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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에서 제2막 인생을 시작하며
2005. 06. 08 작성
♬ 배경음악: Nini Rosso - Flee As a Bird To Your Mountain, 追憶 ♬
이제 25년간의 직장생활을 마감합니다.
처음 입사해서 부산지점에 근무할 때
모 과장님께서 저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씨, 자네는 회사를 잘 못 들어온 것 같애.
내가 보기엔 교편을 잡았던가, 종교계에 있어야 할 것 같애"
그 때는 왜 그런 말을 하시는가 서운한 점도 있었지만 지금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과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가끔씩 내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 과장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제 2막인생을 시작하려는 지금,
하프타임 시간에 저의 내면에서 들려왔던
그 소리에 따라 살수 있도록 준비하렵니다.
▲ 직장생활을 처음 시작하여 영업을 하던 담당지역,
그리고 아내를 만났던 극동호텔과 해운대 호텔이 있었던 해운대 모습(1970년대 말)
해수욕장 끝에 동백섬이 보인다.
사진 중간에 보이는 건물이 극동호텔이고 그 옆에 해운대호텔이 있었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인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李炯基) 의 낙화 중 -
가을이 오면
여름날 마음껏 목청을 돋우어 노래를 부르던 잎새들이
손을 흔들며 안녕을 고하며 떨어집니다
우리들의 삶이란
만남과 떠남을 위하여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에
우리가 함께 하는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며 안녕을 외친 후에도
우리들의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게 기억될 것입니다
- 만남과 떠남을 위하여(용혜원) 중에서 -
직장생활을 하면서 속으로 자주 낭송해 본
'어느 직장인의 기도문' 구절....
매일 아침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시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나로 인하여
남들이 얼굴 찡그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이 직장을 그만 두는 날 또한
생을 마감하는 날에 과거는 전부 아름다웠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만나고 헤어지고 혹은 다투고 이야기 나눈 모든 사람들이
살며시 미소 짓게 하여 주옵소서
힘이 들지만 툴툴 털고 일어나십시오.
진정한 자기 성장, 자기 완성은 떠남의 경험에서 시작됩니다.
완전히, 잘 헤어질 줄 아는 것, 만남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동안 여러모로 도와주신 선배님들과
후배사원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저 때문에 상처를 받으신 분들이 있으시다면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지만 앞으로도 오비맥주의 발전을 위해서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으로 제가 즐겨 낭송했던
'어느 직장인의 기도문'을 올려드립니다.
어느 직장인의 기도문
매일 아침 기대와 설레임을 안고 시작하게 하여 주옵소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나로 인하여
남들이 얼굴 찡그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상사와 선배를 존경하고 아울러 동료와 후배를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아부와 질시를, 교만과 비굴함을 멀리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루에 한 번쯤은 하늘을 쳐다보고
넓은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시고
일주일에 몇 시간은 한 권의 책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보낼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한 가지 이상의 취미를 갖게 하시어
한 달에 하루쯤은 지나온 나날들을 반성하고
미래와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시인인 동시에
철학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작은 일에도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함과
큰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을 지니게 하시고
적극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실수를 솔직히 시인할 수 있는 용기와
남의 허물을 따뜻이 감싸줄 수 있는 포용력과
고난을 끈기있게 참을 수 있는 인내를 더욱 길러 주옵소서.
직장인 홍역의 날들을 무사히 넘기게 해 주시고
남보다 한 발 앞서감이 영원한 앞서감이 아님을 인식하게 하시고
또한, 한 걸음 뒤쳐짐이 영원한 뒤쳐짐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자기 반성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시고
늘 창의력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매사에 충실하여 무사안일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매일 보람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하루를 마감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이 직장을 그만 두는 날 또한 생을 마감하는 날에
과거는 전부 아름다웠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만나고 헤어지고 혹은 다투고 이야기 나눈
모든 사람들이 살며시 미소 짓게 하여 주옵소서
2004.12 지학남
▲ 위의 글은 회사를 퇴직하면서 사내에 올렸던 글입니다.
▼ 아래의 글은 예수님을 만나 신앙을 키우고 사랑을 나누며 정들었던
나의 갈릴래아인 서울을 떠나며 교우들에게 본당에 올렸던 글입니다.
저는 그 동안 제 마음 속에서 들려왔던 소리를
이제는 실천하려고 합니다.
인생의 전반전을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았다면
지금은 조용히 후반전을 준비하는 하프타임에 서 있습니다.
1년여 많은 생각을 한 끝에 회사생활을 마감하고 하루라도 젊었을 때
후반기 인생을 시작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저의 후반전 인생은 제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이지요.
교육과 신앙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전원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덕소, 양평, 용인, 포천 등도 알아보았지만
가장 적당한 장소가 경기도 여주 라는 생각이 들면서
가족과도 상의하여 여주로 결정을 하였고
마침 적당한 땅이 있어서 매입을 하였고 집을 지었습니다.
전원생활을 하기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하루라도 젊었을 때 그 곳에 정착을 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결정을 하는 과정에 오랫동안
기도와 묵상을 병행하면서 결정한 것입니다.
이사가려는 여주는 수녀원이 4개(성바오로딸, 스승예수의 제자 수녀회,
파티마의 프란치스코수녀회,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가 있고,
양로원과 옛날 공소도 있는 곳으로 아주 산골입니다.
이곳을 선택하게 된 것을 돌아보면
그곳 수녀님 한 분을 우연한 곳(통신성서 연수회)에서 만나고
그로 인해 그동네 할머니를 우연히 만난 일 등
일련의 일들이 주님의 섭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사를 앞둔 요즈음, 여러가지로 걱정과 두려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도 있습니다.
6월 5일에는 도전리 공소에서 신부님, 형제.자매들과 미사도 드리고
인사도 나누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잘 살 수 있도록 님들의 기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셨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형제. 자매님들이 계시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신앙생활에서도 남보다 한 발 앞서감이
영원한 앞서감이 아님을 인식하게 하시고 또한, 한 걸음 뒤쳐짐이
영원한 뒤쳐짐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
생을 마감하는 날에
과거는 전부 아름다웠던 것처럼 내가 거기서 만나고 헤어지고 혹은 다투고
이야기 나눈 모든 사람들이 살며시 미소 짓게 하여 주옵소서
형제.자매님들 영.육간에 항상 건강하시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05. 6
2막 인생을 시작하는
여주 원심동(도전리) 소개
여주읍에서 원주방면으로 15Km에 위치한
경기도와 강원도 도계(경계)마을이며
천혜의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보건복지부가 장수촌으로 지정하였습니다.
특히 조선말 천주교 박해시 교인들이 은신하면서
마을의 터전을 잡은 두메산골 청정마을이기도 합니다.
마을의 주산인 당산을 중심으로 기가 많다고 하며
전국 10대 장수촌의 하나(보건복지부발표)로 길지이며 경기도3대 오지마을인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도전3리 원심동 마을을 소개합니다.
마을 터전을 잡은 조상들이 사람은 모름지기
원심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하여 원심동이라 불리며
주산인 당산 중턱 치마바위 주변에 천년 묵은 산삼 꽃이
여주고을 여강나루 한강 물 속에 간간히 비추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도전리의 지명은 도성촌.탑전동.원심이.전거론리로 불리는 4개의 자연부락 중
도성촌과 전거론리의 앞 글자를 따온 것 입니다.
옛날 천주교 박해시대 때부터 무명순교자들에 의해 형성된
작은 마을이 오늘날까지 신앙이 이어져
유서 깊은 200년 공소로 남아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마을을 한국의 스위스라고 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골골마다 파티마의 성모 프란치스코수녀회 피정의 집,
스승예수의 제자수녀회 피정의 집,
성 바오로딸 사도모후의 집,
장애인들의 쉼터인 라파엘의 집 등이 자리잡고 있으면서
영혼의 피난처, 구원의 기도처로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습니다.
1801년 이른바 신유박해가 한창이던 때, 조정의 관리로 있던 정도마가
동생과 처 그리고 두 아들 등의 식솔을 거느리고,
양평 양동을 거쳐 원주 구제(지정면 판대리)에 정착했습니다.
화전을 일구며 생활하던 정도마 형제는 어느 날 장에 다녀오던 길에
천주교도를 밀고하는 밀정을 만나 부득이 형제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해 여름에 나졸들이 정도마를 잡으러 나타나자
정도마는 급히 산으로 피신하였으나
집에 남아있던 그의 처 임가타리나는
“내가 천주학을 하니 나를 잡아가라”며 남편대신 붙잡혀 순교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정도마는 작은 아들만을 데리고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원심이로 숨어들었습니다.
원심이에서의 첫날, 정도마는 바위 위에서 기도를 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둥글게 이어진 줄처럼 생긴 묵주를 쥐고 기도했다고 하여
그 바위를 ‘줄바위’라고 불렀고
지금껏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도마의 작은 아들은 성장해 3형제를 두었으며
관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외가의 성을 따라 전주 이씨로 변성명을 하고 살았습니다.
이들 3형제 중 재영(아오스딩)이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인
원심이 공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성품이 너그러웠고 겸손했던 그는
항상 마을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농토 개간과 농사짓는 법을 보급하여 추앙을 받았습니다.
이재영 회장이 죽자 강천면에서는 원심이 개발공로자인 그에게
장례지를 제공하고 9일장을 치르게 했습니다.
이 회장 임종 당시 허리에 새끼를 두른 것이 발견되었는데
예수의 생애를 상징하듯
33마디로 매듭지어진 새끼줄이었습니다.
이 새끼줄을 평생토록 맨 허리에 두르고 지낸 탓에
반들반들 윤이 나도록 길이 들어있었으므로
보는 이마다 그의 놀라운 신심에 깊이 감격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원심이.중평동.도성촌 주민의 90% 이상이
천주교 신자인 까닭도 이런 힘에서 유래했을 것입니다.
첫댓글
참 아름답습니다
사계절이 있어 더 풍요롭지요
눈 덮힌 모습도 장관 입니다
장독대의 그림을 보니
그 옛날 우리 집 엄마장독대가 생각납니다
장독대 그림 제가 좀 옮겨 갑니다
그리아시고요
혹여 담에 쓰더라고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세잎 클로버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