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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서문
장 자크 루소
순서도 없고 또 체계도 없이 생각하고 고찰하여 엮은 이 책은, 한 선량한 어머니를 위해서 쓰여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저 몇 페이지에 불과한 ‘수상록’ 정도로 계획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 주제에 이끌려 ‘수상록’이 하나의 저서가 되고 말았다. 내용에 비해 부피가 너무 방대하다고 생각되지만, 소재로 볼 때에는 분량이 너무 적다. 이 책을 출판하기까지 나는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리고 글을 써나가면서도 나는 한 권의 책을 완성함에 있어 조금씩의 메모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좀 더 잘 쓰려든 헛된 노력 끝에, 일반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어서 쓰여진 그대로 이 책을 출판해야겠다고 결정했다. 설령 내 의견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올바른 생각만 품게 된다면 내가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칭찬해 줄 사람도 없고 변호해 줄 사람도 없이, 또 사람들이 이 책에 관해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은둔해 지내는 나로서는 책을 ‘세상’에 내놓더라도, 잘못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잘못을 검토해 보지도 않고 받아들이지 않을 까 하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나는 훌륭한 교육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긴 말을 늘어놓지는 않겠다. 그리고 현재 실시되고 있는 교육에 잘못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는 일에만 매달리지도 않겠다. 이런 일들은 이미 나보다 먼저 여러 사람이 해왔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나가 알고 있는 사실로써 한 권의 책을 채우고 싶지는 않다. 단지 나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이미 있어 온 교육에 대해 다른 누구보다 나은 교육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비난만 해왔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현대의 ‘문학’과 지식은 건설보다는 파괴로 기울어져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편승하여 비난만을 일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는 책이 수없이 많은데도, 모든 유익한 것 중에서도 우선적이어야 할 인격형성 기술은 아직까지도 간과되고 있다. 내가 다루고 있는 이 주제는 로크의 {아동교육론}이 나온 후에도 언제나 새로운 문제로 부각되어 왔지만, 내 책이 나온 후에도 여전히 그것이 새로운 주제로 남아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크게 걱정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린 시절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가질수록 더욱 방황하게 된다. 더욱이 현명한 사람들도 어린이들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어른들이 알아야 할 것에만 마음을 쏟는다. 그들은 늘 어른이 되기 전의 어린이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여기에 적힌 나의 모든 방법이 공상적이고 그릇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 연구는 바로 위와 같은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 이 때문에 나는 전혀 엉뚱한 데에 초점을 맞췄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다루어야 할 주제에 관해서만은 옳게 보았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제자들이 더 잘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아무래도 정확하게 그들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이 책이 전혀 쓸모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논하는 이른바 핵심적이고 체계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 ‘자연에 따르라’는 이 점이 바로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할 것이다. 또 이 때문에 사람들은 틀림없이 나를 공박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공박하는 사람들이 옳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 책을 읽다보면 교육론이라기 보다는 교육에 관한 어느 한 환상가의 몽상을 읽는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쓰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아닌 바로 순수한 나 자신만의 의견인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오래 전부터 비난받아 오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관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동조해야만 하는가?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더 현명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어도 그 견해를 의심해 보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다. 내가 때로 단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독자’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각 그대로를 말하는 것 뿐이다. 내가 전혀의심하지 않는 것을 어찌 질문의 형태로 내놓을 수 있겠는가? 나는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정확하게 말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내 견해를 자유로이 말한다고 해도 나는 거기에 권위를 내세우려 하지는 않으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따져보고 비판할 수 있도록 언제나 나의 견해에 여러 가지 논거를 달아 놓겠다. 그러나 완강하게 내 생각을 주장할 생각은 없지만, 나의 생각을 제시하는 데 있어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문제들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좋은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진실인가 오류인가를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고, 또 인류의 행복이나 불행을 좌우하는 그런 문제들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실현할 수 있는 일을 제안하라는 말을 자주한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지금 행하고 있는 일을 실현하도록 제안하든가, 아니면 적어도 현존하는 악과 결합된 선을 제안하라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겠는가. 이러한 말은 어떤 경우의 문제에 있어서는 나의 계획들보다 한층 더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합 속에서는 선은 항상 뒤처지고 악이 앞서기 때문이다. 선한 방법을 어중간히 취하기보다는 차라리 이미 실행되어 오는 방법에 전적으로 따르면 사람들도 그만큼 모순이 적게 될 것이다. 인간이란 상반되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부모들이여, 실행할 수 있는 일이란 여러분이 하고 싶어하는 일이다. 여러분의 의지에 대해서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단 말인가?
대개 어떠한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두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는 그 계획이 절대적으로 선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계획의 실천이 용이해야 한다는 점이다. 첫 번째 문제에는 계획이 그 자체로서 승인될 수 있어야 하고, 실행할 수 있으려면 사물의 본성으로 보아 그것이 선한 일이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경우에는 제안된 교육법이 인간에게 적합하고 인간의 마음에 맞으면 그것으로 족할 것이다.
두 번째로 고려할 것은 어떤 상황에 따라 주어진 여러 관계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는, 곧 사물에 부수된 것으로서 필연적인 것은 아니며, 무한히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위스에서는 어떤 형태의 교육을 무난히 실행할 수 있는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럴 수가 없고, 또 어떠한 교육은 ‘평민계급’에서는 실행할 수 있는 반면, 다른 교육은 ‘귀족층’에서라야 가능하게 된다. 그 실천이 어느 정도로 용이한가 하는 점은 갖가지 사정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여러 경우에 제각기 특별히 적용해 보지 않고서는 달리 결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각각의 적용은 나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계획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 혹시 그럴 사람이 있어 뜻을 둔다면 각자의 ‘나라’나 혹은 ‘계급’에 일일이 방법을 적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다만 사람들이 태어난 곳이면 어디서나 내가 제안하는 대로 교육시킬 수 있으면 족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들 자신과 남들을 위해 보다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만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내 잘못이다. 하지만 내가 약속을 이행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나에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주장 이상의 것은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고,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계몽주의 사상의 대철학자였다고 할 수가 있다. 그가 태어나자 마자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그리고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때에는 그의 아버지마저도 집을 나가 버렸기 때문에, 그는 외삼촌의 집에 머무르면서 어느 동판조각가의 조수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열 여섯 살 때에는 그의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이탈리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는 등, 그의 청소년 시절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던 생애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에밀, 그리고 참회록과 고독한 산보자의 꿈은 아직도 우리 인간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인내로써 역경을 견뎌내는 기술”을 터득했으며, “구속된 생활보다는 빈곤”을 더 사랑했다. 그의 스승은 일찍이 추방을 당하고 박해를 받았던 보좌 신부였으며, 그는 그 스승 밑에서 참다운 자기 철학과 그 행복론을 터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당신(보좌신부)이 행복하다구요? 가난하고 추방당하고 박해받은 당신이 행복하다구요?”라는, 보좌신부에 대한 놀라움과 그 존경 속에는 바로 그의 철학과 행복론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적인 유일사상에서 벗어나 범신론에 빠져 들었고, 그는 스위스로, 영국으로, 다시 프랑스로 비참한 망명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믿음의 의무는 신념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신앙이 없는 철학자는 옳지 못하다. 그것은 그가 연마한 이성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는 자신이 배척하는 진리들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믿는 아이들은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가? 그는 남이 시켜서 하는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므로, 만일 여러분이 그에게 의미가 전혀 다른 말을 해도 그는 역시 그 말도 받아들일 것이다. 아이들이나 많은 어른들의 신앙은 지리적 문제이다. 만일 기독교도와 회교도가 서로 반대되는 나라에 있었다면 그 나라의 종교에 따랐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비슷한 처지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한 명은 천국으로, 다른 한 명은 지옥으로 갈 수 있을까? 한 아이가 자기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할 때, 그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어떤 신이 있다고 그에게 말해준 사람이다. ----에밀, 홍신문화사, 264면
장 자크 루소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종교 교육에도 반대를 했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기독교의 교리도 배척을 했다. 왜냐하면 신앙의 문제는 지리적 문제이며, 또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신을 불완전한 인간이 창출해낸 가상의 존재로 보았던 것이며, 모든 신앙은 그 사람이 타고난 환경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어쨌든 루소는 사회적 천민이었고, 기독교적인 유일사상에 반대하는 신성모독자였다. 그의 사회계약론과 에밀이 불태워지고, 그가 떠돌이-- 망명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는 지독한 회의주의와 염세주의에 빠져서 신음을 한 적도 있었지만,
즉 사회계약은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조건하에 놓여져서, 동일한 권리를 향수할 수 있는 평등성을 각 공민 간에 세워준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계약의 성질상, 주권자의 모든 행위, 즉 모든 일반의지의 정당한 행위는 모든 공민으로 하여금 동등하게 의무와 이익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단체로서의 국민을 인정할 따름이고,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각 개인 간에 전혀 차별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대체 정확히 말해서, 주권의 행위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자優者와 열자劣者 간의 협약행위를 말함이 아니요, 단체와 그 각 성원간의 협약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협약은 사회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고로 합법적이요, 만인에 공통함으로 공평하며, 일반의 복지를 도모하는 외에 다른 목적이 없으므로 유익한 것이며, 공공의 힘과 지상권至上權에 의해서 보증을 받고 있기 때문에 확고부동한 것이다. 국민이 협약만을 복종하고 있는 한, 그들은 아무에게도 복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제 자신의 의사만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권자의 권리의 범위와 공민의 권리의 그것을 묻는 것은 곧 공민이 상호간에, 즉 개인은 전체에 대해서, 전체는 개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로까지 의무를 질 수가 있느냐를 물음과 마찬가지 질문이 되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휘문출판사, 1976)에서
라는 사회계약론이나, 또 그리고,
이와 같은 새로운 사색의 방법을 깨달은 것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나의 모든 불행을 충분히 보상해줄 수 있을 만큼 아주 풍요로운 것이었다. 제 자신 속에 들어앉아 버리는 습관은, 마침내 나로 하여금 지난날 내가 겪은 불행에 대한 감정과 기억까지도 잊게 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란 자기 자신 속에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행복하고 싶어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4, 5년 전부터 나는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에게서 언제나 느낄 수 있는 내면의 환희를 명상 속에서 맛보아 왔다. 이처럼 내가 혼자 산책하면서 그 황홀을, 그 도취의 기쁨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나의 박해자들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내 속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발견할 수도,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고독한 산보자의 꿈, 홍신문화사, 19면
모든 선善 가운데서 가장 귀중한 것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진리이다. 이러한 진실이 없는 인간은 장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진리는 이성의 눈이다. 바로 이것에 의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생존하고, 무엇을 하고, 어떤 방법으로 진리에 이르게 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개별적이고 특수한 진리는 때로는 선이 아닌 악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사람이 꼭 알아두어야 할 일, 또한 그것을 아는 것이 사람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일이란 아마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것들은 그 사람에게 속하는 선이니까 그것이 발견될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선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모든 도둑질 중에서도 가장 부정한 도둑질을 하지 않는 한은 약탈할 수 없는 선인 것이다. 진실이란 만인의 공유재산이기에 타인에게 주었다고 해서 자기가 잃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앞의 책, 61면
라는, 고독한 산보자의 꿈은 그의 낙천주의를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장 자크 루소의 말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에게는 개별 의지, 단체 의지, 그리고 일반 의지가 있으며, 개별 의지는 개인의 이익을, 단체 의지는 단체의 이익을, 일반 의지는 전체의 이익을 지향한다고 한다. 문화적 선진국일수록 일반 의지가 앞서고, 문화적 후진국일수록 개별 의지가 앞선다. “자연의 상태에서는 모두가 자기 자신의 행위의 심판자이기 때문에, 그 자연의 상태로부터 결과되는”(존 로크, 시민정부론) 싸움을 방지하기 위하여 인간은 공동체 사회를 결성하고, 자연의 상태에서 계약의 상태로 밟아 올라가게 된다. 주권자는 전체로서의 국민이며, 나는 그 국민의 일원으로서 그만큼의 주권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다같이 평등한 사람이며,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권리를 다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만인의 평등과 행복은 사회계약론자로서의 루소의 행복론이며, 고독한 산보자의 꿈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루소의 행복론이다. 그는 그처럼 떠돌이--망명객의 생활을 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성의 눈’인 진리 탐구에 여념이 없고, 박해받은 자의 내면의 환희와 그 기쁨을 노래한다. 어떻게 만인의 평등과 그 행복을 구상하고 있는 자가 낙천주의자가 아닐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자기 자신의 적마저도 자기 자신의 행복의 결과”라고 끌어안고 있는 자가 낙천주의자가 아닐 수가 있겠는가? 장 자크 루소는 회의주의자도, 염세주의자도 아니며, 또한 그는 자연주의자도 아니다. 루소의 가장 뛰어난 사상은 그의 사회계약론과 에밀에 들어 있고, 그 저서들 속에는 우리 인간들의 이상적인 국가와 그 행복론이 담겨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후예이며, 그의 ‘에밀’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그 후예로 거느리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장 자크 루소는 어느 누구보다도 착하고 선량한 마음씨로 그의 도덕철학을 무장시켰지만, 그 도덕철학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구속한다는 점에서 몹시도 괴로워했던 인물이다. 타인에 대한 끊임없는 배려와 친절은 만인평등주의에 입각한 사회계약론자로서의 너무나도 당연한 처세술이었지만, 에밀을 출간한 이후, 그가 주변인으로 밀려나서 그처럼 가혹하게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개인으로서의 독창성과 그 자유를 극대화시킨 결과이다. 사회계약론자가 그 사회성을 잃어버리고 끊임없이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부적격자라고 하니, 이보다 더한 역설과 그 비극적인 참상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장 자크 루소의 천재성은 인정을 하지만, 때때로 그의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도덕성은 도저히 인정해줄 수가 없다. 그는 “나는 악을 행할 때는 노예가 되며 뉘우칠 때는 자유인이 된다”라고 값싼 도덕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으며, 이런 점에 있어서 그의 제자 에밀은 도덕적인 기계 인간이며,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 즉 낙천주의자는 신성모독자이며, 그가 악을 행할 때에는 자유인이 되며, 뉘우칠 때는 노예가 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인 것이다. 아무튼 나는 사회계약론자로서의 루소를, 고독한 산보자로서의 루소를, 범신론자로서의 루소를, 그리고 신성모독자로서의 루소를 사랑하고 있으며, 나는 그를 나의 낙천주의 사상으로 더욱 더 크게 끌어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반경환, {행복의 깊이} 제4권에서
* 이 글은 권응호 역의 {에밀}(홍신문화사, 1997년)의 서문이며, 독자 여러분들은 꼭 이 책을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