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大皇后 傳
금선(金鮮)이 본래 유학(儒學)을 숭상하였는데 간혹 예외가 있었으니 성종(成宗)때가 그랬다. 편승훈(片承薰)이란 이가 있었는데 본래 금과 철을 이용한 다양한 신제품들을 만들어 북국(北國) 10여개국은 물론 멀리 왜국과도 교역하니 이로써 떼돈을 벌었다. 사람들이 편승훈을 일컬어 보통은 편행수(片行首) 혹은 편상(片商)이라고 불렸다. 이때 조정이 훈구와 사림으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훈구파는 선대왕때 있었던 정변(政變)에 공을 세운 이들과 이를 따르는 무리들을 중심으로 조성된 파벌이요 사림파는 정규 유학교육(儒學敎育)을 받은 신진관료들이었다. 어떤이들은 종종 사림파를 ‘야당(野黨)’의 역할을 한다고도 했다.
성종에게 본래 정비(正妃) 송씨(宋氏)와의 사이에 태자를 낳았는데 이름을 규(圭)라고 했다. 송비(宋妃)는 규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성종이 10년간 장가들지 않다가 신료들이 간언이 있어 ‘나라에 국모(國母)자리가 너무 오래 비어있는것도 바람직하지 않으며 어린 태자에게도 돌봐줄 어머니가 필요하다’ 하여 간택령을 내려 후비를 들이기로 했다. 이때 왕실에 황후도 태후도 존재하지 않아 임시로 ‘간택위(揀擇委)’를 두어 내명부의 일을 관리하도록 했다. 간택위는 왕실 종친 군부인 10여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주로 후궁들의 관리와 태자 및 왕자,공주들의 혼사문제를 관장하였다.
이때 후궁으로 귀비(貴妃) 허씨(許氏)와 공씨(孔氏)가 있었는데 간택위가 심사 끝에 중전의 자질로는 부족함이 많다하여 모두 무효가 되었다. 결국 금혼령을 내리고 새 중전을 간택키로 하니 오성환(吳成煥)이란 이름없는 선비의 여식이 뜻밖에 중전으로 간택이 되었다. 이때 태자가 갈수록 장성하고 있어 그 부담감 때문에 실력있는 신하들은 되려 딸을 후비로 바치는 것을 꺼려한 탓이다.
원래 선대왕때 정변에 이를 수긍하지 않는 이들이 있어 이중 이민섭,임인섭,안병규,박승홍등 7-8인이 모여 정변으로 어지러워진 왕통(王統)을 바로잡고자 했다. 허나 밀고자가 생겨 무리가 모두 죄를 받았다. 무리중 안병규라는 이에게 부인이 있었는데 임신중이었다. 금선의 법도여 역모의 가문은 아들인 경우 죽이고 딸은 노비로 삼게 되어있어 임신중인 부인의 아이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은 노비로 삼기로 했다. 이때 일홍(一紅)이란 하녀가 병규에게 있어 역시 임신중이었는데 주인에게 가로되 ‘저와 아이를 바꾸도록 하시옵소서. 만약 아들이면 제 아이로 할 경우 목숨을 부지할것이요 딸일 경우 제 아이야 어차피 노비가 될 팔자이니 상관없지 않습니까 ?’ 하여 일홍의 충정에 감동하여 결국 아이를 바꾸었다. 일홍이 딸을 낳았는데 아이를 바꾼뒤 한 사림파 가문의 노비로 주어졌는데 그게 오성환의 집안이었다. 성환이 원래 자식이 없어 아쉬워하다 하녀기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성품이 고와 양녀로 삼았는데 그러다 이때 나라에서 간택령이 내리자 딸을 바쳐 왕의 후비가 된 것이다.
오씨가 후비가 되었을 때 규의 나이 열 살이었는데 오씨가 매일같이 품에 안고 잤다. 성종이 의아하여 묻기를 ‘규가 어느덧 열 살이라 이미 갓난아이라 할수도 없는데 매일같이 그리함은 정도가 지나치지 않는가 ?’ 하니 오씨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규가 너무 어릴 때 어미를 잃어 모정(母情)을 모르고 자랐기에 손수 이를 일깨워주고자 함이니 다른뜻이 없나이다. 옛 선현의 글귀에도 어려서 모정을 모르고 자란이중 나중에 정서가 불안하게 되는이가 많다 하였으니 규는 장차 대국(大國)의 보위를 이어야 할 몸으로 만일 그와같이 자란다면 훗날 어찌 만백성의 참된 어버이의 도리를 다할수 있겠습니까. 모두 규와 금선의 훗날을 위함이니 너무 심려마시오소서’ 하여 왕이 뜻대로 하도록 하였다.
규가 원래 어릴때부터 면요리를 좋아하였는데 오씨는 그렇지 않았다. 나중에 오씨가 일부러라도 궁녀들에게 면요리를 주문하며 맛을 들이려 하였는데 왕이 다시 의아하여 묻자 ‘신첩이 비록 나이 어리나 이미 규의 모후(母后)가 된 몸으로 모든 것을 규에게 맞춰주지 않는다면 어찌 어미된 도리를 다한다 하겠나이까. 모든 것은 규를 위한것일뿐 다른뜻이 없나이다.’ 하여 성종이 거듭 오씨의 인품과 사려깊음에 탄복하였다. 하루는 규가 실수로 성종이 아끼는 자기를 깼는데 왕이 몹시 진노하였다. 헌데 오씨가 오히려 성종앞에 무릎꿇고 울며 간하기를 ‘부왕께선 어찌 아비된 몸으로 진노를 참지 못하시어 손수 자식을 치려 하시옵니까. 자식의 허물은 곧 부모의 허물이니 이는 곧 다 제가 규를 잘못 가르친 탓이니 저를 먼처 치시오소서’ 하니 성종이 그제서야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탄식하며 규에게 말하기를 ‘오비(吳妃)의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너는 훗날에도 오비를 충심으로 대하여 효(孝)를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론 측근 신료들에게 토로하기를 ‘이제야 내가 죽어도 편히 눈을 감을것같다’ 하였다.
규가 어느덧 스무살이 되니 왕이 태자비를 들이려 하였다. 정식으로 금혼령을 내리니 이때 편상(片商)이 딸 세나를 태자비로 들이려하니 이때 세나의 나이가 15세였다. 어떤이들은 편상의 신분이 천함을 이유로 들어 그 여식을 태자비로 들임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편상이 이미 훈구,사림 양쪽에 모두 줄을 대고 있어 쉽게 반박하지 못하였다. 편상에게 딸 세나가 맏이고 그 밑으로 아들이 네명 더 있다.
성종이 어느덧 나이 50을 넘기니 기력이 예전같지 않지 측근 중신들을 은밀히 불러 양위문제를 의논하였다. 이때 훈구파의 거두 성문치가 말하기를 ‘태자의 나이 어느덧 스무살이 넘었고 혼사까지 치렀으나 아직 금선의 천년기업을 물려받기엔 여러 가지로 자질이 부족하나이다. 원컨대 폐하께서 다시 생각하시오소서’ 하였고 중신 원광호가 또 간하기를 ‘금선이 대대로 명문가와의 혼사로 왕실의 번영을 이루었는데 이번에 이례적으로 천한 장사치인 편상의 딸을 태자비로 맞았나이다. 허나 편상은 훈구,사림 양파에 모두 줄을대며 천한 신분에 걸맞지 않게 야심이 만만찮으데 이제 태자에게 대권을 넘기면 이후 편상의 전횡이 걱정되나이다. 다시 생각해 보시오소서’ 하였다. 또 다른 중신 이인규가 말하기를 ‘지금 태자의 성품이 유약하여 훈구-사림 양파로 갈라져있는 조정의 문제를 잘 헤쳐나가기 쉽지 않고 주변 여러나라와의 외교문제를 조절하는데도 여건이 쉽지 않을 듯 하나이다. 생각건대 지금 황후의 나이 젊으시니 새로운 자손을 볼 기회 아직 얼마든지 있으니 마땅히 후사 문제는 원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소서.’ 하였다.
편상이 딸을 태자비로 바친뒤 대권이 태자에게 돌아가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으나 일이 여의치않자 일을 도모하기로 했다. 우선 은밀히 태자 ‘규’를 찾아가 ‘태자께서 마땅히 금상의 적장자로 왕실의 대권을 물려받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사온데 간사한 훈구 중신들은 자신들의 권세가 줄어들까 염려하여 다른뜻을 품고 있는자가 많은 듯 하오이다. 또한 모후께선 현재 태자전하의 생모가 아니시니 만약 나중에라도 후비께서 후사를 보시면 이후 태자의 자리가 위태로와질까 우려되나이다. 청건대 태자께선 간신배나 간악한 계모가 다른뜻을 품기전에 먼저 뜻을 도모하시오소서’ 하고 부추겼다. 허나 태자가 손을 내저으며 ‘지금 모후께서 내 생모가 아니라 하나 지난 10년간 지극정성으로 날 돌봐주셨고 또 지난 10년간 폐하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음도 생각해보면 다 깊은뜻이 있을것이라 사료되오이다. 다른건 몰라도 모후께서 후사문제로 다른뜻을 품는다는 것은 정황상 말이 되지 않고 나 또한 돌봐주신 계모에 대한 의를 저버리고 싶지 않소. 조정중신들의 문제는 훗날 내가 대권을 잡은뒤에 처결해도 되는 일이니 지금 미리 서둘로 논할필요가 없소이다’ 하며 처음엔 편상의 간언을 거절하였다. 이에 편상이 꾀를 내었는데 이때 세나에게 어린 네 동생이 시집간 누이를 그리워하며 종종 황실로 사신(私信)을 보냈는데 태자비를 시켜 일부 내용을 먹물로 지우게 하고 이를 일부러 태자에게 보여주었다. 태자가 의아해서 물으니 태자비가 답하기를 ‘아무래도 누군가가 황실안에서 이간을 시키는자가 있는 듯 하나이다. 혹시 제 아우들의 서신을 계모가 가로채서 일부러 내용을 지운 것이 아닌가 의심되옵니다.’ 하였다. 태자가 생각해보니 이치에 맞지않다 생각하여 ‘모후께서 본성이 그런분도 아니시거지와 지금와서 태자비와 사가의 동생들이 사사로이 주고받는 편지에 개입을 하는게 대체 모후께 무슨 득이 되겠소 ?’ 가당찮은 일이라 하며 믿지 않았다.
얼마후 하루는 태자의 생일이 되었는데 모후가 기뻐하며 스스로 태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위주로 후한 상을 차려주었다. 태자비와 함께 식사를 나누도록 하였는데 이때 태자비가 의심하여 손으로 막으며 ‘석연찮은 구석이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보소서’ 하고는 음식의 일부를 들고 밖으로 나가 황실에서 기르는 개 몇 마리에게 던져주었다. 음식을 먹은 개가 갑자기 구토를 하며 쓰러지니 이때 태자비가 짐짓 놀란 듯 황망해하여 태자에게 말했다. ‘보십시오. 모후께서 태자를 해치려 하고있지 않습니까.’ 태자가 많이 충격을 받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오후(吳后)를 의심하였으나 아직 거사에는 뜻을두지 않았다.
태자가 황후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본격적인 결단은 하지 않자 태자비가 다시 꾀를 내었다. 우선 이때부터 자주 황후의 처소에 드나들며 ‘황후께서 비록 태자의 친모는 아니시나 열 살때부터 거두어 돌봐주신 은혜가 있으니 저 역시 며느리로써의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 하며 자주 처소에 드나들며 인사를 올리고 다과를 나누었다. 허나 은밀히 황후의 필적을 익혀 거짓 편지를 작성하였다. 상단(商團)의 사병(私兵)하나를 밀사로 변장시켜 황궁으로 진입케 하였는데 드넓은 황궁안에서 길을 잘못찾아 태자의 침소에 잘못 들어온 것으로 위장하였다. 태자의 처소를 지키는 병사들에게 이윽고 붙잡혔는데 안에는 태자비가 조작한 황후의 밀서가 발견되었는데 내용이 이와 같았다.
‘내 비록 지금은 역도의 무리에 피를 섞었으나 본심(本心)은 변한 것이 없소이다. 금선이 본
래 태대왕(太大王)의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어 일찍이 ’어린 세손을 날 대하듯 하라‘는 고명
을 받은 신료들이 황실의 적통혈(嫡統血)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선대의 역적 원진(元眞)의 무
리가 가당찮게 제위를 찬탈하여 이때부터 금선의 적통이 흐트러졌소이다. 내 부친께서 일찌
기 충의의 신료들과 뜻을 같이하여 뒤바뀐 왕통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간사한 무리의 참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이제 그 적녀(嫡女)인 내가 그 뜻을 이어가고자 하오. 지금 태자는
어릴때부터 잦은 지병이 있어 오래살지 못할것이오 금상(今上)또한 늙고 병들어 그 천수가
오래가지 못할것이외다. 내 비상(非常)한 약물로 태자의 명줄을 끊을것이요, 만약 금상마저
세상을 떠나면 내 은밀히 교통(交通)한 상원대군(上原大君)의 혈손으로 이 나라의 적통을
바로 잡고자 하니 부디 명공께서 밖에서 외응해주기 바라오.’
태자가 편지를 보고 크게 놀라 편상과 태자비를 불러 대책을 의논하였다. 말하기를 ‘모후께서 날 해치고자 하는 뜻이 분명하거늘 반드시 그 대책을 세워야 할것인데 내게 아무런 힘이 없소이다.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소이까 ?’ 하니 태자비가 ‘태자께선 무슨 근심을 그리하시나이까. 신첩이 일찍이 태자의 정비가 되어 백년해로를 함께 하기로 맹서하였으니 이미 태자의 귀신이 되기로 한 여인이나 다름없나이다. 마땅히 심령(心靈)을 다하여 태자를 보필하겠나이다’ 하고는 본래 사가에 있을 때 사사로이 교류하던 사림파의 자제 오석환,양세종,김광수,이원익,정인보,석중선,진지훈,권칠승등 10여인을 추천하여 태자에게 가까이하게 하였고 훈련대장 정훈의 부장 광일과 석도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편상의 사병들이 합류하게 하니 이로써 마침내 황궁이 편상에 점거되었다. 이에 성종이 크게놀라 ‘밖에 무슨 변고가 있느냐 ?’ 물으니 측근신료가 말하기를 ‘아무래도 태자가 다른뜻을 품은 듯 하옵니다. 정변입니다.’ 하였다. 성종이 놀라 황망히 까닭을 물으니 태자가 손수 황후의 밀서를 보여주며 ‘모후께서 먼저 소자를 해치려 하시니 먼저 군사를 일으킨것일뿐’이라 하였다. 성종이 노하고도 놀라 황후를 불러 추궁하니 황후가 진실로 억울하여 대성통곡하여 ‘이는 누군가가 신첩을 모해하고자 꾸민일이옵니다. 신첩이 태자를 열 살 어린나이때부터 품어 지금까지 온 것을 누구보다 폐하께서 잘 아실터인데 어찌 이런 모함에 넘어가시나이까 ?’ 하고는 역시 분하여 태자에게도 말하기를 ‘태자는 어찌 진상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미를 핍박하기를 이리할수 있단 말인가 ? 실로 서운하도다’ 울부짖었다. 태자가 더 들으려 하지않고 병사들을 시켜 황후를 끌어내 목베게 했다.
성종이 정변의 충격으로 날로 쇠약해져 더 이상 국사를 돌볼 여력이 없어 마침내 양위를 결심하였다. 이후 얼마 안가 세상을 떠나니 재위 26년만인 52세요 규(圭)가 25세 나이로 신왕(新王)에 즉위하는데 훗날 규를 ‘중종(中宗)’이라 부르게 된다.
규가 중종이 되니 편씨는 황후가 되었다. 관례(慣例)대로 편황후 혹은 편후라 불러야 했으나 편씨가 어감이 좋지 않다하여 스스로를 ‘대황후(大皇后)’라 부르게 했다. 중종이 즉위하고 한동안 훈구와 사림 사이에서 탕평을 시도하려 들었다. 허나 국구(國舅)인 편승훈이 막후에서 종종 인사에 개입 유학파 출신 신진관료들이 적극 등용되고 훈구는 뒤로 물러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에 박종훈,진치범,한대희,원정수,신세균등의 무리들이 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선대의 정변때 공을 세운 공신가의 자손들이었다. 이들이 하루는 4대째 공신집안인 상당군의 집에 모여 논의하기를 ‘선대에 어린 임금이 즉위하고 심지어 외족(外族)의 여인이 황후가 되는 나변이 있어 대군(大君)께서 법당(法堂)에서 살생(殺生)의 도(道)를 범하기로 결단하고 일을 벌여 국통(國統)을 바로 잡은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도다. 헌데 이제 다시 요사스러운 계집과 늙은 노추(老醜)가 전권을 잡고 나라를 어지럽히려 드니 우리가 다시 선대(先代)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 기틀을 바로 잡을때가 되었도다. 요녀(편씨 황후를 이름)는 특히 선대의 황후인 오황후께서 비록 후미고 계모였으나 현황(現皇)의 태자시절 오히려 스스로 품으시어 그 덕망을 천하에 떨쳤는데, 이제 허무맹랑한 요서(妖書)로 선대의 황후를 모해하였으니 그 패륜의 도가 천번 폐위되고도 남음이 있도다. 금상께선 죄가없고 다만 요사스러운 계집의 꾀임에 넘어간 것 뿐이니 다만 황후를 폐하고 금상의 도는 바로 지키고자 하니 그대들의 생각은 어떤가 ?’ 하고 물으니 무리가 모두 ‘옳다’고 여겨 결행하기로 했다. 나중에 밀고자가 생겨 거사가 발각나니 편상과 황후가 모두 노하여 무리 10여인과 그 식솔 삼족을 멸하니 죽은이가 1천인도 넘었다.
황제가 이전엔 어지러운 꿈을 꾸는일이 별로 없었는데 황위에 오른뒤로 그런일이 잦았다. 혹자는 ‘국사에 너무 근심이 많으신 것 아닌가 ?’ 하여 심신을 평안케 할 것을 권하기도 했고 황후가 하루는 걱정되어 물으니 황제가 백일을 근심타가 마침내 잠자리에서 고백하기를 ‘실은 언제부터인가 돌아가신 어마마마가 꿈에 나타나신다. 피눈물을 흘리시며 나를 부르니 그 뜻을 알수없도다’ 하였다. 황제가 말한 것은 바로 생모이자 선왕의 정비였던 송비(宋妃)를 이름이나 다만 송비가 죽었을 때 태자의 나이 너무 어릴때라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 못할터인데 그와같은 꿈은 이치에 맞지 않아 기이하게 여겼다. 황후가 간하기를 ‘옛부터 죽은이가 나타나는 꿈은 모두 요사스러운 귀신의 장난이라 하였습니다. 너무 심려마시오소서’ 하였다. 허나 황제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때론 이른새벽에 식은땀을 흘리며 몹시도 슬퍼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날이 밝아 국사를 돌봐야 함에도 오히려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차라리 이대로 꿈속에서 (돌아가신) 어마마마와 영원히 살고싶도다’ 외칠정도였다.
황후가 근심하다 편상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원래 편상이 젊은시절부터 도홍대사(道弘 大師)라는 이와 교류하였는데 겉으로는 스님이었으니 실은 굿을 하며 사주,관상,풍수같은 것을 봐주는 점쟁이였다. 편상이 오랜만에 도홍을 찾아가 의논을 하니 ‘황궁의 터가 예부터 좋지않아 죽은 귀신이 돌아다닌다. 내 친히 이를 바로 잡겠다’ 하며 몸소 산에서 내려와 황궁에 들었다. 그리고 밤마다 황제의 침소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하고 먼저 황제에게 술울 먹여 잠들게 한뒤 앞에서 북,징,꽹과리를 치며 귀신쫏는 의식을 올렸다. 백일이 지났으나 상태가 호전되지 않고 황제는 더욱 서글퍼하며 ‘너희가 어찌 내 어마마마와의 만남을 방해하려 드느냐. 그 어떤 마군이가 와도 내가 어마마마를 만나는 잠자리를 방해하지 못한다. 한번만 더 내 잠자리를 방해하는이는 모두 역모로 다스리리라’ 하며 대사는 물론 황후에게까지 칼을 들이댈 지경이었다. 대사와 황후는 물론 편상까지도 ‘꿈은 모두 귀신의 장난일뿐입니다. 믿지 마소서. 저희가 폐하의 침전을 어지럽히는 못된 마녀같은 귀신을 쫒아내겠나이다’ 하니 오히려 황제가 ‘너희야말로 내가 어마마마와 교류하는 길을 막는 못된 마군이로다. 너희는 모두 마군이가 들었도다. 짐이 관심법으로 보니 과히 그러하도다. 내 어마마마와의 꿈자리를 방해하는 모든 못된 마군이는 모두 쫒아낼 것이다’ 하며 거듭 칼을 휘두르니 아무도 사태를 바로잡지 못했다.
황제가 어린시절부터 종종 원인을 알 수 없는 심통(心痛)을 앓았는데, 오씨가 부왕의 후비가 된후 고향 홍천(洪川)에서 나는 약초로 달인 명약을 손수 지어 먹이면 통증을 잊고 상태가 일시적으로 호전될수 있었다. 그러나 편씨(片氏)가 오씨를 모해하면서 홍천의 명약 역시 실은 태자를 독살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든 극약(劇藥)이라고 거짓으로 말하여 이후 더 이상 홍천의 약은 쓰지 않았다. 그리고 황후와 편상이 몸소 백방으로 의원을 수소문하여 황제의 병증을 치료하려 하였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날로 악화되어갔다. 마침내 황제가 더 이상 국정을 살피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자 대황후가 직접 국정을 총괄하기 시작했다.
세나에게 본래 남동생이 넷인데 대황후가 몸소 국정을 돌보면서 첫째 경철은 ‘제일승상(第一丞相)’에 둘째 승철은 ‘병무총관(兵務總管)’에 셋째 명철은 외교와 교역을 총괄하는 ‘외래총관(外來總管)’에 넷째 진철은 비서실장격인 ‘어사총관御使總管)’에 임명하였다. 또한 법무와 형무를 총괄 관장할 ‘형법국사(刑法國事)’를 두어 이 자리엔 백승원이란 이를 임명하였는데 백승원은 편승훈의 큰누이의 장남으로 편황후와는 사촌간이다. 또한 국구(國舅)인 편승훈은 ‘국사총괄대사(國事總括大使) 원로정무통감(元老政務統監) 대법특무원상(大法特務院相) 황국경무(皇國警務) 통합대원수(統合大元帥) 성업특무공신(成業特務功臣) 진충보사(眞忠保師) 대업안무진사(大業安務眞師)’에 명(命)하고 그의 고향인 경산(慶山)을 바탕으로 ‘경산제일태원군(慶山第一太院君) 국무업산총사사(國務業産總使師)’란 칭호(稱號)를 하사(下賜)하였다. 다만 명칭이 길기 때문에 혼동과 난감함을 배려하여 일반적으로 국구를 부르는 호칭은 ‘대현(大賢)’이라고반 부르게 했다. 또한 황궁에는 특별한 명이 없이도 시시때때로 출입할수 있으며 병사들의 검문수색을 받지 않아도 되는 특혜를 주었다. 다만 칼이나 도끼를 들고는 드나들 수 없으며 대신 황궁안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허용했으며 경우에 따라선 종친부나 내명부에도 속옷이나 잠옷바람으로 드나드는 것을 허용하였다.
편가(片家)가 대권을 거머쥐고 국정을 농단하니 간신배가 판을치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다. 또한 전에없는 태풍과 홍수,지진이 자주 일어나고 백태산(白泰山)에서 큰 폭발이 두 번이나 있었다. 이때 관상간이 천문을 보며 탄식하기를 ‘객성(客星)이 주성(主星)을 범하는 이변이 전에없이 일어나고 음(陰)의 기운이 밤하늘을 뒤덮었으니 권좌를 차지한 요녀를 하루속히 징벌하지 않으면 나라의 운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하며 ‘모든 진상을 사실대로 보고조차 할수없으니 이내 가슴만 답답하도다’ 하였다. 황후가 나중에 이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관상감을 자시에 비밀처형하였다.
옛 정난공신의 2세,3세되는이 10여인이 모여 나라의 일을 더 이상 두고볼수 없어 마침내 의기투합하였다. 무리중 우두머리인 문관일이 설득하며 말하기를 ‘우리가 선대에 나라에 공을세운 덕으로 지금껏 부귀를 누리고 있으나 지금 나라를 역적의 무리가 찬탈하여 어지럽히고 있으니 이를 보고만 있으면 어찌 충신의 자손이라 할수 있겠는가. 예부터 큰 권세도 4대 이상을 가지 못한다 하였으니 우리가 충신의 자손으로 나라꼴을 보고만 있으면 먼훗날 우리에게도 앙화가 미칠것일세’ 하였다. 오영환,지삼만등이 동의하여 말하기를 ‘옳은말일세. 마땅히 지금 나라를 어지럽히는 편가의 무리를 척살해야 할것일세.’ 하였다.
이중 지삼만의 사촌되는 이가 도성옆 작은 고을의 현위를 맡고있어 현의 포졸을 병사로 분장시켜 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황궁의 연회때 황후의 호위를 맡는 호위무사라 속여 궁안으로 들여보낸뒤 황후를 제압하고 또 역시 병사로 분장시킨 포졸로 황후의 네 동생의 집안을 포위하여 네 동생들을 진압할것이며 황후의 아비 편승훈은 외국에서 사신이 왔는데 교역의 일로 은밀히 논의코자 한다 거짓으로 보고한뒤 사가로 꾀어내어 승훈이 돌아가는길에 척살하기로 했다. 무리중 태완선,남동일의 집에 힘깨나 쓰는 장사하인이 몇몇 있어 승훈의 척살은 이들이 담당하도록 했다. 거사일에 마침내 뜻대로 하려 하였으나 황후를 제압하려던 병사들이 먼저 황궁 병사들이게 정체가 발각나 진압당하였고 편승훈의 척살을 맡은 하인들도 외모가 비슷한 다른 노인을 잘못 알아보고 살해하는 바람에 일이 엉뚱하게 번지고 말았다. 마침내 진상을 안 황후가 격노하여 기무대장 연승금으로 하여금 무리를 모두 잡아들이게 하여 마침내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노한 황후가 무리의 삼족을 멸하는 한편 선대에 공을세운 4대공신(정난공신,벽파공신,외무공신,상남공신)의 2세,3세 자손들도 비슷한 역모를 꾀할 우려가 있다하여 모두 잡아들이라 하였고 이후 그 자손들은 향후 100년동안 그 어떤 벼슬자리에도 나가는 것을 금했고 특히 무과(武科)에 응시하는 것을 금하였다.
황후의 농단이 거듭되니 이번엔 민란(民亂)이 일어났다. 창원에 사는 권영식,김진규의 무리가 난을 일으켰는데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권영식은 그 선친이 백부의 첩실과 사통하여 낳은 자손이라 했고 김진규는 태어날 때 하늘에서 ‘마땅히 천지(天地)를 요란케할 귀재(貴才)가 태어날 것이다’ 하는 소리가 세 번 한다. 권영식,김진규기 이후 삼남일대 20여 군현을 장악하니 투항하는 백성들이 잇달았고 나중엔 중인과 하급관리,무장중에도 이들을 지지하는이가 나올 정도였다. 황후가 노하여 예부터 편승훈이 거두어 키운 사병중 재목이었던 풍규명,풍상한,풍봉명 셋을 급히 장수로 발탁하여 권영식,김진규의 무리를 토벌케했다. 훗날 이들 셋을 삼풍장궁(三馮將軍)이라 불렀다. 권영식,김진규의 난은 삼풍장군에 의해 3년반에 겨우 진압될수 있었다. 대황후가 별도의 익명서를 지어내 권,김이 장악한 지역에 뿌렸으니 내용이 ‘황후께서 성품이 인자하시어 지금이라도 투항하는이는 모두 죄를 묻지 않을것이나 끝까지 저항하는 이들은 황후의 격노를 사서 멸삼족의 길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였다. 처음엔 점령지의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권영식,김진규가 삼풍장군에 밀려 형세가 불리해지니 그제서야 투항하는이들이 앞다투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편가(片家)에 대적할 세력이 없어 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세월이 흘러 장군 이준식,조관열이라는 이가 마침내 들고 일어났는데 ‘나라꼴이 더는 이 지경이 되는 것을 두고볼수 없다’며 함께 말갈기를 베어 혈맹을 맹약한뒤 거사하기로 했다. 우선 명분을 지어 말하기를 ‘북방 오랑캐들의 동향이 심상치않아 이를 토벌코자 하나이다’ 하였다. 황후가 의심하지 않고 5천의 군사를 주어 북으로 보내고자 했다. 한바탕 군사를 요란스럽게 일으켜 ‘조선민족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북방오적을 섬멸코자 하니 따르고자 하는 백성들은 모두 나서라’ 하여 북으로 가는길에 잇달아 병사가 불어나 곧 세배가 되었다. 마침내 평양인근에서 거사의 뜻을 밝히고 군대를 돌려 도성으로 향했다.
이,조의 군대가 진격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편승훈이 뒤늦게 알고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아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편씨의 네 아들은 모두 분노한 병사들에 의해 갈기갈기 몸이 찢겨져나가 형상을 알아보기는커녕 흔적조차 찾을수 없게 되었으며 마침내 황후를 천명(天命)을 받들어 폐위하였다. 그리고 성종의 아우 덕원군(德原君)의 차자(次子) 승(承)을 황위에 올리니 그가 신종(信宗)이 되었다. 대황후는 나라를 망친 요녀라고 하여 옷을 발가벗긴후 도성 한가운데 백성들 가장 많이 다니는 저자 한가운데 꽁꽁 묶어놓은뒤 지나가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돌을 던져 징벌케했다. 황후의 전횡에 격노핸 백성들이 돌이나 쇠붙이 쓰레기는 물론 심지어 오물까지 투척하니 그런 모습으로 백일을 버티다 이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이때 편씨의 나이 35세였다.
사관(史官)이 평론(評論)한다. 예부터 양(陽)의 기운이 쇠하면 종종 음(陰)이 대권을 대행(代行)하는 일이 종종 있었으니 이 또한 천지의 이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모(國母)의 성품이 유순하고 온화하여 사리에 밝으면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이 복락을 누리며 때론 외적의 침입도 격퇴할수 있었으나 국모가 덕이 부족하고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우면 권신이 판을치고 백성의 삶이 도탄에 빠져 반드시 국운이 쇠락하였도다. 편녀(片女)는 본래 천한 기녀(妓女)의 자손으로 망령되이 황후의 자리에 올라 병약한 임금을 대신하여 국정을 농단하고 죄없는 나이어린 계모를 모함하였으며 급기야 나라일을 그르쳐 패망의 길에 이르게 만들었도다. 일찍이 여명,하나,소연등의 일이 선녀(善女)의 사례라 국운을 흥하게한 음도(陰道)의 사례라 하여 옛 선현이 이미 칭송하여 기록에 남긴바 있으나 편녀는 오히려 스스로를 대황후라 칭한뒤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단조(檀朝)이래로 이런 악녀가 일찍이 없었도다. 오천년 조선백성의 일에 최악의 사례로 미욱한 사관이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그 행적을 이와같이 고하니 후세에 마땅히 경계할일로 삼을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