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원주교리신학원 정운준 교수님께서 신자들이 사도신경을 바치며 간과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 물음과 답하는 형식으로 강의해주셨습니다.
지난달 강의에서는 사도신경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에 관한것' 과 '거룩한 교회' 에 대하여 살펴봤습니다. 우리가 주일미사안에서 사도신경을 바쳐드릴때 간과하는 것이 있어 일아보고자 합니다. 사도신경은 세례신경이라고도 하는데 세례때 묻는 물음과 답을 거기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바칠때 세례때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야하는데 익숙하게 기도하다보니 의미를 많이 놓치게 됩니다 그중에 특히 먼저 '성인들의 통공' 인데 그것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냐면 '저승에 가시어 '와 ' 죄의 용서' 입니다. 우리는 이 두 구절의 의미를 간과하고 그냥 고백하기 바쁩니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성인들을 믿는것이 아니라 '통공' 을 믿는것입니다.
또 '성인들의 통공'은 우리가 7성사를 믿는다는 것이며 이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 하늘에 계신 성인들과 함께 영의 통함이 있다는것의 차원에서 '성인들의 통공' 을 믿는다는 신잉고백을 하게됩니다.
연혹영혼에 관한것인데 '발타사르''라는 미학의 신학자가 말하는 것으로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토요일에 저승으로 가셨다 합니다. 지옥은 하느님과의 단절울 의미하는 장소인데 하느님은 사랑이시잖아요. 지옥은 사랑이 없는 곳인데 그곳까지 사랑을 채워야 한다는 그래서 하느님의 완전힌 사랑을 드러낸 곳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가장 깨끗하고 거룩함의 존재이신 하느님 앞에 마주하는 순간이 다 고통입니다. 하느님을 대면하는 순간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그런 존재앞에 놓인 인간이 고통을 느낄때 정화과정을 거친다 면 연옥은 감옥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이제껏 살아온 내모습의 정화가 시작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서만 정화과정이 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 정화되는 곳이 연옥이라면 이 자리에서 하느님에 의해 정화되는 여러것들을 체험하는 것도 공부하는 이유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연옥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지옥 또한 보내지는 곳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하느님을 거부하는 사람의 말로가 지옥인것입니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무능하고 비참함,고통, 무력감 같은것이 인간의 죽음인데 이것을 통해서 저너머에 저승이 있다는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죽으심으로 비로소 그 저승에 가신 이유가 전능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비워진곳을 채우기 위해 저승에 가신 뜻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도 죽음으로서 그 상태에 있을때 비로소 예수님을 만날수 있다는걸 생각한다면 죽음은 인간에게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거로 보면 해석이 달라질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희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들의 통공' 을 믿는다는것은 정화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데 교리서는 미사를 얘기 합니다.
특별히 11월은 위령성월이라 돌아가신 많은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나 또한 영적인 존재이므로 나를 위한 위령성월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땅에 살고 있는 나와 돌아가신 분들과 또 천상에 계신분들과 온전한 커뮤니케이션이 일어나는 그러한 11월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바오로 성인의 티모테오 2서 3장 8절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강의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다 달리시고 훌륭히 싸우시고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과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