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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와 조련사가 산중에서 텐트를 쳐서 야영하게 되었습니다. 조련사가 텐트에서 잠이 들었을 때 코끼리가 조련사를 깨워 너무 춥다며 코만 텐트안으로 넣어 밤을 보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조련사는 너무 안쓰러워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얼마 있다가 그 코끼리가 머리만 텐트 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는 괜찮겠다 싶어 허락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코끼리는 슬그머니 한 쪽 발을 텐트 안에 들여놓더니 어느 순간 몸통도 텐트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코끼리가 텐트를 다 차지했고 조련사는 밖으로 쫓겨나 텐트 밖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새가 내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새가 내 머리 위에 둥지를 틀지 않게는 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죄라는 것은 우리 삶 속에 조금의 틈만 내줘도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의 삶 전부를 잠식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십계명 중 제 칠 계명 “간음”에 대해 율법적인 해석과 적용이 어떻게 되어야 할 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간음’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 속의 죄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할 지를 설명하시면서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거룩한 삶을 유지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정말 우리가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참 신앙을 소망하며 거룩한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첫째로, 내면의 거룩을 찾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7,28절입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십계명 중 제 7계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 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것”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과 동침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실은 율법 문구 자체만 따지자면 육체적인 죄에 포커스가 맞춰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좀 더 율법의 핵심을 말씀하십니다. 내면부터 다른 이성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부터 다른 이성에 대해 음란한 생각이 들면 그것이 바로 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제 7계명의 근본적 정신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나누면서 이런 이야기를 제가 드렸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계명을 우리 삶에 대입할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살인행위를 하며 살아갈까요? 어쩌면 저와 여러분은 “살인은 나와 무관하다”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 예수님께서는 형제에 대해 악한 말을 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고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 그 때 이미 살인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이제 우리는 모두 살인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실제로 간통, 강간, 불륜 등 법적 부부가 아닌 다른 이성과 음란한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계명으로 간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2장 22~24절입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이렇게 간음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강력했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율법을 보면 간음죄에 대해 너무나 확실한 처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간음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강력히 처벌받지만 이런 처벌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요? 살인보다는 조금 많이 발생하는 것이 성범죄이기는 하지만 실제 성범죄로 인해 경찰이나 검찰에 끌려가서 조사받고 처벌받는 사람이 전체 인구중 얼마나 되며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저와 여러분중에 이 처벌을 받을 사람이 있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범죄를 저질러 법정에 서는 일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앞으로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마찬가지로 제 7계명 “간음하지 말라”라는 계명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영역으로 만드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근본적 의미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을 통해 이제 우리는 이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실제 간음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많아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물건을 훔치지?’ ‘어떻게 하면 감쪽같이 도둑질할 수 있을까?’라고 매일 생각하지만 감옥에 갇혀 있어 어떤 도둑질 행위를 할 수 없는 사람과 감옥 밖에서 실제로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뭐 다른가요? 행위를 한 것과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은 다르지만 결국 이 사람들은 내면의 생각은 똑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드러난 행위로 판단하지만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둘 다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십니다. 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은 기회가 없을 뿐이지 마음으로 이미 죄를 지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죄에 대해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 내면의 욕망까지 들춰내서 그것도 죄라고 규정하셨습니다. 마음에 품은 음욕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마음 속에서는 각종 음란한 상상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았기에 깨끗한 사람, 경건한 사람이라고 자만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했다는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우리의 은밀한 중심 가운데 음란과 음욕을 가득 품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교훈을 주시며 우리가 이 말씀을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비록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완전함을 향하는 백성으로서 이 말씀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정죄를 목적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말씀이 아니라 본인이 적용해야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네가 한 번이라도 마음에 음욕을 품었으면 너는 죄인이야” 말하며 다른 사람들을 지적하는 데 사용했다면 우리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같은 가식과 외식의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목적과 의도는 ‘거룩’의 본질이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내면의 의도야 어떻든 어떤 행동을 했냐, 하지 않았냐를 따라 거룩함을 구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거룩의 기준을 ‘행위’에 두고 있지만, 참된 거룩은 반드시 ‘마음’부터 깨끗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마음이 거룩하지 못하면 범죄한 삶, 더러운 인생, 부정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거룩’을 지키는 일에 있어 우리의 외적 행동뿐 아니라 마음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이 말씀에 담긴 예수님의 의도이자 목적입니다.
마가복음 7장 20~23절을 보시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행위로만 포장된 ‘외적인 거룩’에만 만족하지 않고 내면의 상태를 고민하길 원하십니다. 리가 겉만 그럴싸한 외적 모습이 아니라 외면과 내면 모두 완전히 거룩해지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만 거룩함을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게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으면 행위를 통해 거룩한 척, 경건한 척 꾸밀 수 있습니다. “예배도 안 빠졌고 기도의 자리도 다 지켰는데 십일조도 안 빼 먹고 드렸고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이 정도면 거룩한 거 아니냐”라고 소리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들을 잠깐 한쪽으로 치워 놓고 우리의 눈을 똑바로 보시며 물어 보십니다. “너는 진심으로 섬겼고 마음에 거리낌없이 순수하고 정직하게 신앙생활했냐?” 예수님은 우리에게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아닌 내면에 상태에 대해 듣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럽히는 것이 사람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정의 부부관계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활에 전혀 상관없는 TV, 혹은 방송매체 연예인들, 또는 주변 이성 인물을 보면서 어느 아내가 남편이 아닌 그 남자를 멋있어 보며 “그런 남자와 한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라고 한다든지 어느 남편이 아내가 아닌 그 여자가 예쁘게 생각하며 “내 아내가 아닌 저 여자와 결혼했으면”이라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무리 거룩할지라도, 그 중심이 더럽고 악하다면 그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행위는 아주 번듯하고 그럴싸한데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질책하실 것입니다. 겉은 깨끗하지만 그 안에서는 시체가 썩고 있는 회칠한 무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는 ‘내면’을 무시한 ‘외적인 의’였습니다. 마음은 온갖 썩은 것들로 악취가 나지만 그들은 행동만 거룩한 척하며 보이는 모습을 자랑하며 의롭고 거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참된 하나님 백성은 모두 자기 심령의 악함, 자기 내면의 연약함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고 심령이 거듭난 백성은 자기 내면의 문제를 고민합니다. 내 속이 얼마나 거룩한 지 속사람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함께 정말 온전한 거룩함을 추구하시길 바랍니다.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참된 마음으로 바른 신앙을 유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둘째로, 단호히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위해 희생을 해야 할 것은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9,30절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오늘 말씀에서 대단히 무서운 말씀을 주십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에 생겨나는 음욕까지도 철저히 회개하고 마음의 순결을 지키도록 촉구하셨습니다. 우리가 육신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육신의 죄를 범하기 쉬운 것을 없애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우선인지를 생각하며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죄가 우리에게 생기면 그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이기에 차라리 ‘죄를 범할 근거를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만큼 죄가 우리에게 끼칠 영적 무서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가 있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죄라는 것이 아주 무서운 것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씀을 직역해서 진짜 육신을 해하는 행동을 해서는 정말 곤란합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엄격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며 믿음 안에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에도 우리는 범죄하기 쉬운 육신을 가지고 있기에 본성이 죄성으로 가득차 있기에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6장 19절입니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우리는 죄의 유혹에 연약해서 불법과 부정의 미혹이 찾아오면 죄악에 쓰러지기 쉬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이렇게 연약한 우리를 의로운 인간으로 만드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로 의로워진 우리가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본성이 계속 드러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0절에서 예수님께서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어느 영화속에 이런 장면이 있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아무도 없는 광야를 여행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당했는데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바위에 손이 끼었습니다. 바위가 짓누르는 손을 뺄 방법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외진 광야라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손을 빼내려고 애를 쓰던 그는 마침내 칼로 자기 손을 잘라냈습니다. 말도 못한 고통이지만 그는 살고자 하는 욕망이 더 강했기에 참아냈습니다. 손이 짤린 팔을 빨리 조치하면서 물을 마셨고 광야를 빠져나와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손은 잃었지만 죽음의 땅에서 벗어나 생명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는 우리를 파멸시킵니다. 죄는 인간을 영원한 지옥으로 몰아갑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 손이 죄를 짓게 하면 손을 잘라 내고 우리 눈이 죄를 짓게 하면 눈을 뽑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과거에 성경에 나온 말씀대로 살아보기 위해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온 대로 성적인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성기를 절단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고자가 되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성적인 죄가 아닌 다른 여러 가지 탐욕의 죄를 지었고 결국 이단 사이비 교주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은 실제로 우리의 육체를 짤라 버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은 죄를 지을 어떤 상황을 없애도 또 다른 부분으로 죄를 짓는 참 추잡한 인간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지체를 끊어낸다면 우리 지체 중에 남아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죄의 유혹 앞에 어쩔 수 없이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요셉이 어떻게 했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타락을 유도하며 유혹의 손길을 내밀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유혹의 욕정을 이길 만큼 강력한 의지와 힘이 없음을 알고 죄가 있는 곳에서 가능한 멀리 도망치는 것이 최선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23절입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올해 초에 저희 집에 TV가 고장이 났습니다. TV드라마, TV프로그램에 시간이 빼앗기는 것 같고 애들 학습이나 가족간의 대화나 함께 하는 시간에 방해되는 것도 있는 듯해서 ‘언제 TV를 없앨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다’라며 사모가 ‘이제 TV없이 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시 TV를 안 사고 TV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TV가 없으니 드라마, 스포츠, 예능, 뉴스 등등 TV로 방송되는 것을 모두 끊고 살 것 같습니까? 사실 처음에는 거의 TV의 내용에 관심없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점차 요즘 다시 생각해보니 TV로 볼 것은 다 보며 살지 않았나 생각이 되네요. 가족들이 각자 유튜브나 방송사 어플, 무료 실시간방송 사이트 등을 통해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찾아서 보더라구요. 물론 예전엔 한 번 TV를 켜면 밤 늦은 시간까지 계속 보든 안보든 TV를 켜놓고 이 채널, 저 채널 돌려보며 볼 만한 프로그램을 계속 찾아 봤지만 분명 이제 그렇게 하진 않아 방송에 대한 관심이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보고 싶은 TV프로그램이 있으면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등을 이용해서 기어코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보게 되더라구요. TV가 없으면 아예 안보게 될거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 우리 인간 본성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본성적 죄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평생을 싸워야 하지만 우리의 의지, 우리의 논리, 우리의 방법으로 죄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F.B. 마이어 목사님은 매 20분마다 갈보리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사는 삶을 통해 성령의 뜻가운데 살아가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님 믿고 의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세상에서는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는 죄악의 손짓이 많습니다. 우리는 철저히 우리를 돌아보며 항상 회개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앞에서 죄에 대해 민감하고 어떤 죄라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본성을 맡기고 성령께서 우리를 흠 없게 지켜주시기를 소망하며 말과 행동이 거룩함을 유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마지막 셋째로, 책임과 의무를 다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31,32절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는 이미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보이고 드러나는 행위만을 범죄라 하지 않으시고 그 본성과 근원까지도 중요함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음으로 인한 죄의 문제를 이혼에 관한 문제와 연결시켜 말씀하십니다. 방금 읽은 마태복음 5장 32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모세는 ‘이혼증서’라는 것을 사용하며 부부간의 문제에 대해 방안을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내를 마구 버렸기 때문에 이혼을 방지할 목적으로 반드시 이혼증서를 써주게 했던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써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써준 이혼증서를 아내에게 주었을 때 이혼당한 여인은 생계와 인권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은 너무나 간단하게 쓴 이혼증서를 아내에게 주면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아내를 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버리고 싶으면 아무런 논의도 없이 그냥 이혼증서라고 되어 있는 서류 하나만 아내에게 주면 너무나 쉽게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흔한 이혼방법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혼증서’라고 되어 있는 것은 ‘이혼증명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혼증명서’는 서로 합의하여 도장찍는 증명서가 아니라 남자들의 일방적인 ‘이혼 통고서’였습니다. 그러니까 여자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지금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오”라고 쓰여진 종이 하나만 아내에게 주면 그냥 이혼이 성립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는 자는 간음한 자라고 정죄하셨습니다. 원래 이혼은 불륜을 저지른 경우외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혼증서만 내주면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저절로 이혼해도 되는 이상한 법이 되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이혼증서를 주면서 합법적인 이혼이 되었지만 우리 주 수님께서는 합법적이라고 말하는 그 절차마저도 의도 자체가 불순하고 악하니 이혼증서를 주며 이혼하는 것이 분명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이혼하는 것 자체를 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악하므로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것이지 결코 그것이 원칙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의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볼 때 세상에 완전히 깨끗한 부부관계를 가질 부부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실제 ‘행위’로는 간음하지 않았을 지라도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저 마음속에서 자신의 남편과 아내에 대해 불평, 불만을 가진다면 그 또한 벌써 아내를 버리고 남편을 버린 죄를 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금 결혼한 남편에 대해 불평이 앞서고 “이 남편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남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이미 남편을 버린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내에 대해 싫은 마음이 생기고 마음속에 “어쩌다 내가 이런 사람을 택했지”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우리는 이미 이혼증서를 써준 것이 된 것입니다. 결혼은 책임입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에 대한 열매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가운데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취향, 우리의 선택, 우리의 품성까지 다 고려하셔서 우리가 우리의 배우자를 만나게 하셨고 부부가 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마태복음 19장 4~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결혼이란 종이 두 장을 강력 접착제로 붙여놓은 것이고 이혼은 그것을 강제로 떼어놓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이를 강력 접착제로 붙여놓고 다시 떼려고 해보십시오. 어떤 일이 생깁니까? 절대 원상대로 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찢어지고 허물어진 상태가 됩니다. 세상에서는 이혼이 합법이고 이혼이 보편화 되어졌다고 말해도 우리 하나님은 인위적 이혼에 대해 절대 인정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혼한 부부는 이미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당시에 유대인들 중에는 율법에 대한 모세의 지침을 근거로 이혼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당사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부부지간 서로 책임지고 의무를 다하는 길고 긴 헌신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상대를 함부로 대하면 안 되고 서로의 힘든 일을 같이 이겨내고 서로 존중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얻고 말씀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배우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랑하려고 하며 감사하며 합력하며 도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혼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간음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단지 성격 차이, 경제적인 이유, 다른 이성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는 이유로 이혼합니다. 우리 주변에 이혼가정, 재혼가정이 참 많이 있습니다. 한 해 결혼 건수 대비 이혼신고 건수는 약 50%정도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결혼해서 만들어지는 가정의 숫자의 반 정도는 다시 사라지는 가정, 깨어진 부부관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통계에 대해 교회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을 보니 더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이혼한 가정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고 죄에 대해 회개하고 다시 이제는 그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며 사는 것은 참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과거에 범한 죄가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닐 것입니다. 실수 혹은 죄에 대해 다시 돌이켜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참 신앙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 죄에 대한 용서의 문제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결혼에 대해 얼마나 책임감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며 올바른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고 있냐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가을 우리 교단의 이번 총회 석상에서 목회자 이혼 문제가 다루어졌습니다. 총회 회의장에서 이혼자에게 노회장, 시찰장 등 공직을 맡기는 것이 합당한가에 대한 안건이 올라왔습니다. 논의 끝에 이렇게 결의되었다고 합니다.
“각 노회가 교단의 신학과 그 이혼의 사유를 살펴 판단하되 이혼자에게 그 이혼에 합당한 사유가 있더라도 5년이 경과하기 전까지는 노회장, 시찰장 등 공직을 맡기지 않는 것이 합당하며 그 이혼에 정당한 사유가 없다면 5년이 지나도 공직을 맡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덕을 위해 합당하다”
왜 총회에서 이런 결정을 할까요? 지금 교회나 사회가 너무나 보편화된 이혼, 재혼으로 인해 질서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바른 가정생활을 하며 책임과 의무가 따르는 올바른 부부 관계속에서 거룩한 신앙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은 단순히 내 소유가 아니라 ‘성령의 전’이라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20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 어떤 악한 것으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간음’이라는 죄는 단순히 우리의 육신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타락을 만드는 것입니다. 간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망치는 것입니다. 더러운 죄가 거룩한 성전을 지저분하게 만들면 안됩니다. 우리 영혼을 파멸시키고 우리의 온 몸을 지옥 불에 타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영적 전쟁에 나서야 합니다. 모든 정욕을 물리치고 음란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해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서 짝 지어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배우자를 인정하며 부부와 가정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야 합니다. 결혼을 파기하고 짝을 버리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감정에 휩쓸려 임의로 갈라선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혼하는 사람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각오까지 고민해 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은 ‘돌싱’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이혼과 재혼이 흔하게 되고 흠이 아니라 이혼하고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당당한 사람, 자신의 삶을 멋있게 살아가는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배우자가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서로 불쌍히 여기며 서로 도와주며 서로 사랑하며 똘똘 뭉치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혹 배우자 아닌 다른 이성에게 마음을 끌릴 어떤 그림, 어떤 사진, 어떤 영상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를 미혹하는 육신의 정욕, 이생의 안목, 타락의 유혹에 넘어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자극적인 것이 우리를 미혹합니다. 우리의 입에 살살 녹는 것이 우리를 상하게 합니다. 우리 귀를 달콤하게 만드는 소리가 우리를 악한 길로 가게 합니다. 우리의 눈과 귀와 입 등 우리의 오감에 자극을 주는 것이 결국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세상 여러 모습들이 우리를 흔들어 놓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 곳에 흘러가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야 할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순결의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 눈앞에서 우리를 미혹하는 성적 유혹, 물질적 유혹, 권력의 유혹이 우리를 신앙에서 멀어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을 깨닫고 이 시간 우리는 비상한 결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간음하는 행동만이 정죄되는 것이 아니라 음란한 생각마저도 무서운 죄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과 결혼생활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부부의 도의를 다 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책임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속부터 거룩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컵에서 공기를 빼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컵에 물을 넣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우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들어와서 우리의 마음을 다 채우시고 악한 생각은 다 밀려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내 속에 주님을 향한 믿음이 생길 때 우리에게서 음란한 생각은 있을 곳을 못 찾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으로 마음이 꽉 차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찬양이 우리의 생활에 꽉 차고 이제 세상의 악한 생각은 우리의 마음에서 다 사라지게 되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