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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 21장
출애굽기 21장 이하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약자보호법에 대한 원론적인 공부를 하고자 한다. 소위 약자보호법은 출애굽기 22:20-24, 레위기 19:9-10, 25:1-55, 신명기 14:28-29, 15:7-18, 24:19-22, 27:19 등에서 집약된 표현으로 나타나지만 율법 전체에 깔려 있는 사상이다.
창세기 4:9에 보면 가인이 하나님께 하는 말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오히려 반문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것을 기억하고 계신다. 언약이란 이러한 가인 정신을 배격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즉 아벨을 지키는 하나님의 모습은 약자를 보호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그런 차원에서 일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구원이다.
창세기 12장에서 바로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과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 전쟁에서 승리하고 승리하고 돌아와서 그 승리를 살렘의 멜기세덱을 영접하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돌리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멀리서 온 이방 나그네로 보이는 사람을 환대하므로 그들로부터 약속을 받는다. 그러나 창세기 19장에서 소돔성에 있는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천사들을 해하려고 한다. 바로 그 성에 심판이 임하게 된다. 복의 근원으로서 복의 제공자에 대한 환대는 이것 이외에도 창세기 20장의 그랄 왕 아비멜렉과의 관계와 창세기 26장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이삭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며 창세기 47:7에서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하는데서도 드러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관계에 들어갈 때에 언약의 말씀을 주셨다(20-23장). 이 언약의 말씀은 십계명을 중심으로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율례들로 되어 있다. 여기에 약자를 보호하도록 소위 말하는 “약자보호법”을 포함하고 있다. 약자란 나그네, 고아와 과부, 레위인, 종(노예) 그리고 가난한 자들로 다른 이의 도움이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다. 특히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보호한다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 어떤 자들에게 구원을 베푸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약자보호법이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정신을 가나안 땅(약속의 땅)에서 사회 구석구석까지 확산시키기 위해 있는 것으로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노릇 할 때에 모세를 불쌍히 여겨 살게 하신(2:6)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국가 단위로 적용하기 위해서이다(33:19;34:6). 구체적으로 말해서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제도와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 제도 그리고 십일조 제도 같은 것이 다 약자를 보호함으로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언약 형태로 지속되어야 이스라엘답게 된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이기 때문이다(19:5-6). 국가적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구원의 하나님을 소개할 책임을 가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50년마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왔던 그 상태로 되돌리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됨이란 약속의 땅에서의 언약 준수에 의미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 자체가 약속의 말씀을 어기는 자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언약 위반은 저주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28장에 의하면 축복에 대한 조항과 저주에 대한 조항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피를 뿌려서 행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스스로 파기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25:6-8).
그러나 약속의 땅에서 약자보호법이 무시된 것은, 그것 지키지 않고 자기 힘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다고 여겼던 불신앙에 있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지적하기 위해 이방인들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다. 이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하면서 부르짖을 때에 언약에서 오는 자비와 긍휼임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사사가 동원된 것이었다. 즉 이처럼 언약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할 수 없었던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들이 그 땅에서 보존될 수 있음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인간들이 세웠던 사울 왕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스스로 평등의 상태를 깨뜨렸다. 그러기에 인간의 왕 제도 속에 갇혀있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바로 아는 자이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이런 면에서 사울에게서 고통받고 쫓겨 다니는 약자의 신세가 된다.
그러기에 사울의 왕정 체제 속에서 다윗을 따르는 것이 구원이며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시편에서 다윗이 말했던 원수란 이런 차원에서의 원수개념이다. 즉 언약을 반대하고 언약을 거부하는 차원에서 서 있는 자들로 현실적으로는 언약이 주어진 다윗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자가 바로 원수이다.
그러면 예수님 때에는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등장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제대로 지킨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요 8:44; 마 3:7)과 그들에 합류하여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다윗언약을 완성하는 차원에서 오셨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4:16-24의 예수님의 비유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천국을 잔치로 표현한 것은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사 25:6-9). 그런데 그 천국은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로 채워진다. 이들은 거리와 골목에서 불려온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일정하게 기거할 곳이 없는 버려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천국은 버림을 당한 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버려짐을 당했다고해서 다 약자가 아니다. 이제 약자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곧 예수님 자신이 사람들(세상)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십자가에서 홀로 약자의 저주를 담당하셨기에 천국은 예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정한 약자는 십자가에 버려진 예수님의 운명과 같은 운명에 놓인 자가 가난한 자요, 병신들이며, 소경이며, 약자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여기고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약자이다. 한 마디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가 진정한 약자이다. 이 약자들 속에 주님은 함께 하신다.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고통 당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통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정신으로 율법을 지키는가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가 하는 문제이다. 십자가 자체가 자동적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언약 안에 있는 자의 모습이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기신다고 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울어본 적이 있는 자라야 주님이 닦아주실 눈물이 있을 것이 아닌가?
출애굽기 21:1-11
종(노예)에 대한 규례로 주인의 입장에서 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육년동안 섬긴 종에 대해서 칠년에는 자유하게 놓아주어야 한다. 이는 안식과 관련되어 있다. 안식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상태였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은 것으로 즐거워 하시며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는 그 상태가 바로 생명의 교제로 안식이었다.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안식이 깨어졌고 인간은 죄의 종이 되었다.
제 칠년에 노예를 해방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은 그 율례를 통해 하나님의 안식이 어떤 것인가를 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이 주인에게서 해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종은 문설주에다 송곳으로 귀를 뚫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종은 주인의 다스림 안에서 자유함을 알기 때문에 영원히 그 주인의 소유로써 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종이 여자인 경우에는 평등이 강조되고 있다. 여자 노예를 아들에게 주었으면 그를 딸로 여겨야 할 것이고, 또 여자 노예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가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도 그 여자 노예와의 동거는 지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이란 결코 인권운동이 아니다. 평등은 하나님 앞에서는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가 죄인이라는 고백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노예를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서 종된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었을 때의 모습이 바로 이 종의 모습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건짐받은 것은 종되었을 때이기 때문에 노예를 해방시켜준다는 것은 자신이 종되었던 몸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라는 계시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종이나 상전이나 다 주님께 하는 마음으로 서로 대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엡 6:5-9). 즉 종이나 상전이나 다 구원의 주님을 보여주는 차원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나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서 희생하신 그 희생정신으로 충만해진 자들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1:12-17
사형에 해당하는 규례이다. 사형에 해당하는 자는 살인자와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한 자, 사람을 유괴한 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의적 살인과 과실로 인한 살인이 구분되고 있다. 과실 살인은 도피성이라는 법을 통해서 보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가인의 모습을 배격하는 차원이다.
가인의 모습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분노한 결과가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아벨은 약자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약자를 보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약자에게 힘으로 다가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다시 말해서 살인은 힘으로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 보겠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자체가 약자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대적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부모를 저주하거나 때린 자와 사람을 유괴하는 자를 살인자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당시 부모는 하나님의 언약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부모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것 또는 사람을 유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전달을 좌절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에서도 누차 강조되었지만 이 율례 역시 결코 윤리적인 차원에서 사형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국가적인 사형법 폐지를 주장하는 것이 사랑이요 기독교적인 시각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국가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인 차원에서 악을 저지하도록 주신 권력이다. 그렇다면 사형제도 역시 우리가 왈가왈부할 것이 못된다. 오직 하나님의 손에 맡길 뿐이다. 교회는 복음전파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21:18-36
21:18-22:17은 이웃의 몸에 상처를 입혔을 때와 재산상의 손해를 입혔을 경우와 그것에 따른 보상에 대한 규례이다. 그 규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①사람에게 상해를 입혔을 경우 그 전치 때까지 배상하여야 한다(18-19절).
②주인이 매로 종을 쳐서 죽일 경우 형벌을 받아야 한다((20-21절).
③서로 싸우다 해를 입혔을 경우 그 해한 대로 갚아야 한다(22-25절).
④종의 눈이나 이를 상하게 할 경우 그를 놓아 주어야 한다(26-27절).
⑤소가 사람을 받아 죽게 할 경우 그 소를 죽여야 한다. 주인이 경고를 받고도 이를 방치하여 소가 사람을 죽였다면 소와 주인을 죽여야 하며, 소가 종을 받았을 경우에는 은 30세겔로 배상하고 소는 죽여야 한다(28-32절).
⑥구덩이를 파서 남의 짐승이 빠져 죽을 경우 이를 배상해야 한다(33-34절).
⑦소가 소를 받아 죽인 경우에는 산 소와 죽은 소를 팔아 반분한다(35-36절).
이 규례의 중점은 상처를 입히거나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하여 반드시 적절한 응분의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3절 이하에 보면,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23-25절)고 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대로 원수를 그대로 다 갚으라는 의미로 이해했었다(마 5:38).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하여 더 이상의 가해가 되지 않도록 정당한 보상이 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결국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밝히셨듯이 오른 뺨을 맞으면 왼편을 돌려대고, 속옷을 원하면 겉옷을 줄 수 있어야 하며, 오리(五里)를 원하면 십리를 동행할 수 있고, 구하거나 꾸고자 하면 거절하지 않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표방하는 것이어야 한다(마 5:39-42).
즉 이웃을 원수로 대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웃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자로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는 대상이기에 그 생명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러내어야 할 뿐만 아니라(30절) 이웃에게 손해를 입힐 권리가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갚음으로 나는 죄가 없다가 아니라 내가 사랑을 받았으니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규례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인간이라도 이러한 규례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죄인들이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의 피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산상수훈(마 5-7장)을 통해 구약의 율법 몇가지를 일례로 들면서 인간이 완전하게 준수할 수 없음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로 완성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는 산상수훈 조차도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주시는 율법의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했던 것과 같이 교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워 자기 공로로 극락을 바라보는 불교인으로 만들고 있으며, 교인들은 스스로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수준으로 서로 판단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시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잘 믿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이는 실로 성경의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놀이에 불과하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