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위 사진은 그녀가 2009년 UCLA에서 박사학위 받을 때인 듯.
1989년 당시 그녀는 만으로 36살.
30대 중반의 단 열흘이 그녀의 나머지 인생을 결정한 것이다.
수배된 후 6개월 동안 숨어다니다가 1990년 초에 미국으로 갔다.
2009년 어느 인터뷰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悠悠二十年.我要回家"
ㅆㅂ...그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데.
1989년 6월 12일 공안부가 북경시 공안국을 통해 전국에 내린 지명수배령은 다음과 같다:
王超華,女,三十七歲,中國社會科學院研究生,身高一百六十三公分左右,較瘦,臉型較長,臉色黑黃,三角眼,短髮。
그녀에 대한 소개글을 복사해둔다
소스는 여기
http://www.64memo.com/b5/14646.htm
王超華是八九學運骨幹中年齡最大的學生,八九學運前已結婚並有一個五歲的兒子。她曾是“老三屆”最後一批中學生,下過鄉,做過工,當過紅衛兵並在文革中批鬥過自己的父親(王瑤,北京大學中文系知名教授,六四後去世),多年後還為此深切地自責。王超華在大學的專業是建築設計,後轉行在《光明日報》做記者,辦公室與戴晴臨近,87年考入中國社會科學院文學所。
王超華因為年齡和經歷,是八九年最具理性的學運骨幹,學運初由北大籌委會秘書長柴玲引薦列席北大會議,隨後加入北高聯逐漸成為高聯的核心人物,4月29日因不滿吾爾開希和王丹“不做實事”與搶見媒體的虛浮作風,到北大籌委會要求改派封從德出任北大駐高聯常委取代王丹的職務,次日推動高聯改選,選下吾爾開希,由封從德任主席,並批准吾爾開希和王丹留任「掛名常委」的請求。但王超華和高聯組織當時並未意識到吾爾開希和王丹已在媒體樹立了北高聯負責人和整個運動領導人的形像,許多二人因擔心遭中共暗算而躲藏起來並不參加的會議決議卻是二人自行透過媒體對外發佈,造成高聯組織的嚴重困擾,結果是個人凌架於組織之上,為此最大的後果是五月中高聯未能阻止二人與其他一些同學不顧高聯反對絕食的多次決議而擅自發動的“個人絕食”,王超華曾在高聯會議上嚴厲批評二人,並在絕食後與其他高聯常委將二人解職。因為反對絕食,她與柴玲也發生嚴重衝突,柴玲認為高聯只是協調組織,無權發號施令。至此王超華和高聯阻止絕食的努力失敗。
絕食後王超華透過戴晴邀請十二位知名學者和作家到廣場勸說學生撤離,但因戴晴背著學者與中共做暗盤交易拋開了學者們商定的“三點要求”,絕食學生沒有理睬戴晴的荒唐建議(只要李鵬來說一聲同學們好就撤),當晚王超華在廣場廣播站發表演說,聲明“高聯與絕食同學的基本要求是一致的,我們的基本態度也是一致的:我們一定要堅持下去!堅持到最後勝利!”至此,高聯完全改變策略進駐廣場,很快取得主控權,但這時高聯內部亦進一步分裂(主要是王超華和鄭旭光分別為核心的幾套人馬各自為政,但以王超華的影響力最大),加之吾爾開希和王丹繼續以“高聯主席和負責人”的形像誤導外界,不時發佈與高聯政策相左的指令,導致高聯在廣場學生中的威信急劇下降,在戒嚴第三天被廣場學生要求離開廣場回校整頓,次日王丹與王軍濤﹑陳子明等“社經所”的“黑手”組建“首度各界聯席會議”,王軍濤﹑王丹與高聯創始人劉剛等人專程到北大要求王超華和北高聯不要再回廣場,以便次日正式成立“廣場指揮部”,至此,王超華和北高聯對學運的指揮權完全喪失。
六四後遭中共通緝,王超華在國內躲藏近一年,最終抵達美國,隨即加入“民主中國陣線”,並參與《新聞自由導報》編輯工作,後曾任一段時間的主編,但因與劉賓雁等人意見相左和導報發行量下降,不久就辭職,入讀加州大學洛杉磯分校中國現代文學專業,並在該校教中文。王超華出國後一直致力於回顧和整理八九學運史實,將其在國內躲藏時記錄的回憶陸續發表,參加1991年巴黎“八九學運歷史回顧與反思”會議,參與美國留學生“華夏文摘”中的六四史料整理等工作,為八九學運史料的整理作了巨大的奉獻。
첫댓글 왕차오화가 이렇게 생겼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2006년에 런던가서 헌책방에서 처음 산 책이 왕차오화가 쓴 One China, Many Paths였는데, 그동안 왕차오화가 남자인줄 알았습니다. ^^ 여러모로 흥미로운 사람인 거 같습니다.
徐钺,诗人,酒徒。
1983年生于中国海滨城市青岛,2001年考入北京大学计算机软件系,两年后转中文系学习。现为北京大学中文系现代文学专业博士候选人,方向为鲁迅研究及现代主义诗学研究。
患抑郁症至今逾十年,其间开始写作诗歌、小说、随笔及评论,2008年获“未名诗歌奖”,2010年出版长篇诗体小说《牧夜手记》。另从事英文文学著作的中文翻译,曾翻译的重要作品包括Eugene O’Neill(1888-1953)的戏剧Long Day's Journey into Night,Hart Crane(1899-1932)的诗集White Buildings和Key West等。
http://site.douban.com/112688/
왕차오화선생의 자제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디에서인가의 왕차오화 약력을 보면 천안문운동 때 이미 5살 난 애가 있다고 했는데 그 애가 바로 이 분인가 보군요.
@sunanugi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은 博士候选人(Ph.D. candidate)이 아니라 박사학위 받고 같은 대학교 포닥으로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얼마 전 결혼식에 백발성성해진 외할아버지 제자들이 많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부친의 임종을 지켰고《中国现代文学30年》 편찬에 참여했던 王超冰(王超華의 언니)은 현재 활동상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구요.
王瑶선생의 아들 王超默은 현재 미국 거주중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王瑶 선생과 옆집에 살던 청화대건축과 교수의 자제이자 王超默의 유치원 및 베이징대부속중학교 동기의 전언)
@메이데이 햣...역쉬 메이데이님! 뜨끈뜨끈한 얘기 ㄳㄳ
@sunanugi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다시 카페에 글 올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sunanugi 위의 댓글을 수정했습니다.
다시 찾아보니 梁思成의 아들이 아니라 梁思成이 청화대 건축과로 초빙했으나 1957년 반우파투쟁에 걸려서 1958년에 해직된 분의 자제였습니다.
梁思成의 자제 梁从诫 운운은 여기에 남깁니다. (梁从诫는 杨东平, 梁晓燕, 王力雄과 함께 '自然之友'를 만들었는데 王力雄은 2003년에 제명되었습니다.)
왕차오빙이 왕차오화의 언니였군요. [중국현대문학30년] 초판본에는 이름이 올라있더니, 개정판부터는 이름이 빠졌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