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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는 공동체
창 11:1-9
이 시간 우림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성도님들 평안하신가요? 성도는 ‘평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완전한 평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평안이 우리 안에 있음에도 평안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이,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평안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입니까? 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상황 자체보다 그 상황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 때문에, 그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때문에 평안할 수 없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상황이, 내가 겪는 상황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에 평안하지 못합니다. 모든 일이 나의 목적대로, 나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평안은 고사하고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렇기에 평안하지 못함, 불안,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상황이 아니라, ‘나의 목적’, ‘나의 뜻’, ‘나의 원함’, ‘나의 욕망’이 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하고, 저렇게 되어야만 하고’ 그래야 맘이 편안하거나 덜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성도의 신앙이 성숙할 수 있으려면 꼭 이런 것들이 있어야 하고, 이런 것들이 이루어져야 하는 등의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이루어야 하는 기준을 각자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죠. 목사는 이래야 하고, 성도는 이래야 하고, 공동체는 이래야 하는 등 여러 가지 기준을 각자 삶의 자리에서 체험하고 익힌 경험과 지식을 통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과 기준이 나와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거나, 또는 이런 해야 함과 이루어짐이 개인의 기준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느끼는 경우,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렇습니까? 내 생각과 기준들이 정말 나와 나의 가정과 우리 공동체 나아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도움이 되는 걸까요?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도움이 되었던가요? 혹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실패한 일일까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과 일들인지 아니면 불안과 두려움에서 나오는 때로는 자기만족을 위한 목적과 일들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많은 교회와 성도 또한 우리 생명사랑교회 역시도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더 성경과 신앙에 기반한 무언가를 말하고 생각하기보다, 구분하는 것 자체가 더 모호해지는 세상이지만 세상의 논리와 가치에 기반해 우리의 목적과 일들을 계획하는 경우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기에 공동체는 어떤 공동의 목적을 세우고, 행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조율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요해 보이고, 반드시 해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일이 세상의 논리와 가치에 기반해서 또는 불안과 두려움에 비롯해 우리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은 ‘허무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나누는 말씀을 통해 교회 안에서건 교회 밖에서건 ‘이것이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많은 목적과 계획, 기준 또는 우리의 욕망이 허물어지고, 우리의 생각과 삶이 하나님께 조율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의 1-4절을 보시겠습니다. “1 처음에 세상에는 언어가 하나뿐이어서, 모두가 같은 말을 썼다. 2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 시날 땅 한 들판에 이르러서,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한곳에 정착을 시도했고, 정착하기 위해 도시를 건설하고, 탑을 쌓는, 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는 동시에 더 이상 흩어지지 않으려 노력하는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정착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노력,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욕망과 노력을 ‘틀렸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안정적인 정착과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인간의 욕망과 노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명령하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7-28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하셨다.”
이 말씀대로 하려면, 정착은 시기상조였던 것입니다. 아직은 정착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더 많이 흩어져서 땅을 정복하고 번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하나의 언어를 가진 이들은 소통을 통해 정착하고, 도시를 만들고, 탑을 쌓자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습니다.
한 마음, 한 뜻을 가지고 움직였지만, 방향성이 틀렸습니다.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틀렸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들 안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읽는 새번역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4절을 영어 번역으로 살펴보면, “4 Then they said. ‘Come, let us build for ourselves a city and a tower with its top in the sky to make for ourselves a name. lest we are scattered over the face of the whole earth.”
‘우리 이름’이라는 표현뿐만 아니라 ‘우리 힘으로’라는, 하나님이 아닌 더 인간중심의 적극적인 표현이 적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더 이상 살피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욕망인 정착에의 욕구, 인정에의 욕구가 더 앞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조율되어 생각하려 하기보다 내 생각, 우리의 생각이 더 중요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자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공동번역으로 5-6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야훼께서 땅에 내려 오시어 사람들이 이렇게 세운 도시와 탑을 보시고 생각하셨다. "사람들이 한 종족이라 말이 같아서 안 되겠구나. 이것은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 앞으로 하려고만 하면 못할 일이 없겠구나.”
‘사람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에 지나지 않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좋을 대로, 자기의 욕망과 가치와 기준에 충실해 살려 하는 일의 시작에 관해 하나님은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흩으셨습니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우리의 힘으로’ 하고, ‘우리의 이름을’ 알리고자 했던 인간의 노력은 실패했지만, ‘우리가 내려가서’라고 말 한 하나님의 일은 성공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극명하게 나뉩니다. “8 주님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흩어지지 않기 위해 애썼던 모든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자신들이 정착하려던 땅에서 하나님에 의해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듯이, “22 주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아라, 이 사람이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서, 생명나무의 열매까지 따서 먹고, 끝없이 살게 하여서는 안 된다." 23 그래서 주 하나님은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쫓으시고, 그가 흙에서 나왔으므로, 흙을 갈게 하셨다.”(창세기 3:22-23)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이 추방당했듯이, “1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 너의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 11 이제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땅이 그 입을 벌려서, 너의 아우의 피를 너의 손에서 받아 마셨다.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이제는 너에게 효력을 더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 땅 위에서 쉬지도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16 가인은 주님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았다.”(창세기 4:10-12, 16)
정착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높은 탑을 만들어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려 했던 이들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렇게까지 하실 일인가?’ 싶은, 이들이 좇으려 했던 목적과 가치는 하나님이 이들을 통해 이루시려 했던 목적과 가치와 달랐기 때문에 추방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얼마든지, 우리 공동체도 얼마든지 오늘 본문에서 추방당한 이들과 같은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들과 닮아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고, 내 힘으로 하려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지 않고 나의 이름과 우리의 이름을 알리려 하지는 않았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우리 자신과 우리 공동체에게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가르쳐 줍니다.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창세기 12:1-2)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스스로 정착하길 원하며 우리 힘으로 이루려 했고, 우리 이름을 알리려 성을 쌓으려 했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하나님의 명령으로 안정되고 익숙한 것을 스스로 허물어 떠난 아브람에게는 큰 민족, 복, 이름을 떨치게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우리 스스로 하려고 하면 실패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는 일을 할 때는 성공합니다.
이때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남습니다. ‘그럼, 대체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은 무엇이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어떻게 찾지?’
우리가 쌓은 것들을 먼저 허물면, 그리고 기다리면 그때 하나님이 나와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바가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만, 나의 목적과 욕망과 가치 등으로 가리어져 있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니 나와 우리가 쌓은 것들을 먼저 허물어야만 합니다.
익숙했던 것,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 이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 등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부터 허물어 내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이 불안하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고 왜 불안하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움직인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마지막 본문의 말씀입니다. “9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바벨’이라는 이름은 경건하지 못한 자, 어리석은 자의 실패를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기념비가 될 예정이었으나, 그 대신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키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생명사랑 공동체는 이들과 다르게 먼저 허물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살아냄으로 아브라함이 누렸던 복과 은혜를 경험케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은 갑작스럽거나 빨리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우리 안에서 올라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는 것은, 결국 이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익숙하고, 당연한 길이 아니라 낯설고, 돌아가는 것 같은 느린 길일지라도 이 길을 저와 성도님들이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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