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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조] 사랑으로
최근 박양규 목사님의 “ 다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읽었다. 책 속 ‘관념의 성채에 맞서라, 톨스토이’ 편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영감을 받았던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야로센코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러시아는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냈다. 한 번 끌려가면 25년간의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혹독한 형벌 탓에 고향으로 돌아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야로센코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그림에 담았다. 그림 속 사람들은 시베리아로 끌려가는 중이다. 그런 탓에 아이의 어머니와 그 뒤의 포로는 체념한 표정이 역력하다. 과연 이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다만 어린아이는 활짝 웃고 있다. 시베리아행 열차에서 배급받은 빵 부스러기를 비둘기와 나누고 있다. 자신의 끼니조차 되지 않는 양이지만, 아이는 몰려드는 비둘기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 아이의 모습을 통해 열차 안에는 삶의 희망이 피어나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은 경이롭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관용적이고, 추상적으로 대답하지 말자. 극한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작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적어도 톨스토이와 야로센코에게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작동하는 실체였음을 기억하자.
저자의 얘기를 마음에 담고 걸었다. 겨울에 맞서 움추린 만물의 들린 손 끝에 닿은 숨결로 새 날 기다리고 있는 초목이 예사롭지 않다. 모든 것이 은혜, 사랑에 감사^^
[디카시조] 사랑으로
씨 품은 구석구석
빛 들면 되살아나
제 닮아 아름다움
온누리 형형색색
쏙쏙쏙 빼닮은 것은
사랑으로 지어짐
어디나 삶
출처 : 다음백과, 그림으로 읽는 러시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43XX51500037
제작시기 1888년
작가 니콜라이 야로센코
그림을 감상할 때 제목을 나중에 보는 습관이 있다. 먼저 온전히 그림만을 감상하고 싶다. 제목까지도 내가 상상해가면서······.
N. 야로센코, 〈어디나 삶〉, 캔버스, 유화, 212×106, 1888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제목을 보는 순간, ‘아······’ 하고 가슴을 죄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디나 삶〉이라니······ 이보다 더 이 그림에 맞는 제목은 찾아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림은 창살 안의 인물들과 아이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먹기 위해 날아든 새들로 구성된다. 새들은 그림 하반부의 정면을 차지하고 있고 인물들은 정면이 아닌 약간 옆으로 치우친 상반부에 묘사되어 있다. 죄수 차량 안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은 모두 창밖의 새들에 집중되어 있다. 정지된 듯한 인물들의 모습은 날갯짓으로 나타난 새들의 동적인 자유로움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왜 새들은 정면에 묘사했으면서 창살 안의 사람들은 측면에 그려놓은 것일까? 창살 너머로 내민 아이의 손 아래에서 떨어졌을 빵 부스러기를 쪼는 새들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 위의 사람들도 정면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기차가 자유로운 세상을 뒤로하고 구속의 땅을 향해 막 출발하기 시작한 순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닐까? 뒤로 가지 않는 한 기차가 떠나는 방향인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을 보면 그런 추측을 더욱 신빙성 있게 만든다. 이제 막 덜커덩하고 기차가 한 번 움직인 거리인 듯 우리의 시선에서 약간 비켜나간 풍경이다. 기차는 이미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 안에서 이들이 보고 있는 바깥세상의 새들은 어떤 모습인가?
플랫폼을 차지한 새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아이가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를 먹으러 날아들어 먹이를 쪼고 있는 새, 막 내려앉으려고 자리를 물색하고 있는 새, 내려앉아 먹을 기회를 엿보며 목을 빳빳이 긴장한 검은 새, 그리고 그 옆에서 움츠리고 앉아 또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참새처럼 작은 새. 모두 두 마리씩 짝을 이루고 있는데 이 작은 놈만 짝이 없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열차 지붕 위에서 꽁무니를 치켜들고 긴장되게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또 한 마리의 새가 있다. 새에 먹이를 주다 보면 옆에서 새들 무리에 끼어들지 못해 주는 모이도 못 얻어먹어 마음 짠하게 하는 놈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닥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작은 새가 신호라도 하면 당장 내려갈 양으로 준비 태세를 갖춘 듯 모이 쪽이 아닌 작은 새를 향하고 있다. 힘 센 놈들이 먼저 먹기 마련이다. 그래도 새들은 창살 안쪽 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는 바깥세상에 있다.
빛바랜 초록색과 황토색이 섞인 낡은 열차 죄수 칸 안에 좌석도 없이 빼곡히 바닥에 앉아 있을 죄수들 틈에서 창살 너머의 새들에 마음을 빼앗긴 인물들의 표정은 어떤가.
깡마른 아이 엄마는 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에게 자신의 마지막 영양분까지도 젖으로 빼앗긴 듯 지친 얼굴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머리에 쓴 검은 스카프는 러시아에서 상복으로 쓰이기 때문에 그녀가 상중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남편이라도 죽은 것일까? 상도 끝나지 않은 그녀는 아이까지 데리고 대체 어디로 끌려가는 것일까?
약간 옆으로 기울인 얼굴의 각도, 지적이면서도 상념에 잠긴 듯한 슬픈 표정 등은 어딘지 성모 마리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예수의 고난을 예견하고 걱정하는 마리아처럼 앞으로 닥칠 아이의 운명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근심이 드러난 표정이다. 일반적으로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성상화에서 성모 마리아가 항상 예수 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는 반면, 여기서 그녀는 아이의 반대쪽으로 머리를 기울이며 상념에 잠긴 표정이다. 그래서인지 성모와는 다른 인간적 고뇌가 느껴진다.
아이 옆의 사내가 쥐고 있는 빵 조각은 그녀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배를 주리며 남겨놓은 아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안아 올린 손이 창백한 얼굴과 대조되게 붉은빛을 띤 것을 보면 아이의 무게마저도 이젠 힘겨운 것 같다. 그녀의 체념한 듯, 부러운 듯 새들을 향한 시선에는 앞날에 대한 걱정이 드리워져 있다.
침울한 여인의 표정과 대조를 이루는 흐릿하지만 흐뭇한 웃음을 띤 사내는 귀중한 흑빵을 창밖의 새들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철없는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며 빵까지 잘게 부숴주는 인정 많은 순박한 촌부의 모습 그대로다. 조금 남은 빵 조각을 쥐고 있는 투박한 손은 그가 살아온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짧게 깎인 검은 손톱, 굵은 손마디, 꺼칠꺼칠한 피부, 커다란 손바닥과 짧은 손가락은 평생을 노동으로 일관한 일꾼의 손이다. 가족을 위해, 그들을 하루 세 끼 먹이기 위해 자기 몸뚱이 하나는 기꺼이 아끼지 않은 순박한 손이다. 선한 웃음을 띤 그의 표정에서 무엇이든 할 것 같은 우직함과 삶에 대한 긍정이 나타난다.
메마른 여인과 광대뼈가 드러난 사내의 얼굴과는 대조되는 아이의 둥그스름한 완전함은 힘겨웠을 고난의 삶을 이겨내며 여인이 지켜낸 아이의 해맑은 표정, 젖살 오른 포동포동한 볼, 생기 있는 입술, 통통한 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아이의 하얀 옷과 흰 얼굴이 그들의 순수함과 결백성을 대신해서 드러내는 것 같다. 창살 아래 가만히 내민 아이의 손은 보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의 뒤에 있는 텁수룩한 수염의 노인은 마치 노년의 톨스토이 같다. 마을 촌장 같은 이미지의 듬직하고 풍채 좋은 덩치, 강직한 콧대, 넓은 이마를 가진 그는, 깊이 팬 눈으로 새들을 보는 것인지 아이를 보는 것인지, 아님 그 둘 다를 보면서 자기 상념에 빠진 것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이가 펼치는 작은 퍼포먼스로부터 역시 눈을 떼지 못하는 것 같다. 고향에 두고 온, 이제 막 재롱을 피우기 시작한 손자 생각이라도 난 것일까?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여생을 보내기 위해 떠나는 유형길이 그에겐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그 옆에서 힐끗 곁눈질로 관심을 보이는 옆집 아저씨같이 생긴 친근한 외모에, 일용직 노동자 같은 모자를 쓴 사내도 인상적이다. 풍채 좋은 할아버지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창밖을 보려고 아마 까치발이라도 선 듯 약간 기우뚱하고 불안한 자세다. 할아버지의 어깨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그는 입꼬리가 약간 올라간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띠고 눈을 아래로 향한 채 바닥의 새들을 주시하고 있다. 새들을 가장 부러워하는 것은 아마 이 사내인 것 같다. 그가 부러운 것은 새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부족한 영양 상태를 드러내듯 검게 보이는 마른 얼굴의 그가 부러운 것은 빵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고 있는 상황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이 그림에서 마음 한 구석을 답답하게 하는 아픈 부분은 다른 쪽 창 앞에서 밖을 주시하고 있는 등 돌린 사내의 모습이다. 그 사내가 없었다면 이 그림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사내. 언뜻 수염도 보이는 듯하고 구릿빛의 얼굴색에 완고해 보이는 얼굴선이 젊지 않은 그의 나이를 드러내 준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유형지로 출발하기도 전에 이미 창살 안에 갇혀 버린 듯하다.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문을 닫아 버린 것같이 무심히 서 있다.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도 수십 년의 유형 생활을 거치고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을 고향으로 돌아갈 때쯤이면 그 무엇에도 관심 없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그런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은 아닐지······. 그런 그의 뒷모습이 마치 앞 사람들의 미래의 모습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사내의 뒷모습이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니콜라이 야로센코가 이 그림을 발표한 것은 1888년 제18회 ‘이동전람파’ 전시회에서였다.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 여인은 무슨 일을 겪은 것일까?’, ‘톨스토이 풍이 느껴진다’ 등의 질문들은 무성했지만 이 그림에 대한 해설은 별로 없다.
‘페레드비쥬니키(이동하는 자들)’로 불리던 러시아의 ‘이동전람파’는 1870년대부터 1923년까지 약 48회에 걸쳐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하리코프, 카잔, 오데사 등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자신들의 그림을 전시하였다. 이 그룹에는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 니콜라이 게(1831∼1894), 일랴 레핀(1844∼1900), 바실리 수리코프(1848∼1916), 이사크 레비탄(1860∼1900)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이상주의적인 미학과 전통적인 회화 규범을 거부하고, 일반 민중의 삶 속에 드러난 ‘민중적 요소들’을 화폭에 옮기려고 하였다. 이동전람파 화가들은 그 당시 러시아의 잡계급 인텔리겐챠들(우스펜스키, 도스토옙스키, 가르신, 오스트로프스키, 체호프 등)과 교류하면서 비판적 사실주의의 영향도 받게 된다. 러시아 자연의 아름다움과 민중의 생명력에 새롭게 눈뜨면서, 그것을 화폭에 옮겨 러시아 민중에게 보여주려고 하였다.
1880년대 후반의 러시아가 알렉산드르 Ⅱ세(1861년 농노제 폐지를 단행하여 ‘차르-해방자’로 불렸지만 1881년 ‘인민의 의지’ 당 요원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후 이어진 ‘반개혁’의 시기였던 점을 고려하면, 민중의 삶을 그대로 그린 사실주의적 경향의 그림들이 러시아 곳곳에서 전시된다는 것 자체가 귀족 사회와 전제 군주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었고 민중에겐 자신들의 처지를 다시금 각성하게 되는 계기였을 것이다.
이 그림의 제목 중에서 러시아어 ‘vsudu’는 원래 장소를 나타내는 ‘어디나’라는 뜻보다는 방향을 나타내는 ‘어디로 가나’에 더 가깝다. 창살 안에 갇힌 그들의 삶은 또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유형지에선 과연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답하고 있다. ‘어디로 가나 삶’이라고, 러시아 속담처럼 ‘삶은 계속 된다’고······.
니콜라이 야로센코
N. 야로센코, 〈자화상〉, 1895
니콜라이 야로센코(1846∼1898)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화가이자 초상화가이다. 폴타바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으나 아버지는 가풍을 이어 군인이 되길 바랐기에 페테르부르크로 이사 와서 파블로프군사학교에 입학했다. 1860년대에 야로센코는 화가 A. 볼코프에게 개인적으로 사사받으며 미술공부를 하였으며 크람스코이가 가르치던 예술장려협회 미술학교 야간강좌를 다녔다. 1867년 야로센코는 군사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면서 미술도 계속 공부하였다. 야로센코의 세계관은 체르니셉스키와 도브로류보프 등의 러시아 혁명민주주의자들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
1876년 야로센코는 이동파에 합류하였고 10년 이상을 크람스코이와 함께 이동파를 지도하였다가 크람스코이 사후에는 이동파의 사상과 전통의 계승자가 되었다. 동료화가 네스테로프는 야로센코에 대해서 “검소하고 자제력이 강하다. 외모는 온화하지만 영혼은 강하다”라고 평하였다. 그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화가들의 양심”이라고 불렀다. 대표작은 〈화부〉와 〈수인〉이 있으며 1880년대에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인 〈어디나 삶〉(1888)을 발표하였다. 이후 〈그네에서〉(1888), 〈농부아가씨〉(1891)를 발표하였으며, 1898년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갈라디아서 5장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25장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톨스토이 단편선] 러시아 원전 번역본
https://youtu.be/K4pvFXDrlk8?si=OtADEA3SCknfUc9z
[책읽기] 다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박양규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