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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27 편
올라가는 노래(8) "여호와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본 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120-134) 중 그 여덟 번째 노래이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이 70년 만에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들을 믿었던 것을 회개하면서 솔로몬의 신앙고백을 따라 여호와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모든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헛되다고 고백했다.
성전에 올라가는 자들이 되새기며 고백하여야 할 내용이다.
1. "여호와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1).
지식과 재산과 능력이 늘어갈수록 사람들은 지식과 재산과 능력과 자기 자신을 믿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믿을 때 결국 낭패하고 만다. 집도 나라도 사업도 다 낭패를 당한다.
지금 하나님의 긍휼로 포로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은 그 사실을 절감하며 성전으로 올라 가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가정과 성전과 (여기 집은 가정을 가리킬 수도 있고 성전을 가리킬 수도 있음) 나라와 사업을 위한 수고와 노력이 다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고 고백했다.
가장이 하나님을 무시하면 가정이 망하고 통치자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나라가 망하고 사업가가 하나님을 무시하면 사업이 망한다.
2. "여호와께서 잠을 주시는도다" (2)
인간의 근본적인 행복은 평안에 있다.
여기 잠은 육체적 잠과 아울러 마음의 평안을 뜻한다.
잠과 평안을 잃으면 천하를 얻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여호와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면서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 그리고 그에게 잠을 주시고 평안을 주신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466).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참된 평안과 잠을 주시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게으름의 잠꾸러기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3-5)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중의 하나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자식이다.
가시 같은 자식도 있고 감람나무 같은 자식도 있는데 아름다운 자식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아름다운 자식은 부모에게 기쁨과 힘을 제공한다.
"장사의 수중의 화살과 같다."
자식은 복과 영예가 되기도 한다. 수치 대신 영예가 된다.
결국 인생의 성공과 평안과 행복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시127편의 제목을 "인생의 성공과 평안과 행복" 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생사화복의 비밀
(시 127:1-5)
찬송 185장
시편 127편은 지혜의 대왕 솔로몬의 시로서 인간의 생사화복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이 강하게 드러나 있는 지혜의 시입니다.
내용이 잠언과 유사하고, 그 주제가 뚜렷하고, 문체가 아름다워서 많은 사람들이 애송되는 시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특히 자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손의 강성은 경제적인 풍부와 가문과 나라의 안녕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서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와 권능과 은사의 복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 무엇도 허사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제일주의,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시편 127:1~5, 128:1~6
오늘 우리는 시편 127편과 128편을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주시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교훈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에 계속적인 관심을 갖도록 하는 일입니다.
어릴 때에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솔로몬은 부(富)와 귀(貴)보다 지혜있는 왕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린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더욱이 그의 부친이 되는 다윗 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렇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2-3) 했습니다.
높은 이상을 품고 그의 모든 기업에 하나님을 모시도록 가르쳤습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여기 ‘집’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인류의 역사는 집을 짓는 역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던 그 날부터 서늘한 바람, 어두움의 공포가 인간들에게 집을 짓게 하였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는 것이 집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낫고 보다 튼튼한 집을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이 인간들의 과제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 발전의 기본 요소를 말할 때 인간 생활의 의, 식, 주를 말하기 마련입니다. 이만큼 우리의 쓰고 사는 집이 역사 발전에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인류 문화의 발전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이 쓰고 살던 집을 보면 대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집’이라고 하면 흙으로 쌓아올린 토담집이나, 나무로 깎아 세운 목조건물이거나, 벽돌이나 돌로 쌓아올린 석조건물이나, 철근 콘크리트 빌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웅장하고 장엄한 철학의 집, 과학의 집, 정치의 집, 종교의 집이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과학의 집, 정치의 집, 철학의 집, 종교의 집은 그 나름대로 사람에게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더구나 제각기의 설계도가 있는데 여기에 차이가 생기고 상극이 생겨 이것이 부딪치고 심해지면 혁명과 전쟁으로까지 번졌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집’은 어떠한 ‘집’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말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건축한 왕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 건축의 모든 준비는 그의 아버지 다윗 왕이 다 해 놓았었습니다. 시편 132편 1-5절에 보면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려고 얼마나 애썼는가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소서 저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성취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잠언 16장 1절 이하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너희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희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선한 사업에 열심내는 것은 좋으나 그것 때문에 너무 조급해 하거나, 그것 때문에 공연히 염려할 필요는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시지 아니하시면 사람이 애써서 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됩니다.
둘째, 집은 가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 가정이 이루어 나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느 누구인들 가정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을 위해서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옛날 욥은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 1:4-5) 하였습니다.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셔야만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것도” 실상은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부(富)의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아침에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다른 사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 정도로 부지런하고 열심히 생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그 수고가 헛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기술이 있고 지식이 많다고 꼭 사업을 잘하는 것을 아닙니다.
전도서 9장 11절에 보면 “명철자라고 해서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 곳에 젊은이들이 많이 계십니다. 특히 요사이 입학의 계절이기 때문에 각 가정에서는 어느 학교에 진학을 하느냐 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이 염려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왕이면 일류 대학교에 다 진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입학하신 여러분에게 충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공하는 것은 일류 대학교를 졸업했기 때문에 성공한다는 보장은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을 지키는 데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옛날에 성은 하나의 나라를 뜻했습니다. 더구나 소아시아 지방에는 성(城) 하나가 한 나라로 행세했습니다. 한 나라가 흥하고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막강한 국방력에 있습니까? 발달한 문화에 있습니까? 경제가 성장하는 데 있습니까? 아닙니다.
한 나라의 운명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의미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주셔야 우리 나라가 길이길이 보전될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보다 더 강한 무력이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보다 인구가 많았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 구약 여호수아 7장을 읽어보시면 이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너서 첫 성 여리고를 믿음과 하나님의 크신 권능으로 무너지게 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이 아이 성인데 이 성만 점령하게 되면 온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 장군이 여리고를 점령한 다음에 아이 성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들이 모두 다녀와서 보고하는 말이 “아, 그 아이 성은 여리고 성처럼 견고한 것도 아니고 성곽도 허술할 뿐 아니라 사람도 적고 하니 뭐 많은 군인을 보낼 필요도 없을 것 같고 그저 우선 생각엔 한 2천명 내지 3천명만 보내면 쉽게 점령할 것으로 압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 장군은 3천명의 정예군인을 뽑아서 “그러면 너희들이 올라가서 아이 성을 먼저 점령하라 그러면 우리 후방 부대가 너희를 따를 것이다.” 하면서 보냈습니다. 이 3천명의 정예부대가 아이 성을 향하여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천만 뜻밖에 아이 성 사람들이 성문을 열고 이스라엘 군대를 향해 쫓아 나아오면서 담대히 싸우는데 아이 성 사람들이 수효는 작지만 그만 이스라엘 군대가 아이 성 사람들에게 겁에 질려 도망치게 되고 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고 창피할 정도로 패전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저희들이 얼마나 겁이 났던지 마음이 녹아서 그만 물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크게 실패했습니다.
왜 이와 같은 패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이스라엘 군대의 수가 적어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군대 가운데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서 범죄하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하나님을 떠나고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확신에 가득 찬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말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밖에서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삶도 꼭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나라의 운명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합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광복 이후 50년 동안의 일을 되돌아보세요. 우리 나라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나라인 것을 분명히 증명할 수가 있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국정을 맡는 분들도 내가 나라를 지키고 내가 나라를 이끈다는 착각을 버리고 공복으로서의 책임을 바로 감당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지혜 있는 통치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자기의 책임을 성실히 감당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은 평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평화가 없습니까? 잠언 29장 4절에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한다”고 했습니다. 공의는 나라의 기초가 됩니다. 반석 같은 공의가 나라의 기초가 될 때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공의가 없을 때 언제나 평화가 없습니다.
여러분, 공의를 행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반면에 죄를 범하면 마음의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을 갑니다. 두려워서 그럽니다.
여유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평화로운 마음의 소유자가 정치를 해야 나라가 평안합니다. 잠언 28장 1절에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을 합니다.
저는 우리 나라가 이만큼 모든 면에 성장했으면 언론 분야에도 어느 정도 자율성을 허용해서 언론을 통제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람이 언제나 좋은 말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반대가 없는 나라는 독재입니다. 지도자가 공의를 따르기 위해서 애쓰면 그 마음에는 누가 뭐래도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를 가장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마음에 평화가 있고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솔로몬은 “여디디야”라 불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라”(삼하 12:25)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이름 그대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이스라엘 왕국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도둑질한 것도 허사였습니다. 아도니아가 그렇게 동요해서 “내가 왕이 되리라.”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솔로몬은 평안하게 앉아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잠을 주시고, 뿐만 아니라 왕국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헛되고 쓸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의 잠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잠과 함께 우리에게 그를 경외하며 눕는 은총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와 함께 고요한 중에 깨어서 잠을 취하므로 얻은 원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과 만족을 주시며 현재의 즐거움과 미래의 안식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을 많이 갖든, 적게 갖든 간에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
3절에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했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인간이 성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 아내에 대한 법적인 결혼에 의해서 자녀를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이외에 인간의 어떤 수단이나 방법으로 얻으려 할 때 여기에 여러 가지 비극적인 문제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2장 15절에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이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지니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식은 기업이요, 상급이 됩니다.
에스겔 16장 20절에는 “네가 나를 위하여(하나님을 위하여) 낳은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낳게 하신 선물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됩니까?
이제 4, 5절을 보십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우리 가정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자녀들이 선한 기업일 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큰 도움과 방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아서 자신의 안정과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들은 건강한 자식들입니다. 부모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부모를 섬기도록 성장할 것입니다.
더구나 자녀가 많다 보면 이런 자녀, 저런 자녀 각각 재능이 다르기 때문에 여러 방면으로 가족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는 믿음 안에 한 형제, 자녀된 분이 이렇게 많기 때문에 육신적으로도 외로움을 모르고 삽니다. 또 어디서나 여러분이 내 뒤에서, 좌우에서 함께 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담대한지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에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오늘 읽은 시편 128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127편에서는 가정의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편 128편에서는 우리의 가정이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축복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이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데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향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어떤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경건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세상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장차 영원한 복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높거나, 낮거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 따라 살기를 힘쓸 때 복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축복을 개인에게 적용시킵니다.
2절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가 복되리로다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면 너는 그 약속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며 그것이 네게 주어진 것처럼 그 은택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네가 복되고 네가 형통하리로다 네게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길지라도 그것으로부터 유익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네가 사는 동안 그리고 네가 죽어서 영원에 이를 때에도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분명히 들으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이런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축복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근심이나 고통이 없이 그저 편하게 살 것이라고 약속한 것이 아닙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은 할 일을 갖는 축복이 있습니다.
건강과 능력과 그것을 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내 능력대로 일하여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수고는 성공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수고의 열매를 기뻐하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복받은 사람은 가족관계에 있어서도 풍부한 위로를 얻게 됩니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견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포도나무는 약하고 연한 식물이므로 소중히 간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매우 값진 식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정의 아내는 포도나무와 같이 귀하고 값지므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집 내실에 있다”고 했습니다. 집안을 잘 보살피는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와 같이 사랑을 받는 아내가 될 것이며, 유순한 포도나무와 같이 복종하는 아내가 될 것입니다. 다른 나무는 구부리면 부러집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구부리는 대로 휘어집니다.
온유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아내가 가정의 모든 권한을 차지하게 됩니다. 세계를 흔드는 것은 남자입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조종하는 것은 요람을 흔드는 연약한 여자의 손입니다. 세상에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 남편은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다”고 했습니다. 자식이 헤어지지 않고 식탁에 둘러앉았다는 것은 화목과 번영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감람나무 같다”고 한 것은 각 방면에 귀하게 봉사하는 자녀임을 의미합니다.
감람나무 열매나 기름은 음식에 맛을 냅니다. 감람나무 기름을 몸에 바르면 부드러워지고 상처에 바르면 상처가 낫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 안에는 감람나무 기름으로 불을 켰습니다. 왕이나 제사장에 기름을 부을 때에 감람유를 썼습니다. 이 얼마나 존귀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가정에 허락한 자녀들이 이와 같은 축복을 받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은 시온에서 베푸시는 축복입니다. ‘시온의 축복’은 보통 섭리에서 오는 축복이 아니라 특별 섭리에서 오는 가장 좋은 축복입니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복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가족은 창대하며 그것을 보는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후손이 아름답고 훌륭할 때, 잠언 17장 6절에 있는 말씀대로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의 몸인 교회가 번성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그것이 그 자신의 가족의 번영만큼 소중히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이 다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