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3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정의의 하나님 》
말 2:17
<하나님을 아버지 삼기가 천만다행입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 참 무섭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끔 섬찟할 때가 있습니다.
옛 어른들이 “천벌을 받을 놈”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했습니다.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말하게 된 배경에는 “하나님 참 무서운 분이다”가 있을 겁니다.
인생을 살다 보니, ‘하나님의 징벌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구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 아울러 떠오르는 ‘믿음’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어 주셨으니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고백할 때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해도 끝까지 아들 편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
이 말은 “하나님은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주신다”라는 의미입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원리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아들로 삼고, 끝까지 지지해 주시는 거지요!
그래서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한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자식이 어디가서 잘못하면, “저거 저거, 뉘집 자식이야?”합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교회 다니는 것들 맞아?”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내 편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녀답게 평생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겠습니다.
☞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의 죄 세 가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이들이 이스라엘, 유다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못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다가 하나님을 영화롭게는 고사하고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고 나옵니다.
(17절)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유다는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라고 말라기 선지자가 분명히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괴로워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송구영신 예배때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인격적으로 교제”를 설교했습니다.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괴로워 하시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괴롭게 했다!” 말라기 선지자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 괴로우신가?’ 잘 들으시고 은혜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첫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혀 드렸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를 형통케 하신다!”
셋째,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유다가 이렇게 세 가지 말을 함으로써 하나님이 괴로워하십니다.
첫 번째 나온 말이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혀 드렸습니까?”
아버지가 속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안 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들이 말합니다.
“제가 아들로서 이만큼 했으면 됐지, 얼마나 더 해야 합니까?” 꼭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가 속 상하시고, 괴로워하시는 것 같으면, 조심하면서,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자기 성찰은 안 하고, “얼마나? 어떻게 더 잘 해야 하는데?” 이렇게 대들었습니다.
누가요? ~ 저와 여러분들이!
본문에는 유다가 그렇게 했다고 나오지만,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대들지 말고 나를 돌아봅시다!”
<악인의 형통에 대하여>
말라기 선지자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에 활동했습니다.
2,500년 전, 그때, 유다인들이 하나님을 향해 불평했습니다. 둘째입니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선하게 사는 자보다 악하게 사는 자를 더 형통하게 하신다’ 이 뜻입니다.
줄여 말하면, ‘악인의 형통’입니다.
성경에 단골로 등장하는 신학적인 주제 중 하나입니다.
2,500년 전 유다도 이것을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너희의 이 불평이 하나님을 괴롭게 한다.’ 말라기 선지자의 선포입니다.
우리가 언뜻 보기에 잔꾀를 부리는 사람이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악하게 사는 이들이 더 성공하고 출세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이런 현상은 분명히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플랜 B]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결코 악인을 형통케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알고, 2,500년 전 유다가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아야 합니다.
섣부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악인이 형통하는 듯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형통케 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 저는 어제 ‘서울의 봄’ 두 번째 보고 왔습니다.
개봉하는 날 아내와 함께 관람하고, 해를 넘겨 2번째 봤습니다. 참 재밌는 영화입니다.
‘서울의 봄’ 이 영화를 보면서 젊은 세대가 ‘심박수 첼린지’라는 것을 했습니다.
스마트 시계를 차고 영화를 보면서 ‘어느 대목에서 심장이 가장 빨리 뛰었느냐?’
화가 난다는 이야깁니다. 왜 화가 납니까? 다름 아니라 ‘악인의 형통’ 문제입니다.
전두광이가 아군끼리 충돌시키면서 정권을 잡아서 나라를 주물렀습니다.
전두광이의 형통은 분명히 악인의 형통입니다. 그러니 화가 납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분명히 이렇게 원망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살아계십니다.
대통령을 두 번이나 해 먹고, 천문학적 규모의 부를 축재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악인의 형통’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전두광이의 유골, 지금 갈 곳이 없습니다.
☞ 죽어서 땅에 묻혀야 하는데, 삼천리 반도에 전두광 유골을 묻을 곳이 없습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첫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혀 드렸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를 형통케 하신다!”
셋째,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우습게도 전두광이 대통령 하던 시절 그가 외친 말이 “정의사회 구현”이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깁니까?
가장 정의를 짓밟은 자가 정의사회를 구현하겠다는 것입니다.
전두광이 아마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많이 해처먹은 대통령입니다.
그래놓고 ‘정의 사회 구현’
그 다음을 이은 ‘노태건’ 노태건 재임중 슬로건이 뭐였지요? “보통 사람들의 시대”
참으로 웃깁니다. 보통 사람들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자가 ‘보통 사람’이래요!
☞ 이러한 현실을 하나님과 결부시켜 이야기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괴로워 하십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함부로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이렇게 떠들어대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괴로워하십니다.
첫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혀 드렸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를 형통케 하신다!”
셋째,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이렇게 떠들어대면 하나님이 괴로워 하십니다.
전두광이 죽어 유골이 갈 곳이 없습니다. 그의 아내 역시 갈 곳이 없을 겁니다.
☞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할렐루야~
<강홍모 목사 vs 최순영 장로>
제가 [너 알아? 전주대학교 – 설립자 강홍모 행전]을 2022년 3월에 펴냈습니다.
그 책의 두 주인공은 영생학원 강홍모 목사, 신동아학원 최순영 장로입니다.
1984년, 최순영 장로가 영생학원을 깃털도 안 뽑고 집어삼켰습니다.
30년간 가꾼 영생학원 네 개 학교 {전주대학교, 비전대학교, 영생고, 전주사대부고}!
전두광 정권을 등에 없고 꿀꺽 했습니다.
강홍모 목사님이 그 이후에 겪은 고초, 피눈물 납니다.
교회는 화재가 나서 불타버렸습니다. 그리고 쫓겨났습니다.
강 목사님 사택은 법원 집달리가 들이닥쳐 세간살이를 마당에 끌어냈습니다.
담장을 허물고 안방 벽을 깨부셨습니다. 사모는 거기에 충격을 받아 소천합니다.
1984년 영생학원을 삼킨 최순영 장로, 1999년에 어떤 일을 당합니까?
1999년 당시 신동아그룹은 재계서열 24위였습니다.
계열 기업 22개, 자산규모 19조 7천억원, 연 매출 9조 2천억원입니다.
그런데 1999년 김대중 정부에 의하여 몽땅 뺏깁니다.
붙잡혀 들어가서 8개월 살고 나와보니 탈탈 털리고 거지가 되어있습니다.
거지만 되었으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추징금 수천억 원이 부과되었습니다.
월간 조선 2009년 3월호에 소상히 나옵니다.
최순영씨가 8개월 살고 나와보니, 자기집 소파 냉장고가 길거리에 나와 있습니다.
길거리에 내놓고 경매에 붙여졌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1984년 강홍모 목사님의 집기들이 마당으로 주차장으로 팽개쳐졌습니다.
딱 15년 지나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소파 냉장고가 길거리에서 경매처분됩니다.
어때요?
이런 걸 기시감이라고 해야 합니까? 인과응보라 해야 합니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최순영 장로가 1984년에 강홍모 목사에게 한 일은 기억 못합니다.
자기가 신동아그룹 빼앗긴 억울함만 이리저리 다니면서 토로합니다.
자신이 강홍모 목사님에게 한 일은 까맣게 모릅니다.
최순영 장로가 자신의 억울함을 간증하는 동영상이 몇몇 있습니다.
그것을 듣다보면, 강홍모 목사님이 당한 것의 복사판입니다. 똑같습니다.
1984년에 복사판으로 피해 줬던 일, 복사판인데, 그것을 왜 떠올리지 못할까요?
최순영 장로가 살아생전에 자신이 강홍모 목사에게 한 일을 회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그것을 회개하고 가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 인생 80년, 90년,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한없이 깁니다.
이 인생동안에 자기가 남을 힘들게 한 일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오기도 합니다.
섬짓합니다. 정말,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구원>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했던 2,500년 전과 지금,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투덜대기를,
첫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괴롭혀 드렸습니까?”
둘째,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를 형통케 하신다!”
셋째,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오늘날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 이와 똑같이 생각하고 외치고 떠들어댑니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우리가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하나님은 끝까지 나의 편이 되어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법입니다.
요즘 한국사회,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 변호사로 무죄판결을 이끌어냅니다.
세상 법정에서 무죄로 판결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 됩니까?
그것은 잠시잠깐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아버지가 되어주심으로 구원을 완전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에 누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영화롭게 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한 사람이 살아생전에 죄값을 치르게도 하십니다.
만일 그 사람이 한 평생에 자기 죄 값을 치르지 못했다면 죽어서라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우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형통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괴롭게 했나이까?” 이 말은 금기어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성령을 탄식하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품어주시지 않고는, 이 죄악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