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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019.11.27. 고령 고분 숲과문화 산행일지- 지산
이번에는 경상북도 문화과에서 지원해주는 ‘경상북도 조금 특별한 여행‘을 하기로 하고 30명이 되어야 출발한다고 하여 내 주변에 있는 몇 분(이동민, 이재천, 이상번, 반재홍 님)과 같이 참석하였다. 그랜드호텔 앞에서 8시 30분에 차를 타고 상인동 롯데백화점 앞에서 한 그룹이 승차하고 고령 대가야문화체험관으로 향했다. 10시가 다 된 시간에 만든 지 1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아직 나무 냄새도 다 빠지지 않은 새로 지은 느낌이 풀풀 나는 것 같은 대가야 생활촌에 들어갔다. 우선 버스에 고령군 문화해설사가 같이 타고 고령의 특징과 가야의 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곳 생활촌에서도 나이가 지긋한 아줌마 문화해설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는 날씨가 좋았으나 오늘은 회색구름이 하늘에 덮여있고 기온은 내려가 쌀쌀하여서 좀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 날씨였다. 그러나 참석한 분들의 마음은 소풍가는 초등학생들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고령군은 대가야 문화에 대한 새로운 기획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대가야 생활촌은 아주 넓은 면적에 옛 대가야 생활촌을 만들어 놓았다. 가야산 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가 가야산 위에서 천신 이비가지(夷毗訶之)에 감응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 뇌질주일(惱窒朱日)은 대가야를 만들고 작은 아들 뇌질청예(惱窒靑裔)는 금관가야를 만들었다. 대가야는 562년 신라에 의해 망하기까지 많은 문화가 생성되어 섬진강변까지 번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700여개의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본강점기시기에 많은 도굴이 이루어져 가야 금관 역시 2개나 도굴되어 일본에 팔려간 것을 하나는 삼성문화재단에서 다시 사들여 서울 호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제대로 발굴된 것은 1914년 일본 고고학자들에 의해 시행되었고 해방이 된 후 1974년 경북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정상적으로 발굴한 것이 제 44호 고분이라고 한다. 현재 그 중 몇 개만이 발굴되었으며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했고 현재 제44고분 발굴결과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일반인들에 개방하고 있다. 이러한 가이드의 이야길 들으면서 9시 40분쯤 고령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려 대가야 생활촌 답사를 시작하였다. 작년에 조성이 된 체험 시설이라고 한다.
11시까지 해설사를 따라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특별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없었다. 새롭게 지어 놓은 대가야 시대의 생활촌은 초가로 번듯하게 지어져있어 마치 조선시대 마을을 둘러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이용요금표가 게시되어 있는데 입장료 개인 5,000원, 철의 원정대 15,000원으로 상당히 높은 가격이 붙여져 있다. 그리고 목선승선권, VR체험권, 전기차 이용권 등의 요금을 따로 받아 개인이 이용하려면 26,000원의 경비가 필요했다. 입구에 들어서 인트로 영상관을 지나 인줄마을(대가야의 건국신화와 생활상을 알아 보는 곳)에서 정견모주와 두 아들의 동상을 보았다. 철기문화를 자랑하는 불묏골은 대가야 철기문화를 체험하는 곳으로 만들어 놓았다. 골안마을에 들어서면 대가야토기와 교역물품에 대해 전시해 놓았다. 중국, 일본, 류큐제도와도 해상교역을 했다고 적혀있다. ‘상가라도‘못에서는 배를 타는 체험을 하는 모양인데 오늘은 관광객이 특별히 우리뿐이어서 운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기정, 한기촌를 지나 대가야 고분 전시장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대가야 무덤에 순장한 사람들이 같이 묻혀있는 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순장은 신라시대에 금지되었으며 무덤 안에 시신의 모양을 보면 약을 먹은 다음 순장되었다고 했다. 고대 여러 나라에 순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가야 순장은 10여명으로 규모가 축소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하지오 승선장으로 가서 배안을 둘러보고 11시가 되기 전에 모두들 밖으로 나왔다. 돌아본 가야 문화시설이 별로라는 얼굴 표정들이다. 대가야촌 입장 한기정에 올라 현판을 바라보며 오후부터 갠다는 날씨가 여전히 옅은 구름에 덮혀 걷히지 않고 있어 여전히 쌀쌀한 날씨다. 자동차에 올라 고령전통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통시장은 5일장으로 오늘은 장날이 아니라고 했다. 11시인데 문을 열어 놓은 가게가 얼마 되지 않았다. 쇠로 만든 솥을 파는 곳에 들어가 보니 언젠가 유도회 사람들과 중국 태산에 가서 만난 사람의 언니가 운영하고 있는 곳이었다. 자매가 얼굴이 똑같아 금방 알아볼 수가 있었다. 시장 안에는 커피집이 있었는데 ‘바리스터 커피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커피 강의도 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이런 시골 시장에까지 커피상들이 자리를 잡고 있음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커피 소비층이 얼마나 깊게 뿌리내려져 있는가에 놀랍기도 했다. 시장입구로 돌아 나와 11시 20분부터 온누리 국악공연단이 우리를 위한 공연을 한다고 했다. 보통 토․일요일은 관광객들이 많아 정기적으로 공연을 하지만 오늘은 우리밖에 관중이 없어 특별히 관광버스회사에서 주문해서 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단원이 드럼, 전자오르간, 서도민요 가수 이렇게 단 3명이었다. 드럼과 전자오르간이 연주를 한곡 끝내고 민요가수가 노래를 하나 부른 다음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을 열창하여 우리 모두 둥글게 원을 그리면서 서너 바퀴 돌고 나니 추위도 가시고 기분도 썩 좋아졌다. 다들 주머니 안에 쌓아놓은 즐거운 마음이 노래 소리에 맞추어 솔솔 밖으로 나온 듯했다. 그리고 앙콜을 청해 한두 곡을 더 듣고 길 건너에 있는 ‘복동이 숯불갈비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불고기에 막걸리 한잔씩 곁들이며 맛있게 점심을 마쳤다. 같이 참가한 이동민 박사의 구수한 이야기가 이어져서 더욱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온누리국악단 연주회 이후 단체사진
오후에는 대가야 박물관으로 향해 제 44호 고분을 실제 모양대로 만들어 놓은 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순장에 대한 이야기와 가야고분 발굴에 대한 이야길 심규태 박물관 문화해설사에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무덤을 그대로 만들어 놓고 지붕을 얹어서 무덤 안처럼 꾸며 놓았다. 원래 44호 고분은 산기슭 길을 따라 십오륙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이곳에 설치해 놓았다고 했다. 신라의 고분은 대부분이 돌을 쌓아 만들고 윗부분만 흙으로 덮은 것인데 대가야 고분은 대부분이 흙으로 덮어 만든 것이라고 했다. 대가야 초기 고분은 무덤 안쪽에 나무로 보호대를 만들어 그 보호대가 내려앉으면 봉분이 무너져 무덤의 흔적이 사라져 땅속에 묻힌 무덤이 수없이 많다고 했다. 후기에는 돌로 지지대를 만들어 후기 무덤은 그대로 봉분이 남아있게 되어 보존이 양호하다고 한다. 박물관을 나와 44호 고분에 올라갔다. 다들 산줄기의 비탈길을 따라 능선을 올라 44호 고분 앞에 섰다. 해설사 이야기는 이 고분을 한 바퀴 돌면서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한 바퀴 돌고 그 앞에서 기념단체사진을 찍었다.
44호 고분 앞에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심규태 문화해설사 제44호 고분 앞에서 제 44호 앞에 있는 고분 옆에 심어진 리기테다 소나무
고분 옆에 4, 50년은 되어 보이는 리기테다 소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향해 서있다. 이 나무가 생겨난 건 1960년대이고 여기에 식재된 것이 1970, 80년대인데 대가야의 고분 안에 세워두기에는 맞지 않는 나무 같았다. 주변에 소나무들도 많이 있는데 소나무가 서있는 것이 역사성에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여기 서있으니 고령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바로 건너 산 능선에 가야대학의 건물들이 보이는데 이제 폐교가 되어 김해로 다 이사 가고 김해가야 대학에 설립된 골프학과 연습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운동장 주변에 9홀 정도 코-스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고령군민들은 가야대학 설립자에게 유감이 많다고 했다. 학교를 설립한다고 하여 모든 특혜를 제공했는데 언젠가 김해로 옮겨 가고 이곳은 폐허가 되고 주변 원룸가는 폐가가 되었다고 했다. 학교 설립자도 점점 줄어드는 입학생수를 감안하면 교육이 지속가능할 수 없는 형편으로 고민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역주민들과 소통을 하면서 서로 상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리가 되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제1호 고분까지 갔다가 오자는 심해설사의 말에 따라 산8부 능선쯤에 있는 1호 고분까지 가기로 했다. 참가인원의 절반 정도가 같이 따라 오지 못하고 도중에서 하차하고 반쯤이 도착하여 1호 고분 앞에서 인증샷을 남겼다. 구름이 낀 날씨였으나 공기는 상쾌하고 주변 경관은 평화로워 보였다.
제1호 고분 앞에서
산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코스인 김종직 종가가 있는 개실 마을로 향했다. 지금 종 가를 지키며 살고 있는 분이 점필재의 17대 손이라고 했다. 김종직이 부관침시를 당하고 그 후손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이곳에서도 김종직 종가 담당 문화 해설사 아주머니가 우리가 방문한다는 연락을 받고 나와 설명을 맛깔스럽게 해주었다.
종택 옆에는 박물관이 있고 박물관 안에는 김종직의 교지와 그 유명한 ‘조의제문’과 과거공부 했다는 대나무 쪽에 쓴 ‘강독죽통’, 임금이 내려준 ‘옥벼루’, ‘필재당 후일기’, 조정에 들어갈 때 사용한 ‘상아홀’, ‘유리주병’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김종직은 밀양에서 태어나 밀양에도 박물관이 있고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함양에도 기념관이 설립 중이라고 했다.
<점필재 종택>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에는 선산(일선) 김씨들이 모여 사는 한옥마을 집성촌이 있다. 500여 년 전 무오사화 때 화를 면한 김종직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부터 지금까지 18대째 종가가 대를 이어오고 있다. 현재 종택 뒤쪽에 사당이 있으며 2011년 교지 등 고문서 79점이 보물 제1725호로 지정되었다. 점필재 유물과 유품의 일부는 대가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종택 앞에서 바라본 蝶舞峰(보통 문필봉이라고 부르는데 봉우리 이름이 특이하다) 종택으로 들어온 회원들 종가 사랑채 ‘문충세가’의 현판이 선명하다. 筆翁玉友(임금에게서 하사받은 옥벼루)
4시 20분이 되어 모든 일정을 마치고 대구로 돌아와 상인롯데백화점 앞에서 대부분이 내리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재미있는 하루를 보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을 잘 세워 차질 없이 진행시켜준 주경숙 반장님과 좋은 사진을 많이 찍어준 주동일 선생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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