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춘 시인의 시집 『달그락, 봄』
책소개
시집 『달그락, 봄 』은 자연과 인간의 내밀한 교감을 다루고 있다. 탈인간 중심의 시선으로 화자가 자연을 호명하는 발화 방식은 장영춘 시의 서정을 개성적으로 건설하는 시적 장치이다. 시에서 시적 화자는 자연사물을 폭력적인 눈길로 재단하거나 감정으로 윤색하지 않는다. 때문에 인간과 자연은 경계를 넘어서서 혼융되는 세계를 창안한다. 또한, 나무, 들꽃, 물매화, 숲' 등의 의인화된 자연 사물은, 시적 화자가 잠언과 같은 생의 진실을 인식하는 동기를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시에 다수 등장하는 자연물은 화자의 과거 아픈 경험의 서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각이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으로 감각의 전이와 결합을 통해 고통의 서사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구체적 사물 이미지로 변주되고 있다. 장영춘의 시세계는 감각의 전이와 시적 화자의 개성적인 발화 형식으로 소외된 이들을 호명하고, 자연과 인간의 육체가 뒤섞이는 혼융의 세계인 동시에 우주적인 공간으로 확장을 시도한다. 이 시집은 사물이 우리에게 건네는 따스한 흰 손처럼 "사람도 섬이 되는 그런 날의 아름다움, 생의 비의(秘義)를 미문으로 정확하게 겨누고 있는 시집이다.
・서안나(시인)
약력:
장영춘
2001년 《시조세계》 등단,
제주작가회의, 한국작가회의, 제주시조시인협회 회원.
시집 『쇠똥구리의 무단횡단』, 『어떤 직유』, 『단애에 걸다』,
현대시조 100인선 『노란, 그저 노란』.
sullim8034@hanmail.net
시인의 말
중산간 길을 걷다가 안개에 갇혔다
숨 가쁘게 걸어왔던 길들도 모두 지워지고
덩그러니 중심을 잃고 미로에 선 나
어디로 가야 하나? 뒤를 돌아봤지만
아직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며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책장을 정리하다
한 권 두 권 차오르는
책꽂이를 보면서
지나온 흔적만큼 커지는 미련을 두고
이제는 미룰 수 없어 정리를 시작한다
언제 그 어디쯤
읽다 만 페이지에
누렇게 손때 묻은 책장을 넘기다가
밑줄 친, 한 문장 속의 따뜻했던 위로여
그날 그 시간이
오롯이 재생되어
살며시 단어 한 줄 가슴에 받아 안고
잘 가라 어제를 노래하던,
노란 잎새 수북하다
어머니 숲
사막에 꽃 피우는 낙타 풀 가시처럼
언제나 바람 맞서 궁굴리며 궁굴리다
하나둘 비워내 가며
가벼워지는 숲이네
늦가을 존자암 무게 진 산 중턱
푸르게 푸르게 푸르게 더 푸르게
우듬지 햇살을 잡는 상수리나무 어머니
한 번도 제 둘레를 재어본 적 없는 당신
검버섯 핀 손등 아래 염주 알 굴리는
어머니 야윈 생애가
곧추선 적 없었네
산방산, 그 자리
누가 저 산중에 돌의자를 빚었는가
한라산 봉우리로 만들어진 산방산엔
언제나 목젖이 부은
까치들이 살고 있지
메아리로 가득 찬 그 길 위에 마주 서면
해종일 기다려도 너는 다시 오지 않고
발갛게 노을 속으로
새 한 마리 날아간다
밤마다 다시 돋는
의지에 찬 별빛 따라
가쁜 숨 몰아쉬던 설문대할망 신선의 자리
산방산 선인 탑 바위, 턱을 괴고 앉았네
빛의 벙커
-반 고흐전
툭툭 찍은 점들이
어둠 속에 길을 낸다
붓자국 가는 곳마다 길이 되고 숲을 이뤄
밀밭에 까마귀 떼들 하늘을 날아오르는
날마다 꿈을 꾸며
저 들판을 달렸었지
지는 해 온기를 담아 끊임없이 덧칠해도
허기진 삶의 모퉁이 소용돌이로 떠밀리는
검푸른 하늘에는
그래도 태양은 떴다
밤마다 별똥별이 속절없이 떨어져도
방안의 해바라기꽃 피다 지고, 피다 지는
달그락, 봄
기다린 당신의 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겨울 골목길에 발소리도 낮추며
살아서 돌아오리라 울먹이던 아버지
몇 번의 계절 앞에
당신은 오지 않고
무작정 찾아든 숲, 빗금 친 날들 사이
풀뿌리 근성으로 견딘 발자국이 뜨겁다
꽁꽁 언 낮과 밤
봉인된 시간을 풀며
달그락 숟가락 소리, 얼음장 녹는 소리
드디어 재회를 꿈꾸는 얼음새꽃 떨리는 손
팽목항에서
미안하다, 미안하다 고개를 떨구다 본
어느새 바다를 지운 아이들이 웃는다
종이배 출렁거리며 섬 하나를 건넌다
해설 :
결핍의 시간,
충일의 욕망
임채성 시인
인간은 고독감과 고립감 속에서 그리움을 느낀다. 그리움의 대상이 떠나버린 시·공간에는 적막함과 고요함만 감돈다. 그 틈을 비집고 자라나는 공허함과 아쉬움은 불특정 다수를 바라보는 시각에 간절함과 애잔함을 더한다. 장영춘 시인은 바로 이 없는 것들과 사라지는 것들, 즉 부재하는 존재들에 대한 성찰과 자각을 통해 자기 삶의 의미와 지향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있다. 인간의 근본적인 고독과 한계로 인한 결핍으로부터 그것을 스스로 채우려는 욕망의 발화, 그 내적인 역동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단애에 걸다』 이후 6년 만에 내놓는 이번 시집 『달그락, 봄」에서는 인간의 본성에 기반하여 부재와 결핍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을 회복하려는 욕망의 현시화(顯示化)를 시도하고 있다. 이별 혹은 사별로 인한 그리움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일상에서의 자아와 근원적인 자아의 단절을 해소하려는 시도에서부터 자아와 타자의 불통을 넘어서려는 분투에 이르기까지 그 상관관계는 다분히 복합적이다. 기억 너머에 있는 그리움의 대상은 대부분 비가시적이라서 언어로 재현하거나 포착할 수 밖에 없는 부재의 대상이다. 따라서 장영춘 시인의 시조는 부재하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재현 할 수 없는 것은 언어로 가시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장영춘 시인에게 시조는 자아와 세계를 관계 맺으려는 그리움의 알레고리이자 갈라지고 멀어진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욕망의 형상화라 할 수 있다. 현존하는 부재와 부조화 속에서도 그리움에 관한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시인에게, 떠나버린 시간과 그 시간 속 존재들에 관한 추념이기도 하다. 삶의 연대기를 거슬러 삶의 진정성과 존재의 지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시적 사유는 역사에 매몰당하면서도 영원을 지향한다. 이는 곧 관계의 해체가 가져온 존재론적 결핍과 역사적 일그러짐을 뛰어넘어 삶의 본원을 회복하려는 갈망으로 이어진다. 이 시집은 세 개의 큰 얼개로 구축되어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현재적 소환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로 구현되는 육친에 관한 그리움이고, 또다른 축은 부재와 단절에 이르게 된 역사적 사건의 상상적 재현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부재와 결핍의 상황에서 벗어나고픈 강렬한 욕망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시조를 통해 그와 같은 관계성의 간극을 넘어서려는 시인의 시적 태도는 대단히 진중하고 견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