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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김씨 五龍' 학봉 김성일 5형제 학문연마 요람
(제자·자문: 養齋 이갑규)
부친 청계공 추모 위해 정자서 오랜 생활, 5형제 모두 퇴계제자 되어 과거시험 급제
백운정에서 바라본 반변천과 내앞마을 전경. |
백운정(白雲亭)은 퇴계 이황의 수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1538~1593)이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하던 정자였다.
또한 부친인 청계(靑溪) 김진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의탁한 곳이기도 하다.
이 백운정은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 내앞(川前) 마을 반변천(半邊川) 건너편 연화봉 자락
부암(傅巖) 위에 자리잡고 있다. 청계공의 둘째 아들 귀봉(龜峯) 김수일(1528~1583)이
1568년(선조 1년) 부친이 내 준 터전에 창건한 정자다. 백운정에서 내려다 보면
언덕 아래로 유유히 흘러가는 반변천과 주변 풍광이 눈길을 시원하게 한다.
#학봉 형제가 학문을 연마하고 부친을 추모하던 정자
한강(寒岡) 정구가 쓴 학봉의 행장에 의하면, 중앙요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부친 청계공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고향에 내려온 학봉은 정성을 다해 부친을 간호했다.
부친이 별세하자 삼년상을 마치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형 귀봉과 함께 백운정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는 부친을 잃은 슬픔이 그치지 않아 묘소가 바라보이는 정자에서
추모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라고 전한다.
백운정은 청계공의 다섯 아들이 강학한 정자이기도 하지만, 이처럼 학봉 형제들이 부친인
청계공을 추모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자의 이름도 '높은 산에 올라 흰구름 바라보며(登高山望白雲)/
어버이 그 아래 계신가 그리워 하노라(思親在其下)'라고 한데서 가져왔다.
반변천 건너 내앞마을이 바라보이는 정자에 오르면 멀리 의성김씨 큰 종택과 작은 종택이 눈에 들어온다.
북으로는 의성 김씨 가묘(家廟:사당)를 마주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선영(先瑩)이 바라보인다.
그리고 정자 마루 위에는 미수(眉 ) 허목이 90세에 쓴 전서 편액 '백운정'이 눈길을 끈다.
백운정에 걸려 있는 현판 중 귀봉이 어느 날 정자에 올라 감흥을 노래한 시다.
'고을 성 서북 낙동강 물 가(縣城西北洛江湄)/
푸른 산 언덕에 우뚝한 작은 정자 지었네(靑 開成小閣危)/
재자들은 한가한 틈에 와서 주역을 읽고(才子乘閒來讀易)/
대형은 술을 가져와 앉아 시를 읊조리네(大兄携酒坐吟詩)/
구름 거둔 먼 산골짝은 그림 같고(雲收遠壑山如畵)/
바람 멈춘 깊은 연못 물은 숫돌같이 고요하네(風定深潭水似砥)/
지난 밤 약한 물결 일어 밝은 달 흔들리는 모습이여(向夕微瀾搖朗月)/
절승지에서 신녀가 구슬을 으르고 노는 때였네(絶勝神女弄珠時).'
#6부자(父子)가 서원에 제향된 청계공 부자
청계공 조부인 망계(望溪) 김만근이 내앞으로 입향한 이래 기반을 다져오다가
청계공대에 이르러 가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청계공은 다섯 아들을 두었다.
약봉(藥峯) 김극일, 귀봉 김수일, 운암(雲巖) 김명일, 학봉 김성일, 남악(南嶽) 김복일이다.
5형제가 모두 퇴계의 제자가 되었고, 그 중 3형제(약봉, 학봉, 남악)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운암과 귀봉은 소과에 급제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흔히 이 집안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칭송하기도 하고, 다섯 형제는 의성김씨 오룡(五龍)으로 불리기도 했다.
훗날 사빈서원(泗濱書院)에서 청계공을 주벽(主壁)으로 그 아들 5형제를 제향(祭享)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6부자가 한 서원에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
퇴계 학통의 번성함도 학봉에 의해 이루어졌다.
학봉의 학통은 경당(敬堂) 장흥효→석계(石溪) 이시명→갈암(葛菴) 이현일→
밀암(密菴) 이재→대산(大山) 이상정 등으로 전해 내려갔다.
퇴계는 일찍이 학봉을 "행실이 훌륭하고 학문이 정밀하니 나의 눈에 그를 견줄 이를 보지 못했노라"고 평했다.
또 퇴계가 학봉에게 내린 병명(屛銘)에 '박문(博文)과 약례(約禮) 양면으로 도달하였고(博約兩至),
연원의 정맥이로다(淵源正脈)'라고 하였다. 선조실록에는 서애(西厓) 유성룡, 월천(月川) 조목,
학봉 김성일을 퇴계 문하의 삼영수(三領袖)로 꼽고 있다.
학봉은 훗날(1587년) 낙동강변 청성산(안동시 풍산읍)에 석문정(石門亭)을 지어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자녀 교육에 각별했던 청계공
학봉의 부친 청계공은 자녀들의 학문 장려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다.
의성 김씨 집안에는 시조인 김석(金錫)이 아버지 경순왕으로부터 받은 고적(古笛)과
문장검(文章劍) 등 보물이 대대로 전해 내려 왔다. 청계공은 이 보물들을 장학기금 용도인
문장답(文章畓)과 함께 가장 학문을 열심히 닦는 자녀에게 전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이 모두가 둘째 아들 귀봉의 집에 전해 왔으나, 보물들은 6·25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유실되었다 한다.
고적과 문장검은 귀봉의 증손자인 경와(敬窩)가 쓰던 연하침(煙霞枕) 및 매죽연(梅竹硯)과 함께
의성김씨 집안의 4보(四寶)로 받들어져 왔다. 연하침은 경와공이 금강산 만폭동에 들어갔다가
구해 온 것으로, 화석이 된 향나무 목침이다. 습기가 차면 향기와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는 목침으로,
백운정에서 줄곧 사용해 왔다고 한다.
청계공은 일찍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했으나 대과를 포기하고 오직 부모 봉양과 자손 교육을 통해
영광을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 결실로 6부자가 사림(士林)의 존숭을 받게 된 것이다.
전하는 일화에는 어느 도사가 청계공에게 살아서 참판(生參判)보다는 죽어
판서로 증직(贈判書)됨이 나으리라 조언했다 한다. 훗날 넷째 아들 학봉의 벼슬로 인해
청계공은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안동 서후면 운장각
학봉 편지·안경 등 다양한 유물 소장, 후손이 우연히 구입한 희귀 친필 詩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학봉 선생 종택에 가면 학봉의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는 운장각(雲章閣)이 있다.
학봉의 14세 종손 김시인씨(90)를 찾아 백운정과 석문정 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운장각에 들어가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유물이 지금까지 잘 전해져 올 수 있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학봉이 아내에게 보낸 한글편지 등 각종 문적은 물론, 학봉의 가죽신과 패도, 갓끈들,
안경과 안경집(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임) 등 다양한 유물이 보관, 전시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중 보물로 지정된 유물만 해도 73종 503점이나 된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유물로는
질적이나 양적으로 최고일 듯하다.
유물 중 수년 전 학봉 후손이 서울 인사동 골동상에서 우연히 찾아내 구해온 학봉 친필시를 소개한다.
'나무마다 단풍빛 곳곳마다 새로운데(樹樹楓光處處新)/
만나는 곳 모두 생각 속에 친근하네(逢場盡是意中親)/
한 단지 술 실은 조각배 타고 떠나니(一尊載得扁舟去)/
어렴풋한 강 하늘 그림 속 몸이로세(漂渺江天畵裏身).'
사순(士純)은 학봉의 자(字)다.
학봉 김성일 형제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백운정. |
미수 허목이 90세에 쓴 백운정 현판. |
학봉 문집에는 없는 학봉 친필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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