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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묵상글 들 (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 나의 끝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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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나의 끝은?
어제 저녁 기도 성모 찬송을 바칠 때 같은 하느님인데
사람에 따라 다르게 대하시는 주님을 새삼스럽게 묵상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지요.
그 인자하심은 세세 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권세 있는 자는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하느님의 인자하심은 세세 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는데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세가와 부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이 세세 대대로 미치지 않고 현세에서 끝난다는 겁니다.
어제 이런 묵상을 했는데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때,
곧 예루살렘이 황폐해질 때에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종말이 오면 희희낙락하던 자는 그 기쁨과 즐거움이 끝나고,
애통하고 고뇌하고 신음하던 사람은 그 고통이 끝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런 묵상을 했습니다.
내게 종말은 즐거움의 끝인가, 괴로움의 끝인가?
내게 오는 것은 종말뿐인가, 속량하실 주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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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루카 21,28)
우리는 지금 <전례시기>의 막바지에 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날에 벌어질 무시무시한 표징들을 듣습니다. 곧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고’, 곧 종말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재림에 대한 표징들입니다. 이는 종말 곧 구원은 올 것이라는 사실과 하느님께서 그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그때에 그 어떤 시련을 당하더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이고,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이는 종말, 그날이 우주의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곧 그날의 대재앙은 단순히 미래를 앗아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다는 것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그래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종말은 집단적 죽음이나 멸망, 결별이 아니라, 하나의 변형이 될 것입니다. 곧 인간의 종말은 분열과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탄생이 될 것입니다. 곧 대재앙이 아니라, 정신적 역전이 될 것입니다. 정신은 역전하고 다른 영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세계는 순간적으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서의 희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말론적인 표현들을 미래의 세상 종말에 대한 지식을 전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삶에 대한 태도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종말론적인 표징들은 우주론적인 표현이라기보다 신학적인 표현으로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그분은 먼 미래에 오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오셨고,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완성의 때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을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이를 헨리 나웬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은 오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내년이 아니라 올해,
우리의 비참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에가 아니라 그 비참함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으로 주님은 오십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의 삶 안에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들어옵니다. 곧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질 때, 그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때”에 결정적으로는 드러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주님!
새롭게 하소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하소서.
당신의 속량을 입게 하소서.
당신을 맞아 변형되게 하소서.
제 삶이 역전되고 당신 승리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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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현혹되지 마라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걱정이 큽니다. 종식을 위해 기도하며 각자의 건강관리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건강한 몸은 나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큰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서민들은 따뜻한 겨울을 바라지만 겨울은 겨울다워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병충해가 덜한 봄을 맞이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겨울은, 휴식을 하며 새 생명을 준비합니다. 이처럼 인생여정도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고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지만 그에 걸맞은 준비는 꼭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안락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곳에 맛 들이면, 빠져나가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인간이 지배합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탄소중립 정책을 펴고 지구를 살리자는 운동이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하고 말씀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에게는 시련은 은총의 기회일 뿐입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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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사자굴의 다니엘, 구름을 타고 오시는 메시아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품고 있는 바다는 늘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런데 바닷물의 움직임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어서, 표층해류는 기온에 따라 차가워지거나 더워지고 바람에 밀리면 한류나 난류가 되어 대륙과 대륙 사이의 대양을 오가지만, 심층해류는 염도와 산소 함유도에 따라 삼투압 작용으로 위아래로 흐르며 전체 바닷물을 움직여서 바다가 숨을 쉬고 썩지 않게 합니다. 바깥 요소로 인해 물리적이고 수평으로 움직이는 표층해류의 움직임은 대륙의 기후에 영향을 미쳐서 해양성 기후를 만들기도 하는데, 자체의 성분 변화에 따라 화학적이고 수직으로 움직이는 심층해류의 움직임은 느리기는 하지만 표층해류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처음에 질소 투성이었던 육지에 산소를 공급하여 동식물이 살 수 있게 된 것도 바다 속에서 산소를 만들어내는 세포들 덕분이고, 지구 전체의 온도와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킬 수 있는 것도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바다 깊숙이 품고 있는 심해의 움직임 덕분입니다. 이렇게 바다 근처 육지의 기후 정도가 아니라 지구 전체의 기상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육지의 자연 생태계를 좌우하는 것이 심층해류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류처럼 역사도 흐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에서도 권력과 지식을 담당한 엘리트층은 외부의 힘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우상숭배에도 쉽게 빠지기도 하고 멸망당하여 유배를 가서도 쉽게 동화되며 자기 땅에서 식민 통치를 받아도 기꺼이 외부 세력의 앞잡이가 되지만, 생산과 소비를 담당한 민중계층은 자신들의 조상이 전해준 신앙의 전통과 이로 인해 형성된 심성에 충실하려는 경향이 압도적이어서 나라 엘리트층이 우상숭배를 하면 비판하고 유배를 당하면 신앙을 그리워하며 식민통치를 받으면 저항했습니다.
바빌론 유배 후에 쓰여진 다니엘 예언서는 성서의 문학유형상 교훈문학에 속합니다. 유배 당시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인들 가운데 많은 엘리트들이 바빌론 우상문화에 포섭되어 신앙을 버리거나 변절했지만, 다니엘을 비롯한 아나빔들은 오히려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며 살아남았습니다. 굶주린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은 바빌론에 끌려간 유다인들의 처지를 상징하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보호를 받아 살아난 다니엘은 신앙 덕분에 유배에서 살아남기를 희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에 비해 루카복음서가 전하는 21장은 묵시문학 유형이어서, 장차 다가올 일을 마치 현재의 일인 양 묘사해서 미래에 요구될 행동을 지금부터 앞당겨하도록 촉구하려는 의도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닥칠 박해에 맞서서 믿는 이들이 신앙을 잃지 않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지금부터 노력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사자굴의 다니엘이 멀쩡하게 살아서 나오는 일이나, 박해와 시련을 겪는 당신 백성을 격려하시려고 구름을 타고 오시는 메시아를 맞아들이는 일이야말로 심층해류의 움직임처럼 더디지만 확실하게 세상의 현실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인권주일이기도 한 대림 제2주일을 앞두고 검찰과 언론 및 정치 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와 수도자 1천 인 시국성명이 최근 발표되었습니다. 20년 째 국정의 목표로 지정되어 있기만 하고 도무지 진척이 없는 우리 사회 공동선의 질서를 고발하는 민심의 깃발입니다. 성경의 역사적 교훈과 묵시적 비유에 응답하려는 우리 사회의 예언자들의 목소리라 할 만 합니다.
이 깃발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은 돈과 이익에 따라 대단히 민첩하게 움직입니다. 검찰은 죄인을 기소하여 명성을 얻고 더 큰 죄를 덮어서 돈을 법니다. 부동산 부자인 언론 사주 또한 정치 검찰의 동업자이기 때문에 언론은 검찰의 변호사가 되어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립니다. 검찰과 언론의 타락상 위에 부동산 경기가 활성화되는 틈을 타서 떼돈을 벌고 있는 일부 정치인들도 공범입니다. 이 모두가 돈과 이익을 따라가는 우리 사회의 표층해류가 흘러가는 움직임입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를 공동선을 향하여 전진시킬 수 있는 힘은 공동선 질서에 대하여 깨어 있는 민심입니다. 세계에서는 경제력이나 국방력 또는 문화 한류로 선진국이 되었다는 대한민국이 막상 국내의 공동선 질서에 있어서는 양극화로 인한 불평등과 기득권 카르텔의 횡포로 인한 불공정 때문에 낙제점을 맞이하고 있는 이 시국에 민심의 깃발이 들어 올려진 것입니다. 사자굴의 다니엘을 구하시러 메시아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듯이, 거룩함과 의로움의 가치로 움직여온 우리 사회의 심층해류가 움직이기 시작한 듯합니다.
지구의 표면을 덮고 있는 육지는 30%정도이지만 바다는 70%나 됩니다. 우리가 먹고 씻고 농사와 공업에 쓰는 민물은 강과 호수와 산의 나무가 뿌리에 잡고 있는 양을 다 합쳐도 지구 전체 물의 2%도 채 안 됩니다. 나머지 98%의 물이 바다에 있습니다. 이처럼 바다의 힘이 큽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는 바다의 힘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힘을 지니신 말씀을 예수님을 우리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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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제까지의 사제생활을 돌아보면 정말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본당신부로 있을 때 신자도 많이 늘었고, 다른 신부가 부러워할 정도로 청년이나 초중고 학생들 숫자도 참 많았습니다. 신자들도 정말로 열심히 해서 성당 안이 늘 북적거렸습니다.
얼마 전, 본당신부로 있을 때의 사목회장님과 오랜만에 만나 점심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식사하면서, “저는 참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본당신부로 있을 때, 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신자분이 열심히 하셔서 신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회장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신부님이 열심히 노력하셨으니 그렇지요.”
첫 본당신부였기에 열심히 살려고 나름 노력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부족한 노력에 비해 얻은 것이 너무 크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좀 더 생각해보니, 저의 운 좋음은 노력이 있었을 때인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는 원하는 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저절로 되기를 바랐지만, 저절로 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떠올려 보십시오. 운은 노력과 비례해서 나아갑니다. 그런데 노력 없이 운만 좋기를 바라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때에 무서운 자연재해가 있으리라고 예고하시는 장면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통해 부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세상은 끝이구나.’라며 자포자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로 모든 것이 끝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종말의 때를 예고하신 뒤에 이런 말씀도 분명히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지만, 오히려 구원의 시간이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시간임을 말씀해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때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커다란 재해, 즉 지진, 홍수, 화재 등의 재해를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을 해야 할까요? ‘언젠가는 나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하는 종말이 오겠지?’라며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장차 다가올 그 종말의 때를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지금 여기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자신에게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과 은총의 삶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운 좋은’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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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갚는 것보다 더한 의무는 없다(툴리우스 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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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7가지 방법
인터넷을 보다가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7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습니다.
1. 현실을 받아들이기.
2. 균형 잡힌 식사하기
3. 사소한 일을 걱정하지 않기
4. 노래하기
5. 반려동물과 시간 보내기
6. 숙면 취하기
7. 종교 가져 보기
젊었을 때, 솔직히 늙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외모를 가꾸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좀 젊어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50이 넘었다고 하면 깜짝 놀랍니다. 40대로 봤다면서, 젊어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것도 있겠지만, 오히려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위에 나와 있는 7가지 역시, 편안한 마음을 위한 방법이 아닐까요? 젊어지길 원한다면 먼저 마음을 가꿔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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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입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청교도들은 1620년 9월 6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25명의 선원과 102명이 승선하여 미국 동해(대서양) 중부지방 버지니아(Virginia)를 목적지로 삼고 출발했습니다. 63일간 3,400마일(5,440km)의 멀고도 긴, 그리고 위험한 항해 끝에 닻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11월 16일 현재의 플리머스(Plymouth)에 정착했습니다. 개척자들은 무사히 신대륙에 도착했지만, 더 어려운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11월 중순에 도착한 그들은 강풍과 눈보라 치는 혹독한 추위, 질병과 식량 부족, 들짐승들의 위험, 집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그해(1620-1621) 겨울, 2-3개월 내에 도착했던 102명 중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따스한 봄날이 찾아오자, 생존한 청교도들은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가꾸어, 그해 가을 기대 이상의 추수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눈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라는 시편의 말씀처럼 청교도들은 엄동설한에 황무지에서 살아남은 것,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여 주신 것, 미 대륙의 개척자들로 삼아주신 것 등을 하느님 앞에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결국 청교도들은 북아메리카로 건너 온 다음 해인 1621년 가을, 하느님께 첫 추수감사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추수한 첫 곡식들과 채소들 중 최고 우량품들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기도 중 "우리는 대서양을 건너와 여러 친구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첫 열매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일 년에 한번 있는 명절이 아니었습니다. 감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매일이 추수감사절입니다. 불평과 불만, 원망과 근심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가진 것이 많아도 추수감사절은 오지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지켜주었습니다. 다니엘을 사랑했던 왕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 나라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는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왕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렸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왕에게는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무사하게 살아 온 날이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성찬의 전례의 중심에는 ‘감사송’이 있습니다.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기 전에 이렇게 기도를 바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 감사와 영광을 드림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옵니다. 무수한 천사가 밤낮으로 아버지를 섬기고 그 빛나는 얼굴을 뵈오며 끊임없이 찬양하오니 저희도 그들과 함께 하늘 아래 모든 조물과 더불어 기뻐하며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나이다.”
돌아보면 2021년에도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건강을 주셨습니다. 주일이면 함께 미사 할 공동체를 맡겨 주셨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상황에서도 신문 홍보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동료 사제들이 곁에 있습니다. 텃밭을 가꾸었는데 올해도 풍성한 결실이 있었습니다. 봄에 코스모스 모종을 심었는데 가을에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습니다. 횡당보도를 걷다가 차와 부딪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다행히도 몸에 이상이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감사할 일입니다. 2022년이 어떻게 지나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묵시록의 예언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멸망하는 것도 무섭지는 않습니다. 오늘 하루만 충실하게 살 수 있다면 됩니다. 오늘 하루를 감사드리면 살 수 있으면 됩니다. 그것이 모인 것이 지난날들이고, 그것이 모이면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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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지혜
- 태풍颱風을 미풍微風으로 -
지혜로 전환된 지식이 아니라면 그 지식의 축적도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무리 지식을 싸놓아도 지혜가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깨달아 알아감이 지혜입니다. 그러니 지혜는 참 좋은 선물입니다. 옛 어머니들은 지식은 짧았지만 때로 지혜는 깊었습니다.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들 세상 지식을 짧을지 몰라도 농사일을 통해 체험한 지혜는 깊었습니다.
옛 구도자들 역시 삶의 지식이 아닌 삶의 지혜를 찾아 사막의 수도승을 방문했습니다. 사막 수도승들의 이야기 모음이나 불가의 선사들의 선문답의 일화를 보면 짧지만 깊은 깨달음을 주는 지혜로 가득합니다. 계속 두고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지혜의 결정체같은 일화들입니다.
어제 오후 잠시 초겨울 불암산에 올랐습니다. 산에 갈 것이 아니라 산이 되어야 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산에 가지 않고 산이 될 수 있을런지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정주의 ‘큰산’이 되고 싶은 열망은 여전했습니다. 깊은 지혜를 함축하는 상징적 침묵의 거산巨山 불암산입니다. 산을 찾는 이들을 고요하게 하고 치유하는 산입니다. 언젠가의 짧은 시도 잊지 못합니다.
“참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더불어 생각난 공자의 '인자요수 인자요산(仁者樂山 知者樂水)’,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마디였습니다. 외출하는 순간 벼락치듯 깨달음도 또한 잊지 못합니다. “아, 나는 공인公人이구나!” 제 집무실도 사적 공간인 듯 하나 공적 공간이요, 혼자 있을 때도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기에 온전히 나 하나는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공인중의 공인이 프란치스코 교황일 것입니다. 완전히 드러나 사생활이 없는 교황님입니다. 강론 역시 개인적이고 사적이기 보다는, 보편적이고 본질적이며 명쾌하고 단순하며 짧고 깊습니다. 사실 위로 올라가면서 책임이 막중한 공인일수록 삶은 투명하고 일관성이 있고 예측 가능해야 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은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며 이래서 철저한 검증을 요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을만한 삶은, 비밀이 없는 투명한 삶이요 예측 가능하고 일관성이 있는 삶이겠습니다. 사실 수도원에서 오래 정주생활하다 보면 비밀이 없어져 투명해지기에 서로간 신뢰가 있고 평화롭습니다. 누가 지금 어디 있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예측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 보면 누구나 공인입니다. 하느님 앞에는 비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무일도 제4주간 저녁기도 시편 139장 다음 대목을 기억할 것입니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님은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시편139,7-8)
바로 이런 하느님 현존 의식의 자각이 늘 ‘신독(愼獨;혼자 있을 때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언행을 삼감)’, 삼가고 조심함으로 공인처럼 살게 합니다. 참으로 이런 이들에게 하사下賜되는 은총의 선물이 지혜입니다. 바로 오늘 다니엘서의 주인공 다니엘입니다. 참으로 매력적인 하느님의 사람, 현자賢者인 다니엘입니다.
무려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 이어 벨사차르 임금, 이어 오늘 다리우스 임금을 세분을 모신, 중심 자리에 있으면서 참 조용하고 평화롭게 임금들을 잘 이끌었던 겸손하고 지혜로운 다니엘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되어 살기에 늘 한결같이 고요하고 지혜롭고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말 산을 좋아하는 어진이와 같고 물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이와 같은 인자요수, 지자요수의 사람, 다니엘입니다.
정말 중심이 가볍고 시끄러우면 주변이 시끄럽고 혼란합니다. 바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하면 공동체가 고요하고 평화롭기 힘들 것입니다. 늘 시끄럽고 어지러울 것입니다. 미풍도 태풍으로 만들 것입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미풍으로 끝날 일을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만드는 일은 얼마나 비일비재한지요! 건드리지 않는 것, 그냥 내버려 두는 것, 바로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않는 삶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이들은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만, 정작 지혜로운 이들은 반대로 태풍도 미풍으로 만듭니다. 다니엘이 간신奸臣들의 모함으로 태풍에 휘말리는 듯 하나 결국은 사필귀정事必歸正,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생환生還하고 다리우스 임금은 이들 간신들을 사자굴에 넣어 처단하니 태풍은 미풍으로 변하고 맙니다. 한결같은 기도의 사람, 다니엘의 승리는 바로 하느님의 승리를 뜻합니다.
실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다리우스 임금과 충신忠臣 다니엘 재상과의 대화입니다. 유배중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니엘은 희망의 아이콘, 희망의 별, 희망의 영웅입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사자들에게서 구해 내실 수 있었느냐?”
“임금님.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죌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다리우스 임금의 신망과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는 다니엘인지요. 나라의 중심에 이런 다니엘 같은 국무총리가 있다면 나라 전체가 평안할 것입니다. 마침내 다리우스 왕의 칙령이 다니엘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됩니다. 마침내 다리우스 임금의 하느님 고백까지 이끌어 내는 위대한 다니엘입니다.
“내 나라의 통치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는 누구나 다니엘의 하느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해야 한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의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오늘 복음의 종말 상황도 무시무시한 폭풍 속의 재난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니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풍처럼 요즘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 또한 이와 흡사합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경거망동, 부화뇌동은 금물입니다. 오직 삶의 중심에서 주님과 함께 고요히 깨어 머뭄이 태풍을 미풍으로 만드는 최고, 최선, 최상의 지혜로운 영적 대책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결정적 답을 줍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은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구원의 임재하심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태풍은 미풍으로 변할 것이며,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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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날을 촘촘하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다니엘을 끌고 가서 사자 굴에 던졌다."(다니 6,17)
제1독서는 다니엘에게 닥친 위기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나라를 잃고 이방인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유배민이지만 다니엘은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와 기도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건 숨을 쉬는 것과 같은 그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변함없이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는 다니엘의 모습에 분개해 임금에게 몰려갑니다.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에게 호의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지라고 분부하지요. 임금은 몹시 안타까워하면서 "네가 성실히 섬기는 너의 하느님께서 너를 구해내시기를 빈다."고 기원합니다.
"다니엘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이다."(다니 6,24)
놀랍게도 사자들은 다니엘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성경 저자는 그 이유를 하느님께 대한 다니엘의 믿음이라고 단언합니다.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어 보이는 고통과 멸망의 순간에도 믿음은 생명을 보증하는 신비입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
복음 속 예수님의 말씀은 기원후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면서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자존심이고 정체성인 영광의 도성이 이방인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백성들은 죽음과 착취, 억압의 그늘에 놓이게 되었지요.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라칠 것이다."(루카 21,26)
세상 민족들 간의 세력 다툼과 전쟁에 더하여, 온 우주에도 표징들이 나타나 하늘의 세력들까지 흔들리면 그때 사람들은 더더욱 큰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걷잡을 수 없이 닥쳐오는 일들로 마치 모든 것이 끝장난 듯
절망하고 체념하게 되겠지요.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7)
그런데 징벌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구원의 날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성실히 믿어온 분, 세상을 온통 둘러싼 재물과 권력과 요행의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롯이 하느님만을 섬기는 이들은 상처 하나 남지 않고 구원될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절망과 체념으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기뻐하며 구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다니 6,27-28)
주님께서 이 세상에 "징벌의 날", "사람의 아들의 날"을 마련하신 첫째 이유는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속량하시려는 사랑 때문일 겁니다. 또 오늘 독서 속 다리우스 임금의 신앙 고백에서 드러나듯, 주님을 몰랐던 이방인들까지 모두 당신 나라로 모으시려는 하느님의 큰 그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충실히 섬기는 모든 믿는 이들은 상처 없이 두려움과 공포의 그 날을 건너갈 것입니다. 삶의 순간순간 중첩된 주님과의 촘촘하고 친밀한 사랑의 관계가 그날을 심판과 징벌의 날이 아닌 속량과 구원의 날, 벅찬 해후와 뜨거운 일치의 날로 만들어 주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언제일지 모르는 그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지나온 하루만큼씩, 지나온 순간만큼씩 죽음과 종말에 더 가까워지는 중이지요. 어차피 닥칠 그 순간을 두려움과 공포, 회피로 맞닥뜨릴지, 그리움과 사랑으로 준비하다 맞이할지는 우리 각자에게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간이 후반부에 이르렀고, 위령성월 또한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생명을 넘겨드릴 그날, 모든 영혼들과 함께 주님 앞에 설 그날을 관상하며 몸과 마음과 영혼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그 결정적 순간까지 주님을 찬송하고 찬양하다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기쁘게 그분을 맞이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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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구원인 속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성탄)와 땀(공생활)과 죽음과 그리고 재림의 본질은 우리의 '속량, 곧 구원'입니다. 그것도 '모두의 속량', '모두의 구원'입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 아들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오늘 복음은 징벌의 날인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때에 일어나는 모습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이루셨던 '인간의 구원 역사'이며,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셨던 '모든 인간의 구원역사'입니다.
요즘 우리는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후 바빌론 유배지에서 일어나는 구원의 모습, 곧 하느님께서 지혜가 충만한 '다니엘'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모습을 독서로 듣고 있습니다.
'삶의 역사'는 '기쁨과 고통의 역사'요,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는 '속량 곧 구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구원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구원 만이 아니라, 너의 구원과 모두의 구원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바람이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서 모두의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
아니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라는 이 시대의 병폐와 이런 저런 핑계 안에 갇혀 지내고 있지는 않은지?
함께 각자의 모습을 되돌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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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전신 마취를 하고 수술대에 올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이동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냥 누워 있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누운 채로 눈을 뜨지 못한다면 …….’
대개 두려움이란,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이고 다른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의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생각에서 찾아옵니다.
그 힘에 우리는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잃으면, 사랑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고,
내가 이루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생각이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소중했던 도시인 예루살렘의 멸망,
임신한 여자에게 가장 소중한 배 속의 아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젖먹이 아이 ……, 그 소중함을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는 두려움이 닥쳐옵니다.
나약한 인간에게는 너무나도 거대한 자연의 힘이 이제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는 공포가 밀려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두려움을 온몸으로 맞이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마지막 순간일지라도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한 번이라도 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삶이 행복했다고, 미안하다고 안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내일 당장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우리의 소중함을 깨닫는 데
소홀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시는 그 전능한 힘에 온몸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모든 것을 잃게 하는 힘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희망의 힘임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소중함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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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창조계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하고 땅의 주민들이 견디기 힘든 공포에 휩싸일 때부터 무서운 환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장차 올 것들에 대한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파멸에 이를 것이다. 임신한 여인들이 불행한 것은 몸이 무거워 위험을 피해 달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24절)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여도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고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세상 도처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포로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믿는 이들에 의해 성령의 쌍날칼(히브 4,12) 아래 놓일 것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자기 믿음에 따라 거룩한 태양(말라 3,20)이 밝아지기도 하고 흐려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하늘의 해를 바라볼 때도, 보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흐리게 보는 사람과 밝게 보는 사람이 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빛도 믿는 이의 경건함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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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가까워진
당신의
속량으로
우리의 모든
빗장과 마음의
자물쇠를 여신다.
불완전하고
미완성의
우리들 삶에
주님의
속량(贖良)이 있다.
유죄(有罪)와
무죄(無罪) 사이에
넘치는 속량이 있다.
속량의 뜻은
구원이다.
속량은
다름아닌
자유로운
은총의
삶이다.
속량의 여정이
바로 구원의
여정이다.
아름다운 속량은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주님의 속량에
우리 마음을
맡겨드린다.
속량으로
우리마음또한
가야할 곳을
알게된다.
속량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다.
속량으로
참된 사랑을
가르쳐주신다.
참된 사랑은
속박이 아닌
참된 자유이다.
희생 없는
속량은 없다.
사랑 없는
속량은 없다.
고귀한 사랑으로
우리 마음을
맑게하신다.
속량이라는
사랑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위한
속량의 길을
걸어가신다.
속량과
아픔 사이에
만나게되는
가장 좋은
사랑이다.
속량으로
새날이
더욱 맑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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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두려워 말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루카21,28)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의 파괴를 최종 심판의 전조로 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안에 있는 이들은 빠져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합니다(21,21). 서기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무려 110만 명이 죽었으며 9만7천명이 로마군 총사령관 티투스의 포로가 되어 여러 지방에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입니다(21,24).
기근까지 확대되어 “다락에는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로 가득 찼고, 거리의 길이란 길은 모두 늙은이의 시체로 채워져 있었으며, 어린 아이들도 젊은이들도 굶주림으로 퉁퉁 부어서 망령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쓰러졌습니다. 이런 재난에 대하여 슬퍼하는 사람도 없었고 슬프게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유대 고사)
사실 성전 파괴는 서기 66-70년 사이에 일어난 로마와의 독립 전쟁에서 인간의 힘에만 의존했던 유다인들 스스로가 부른 참혹한 결말이었습니다. 누구든 이런 파멸의 경고 앞에 공포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21,25-26).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 것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21,28)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며”(21,9),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21,28)
성전 파괴와 갖가지 징벌로 표현되는 나 자신과 이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들은 절망의 끝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과 내 의지, 선과 악, 육과 영,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갈등과 고통을 겪곤 합니다. 무게는 달라도 저마다의 십자가와 아픔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목숨을 바쳐 속량하시려고 우리 삶에 끼어드십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선택하고 따름으로서 떠안게 되는 죄와 어둠에서 벗어나라는 사랑의 촉구 외에 다른 것이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멈추어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 하느님의 그 눈길로 자신과 이 사회를 바라봄으로써 파멸의 징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21,20). 영혼의 파멸이 아닌 생명의 길로 가려면 예루살렘에서 빠져나가고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21,21 참조). 이기심과 탐욕, 증오와 폭력, 분노와 교만에서 벗어나 세상의 불의와 차별, 박해와 탄압, 폭력에 맞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오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21,28) 하고 말씀하십니다. 파멸과 영혼의 어둠 속으로 치닫는 그 상황은 또한 영광의 주님을 만나 뵈올 절호의 기회요 더 큰 은총으로 나아갈 전환점입니다.
육의 정신에 이끌려 주님을 거스르고 어둠과 괴로움을 맛보고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보는 아픔 속에서도 "허리를 펴" 주님의 영(靈)을 호흡하고, "머리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넘어져도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까닭은 주님만이 나의 희망이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지는 것보다 넘어졌을 때 일어나 다시 시작하지 않는 태도가 주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과 교회, 사회의 아픔과 어둠 가운데서도 희망이신 주님께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카이로스의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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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도, 그분 앞에 항복하고, 그분 앞에 내 모든 계획과 의지, 삶 전체를 내려놓는 것!
제 삶 속에 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이나 우선권이 어느 정도일까? 성찰해보며,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첫 번째 자리에 있어야 할 기도가 일이나 취미활동, 티비나 SNS에 밀려 한참 뒷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틈만 나면 기도가 신앙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외치고 있고, 머리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하루일과 중에 일과 기도 사이의 균형을 자주 놓치곤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족하고 나태한 기도 앞에 스스로를 합리화시킵니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일하는 게 기도가 아닐까? 한량처럼 빈둥거리면서 기도에만 충실한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존경하는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 이 부분에 대해서 명쾌히 정리해주시니 참으로 감사드릴 일입니다.
“악령은 우리를 정신없게 만들어, 자투리 시간이 조금만 보여도 온갖 할 일과 만날 사람과 처리할 업무와
만들어야 할 제품으로 쉴 틈을 주지 않으려 합니다.
악령은 우리에게 진정한 슬픔과 애통해할 여지조차 허용하지 않으려 기를 씁니다.
삶이 바쁘기 때문에 내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바쁜 삶은 오히려 저주가 됩니다.
악령의 음성은 또한 우리를 유혹하여 무적(無敵)의 얼굴을 취하게 하려 합니다.
‘연약하다, 내려놓다, 엎드리다, 울다, 애통하다, 슬프다.’ 따위의 말은 악령의 사전에 없습니다.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기도가 아닐까요?
크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내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파악하는 것.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그분 손바닥 안에 있음을 인식하는 것. 그래서 결국 그분 앞에 항복하고, 그분 앞에 내 모든 계획과 의지, 삶 전체를 내려놓는 것, 그분 앞에 겸손되이 엎드려 눈물 흘리는 것.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구약의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신비로운 인물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유달리 신심 깊고 총명했던 그는 바빌론 유배지에서도 승승장구합니다.
바빌론 왕들의 총애를 받아 셋째 가는 통치자가 됩니다.
다리우스 왕 같은 경우 총독 제도를 도입합니다.
총독 120명을 임명해 각 지역에 주재하게 하고,
총독들을 지휘할 세 명의 재상을 임명하는데, 다니엘은 세 명의 재상 중에 한 명이었으니,
그에게 주어진 권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다니엘을 다른 재상들이 그냥 둘리 만무했습니다.
즉시 계략을 짰습니다. 임금을 압박해서 법령 하나를 만들어 서명하게 했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임금 말고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를 올리는 자는 누구든지 사자 굴에 던져질 것이다.”
임금이 반강제적으로 문서에 서명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으로 돌아간 다니엘은 늘 그랬듯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그의 집 옥상 방 창문은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그는 습관처럼 하루에 세 번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은 기도하고 있는 다니엘의 집을 급습해서 현장을 목격했으며, 곧바로 왕에게 달려가 그가 법령을 어겼다고 고발했습니다.
다니엘을 총애했던 왕은 눈물을 머금고 그를 사자 굴 속으로 넣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버리셨습니다.
멀쩡한 몸으로 사자 굴을 빠져나온 다니엘을 부둥켜안은 임금은, 이방인이면서도 참으로 멋진 신앙고백과 찬미가를 불렀습니다.
“그분은 살아 계신 하느님,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나라는 불멸의 나라, 그분의 통치는 끝까지 이어진다.
그분은 구해 내시고 구원하시는 분, 하늘과 땅에서 표징과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다니엘을 사자들의 손에서 구해 내셨다.” (다니엘 예언서 6장 27~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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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희망 없는 사면초가 상황에서 영웅이 되려 하지 마라
오늘도 예수님은 ‘종말’의 상황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우리는 나라를 위해 끝까지 항생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살 방법을 모색해야 할까요?
만약 살 방법을 모색하다가는 나중에 나라의 큰 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적군에게 포위된 상황’, 곧 ‘사면초가’에 놓이면 도망치라고 합니다.
계속 싸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징벌’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빌론에 포위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예레미야 예언자는 항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그런 소리를 하느냐며 예레미야 예언자를 가두고 박해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들은 치드키야 왕은 두 눈이 뽑히게 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첫 번째 멸망입니다.
상황이 더는 가망 없을 때 그것을 ‘하느님의 징벌’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한 항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꼴이 됩니다.
분명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두 번째 멸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인 이들을 향한 하나의 예고된 징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항전하였습니다.
그 항전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나라의 자존심을 위해 한 것입니다.
이들이 끝까지 항전했던 곳이 ‘마사다’입니다.
결국, 마사다에게 항전하던 이들은 모두 자살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마사다 항전을 기리며 끝까지 항전한 이들을 추켜올립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 싸웠다기보다는 나라를 위해 싸운 것입니다.
이 세상 지나버릴 왕권을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영혼을 구원해주지도 못할 것을 위해 목숨을 내어버려야 할까요?
마지막 때가 오면 분명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지막 때는 온 세상이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고 땅이 갈라지고 바다가 덮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사면초가가 되었다면 이것은 ‘하늘의 징벌’로 여겨야 합니다.
이때 반항해 봐야 내 영혼을 돌볼 기회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잘살고 있는데 망하는 교회나 망하는 사회나 망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사면초가가 되었다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징벌은 받아야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때에 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말씀과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라합이 잘하였습니다.
라합은 창녀였지만 자신이 사는 예리고가 자신보다 더 썩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분명 징벌이 내릴 것을 느끼고는 징벌을 내리는 이들을 숨겨줍니다.
두 명을 숨겨주는데 저는 이 둘을 ‘은총과 진리’로 봅니다.
라합은 자기 나라에서 배신자가 되었지만,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나라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식의 말로 우리를 이용하려는 세력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공산주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습니까?
그러나 그 피의 값을 하느님은 기쁘게 쳐 주실까요? 왜 그랬냐고 하실 것입니다.
일단 역전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우리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1968년 북한 특수부대 124군 소속 31명 특공대원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산속에서 마주쳤다가 살려준 지게꾼 형제들의 신고로 서울은 이미 경계태세에 있었습니다.
결국,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김신조를 제외한 모든 대원이 전투 중 사살되었습니다.
바위틈에 숨어있던 김신조도 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합니다.
이미 주위는 포위되어 살 가망성이 없었고, 항복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이 들려옵니다.
문득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집니다.
‘나는 김일성 수령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존재인가?’
그는 항복합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북한은 자신들을 보낸 적이 없다고 잡아뗍니다.
분노를 느끼고 항복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는 길을 택합니다.
누가 김신조 목사를 탓할 수 있을까요? 북한은 분명 배신자라 낙인찍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영혼 구원을 책임지지도 못할 세상 권력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마치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처럼 점점 절망의 나락으로 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이때 이 세상 편에 서서 하느님의 진노가 가까워지는 데도
이용만 당하다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적들에게 포위되었다면 분명히 이 상황은 하느님의 진노 결과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원하러 이 감옥까지 들어온 이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런 상황이 왜 일어나는지 묻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프리즌 브레이크에는 무죄하게 무기징역을 받은 형을 구원하기 위해 들어온 동생이 있습니다.
동생은 온몸에 탈출할 수 있는 암호가 적힌 문신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죄도 없이 살아야 할 감옥을 탈출한다고 비겁하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영웅이 되려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하느님의 징벌 아니고 사면초가가 되는 상황은 거의 없습니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십시오.
우리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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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cpbc TV. 매일미사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매일미사ㅣ김태완 바오로 신부 집전
https://youtu.be/nNbZ4Qp8wbg 36:15
2021. 11. 25.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11월 25일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김태완 바오로 신부 (수원교구 제1대리구 복음화2국장)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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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25.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제1독서 (다니6,12-28)
"저의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저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그분 앞에서 무죄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저는 임금님께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23)
메디아의 다리우스 임금은 밤새 잠 한 숨 못자고 단식하면서 기도하다가 동이 트기도 전, 어두움이 가시기 시작할 때 채비를 갖추고 급히 사자 굴로 달려갔다.
다니엘서 6장 14절, 16절, 18절에 이어지는 19절의 다리우스 임금에 대한 묘사는 다리우스 임금이 다니엘을 얼마나 극진히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죄인이 당연히 죽음이 예견되는 형벌을 당하면서도 밤을 지나 아침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그 사람은 사면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고 한다.
다니엘서 6장 20절의 '새벽에 날이 밝자마자'에서 '새벽에'에 해당하는 '삐쉬파르파라'(bishiparpara)는 동녘에 해가 뜨기도 전 어두움이 가시기 시작하는 가장 이른 새벽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즉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꺼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에 사자 굴에 찾아간 것이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안했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하느님께서 다니엘을 구원하셨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함을 가지고 발걸음을 서둘러서 사자 굴을 찾아갔을 것이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무려 8시간 이상 있으면서도 몸 하나 상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 나온 이 사건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꾸며낸 설화라고 주장하는 비평론자들은 다니엘서가 B.C.2세기에 다니엘의 이름을 차용한 익명의 저자에 의해 서술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은 B.C.2세기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치하에서 혹독하게 박해를 당하던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과 구원을 생생하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가 고안한 문학적 창작이라고 주장한다.
비평론자들은 인간의 상식과 과학적 기준에 맞지 않는 기적적 사건들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다니엘의 사자 굴 사건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니엘이 사자 굴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학자들 가운데 다니엘이 사자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은 이유를 합리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다.
전날 저녁에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기 전에 다리우스 임금이 비밀리에 여러 마리의 사자들을 배불리 먹였기 때문에 그 사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아 다니엘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리우스 임금은 다니엘을 살리기 위해 고민하던 전날 점심때부터 저녁 해 질 때까지 그런 술수를 시도할 여력조차 없었으며, 오직 다니엘을 살릴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있을지에 대해서만 몰두했을 것이다.
동시에 그런 술수를 동원했다면, 그가 다니엘로 말미암아 그처럼 슬퍼하고 한 숨도 자지않으며 단식하고 새벽에 급히 나가 다니엘의 하느님을 들먹이며 그 하느님이 구원해 주었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다니엘을 고발한 자들이 그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에 그 사자들은 그들의 뼈를 모조리 부주어 먹어버렸다.
다니엘을 고발한 자들이 던져진 시간과 다니엘이 사자 굴 밖으로 나온 시간의 차이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이에 사자들이 갑자가 배가 고파졌을 리도 만무한다. 사자들은 다니엘이 굴 속에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물지도 심지어 발톱으로 할퀴지도 않았다.
이것은 다니엘이 설명한대로 하느님께서 다니엘이 사자 굴안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천사를 보내어 그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는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서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은' 조상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로 다니엘이 그 사람이었으며,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도 해를 당하지 않고 살아 남은 사건은 오로지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는 믿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천사를'에 해당하는 '말라케흐'(mallakeh; his angel)는 단수형으로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한 천사를 의미한다.
그 천사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사자 굴 안으로 보내졌는지, 아니면 비가시적 형태로 단지 영적 상태로만 보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유사한 예를 통해 당시 상황을 추정할 수 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이글거리는 용광로에 들어갔을 때, 밖에서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결박되지 않은 네 번째 사람을 보았고, 그 형상은 신의 아들과 같았다(다니3,92).
만일 다니엘이 말한 천사가 그런 존재였거나 유사한 존재였다면, 다니엘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형태로 그 사자 굴 안에 있었을 것이다.
사자들이 감히 그 천사를 건드릴 수 없었다는 것은 그 천사가 신적인 존재 또는 초월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 천사는 하느님에 의해 특별히 파견되었으며, 다니엘이 사자 굴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사자들의 입을 막아 놓았다.
'입을 막으셨으므로'에 해당하는 '우싸가르 품'(usagar pum)은 문자적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천사가 손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았다기보다 천사의 초월적이고 신비한 능력을 통해 사자들이 다니엘에 대해 전혀 식욕을 느끼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다니엘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천사를 통해 사자들의 입을 막으신 하느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전부 다 이해될 수 없는 분이시다(로마11,33; 신명29,29참조).
한편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신 것이 두 가지 이유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는 다니엘이 하느님 대전에 무죄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다니엘이 다리우스 임금에게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그분 앞에서'에 해당하는 '카다모히'(qadamohi; before Him)는 '하느님 앞'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나의 무죄함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라는 표현과 함께 사용되어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고 당신 대전에 의롭게 살아가는 신실한 자들을 반드시 구원하여 주신다고 하는 다니엘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인간 임금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다니엘을 보호하는 것에 실패하였지만, 살아계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의롭게 사는 다니엘을 구원하시는 데에 결코 실패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대전에 신실하기 위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는 다니엘을 구원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다니엘의 의로움이라는 양면을 임금과 여러 고발자들 앞에서 분명히 입증하셨다.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루카21,20-28)
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 적군 로마에게 포위될 것을 말씀하신데 하느님의 뜻을 적대하는 곧 사람의 욕망, 뜻을 만족시켜주는 그 세상(로마)의 힘, 말(법)이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황폐해질 것이라는 말씀이시다.
현세의 우리의 모습을 보라하신다. 세상화가 되어가는 교회, 우리의 모습이다.
21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 구원의 힘이 없는 세상화가 된 예루살렘에서 나와라. 들어가지 마라 하신다. 빠져 나와 산으로 달아나라 하신다.
예수님이 계신 산이다. 그곳이 우리의 도피처라는 말씀이시다. 죄인들의 도피처가 되시기 위한 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기도 하시는 산이다.
(루가6,12) 12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루가22,39) 39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도피처란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실 우리의 대사제, 예수께서 계신 곳이다.
(민수35,28) 28 살인자는 대사제가 죽을 때까지 반드시 도피 성읍에서 살아야 한다. 대사제가 죽은 다음에야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다.
22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 성경에 예고된 징벌은 하느님의 뜻을 떠난, 버린 그 죄들이 받는 죄의 징벌인 것이다.
23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 잉태는 했지만 낳지 못한 여자, 곧 말슴은 받았지만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하느님의 아들로 우리의 구원자 그 도피성으로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문자 그대로 품고있는 여자다.
젖먹이가 딸린 여자, 아이를 낳기는 했는데 곧 말씀을 깨닫기는 했지만 젖먹이 수준인 여자다.
(히브5,12-13) 12 사실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벌써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아직도 하느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를 *다시 남에게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이 아니라 젖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3 젖을 먹고 사는 사람은 모두 *아기이므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에 서툽니다.
=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신앙은 종교 행위등,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려 애쓴다. 스스로가 도피성을 쌓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대신 죽어줄 구원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땅의 의로움, 곧 사람의 열심으로 얻을 수 있는 구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옳고 그름, 곧 말씀을 받을 때, 가르침을 들을 때. 사람의 뜻으로 주는 그름과 하느님의 뜻으로 주는 오름을 분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도피처가 없다. 도피처가 어디 있는지, 도피처가 되어 줄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임신한 여자, 깨달음이 젖먹이 같이 분별 못하는 여자, 모두 불행한 것이다.
24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 다른 민족, 세상의 삶을 사는 한, 하늘의 참 평화는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태6,7)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 하느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빈말 기도이다.
25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26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 말씀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지 못한 여자, 그래서 말씀에서 피신처를 찾지 못한 여자, 자기행위 자기 열심을 의지하는 여자에게서 이다. 그런데 그 모든일이 ,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라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씨)을 하느님의 뜻으로 깨닫지 못하도록 빼앗아 먹는, 그래서 구원을 못 받게 하는 하늘의 새, 사탄이다.(마르4,4 14참조)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탄, 그들의 그 거짓된 일을 더 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말씀이시다. 그들의 거짓된 말, 가르침이 힘을 쓸 수 없는 구원의 완성의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이다.
27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 비를 품은 구름이다. 곧 하늘의 물, 말씀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구원의 진리, 그 말씀으로 오시는 것이다.
28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아멘.
(이사55,10-11) 10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11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오늘 말씀)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아멘!!!
연중 제34주간 목요일 복음(루카21,20~28)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침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7~28)
루카 복음 21장 27절은 예수님의 영광스런 재림을 직접적인 어휘로 묘사하고 있다.
루카 복음 21장 25절과 26절은 종말에 두려워 떨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반면에, 21장 27절은 그리스도께서 권능과 큰 영광으로 오시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사실 21장 27절은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구절로서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의 재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모습은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습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사도1,9~12), 하늘로 올라가실 때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재림 때에도 동일하게 재현될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루카 복음 21장 28절의 '이러한 일들'로 번역된 지시 대명사 '투톤'(tuton; these things)이 무엇을 가리키는 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나타나는 우주적 징조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재림 시기의 정확한 때와 시간을 알 수 없지만, 말씀에 예언된 나타나는 징조들을 통해 그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재림의 시간에는 사람들이 극단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일텐데, 그것은 그 재림의 날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벌에 처해지는 두려움과 고통의 날이 될 것이며, 믿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완전한 기쁨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로 권고하신다.
이 표현은 공관 복음의 병행 기사에서 루카 복음에만 나온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천사를 보내어 선택하신 이들을 모으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나온다(마태24,31; 마르13,27).
이러한 차이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가 마지막 날에 하실 예수님의 일을 중심으로 기록하였고,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말하자면,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사가의 시선은 하늘에 있었고, 루카 복음사가의 시선은 땅에 있었다.
루카 복음사가가 이렇게 기록한 것은 특별히 예수님을 따름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 용기와 격려를 주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허리를 펴고'라는 뜻으로 번역된 '아나큅사테'(anakypsate; stand up)의 원형 '아나큅토'(anakypto)는 '스스로 일으키다','치켜 올리다'는 뜻이다.
그러나 비유적으로는 사람의 정신이나 원기를 '돋우어주다','고무시키다'는 뜻도 있다.
그리고 '들어라'로 번역된 '에파라테'(eparate; lift up)의 원형 '에파이로' (epairo)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 즉 '손'(1티모2,8)이나 '머리'등을 '높이 들어올리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의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징조를 볼 때, 신앙인들은 머리를 들고 그 징조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주님의 재림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 두려움으로 숨을 곳을 찾게 될 것이지만, 신앙인들은 그 때에 세상의 모든 것에 미련을 두지 말며 세상적인 관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새롭게 펼쳐질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