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무대 누비는 지휘자 김은선]
베를린·뮌헨 국립오페라 등 세계 정상급 무대 요청 잇따라
바렌보임, 페트렌코 가르침 받아
단원들과 소통하려 5개국어 독학 "내가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
지휘자 김은선(37)의 지난 1년은 여행용 트렁크 가방 세 개로 요약된다. 지난해 9월 이후 집에 들어간 적 없을 만큼 바쁜 일정 탓이다. 사계절 옷과 악보를 싸들고 유럽 곳곳을 돌며 유명 연주회와 오페라를 지휘했다. "오는 9월부터 2019년 초까지 지휘 스케줄도 꽉 찼다"고 했다.
김은선의 성장은 정명훈의 30대 시절 경력을 넘어섰다.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 지휘자가 극히 드물어 더욱 눈부시다. 그의 지휘는 쉬우면서도 지적이고 레퍼토리가 폭넓기로 정평 났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에 이어 런던의 대표 오페라극장인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 이탈리아 마체라타 오페라 페스티벌까지 그에게 무대를 내줬다. 오는 11월부터 석 달간은 세계 정상급 오페라단인 독일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의 '리골레토'와 뮌헨 바이에른 국립오페라의 '헨젤과 그레텔', 베를린 국립오페라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를 모두 지휘한다. 드레스덴은 두 번째, 베를린 무대엔 다섯 번째다. 운이 좋아 한 번 지휘할 수는 있어도 거듭 연주 요청을 받는 건 어렵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인정할 만큼 탄탄한 실력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7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김은선은 "뭉친 근육을 풀려고 수기치료를 받았다"며 웃었다. "등과 어깨가 아파요. 직업병이죠." 연세대 작곡과를 거쳐 같은 대학원 지휘과에서 최승한 교수를 사사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에 재학 중이던 2008년 5월 스페인 지휘자 헤수스 로페즈 코보스가 주최하는 오페라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올해로 데뷔 10년. 남자들 입김 센 지휘계에서 "키 작은 동양인 여자애"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김은선은 "유럽 어느 악단을 가든 그 나라 말로 단원들과 대화하려고 영어·독일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를 터득했다"고 했다. 2008년 마드리드 극장 부지휘자로 바닥부터 경험을 쌓을 때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했던 김은선은 6개월간 하루 네 시간 자며 말을 배웠다. 낭시 오케스트라 시절엔 1년 새 "미친 듯이" 프랑스어를 익혀 그녀의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했던 프랑스 단원들을 놀라게 했다.
김은선은 "실력만이 편견을 깬다"고 했다. "학자가 논문 읽듯 악보를 탐구해요. 작곡가의 일생, 시대상과 철학도 공부해서 저만의 관점이 생기면 관련 음반 30~40개를 싹 찾아 듣지요." 시간 날 때마다 다른 지휘자의 연주를 보러 다니면서 "저 사람의 좋은 점을 나는 갖고 있나 매번 반성한다"고도 했다. 2010년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끄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에서 본 오디션 덕분이다. "바렌보임이 충고했죠. 너처럼 재능은 뛰어나지만 경험이 없다면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많이 봐야 한다고." 매일같이 바렌보임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처럼 할 수 없는 자신에 절망하자 바렌보임이 또 웃으며 말했다. "나는 곧 일흔이야. 나도 네 나이 땐 몰랐어."
베를린필 차기 수석지휘자인 키릴 페트렌코도 큰 영감을 줬다. "2011년 리옹에서 페트렌코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할 때 제가 보조 지휘를 두 달간 했어요. 그는 쉬지 않고 공부했고, 준비가 덜 된 가수를 따로 불러 연습시키면서도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는 성인군자였죠. 페트렌코를 만나
면서 겸손함으로 매일 새로운 레퍼토리를 연구하자고 다짐했지요."
김은선은 "평론가 비평을 챙겨보지 않는다"고 했다. 유명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싶은 욕심도 없단다. "베를린필이든 이름 없는 시골 악단이든 제가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니까요. 어쩌면 욕심내지 않고, 다른 사람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서 오히려 남들보다 빨리 가는 게 아닌가도 싶어요(웃음)."
- [인물정보]
- 영국 국립오페라단(ENO) 지휘자 김은선
-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21/2017072100146.html
100자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