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고모
셋째 고모가 돌아가셨습니다. 서너 해 동안 요양원에 계셨는데 며칠 전 갑자기 심정지가 와 혼수상태에 계시다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입니다. 연세도 팔십을 넘겼으니 그만하면 살 만큼 사셨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백 세를 산들 어찌 미련이 없겠습니까.
그럼으로써 아버지 항렬의 다섯 남매가 모두 세상을 떴으며, 한 세대가 가고 우리 집에서는 내가 제일 어른이 되었습니다.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삼 일 내내 제일 큰 어른으로서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고모가 친정 동네에 와 산 까닭이기도 하지만 시댁 사람들의 왕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친정 조카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종들도 제 친형처럼 의지하고 지내온 터라 스스럼없이 장례절차 등을 물어옵니다. 외사촌인 우리 형제들도 끝까지 장례에 참석해 일이 그르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내가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1950년대 중후반이었습니다, 고모가 시집을 가셨는데 당시에는 혼사는 물론 큰일을 모두 집에서 치를 때였습니다. 혼례를 마치고 신행할 때 시발택시라고 불리던 승용차가 마당에 와 섰죠. 눈치가 빤한 나는 울고불고하며 고모가 떠나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던 집안에 내가 태어나자 아직 미혼이던 셋째 고모와 막내 고모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고모들은 나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구구단을 외우게 하면서 취학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런가 하면 딱지를 접어주거나 구슬을 사다주며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게도 했죠.
업어주고 안아주며 나를 키워 정이 흠뻑 들었던 고모가 시집을 가게 되자 헤어진다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비록 철부지였지만 고모가 없으면 아쉬움이 생길 것이라는 걸 알았던 듯합니다. 몇 해 후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시켜 동네에 있는 밭에 집을 한 채 짓고 고모 내외를 들였습니다. 그것이 근 육십 년이 다 된 일인데 그 이후에 친정 동네에서 살다가 삶을 마감한 것이지요. 그 바람에 커서까지 친정 큰조카에 대한 사랑은 끊임없이 이어졌던 것이죠.
상제인 고종사촌들이 모여앉아 제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듣기로는 어림없는 이야기입니다. 모성애야 본능적이니 그렇다고 쳐도 시집가기 전 한 식구였을 때 나에게 베풀었던 사랑은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비길 수 없습니다. 언제나 고모는 나에게 네가 잘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잘되어야 한다는 말이 부와 명예와 권력까지도 가질 수 있으면 모두 가져야 하며, 아울러 인격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였음을 알겠습니다. 물론 고모가 소망했던 대로 되지는 못했어도 남에게 손가락질받는 지경에도 있지 않으니 이만하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장지로 떠나기 전날 밤 고모의 영정 앞에서 당신의 사랑에 감사함을 표하면서 이만하면 되었느냐고 물었지요. 어차피 돌아가신 분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을 하지는 못한 것이 분명해 고모를 안타깝게 했을 테지만 그럭저럭 사람답게 산 것은 고모의 소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가끔 고모께서 ‘네가 그러기에 마음이 놓인다’는 말씀도 여러 번 들었는데 의미인즉, 그만하면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승에서의 인연은 모두 끝이 났습니다. 어제로 고모의 다섯 남매가 모두 만나게 된 것이지요. 무슨 말씀을 나누었는지 궁금해도 알 길이 없습니다. 추측하건대 대화를 나누었다면 그 내용이란 게 빤하지 않겠습니까. 우선은 그동안 없는 살림에 세상살이하느라고 고생 많았다는 인사와 위로를 시작으로 남겨진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대화가 이어질 겁니다. 살아봐서 아는 이야기를 다시 할 까닭이 없지요.
그러니 남은 자식들은 어찌어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이야기할 것이 분명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자식 걱정뿐인데 정작 산 사람은 그걸 알 까닭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이렇게 상상하는 것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늘 걱정만 끼치는 존재인가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지요. 그런 말들은 부모의 자식 걱정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짚어주는 말이건만 우리는 우스갯소리 정도로 넘기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가 나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기억하면 부모 노릇이 한결 수월합니다. 그것을 알기만 한다면 자식 노릇도 쉬워질 것입니다. 그걸 잘 알 수 없으니 ‘내리사랑’이란 말이 생겼나 봅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 곁에서 사셨던 부모님이나 고모나 모두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내 부모에게 혹은 자식에게 그렇게 하도록 해주셨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게 할 일이 남았다면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아이들에게 전하고 가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인데 이 또한 배우고 익혀 몸에 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