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글은 2022년 4월 11일 충남 홍성에서 열린 <대전․충남 권역 사회적 농업 민․관 간담회>의 강의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내용 중에는 다른 이의 관점, 발상, 지적 작업을 빌려온 것이 있을 텐데 특정 구절을 인용한 것은 아니어서 출처를 낱낱이 밝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자료는 사회적 농업 연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탈리아의 디 이야코보(Francisco Di Iacovo) 교수, 철학자 김영민 선생님, 그리고 제가 만났던 여러 사회적 농장의 농민들에게 빚진 것임을 밝혀 둡니다.
===================
사회적 농업의 열쇳말: 사회적 포용, 사회혁신, 사회적 경제
들어가며
농민이 작물을 재배하거나 가축을 사육하면서 ‘먹고사는 일’이 농업입니다. 저는 가끔 농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왜 농사지으시느냐’라고 물어봅니다. 농민 열에 여덟 분은 ‘먹고살려고 농사짓는다’고 대답하십니다. 한두 분 정도가 ‘돈 벌려고 농사짓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먹고사는 것’과 ‘돈 버는 것’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특히, 농촌에서는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돈이 적어도,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먹고살 수 있습니다. 물론, 돈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한편, 돈이 있다고 해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농촌에서, 홀로 사시는 어르신이 돈이 있다고 해서 온종일 무료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경로당에 가서 이웃 노인들과 함께 밥 먹고, 이야기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 큰돈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소일거리를 찾아 일상을 재미있게 지내려면 이웃이 필요합니다. 살펴보아야 할 것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돈이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필요한 모든 것을 돈만으로 얻을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돈이 없어도 좋은 이웃이 있다면, 꼭 필요한 것을 얻어 일상생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 농업을 하자는 권유는, 농민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자’는 말입니다.
사회적 포용
조금 어려운 학술용어를 쓰자면, 사회적 농업이란 사회적 포용(social inclusion)을 지향하는 농업이라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을 그대로 두지 않고 지역사회에서 함께 잘 살아가려는 목적의 영농활동이라고 말합니다.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다는 말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을 남들만큼, 즉 주변에서 흔히 보는 보통 사람들만큼, 필요한 것을 얻지 못해서 곤란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가난한데 일자리가 없어 돈을 못 벌고 먹거리나 약이나 필요한 물품을 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적 장애나 정신장애나 신체장애가 있어서 취직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자리를 구하는 데 도움 될 만한 직업기술을 배울 기회도 못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시설’이나 집에 고립된 채 친구나 이웃과 만나는 일조차 없이 일상의 대부분을 지내면서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안 좋은 상태가 더욱 빨리 악화됩니다. 치매가 시작되었지만 돌봐줄 가족 없이 집에서 홀로 지내는 어르신도 적지 않습니다. 경로당에 가지도 않으시고 홀로 끼니를 거르며 지내시는 분도 있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고 무엇이든 활동을 함께 할 때 치매의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습니다. 치매가 없으시더라도 시골의 어르신 중에는 각종 질병과 더불어 고독, 빈곤 등 생활의 어려움을 겪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외국에서 온 결혼 이민 여성 중에는 한국말이 서투르다는 이유로, 문화나 관습이 다른 곳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는 이유로 지역사회에서 다른 이들과 쉽사리 어울리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상당수는 가정 형편상 돈벌이가 필요하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소개받기 어렵습니다. 그 자녀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중에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쟤는 ‘다문화’래...”라는 식의 따돌림을 당하고 학교 안에서 친구 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소외되는 일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요즘에는 어느 학교에나 몇 명씩 있는 돌봄반 친구들, 지적 장애나 자폐성 장애가 있는 학생들도 학교에서 또는 방과 후에 소외되기 쉽습니다. 학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삶을 준비하려고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을 배우는 곳이어야 하는데 이 친구들에게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농사짓고 살겠다며 농촌에 온 청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 없이, 농사지어 본 경험도 없이, 아는 사람도 없이 시골에 온 청년들이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신체 건강이나 학력과는 무관하게, 귀농 청년들은 농촌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되기 십상입니다. 즉, 지역에 정착해 살아가려면 필요한 것이 한둘이 아닌데 그것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육원에서 아동청소년기를 보내고, 보호종료 시점이 된 청소년들도 있습니다. 이제 보육원을 떠나 경제적으로 자립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들에게 주어지는 건 몇 백만 원의 돈이 전부입니다. 무작정 도시로 가지만 손에 쥔 돈으로 월세방을 얻고 나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우리 주변에 ‘사회적으로 배제된’ 사람이 많습니다. 낱낱이 예를 들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자는 말은, 농사지으며 사는 농민들이 주변의 그런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 주자’는 말입니다. 농사짓는 농민이 사회복지사도, 간호사도, 의사도, 교사도 아닌데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농민은 사회복지사가 아닙니다. 의료기관 종사자도 아닙니다. 학교 선생님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농민이 농사짓는 장소와 시간 중 일부분을 나누어, 이 사람들을 초대하고 맞이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는 농민들이 전국 곳곳에 있습니다. 소일거리 겸 돈벌이가 필요한 어르신이나 경제적 수입이 필요한 결혼 이민 여성들과 함께 농사지어 소득을 나누는 농장들이 있습니다. 즉,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시설’이나 집에 고립되어 인간관계의 경험으로부터 차단된 치매 어르신, 성인 발달장애인, 정신장애인 등을 초대하여 간단한 농작업을 함께하고 식사를 함께하고 이야기 나누는 농민이 놀랄 만큼 많아졌습니다. 사회복지 전문가가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농촌에 사는 보통 사람인 농민과 만나고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만으로도 돌봄(care)의 효과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회에 연결되지 못하고 고립된 이에게 ‘관계 맺기’는 그 자체로 돌봄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사가 아니어도 농민은 누군가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그 순간에는 교육자입니다. 이것저것 몸으로 머리로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귀농 청년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것, 이미 어른이거나 어른이 되었을 때 어느 농장에서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농사를 배우는 발달장애인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것, 학교에서는 접할 수 없는 농사를 아동, 청소년 등에게 가르치는 것 모두 교육입니다. 이렇게 사회적 농업은 일자리 제공, 돌봄, 교육 등의 여러 형식으로 사람들을 포용하는 실천입니다.
사회혁신
사회적 농업을 아무리 훌륭하고 멋지게 실천한다고 해도 사회복지기관이 하는 일을, 학교가 하는 일을, 일자리 정책을 펼치는 공공기관의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농업을 하자는 것은 그런 직능을 맡은 기관이나 사람들을 제치고 농민이 대신하여 일자리를, 돌봄을, 교육을 책임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복지기관, 보건의료기관, 교육기관 등 적지 않은 기관, 단체가 저마다의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하겠지만 여전히 빈 곳이 있어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특히 농촌에 많습니다. 그 빈 자리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농민들이 채울 수 있는 만큼 채우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는 농민들의 본업은 여전히 농업입니다. 사회적 농업은 농사라는 본업에 사회적 포용이라는 가치를 덧붙이는 일입니다.
‘사회’라는 말은 ‘관계’를 뜻합니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듯이 두 명 이상의 사람이 관계를 맺고 살면, 그것을 두고 사회라고 부릅니다. 가정도 사회이며, 여기 이곳 도산2리라는 마을도 사회이며, 장곡면도, 홍성군도, 한국도 사회입니다. 사회는, 즉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더러 바뀌어야 좋을 때가 있습니다. 혁신(innovation, 革新)이란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있는 것을 다 없애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을 고쳐 새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사회를, 즉 관계를 새롭게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한 동네에, 한 지역에 살지만 평소에 만나지 않던 사람을 새롭게 만나서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농업은 사회혁신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잘 안 만나던 어르신, 장애인, 아동, 청소년 등을 농민이 농장에 초대해 만나면서 새로운 관계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려면, 특히 돌봄농업(care farming)을 실천하려면 그 농민은 사회복지기관, 보건의료기관, 지역의 이러저러한 단체 등과 관계를 새로 맺어야 합니다. 가령, 발달장애인을 농장에 초대해 농작업을 경험케 해주고 농민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가지려 해도, 구체적으로 준비할 것이 많습니다. 무작정 아무나 농장에 오라고 초대할 수는 없습니다. 발달장애인이 농장에 왔을 때, 아무런 준비 없이 농사일을 같이 하자고 논, 밭, 비닐하우스로 데리고 갈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는 장애가 있는 사람이 농장을 찾아오는 것부터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역에서 발달장애인을 돌보고 돕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기관, 단체, 사람과 농민이 상의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적 농업이 시작될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농장에 올 수 있으며, 일주일에 한 번이 좋을지 몇 번이 좋을지, 1년 중에 몇 주 몇 달 동안을, 농장에 와서는 어떤 경험을 하는 것이 좋을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것은 없는지, 농장에 오고 가는 일은 누가 도와줄 수 있는지, 혹시 비용이 든다면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가장 중요하게는 농장에서의 경험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등을 의논해야 합니다. 이곳 행복농장도 그렇고, 옆 동네에 있는 정다운 농장도 그렇고, 오늘 소개될 대전시의 손수레 농장도 그렇고 농업이 아닌 분야의 기관, 단체, 종사자와 협력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행복농장은 충남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 주변의 학교들, 홍성군 보건소 등과 협력하고 있습니다. 치매 어르신을 농장에 초대해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정다운 농장도 홍성군 치매안심센터(보건소), 홍성군 농업기술센터와 협력하면서 사회적 농업 실천을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만나지 않아서 그렇지 농업이 아닌 분야의 기관, 단체, 사람들을 만나서 의논하다 보면, 그분들도 사회적 농업이라는 것이 자신들의 활동에 도움이 되며 뜻밖에도 ‘농민’이라는 든든한 협력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점을 깨닫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만나야 할 곳은 아주 많고 다양합니다. 예를 하나 들면, 성인 발달장애인이 평소 일상생활 중에 ‘의미 있고 인간다운 하루’를 지역사회에서 보낼 수 있게 돕는다는 취지의 ‘발달장애인 주간활동 서비스’라는 제목의 보건복지부 지원사업이 있습니다. 이 서비스를 개발하고 제공하도록 지정된 발달장애인 주간활동 서비스 제공기관이 충청남도에 26곳, 대전시에는 6곳이 있습니다. 웬만한 지방자치단체에는 치매안심센터가 다 지정되어 있습니다. 읍․면 지역사회마다 지역사회보장협의체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밖에도 새롭게 만나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할 기관, 단체는 뜻밖에도 아주 많습니다. 물론, 인간사가 대개 그러하듯 잘 모르는 사람을 만나 좋은 일을 함께하자고 청하고 의논하는 과정이 언제나 술술 풀려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하게 경청하고 터놓고 대화하는 자리를 갖는다면 안될 일도 아닙니다. 그렇게 ‘안 만나던 사람들 함께 모여 궁리하고 협동하는’ 사회혁신의 실천이 사회적 농업입니다. 그러면서 지역사회가 그 자체로 더 건강한 곳으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사회적 경제
사회적 경제가 무엇인가를 학술적으로 따지자면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라겠습니다만,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들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협동하되 ‘우리끼리만 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의, 주변의 약자들과 연대하면서 협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농사짓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농산물을 잘 팔려고 협동조합이나 영농조합법인 같은 것을 만들어 협동한다면 좋은 일입니다. 거기에 덧붙여 특별히 능력이나 형편이 좋지 않은 소농 어르신이나 사회적 약자까지 함께 연대하는 협동조합을 만든다면 명실상부한 사회적 경제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농업이라는 말이 탄생한 곳은 이탈리아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수십 년 전에 사회적 협동조합(social cooperative)의 형태로 사회적 농업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협동하지 않고, 연대하지 않고 사회적 농업은 진행될 수 없습니다. 사회적 농업은 어느 농민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고, 어느 농민 한 사람의 명예나 업적을 목적으로 할 수 없고, 어느 농민 혼자서 돈 벌자고 하는 실천은 더더욱 아닙니다. 반드시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협동조합을 만들어야만 사회적 농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형식이든, ‘협동과 연대’가 사회적 농업 실천의 바탕이라는 점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나오며: 듣는 공부, 물듦의 공부, 그렇게 너도나도 변하는 공부
주어진 시간이 짧아서, 이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사회적 농업을 실천하려는 농민, 관계 기관의 종사자, 관련 정책사업을 담당하는 공무원, 저 같은 연구자 모두 공부할 일이 많습니다. 사회적 농업은 이렇게 저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공식이나 정해진 정답은 없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공부는 여러 가지입니다. 농장활동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등의 기술적인 공부를 먼저 떠올리실 분들도 있겠지만, 오늘 강조하고 싶은 공부는 그런 것보다 더 바탕이 되는 공부입니다.
사회적 농업은 나 혼자 물건 만들어서 판매하는 장사가 아닙니다. “내 상품은 이런 것인데 보고 사세요. 싫으면 말고...”라는 식으로 할 일이 아니지요. 여럿이서,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도모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듣는 공부’가 가장 필요합니다. 내 생각을 죽이고, 내 앞에 있는 그이의 말을 극진하게 경청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내 농장에 오는 장애인이나 치매 어르신이나 아동이나 청소년, 함께 의논하고 도움을 받아야 할 이런저런 보건복지기관 종사자나 장애인 등의 보호자, 시․군청의 담당 공무원 등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명하게 헤아려 듣지 않고서는 한 치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백 배는 어려워 듣는 ‘공부’라고 말씀드립니다.
사회적 농업을 하면 대박이 난다거나, 사회적 농업은 새로운 산업 또는 유망한 블루오션(blue ocean) 시장이라는 식의 말을 하는 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회적 농업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지역사회를 만들자는 사회적 실천에 더 가깝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돈 안 되는 일은 잘 퍼져나가지 않는다고,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의미 있는 활동을 오랫동안 한결같이 해 나간다면, 필경 주변에서 또는 먼 곳에서라도 그것을 보고 듣고 알면서 자신도 물들어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시간이 걸릴 뿐이지, 사람들은 결국 좋은 일에 물들면서 변하기 마련입니다.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농업에 물들어 함께 일을 도모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날 것입니다. 이곳 홍성군 장곡면도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꾸준함’입니다. 이웃들이 다 물들어서 너도나도 변해서 이 지역사회에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이 없게 만들자며 나서는 공부의 과정이 바로 사회적 농업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