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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재배 연구소(자연재배 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여명
나는 불행 속에 고통스러워하며 / I'm so unhappy, I feel so bad,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네. / I could lay me down and die; 당신은 무슨 말이든 할 수 있겠지. / You can say what you choose, 그러나 나는 혼란스러워하며 / But I'm all confused; 달콤하고 달콤한 슈거 블루스에 빠져드네, / I've got those sweet, sweet sugar blues, 설탕 또 설탕, / More sugar, 달콤하고 달콤한 슈거 블루스에 빠져드네! / I got those sweet, sweet sugar blues!
1920년대에 발표된 노래 “슈거 블루스”의 가사다. 설탕의 달콤한 맛 뒤에 가려진 역사는 씁쓸하다. 오랫동안 설탕 산업을 지탱한 것은 노예들이었다. 설탕으로 인해 전염병이 나돌아도 그 사실은 경제적 이익 때문에 은폐되었다. 설탕은 뇌에 영향을 끼쳐 정신질환을 유발시키기도 했다. 설탕으로 인해 발생하는 질환들, 슈거 블루스를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고민 끝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다의 아들 오난이 희생양이 되었다. 슈거 블루스 증세가 자위행위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오난의 이야기는 새로운 단어 오나니즘(onanism)을 탄생시켰다. 이후 의사들은 ‘손으로 신성을 모독하다’라는 라틴어 마누스툽라티온(manustupration)을 찾아냈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자위행위,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이 옥스퍼드 사전에 수록되었다. 설탕은 면죄부를 받았고, 자위행위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재앙에 빠뜨리는 행동이 되었다. (지금이야 우스꽝스러운 과거지만, 당시에는 얼마나 심각한 일이었을까?) <슈거 블루스>에서 다루는 설탕의 역사는 부정적인 면이 보다 부각된다. (나중에 설탕의 역사에 대해서 쓴 다른 책 이야기도 올릴 것이다!)
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땀 흘려 일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 병든 사람이 없었다. 정제 설탕을 먹는 사람도 없었다. 낙원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자연 그대로의 음식들. 아몬드와 호도 같은 견과류, 사과와 올리브 같은 과일, 보리와 밀 같은 곡류, 오이와 양파 같은 채소, 이밖에 우유와 꿀 등으로 영양소를 섭취했을 것이다. 자연식품에는 자연 그대로의 달콤한 맛이 있다. 정제 설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류는 오랫동안 설탕을 모르고 살았다. 모세의 율법은 물론 <마누법전>, <역경>, <신약성서>, <코란>에는 설탕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인도의 고대 경전 <아타바 베다>에서 사탕수수를 칭송할 뿐이다. “당신의 머리에 사탕수수 순으로 관을 씌워 드리오니, 나를 버리지 마소서.” 인도인들은 사탕수수를 잘라서 찧고 병에 넣어서 설탕처럼 하얗게 될 때까지 농축시켰다. 미국 인디언들이 단풍나무 수액을 채취해 메이플 시럽을 만든 것처럼 인도인들은 사탕수수의 즙을 짜서 마셨다.
그리스에는 사탕수수를 가리키는 단어가 없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BC. 325년 인더스 강을 답사한 후 ‘꿀 같은 것’이 자란다고 기록했다. 그리스인은 ‘인도 소금’ 혹은 ‘꿀벌이 만들지 않은 꿀’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으며, 작은 양에도 엄청난 값을 치렀다. 네로 시대에 역사가 디오스코리데스는 “인도와 아라비아 지방의 사탕수수로 만든 딱딱하게 굳힌 꿀의 일종으로 사카룸이라 부른다. 소금과 질감이 비슷하며 입안에서 쉽게 녹는다.”(p36)
서기 600년경 페르시아에서 사탕수수 즙을 발효하지 않고 보존하는 방법을 개발한다. 당나라에서는 이 ‘돌 같은 꿀’을 수입하기 시작한다. 당시 사카룸은 기적을 일으키는 진귀한 약품이었다. “중세 라틴어인 ‘사카룸’이 세월이 흘러 설탕의 대체물(사카린)을 뜻하게 되고, 원래는 ‘자그마한 조각’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인 ‘칸다(khanda)’가 달콤하다는 의미만 남아...... 캔디라는 단어로 살아남았다.”(p37)
페르시아를 괴멸시킨 이슬람 세계는 전리품으로 사카룸 제조 비법을 챙겼다. 이슬람은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며 서구 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종이와 설탕 등을 전파했다. 설탕을 풍부하게 생산한 이슬람 제국은 세계 최초로 궁정에서 단 음료수와 사탕을 먹었다. 독일의 식물학자 레온하르트 라우볼프는 사막의 전사들이 설탕을 마음껏 먹게 되면서 매서운 칼날이 힘을 잃었다고 썼다. 그는 1753년 술탄의 제국을 여행한 후 여행기를 출간했다. “투르크인과 무어인은 설탕을 한 조각씩 잘라내어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먹어댔다....... 탐식에 길들여진 이들은 더 이상 예전의 용맹한 전사가 아니었다.”(p39) 이것이 설탕의 남용에 대해 관찰 기록된 최초의 경고문이다. 술탄 군대의 설탕 중독은 월남전 때 미군의 헤로인 중독과 아주 흡사하다.
중세에 평범한 사람들이 아프면 기댈 곳은 민간치료자들뿐이었다. 민간치료자들은 여러 약초들로 사람들을 치유했다. 그들의 관점에서 보면 정제 설탕은 온전한 식품이 아니었다. 설탕은 교회와 정부에 아첨하는 인간들에 의해 수입되어 죽음과 세금, 함정과 말썽, 전쟁과 역병 같은 흔적만 역사에 남겼을 뿐이다.
십자군 원정이 끝나면서 기독교인들은 설탕의 맛을 알게 된다. 1306년 교황 클레멘트 5세는 ‘설탕 전략’의 개요가 담긴 청원을 받게 된다. “술탄은 사탕수수를 대량으로 경작하여 막대한 이익과 세금을 챙긴다. 만일 기독교도가 이 땅을 탈환한다면 술탄은 큰 손해를 입을 것이다....... 사탕수수는 모레아, 몰타, 시칠리아에서도 자라니 기독교의 땅 어느 곳에서도 경작을 하면 자라날 것이다.”(p40) 기독교도들이 금단의 음식에 손을 뻗치면서, 이후 700년 동안 노예와 대량 학살, 조직화된 범죄의 역사도 시작된다.
십자군이 귀환하면서 설탕을 편법으로 사용하여 맥주와 포도주를 양조하는 방법도 들여왔다. 맥주가 곡식과 맥아, 호프만으로 빚어졌는지 검사하는 엄격한 감별법이 있었다. 의심 가는 맥주를 나무의자에 붓고 네모난 것을 올려놓는다. 가죽옷을 입고 그 위에 앉았다가 한참 후 일어날 때, 가죽이 나무에 붙으면 설탕이 첨가된 것이다. 맥주에 설탕을 넣은 게 발각되면 양조업자 목에 칼을 씌워 구경거리로 삼거나 마을에서 추방했다. 어떤 포도주 제조업자는 자신이 빚은 포도주를 6퀴트나 마시는 벌을 선고받았다. 그는 형벌이 집행되는 도중 사망했다. 1816년 영국에서는 양조업자가 설탕이나 당밀을 갖고 있기만 해도 불법으로 규정되었다. 옛날에 맥주는 마시는 빵(liquid bread)이었다. 기본 식품이었던 것이다. 젖을 먹이는 엄마들은 빵 대신 맥주를 마시곤 했다. 맥주에 설탕을 넣는 것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였다.
<설탕의 역사>를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 노엘 디어는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무역에 희생된 책임을 설탕에 묻는다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라고 말했다.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훑으면서 사탕수수밭을 찾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사탕수수밭이 아니라 사탕수수가 자라는 열대 기후에서 노예 생활을 해낼 아프리카 흑인들이었다. 1444년 엔리케는 라고스에서 235명의 흑인을 데려와 세비야에서 노예로 팔았는데, 이것이 노예무역의 시작이었다.”(p41) 10년 후 교황은 노예무역을 축복했고, 이후 기독교도 설탕업자들은 성경 구절을 합리화시키고 악용해서 노예들을 잔인하게 부린다.
콜럼버스는 사탕수수를 스페인으로 가져왔다. 서인도제도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예를 부리자고 했지만 이사벨라 여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왕이 사망하자 페르디난드 왕은 설탕업계의 발전을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징발하는 데 찬성했다. “서구의 정치사에서 설탕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던 생산품은 없다. 부와 권력에 힘입어 포르투갈과 스페인 제국은 금세 일어섰다. 그러나 예전의 아랍이 힘없이 무너졌듯이 두 나라 또한 너무나 급속히 쇠퇴했다. 고위층이 설탕을 흥청망청 먹게 되면서 이러한 쇠퇴는 생물학적으로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을까.”(p42~43)
처음에는 영국 식민지에 노예제도를 공인하지 않으려던 엘리자베스 1세도 감상적인 양심을 벗어 던졌다. 영국은 사탕수수를 재배할 플랜테이션 농장을 시작하면서 노예무역을 장악했다. 사탕수수 즙을 발효시켜 럼주를 만들고, 북미 인디언들과 값진 모피로 맞바꾸었다. 설탕, 당밀, 럼주의 삼각무역으로 철저하게 단물을 빨아먹었다. 바다의 패권을 쥔 영국은 설탕 사업을 장악했다. 차에 부과된 세금이 미국 독립전쟁을 촉발했다고 하는 역사학자가 있는 반면, 1733년의 당밀 조례(Molasses Act)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설탕이나 당밀을 수입하면 높은 세금을 물렸기 때문이다. 당밀조례는 미국 식민지의 순환 무역에 위협을 가했고, 럼주 중독자들을 술에 굶주리게 만들었다.
“유럽에서 수입하는 설탕 중 어느 것 하나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고 만들어진 것이 없다. 노예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모름지기 감정이 있는 인간이라면, 불행한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죽음을 먹고 자라는 설탕을 끊고 즐거움을 거부해야 한다.”(p45)라고 프랑스의 철학자 클로드 아드리앙 엘브티우스가 적었다. 그러자 비난이 쇄도했고, 그는 종교법정에 서야 했다. 그는 결국 주장을 철회했고, 책은 모두 불쏘시개가 되었다.
노예제도에 대한 혐오 사상은 유럽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792년에는 반설탕운동협회(Anti-Saccharite Society)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세계 설탕 산업의 중심지였다. 달비 토머스 경은 “그 어떤 것보다 영국의 영광과 위엄을 드높인 생산품은 설탕이다”(p46)라고 공언했다. 다른 정치인은 “서인도제도에서 설탕을 생산해내는데 필수적인 노예제도 덕에 설탕 공급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다른 이유를 들 필요조차 없이 설탕의 필요성, 절대적 필요성이 노예제도의 존재 이유다.”(p46)라고 했다. 대영제국은 완전히 설탕에 중독되었다. 설탕과 노예는 불가분의 관계였으므로 두 가치를 모두 수호해야 했다.
나폴레옹도 설탕의 생산자였다. 영국이 해상을 봉쇄하자 프랑스의 설탕 값은 치솟았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도처에 사탕무를 심고, 설탕 정제를 위한 공장을 설립하고, 설탕 정제 공장 인가증을 발부했다. 그 결과 바로 다음 해 프랑스는 800만 파운드나 되는 설탕을 생산하는 성과를 거둔다.
1833년 영국 식민지의 노예는 해방되지만, 미국에는 노예제도가 합법적이었다. 증기기관, 동물의 뼈로 목탄을 만드는 방법, 진공 펌프 등 19세기 초의 발명들은 미국이 설탕 산업에서 전성기를 누리는 기반 역할을 했다. 이런 발명 전에는 지금의 백설탕 같은 설탕을 만들 수 없었다. 노예도 필요했다. 사탕수수를 수확하려면 사람이 직접 등골이 빠지도록 일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자들에게 설탕은 확실한 세원이었다. 미국의 설탕 공장은 연방정부가 거둬들이는 수입관세 총액의 20%를 떠맡았다. 이제 미국은 세계 최대의 설탕 소비국으로 부상한다.
이제 일본으로, 중국으로, 우리나라로 설탕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온다. 설탕의 역사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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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커피나 설탕, 담배 등은 해롭지 않습니다. 유익한 음식이자 약초지요. 다만 가공과정에서 들어가는 첨가제가 문제될 뿐... 그러나 아스파탐이나 사카린 등은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합성물질 그 자체입니다.
제가 가끔가는 동네공원 관리아저씨한테 들은 얘긴데...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같은 것을 먹을수록 비둘기가 비실비실한답니다...
설탕에대해 이해가 빠르게 올려주신글 감사합니다
저는 이번에 필리핀에서 사탕수수로 비정제했다는 설탕을사서 매실을 담궜는데 그런 설탕도 첨가제가 들어갔을까요?
남미, 남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 등지에서 생산하는 설탕은 대부분이 유기농설탕으로 알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