니다. 가족은 가난한 소설가를 어떻게 바라보나요.
“제 아내와 딸과 아들은 빈부(貧富)따위에 연연하는 천격(賤格)이 아닙니다. 남편과 아빠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지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