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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6월 30일 화요일
[(녹)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로마 교회의 초기 순교자들
말씀의 초대
아모스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예언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님의 날을 예고한다(제1독서).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던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예수님께 호소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탓하시며 바람과 호수를 꾸짖어 고요하게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8; 4,11-12
1 “이스라엘 자손들아, 주님이 너희를 두고,
이집트 땅에서 내가 데리고 올라온 씨족 전체를 두고 한 이 말을 들어라.
2 나는 이 땅의 모든 씨족 가운데에서 너희만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지은 너희를 나는 벌하리라.”
3 두 사람이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
4 먹이가 없는데도 사자가 숲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잡은 것이 없는데도 힘센 사자가 굴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5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땅에 있는 그물로 내려앉겠느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땅에서 그물이 튀어 오르겠느냐?
6 성읍 안에서 뿔 나팔이 울리면 사람들이 떨지 않느냐?
성읍에 재앙이 일어나면 주님께서 내리신 것이 아니냐?
7 정녕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당신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시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8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4,11 “나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은 것처럼 너희를 뒤엎어 버리니
너희가 불 속에서 끄집어낸 나무토막처럼 되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이다.
12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라.
내가 너에게 이렇게 하리니,
이스라엘아, 너의 하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먼저 배에 오르시고, 제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단순한 움직임의 묘사 같지만, 이 장면은 제자 됨의 길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호수가 거세게 흔들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풍랑’으로 옮긴 그리스 말 ‘세이스모스’는 흔들림이나 지진을 뜻하는 낱말로 단순한 폭풍이 아니라 삶 전체를 뒤흔드는 큰 불안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불안에도 주무십니다.
제자들은 다급히 외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 8,25). 여기서 처음으로 ‘구원하다’라는 말이 다급한 현실 속에서 울려 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의 두려움을 짚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8,26) 그들의 두려움은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 작은 믿음이 흔들린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십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께서만 바다를 통제하실 수 있으셨지만, 이제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로 통제가 이루어집니다. 신화적 언어로 묘사한 장면이지만 오늘 복음은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의 권위 앞에 맞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두려움을 떨치고 주님께 온전히 맡겨야 함을.
오늘 복음에 나타나는 배를 두고 교회는 자기 이해의 상징으로 읽어 왔습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는 온갖 어려움으로 흔들리는 우리 삶과 교회와 닮았습니다. 믿음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거기서 겪게 되는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바다가 완전히 잔잔해진 뒤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우리가 버틴 것은 배가 튼튼해서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이었다는 것을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어렵고 힘겨운 삶의 어느 날, 눈물조차 흐르지 않을 만큼 그저 막막한 날, 바로 그런 날에도 예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믿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합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달라스 교구 ‘다문화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작년에는 에어컨이 고장 나서 더운 가운데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올해는 에어컨은 잘 되었는데, 성당 인근 지역의 전기가 나갔습니다. 성당은 어두웠고, 날씨는 더웠습니다. 그런 가운데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구장님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활력이 넘치시는 분입니다. 본당 신부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뜨겁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사에 함께한 교우들도 웃었고, 사제들도 웃었습니다. 무덥고 어두운 분위기가 주교님의 한마디로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강론을 마칠 무렵에는 환하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연합 성가대의 성가와 연합 반주단의 반주가 더욱 멋지게 들렸습니다. 주교님은 강론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가톨릭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미사 후에는 각 나라 공동체가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 한국 공동체는 김밥과 떡을 나누었습니다. 올해는 사물놀이와 K-POP 공연도 보여 주었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 서로 다른 음식, 서로 다른 옷차림, 서로 다른 문화가 있었지만, 그 모든 다름이 갈등이 아니라 축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교회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같아야만 하나 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다르지만 서로를 받아들이고, 다르지만 함께 기도하고, 다르지만 같은 주님의 식탁에 모이는 공동체입니다.
저는 달라스 교구의 다문화 미사를 보면서 미국 정부도 이런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민족이 달라도, 종교가 달라도, 언어가 달라도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태양계에서 보면, 우리 은하에서 보면, 더 넓은 우주에서 보면, 지구라는 푸른 별은 정말 작은 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별에 사는 우리가 피부색으로, 이념으로, 종교로, 세대로, 남자와 여자로 나뉘어 갈등하고 서로 싸운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차이는 싸움의 이유가 아니라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런 어리석은 삶을 살아가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한때는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로 살던 민족이었습니다. 남의 땅에서 도움을 받아야 했고, 남의 땅에서 살아야 했던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였음을 잊지 마라.”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미국이라는 강대한 나라도 처음부터 주인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땅 위에서 살아온 역사도 있습니다. 이민자들이 흘린 땀과 눈물 위에 세워진 역사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진 것을 자랑하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고, 우리도 누군가의 환대를 받았고,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신앙인은 자비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의로움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불의와 차별 앞에서 침묵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밀어내면 세상은 더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면, 꺼졌던 전기가 다시 들어오듯이 공동체 안에 빛이 들어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조용하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가다가 거센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는 파도에 뒤덮일 지경이 되었고,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외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고,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오늘은 6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언젠가 비행기에 비치된 책에서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말은 외롭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소리에 쉽게 흔들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욕망의 그물에 걸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더러움 속에서도 마음의 순결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길을 두려움 없이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왜 믿음이 약하냐?” 풍랑은 언제든지 올 수 있습니다. 배는 흔들릴 수 있습니다. 마음은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배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어둠 속에서도 빛이 들어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무더운 미사도 은총의 시간이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서로 다른 민족과 문화도 하나의 교회가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마음의 풍랑도 고요해집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탁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풍랑을 잠재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주님 안에서 당당하게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그리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제자처럼,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당신 계시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마태 8,24)
당신
계시니
나
있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사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믿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바라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사랑하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일어나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굳건하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나아가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이루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살리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사나이다
당신
계시니
나
있나이다
평화의 항구로 이끄시는 주님과 함께 걷는 길
김웅태 신부님
1. 흔들리는 인생의 배 위에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다가 거센 풍랑을 만납니다. 배는 파도에 뒤덮이고,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다급히 예수님을 깨우며 외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마태 8,25)
우리 삶도 이와 닮아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인생이라는 바다 위에 작은 배를 띄우고 살아갑니다. 가정, 건강, 경제 문제, 인간관계, 신앙의 어려움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배를 저어 갑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감당하기 어려운 풍랑이 몰려오면, 우리의 경험과 자신감은 쉽게 무너집니다.
그때 우리도 제자들처럼 묻게 됩니다.
“주님, 어디 계십니까? 제가 이렇게 힘든데 왜 침묵하십니까?”
2. 주님께서는 같은 배 안에 계십니다
고통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주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주님께 버려진 듯한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내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요한 14,18)
풍랑 속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이 얼마나 거센가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우리와 함께 배에 타고 계시는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비록 배가 흔들릴 수는 있어도 결코 침몰하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주무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의 배 안에 함께 계시며, 우리가 두려움 속에서도 믿음으로 그분을 부르기를 기다리십니다.
3. 두려움보다 큰 믿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태 8,26)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이 위험을 느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잊고 있었던 것은,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신들과 한 배에 타고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비행기가 심한 난기류를 만나 승객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한 어린아이는 평온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무섭지 않으냐고 묻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이 비행기를 조종하시는 분이 제 아빠예요.”
이 아이의 평온함은 상황이 안전해 보여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종하는 분을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평화였습니다.
우리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키를 잡고 계신 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주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풍랑이 사라진 뒤에야 평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할 때 참된 평화가 시작됩니다.
4. 주님을 맞이할 준비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 앞에 깨어 있으라고 선포합니다.
“사자가 포효하는데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모 3,8)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삶을 흔들어 깨우는 말씀입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전한 회개의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풍랑이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 마음이 주님께 돌아서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고, “아주 고요해졌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주님의 한 말씀은 혼란을 고요로, 두려움을 믿음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십니다.
5. 평화의 항구를 향하여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도 우리 삶에는 크고 작은 풍랑이 불어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배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두려움이 밀려올 때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저와 함께 계셔주심을 믿습니다. 제 삶의 풍랑을 당신께 맡깁니다. 제 마음을 고요하게 하시고, 당신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풍랑은 끝이 아니라 믿음의 자리입니다. 우리 인생의 배를 주님께 맡기고, 평화의 항구를 향해 오늘도 담대히 걸어갑시다. 아멘.
오늘의 성인
로마 교회의 초기 순교자들
네로 황제 때인 서기 64년 로마가 화재를 입은 후 교회에 가해진 첫 번째 박해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잔인한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
역사가인 타치투스(Annales 15, 44)와 로마 주교 클레멘스의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편지(5-6장)가 이 사실을 증언해 준다.
성 클레멘스 1세 교황의 고린토 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적어본다.
이제 과거의 예를 떠나 좀더 근래에 있었던 영웅적인 분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우리 시대의 숭고한 모범을 보기로 합시다.
우리 교회의 가장 견고하고 거룩한 기둥이었던 그분들도 질투와 시기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아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투쟁했습니다.
먼저 거룩한 사도들을 바라봅시다. 베드로는 이 죄스런 질투심 때문에 한 두 가지도 아닌 여러 가지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수난 받은 후 마침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을 얻었습니다.
바오로도 이 질투심과 분쟁 때문에 인내의 상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곱 번이나 사슬에 매이고 피신도 하고 돌로 맞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 서방의 복음 전파자가 되고 신앙으로 말미암아 높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 온 세상의 정의를 가르치면서 서방의 극변까지 이른 후 통치자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의 팔마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바오로는 이 세상을 떠나 성도들의 거룩한 안식처로 올라가 우리에게 인내의 가장 위대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생활을 영위한 이분들 외에 질투심 때문에 생긴 고문과 고초를 당한 수많은 성도들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도 우리에게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질투심 때문에 다나이다와 디르체아 같은 여인들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지독히 잔인하고 가증스런 고초를 당한 다음 신앙의 목적지에 다다라 연약한 몸을 지니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고귀한 상급을 받았습니다.
질투심은 아내의 마음을 남편에게서 멀어지게 하여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라는 우리 선조 아담의 말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질투심과 분쟁은 큰 도시마저 뒤엎었고 강대한 민족들을 뿌리째 뽑아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은 다만 여러분이 지켜야 할 의무를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것으로 나 자신도 교훈을 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이나 나나 같은 경기장에 서 있고 같은 싸움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쓸데없고 헛된 걱정거리는 뒤에 제쳐 두고 영예롭고 거룩한 우리의 전통에로 방향을 돌려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즐거우며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인지 분간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피에다 우리 시선을 두도록 하고, 우리 구원을 위해 흘리심으로써 온 인류에게 회개의 은총을 얻어 준 그 피가 하느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보배로운지 깨닫도록 합시다.
복자 라이문도 룰로(Raymund Lull)
활동년도 : 1232-1316년
신분 : 선교사
지역
같은 이름 : 라이문두스, 레이먼드, 룰로, 룰루스
라이문두스 룰루스(Raymundus Lullus, 또는 라이문도 룰로)는 모슬렘으로부터 마요르카(Mallorca) 섬을 구출한 어느 장군의 아들로서 마요르카 섬의 팔마(Palma) 태생이며, 아라곤(Aragun)의 야고보 1세 왕의 신하가 되었고, 1257년에 블랑카 피카니와 결혼하였다. 2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라이문두스는 은거생활을 추구하였는데, 1263년에 그리스도의 환시를 본 뒤로 생활을 완전히 바꾸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와 로카마두르를 순례한 후,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고, 가족들의 생계 외에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사하였다.
그는 마호메트 교도들의 개종에 관심에 많았으며, 9년 동안 모슬렘에 대해 공부한 뒤, 자신의 이상을 꽃피우기 위하여 마요르카 섬에 트리니타스 대학을 세워 설교 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는 마호메트 교도들의 선교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그 당시의 정세 때문에 허가를 받지 못하다가, 1306년에 부지에 가는데 성공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추방되었다. 그는 철학, 음악, 항해, 법률, 천문학, 수학, 신학 등의 저서를 아라비아어로 남겼고, 아빌라(Avila)의 성녀 테레사(Teresa)와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에 버금가는 신비적인 시를 남겼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50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에 의해 승인되었다.
복자 필립보 포웰(Philip Powell)
활동년도 : 1594-1646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영국 웨일스(Wales) 남동부 궨트(Gwent) 혹은 브리컨의 트롤윙에서 태어난 필리푸스 포웰(Philippus Powell, 또는 필립보)는 16세 때에 런던으로 가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2-3년 뒤에 업무차 프랑스의 두에(Douai)로 갔다. 그는 여기서 베네딕토회에 큰 매력을 느껴서 1619년에 입회하였다.
1622년 3월 7일 그는 영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처음에 잉글랜드(England) 남서부 데번셔(Devonshire)로 가서 어느 가톨릭 신자 가정을 소개받았는데, 그 후 20여 년간 데번(Devon)과 서머싯(Somerset) 그리고 콘월(Cornwall) 지방에서 숨어 다니며 배교자와 이단자들을 권면하는 등 사목활동을 열렬히 전개하였다. 영국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그는 고링 장군 편에 가담하여 종군사제로 일하다가 웨일스 지방으로 여행하던 중에 가톨릭 사제임이 발각되어 런던으로 호송되었다. 옥중생활 속에서도 그의 놀라운 신심과 그리스도교적 덕행이 빛을 발했기 때문에 관리들조차 그를 아주 점잖게 대하였다. 그는 타이번(Tyburn)에서 교수형을 받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그는 1929년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