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꿈꿨지만 현실은 디스토피아
양지호 기자
입력 2021.05.22 03:00
함께 못사는 나라로 가고 있다
강영철 외 6인 공저|윤성사|256쪽|1만5500원
대한민국의 임금 격차는 OECD 국가 중 셋째로 크다. 취업률과 노인 빈곤율도 OECD 최악 수준이다. 시장 원리를 무시한 부동산 정책은 집값 폭등으로 이어졌다. 승차 공유 서비스 ‘타다’와 같은 혁신 기업은 이익 집단과 정치권에 가로막혀 좌절했다. 저자들은 이런 문제의 원인을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에서 찾는다. ‘한강의 기적’에 사로잡혀 정부가 지나친 권한을 가지고 각종 부작용을 양산했다는 주장이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펼친 정책이 디스토피아를 만들었다.”
한국 사회를 살면서 ‘이건 뭔가 아닌데’라고 느끼는 부분을 통계와 분석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대안을 내놓는다. 언론인 출신인 강영철 한국개발연구원(KDI) 초빙교수가 경제·행정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집필했다.
주의. 유토피아 같은 이상 사회 실현이 가능하다 믿는 사람, 시민 단체 출신이 더 많이 정치권에 진출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가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이 불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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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책머리에〉
미래 세대를 위한 진지전을 제안한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후 최초로 후대가 선대보다 못사는 국가로 전락할 위기에 빠져있다. 과연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많은 국민이 혼돈의 시기를 겪고 있다. 경제, 사회, 정치 어느 부문에서도 우리가 미래를 통제하고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성과에 대한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모두 문제투성이고 개혁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미래를 향한 전진은 없고 과거에 대한 단죄만 난무하고 있다. 논리와 이성을 상실한 자기편 감싸기로 정치는 피폐해지고, 5년 단임의 제왕적 대통령제하에서 5년이 아니라 10년, 20년 후를 내다보고 준비
하는 정부는 사라져 버렸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정치, 사회, 경제 세력이 존재하지 않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에서는 아직도 얼치기 진보와 얼치기 보수의 이념적 대립 외에 국가적 미래를 염려하고 준비하고 대비하는 세력을 볼 수 없다. 정치적 지형은 사회 속에도 그대로 투영돼 대립과 반목, 맹목적인 진영 논리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적 토론과 대타협은 불가능한 지경이다. 게다가 정치인에게서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는 찾아보기 어려워진 지 오래며, 오로지 정권의 떡고물을 나눠 먹는 잔치를 5년마다 되풀이하며 경제와 사회를 점점 더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경제마저 정치화돼 경제 발전의 동력이 돼야 할 기업은 온갖 사회적 비용을 분담하면서도 수사받고 갹출받고 질시받고 무시당한다. 잘 하는 기업과 잘 못하는 기업의 구분은 없고, 큰 기업은 악이고 작은 기업은 선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시장실패에 대한 오독, 정부실패에 대한 무신경이 지배하고, 대기업을 핍박하면서 동시에 대기업에 기생하는 정치집단의 기형적 행태가 도처에 보인다. 경제 발전의 주체로서 기업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건전한 기업자본주의가 한국 경제에 뿌리내리는 것을 좌절시키고 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 경쟁에 기반한 성장과 분배라는 헌법적 정신이 훼손되고 있는 사실이다. 한 번도 시장에서 경제 주체로 활동해 본 경험이 없는 정치꾼들이 시장을 재단하고 규율하고 망가뜨리고 있다. 시장 질서 훼손과 함께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도 만만치 않다. 대한민국을 버리고 ‘우리나라’로 바꾸자는 사고의 단면이나 면면히 내려온 애국의 염을 담은 애국가도 적폐의 대상이 되는 사회가 됐다.
과연 우리는 미래의 주역이 될 우리 후대에게 어떤 유산을 남겨주고 싶은가? 극심한 이념 갈등과 정치 투쟁, 시장경제도 아니고 사회주의경제도 아닌 기형적인 경제를 남겨줄 것인가? 과연 그러한 환경하에서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성취한 ‘후대가 선대보다 잘사는 대한민국의 여정’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누구도 나서서 국민의 자유의지를 향상하고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 경제사회의 장기적 발전의 기본이라는 점을 강조하지 않다 보니, 국민들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국가가 개입해서 자신들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기 바라는 해바라기로 추락했다. 자유의지를 잃은 국민은 결국에는 노예로 전락한 세계사, 한국사의 교훈이 한국에서는 잊힌 지 오래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같은 경제사회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정하고 바로 세우겠다고 나서는 지식인집단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지식인들이 국가 미래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토론을 통한 방향 제시라는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오히려 5년마다 바뀌는 권력 주변을 기웃거리면서 학문의 본업을 도외시하다 보니, 떼로 몰려 다니며 구체적인 실체도 없는 진보와 보수의 파수꾼으로 전락해 현인을 찾으려고 해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오염됐다. 현인이 있어도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 그들의 존재는 망각 속에 잠들고 있다.
지식인들이 시장경제를 가르치고 말하면서도 시장경제를 훼손하는 정치사회적 시도를 단일대오로 차단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시장경제에 믿음이 없고 국가가 시장을 정화해야 한다고 믿는 국가주의 세력, 자본가와 기업가의 긍정적 기여를 인정하지 않는 반기업주의 세력,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교육을 이념형 인간 창출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정치 세력은 지난 20년간 공고히 진지전을 구축해 왔다.
그들은 한국이 겪은 우여곡절들을 침소봉대하며 한국을 번영으로 이끈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선택을 조롱하고 있다. 그들은 교육감 선거 때마다 정략적 단일화를 통해 전국의 교육을 장악하는데 한국의 교육계는 개인적 영달만을 위해 국가적 대의를 얼마나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왔던가!
사회를 뒤바꾸고자 하는 세력이 이처럼 먼 미래를 내다보고 하나하나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나가는 진지전을 전개하는 동안, 반면에 사회를 지키고자 하는 세력은 분열되고 중심을 잡지 못하며 저변 확대를 위한 진지전보다 개인의 이익과 당장의 정권 창출에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586세대의 이념적 편향성이 문제라면 왜 그 이전의 세대는 선배로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데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는가?
오늘날 한국 경제ㆍ사회ㆍ정치의 위기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겪었던 위기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해방 후의 좌우 대립, 한국전쟁의 피해, 두 차례의 오일 쇼크, 군부 통치의 위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국제 금융위기 등 정치경제적 위기를 한국은 일치단결된 국민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는 국민이 분열되고 이 분열을 오히려 외연 확장의 계기로 삼는 정치사회집단의 강고한 기반 위에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쉽게 대응하고 치유할 수 없다.
유일한 대안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세력도 진지전에 나서는 것이다. 당장 1, 2년 후가 아니라 10년, 20년을 내다보고 대한민국의 지속 성장과 발전의 토대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책무는 바로 이러한 진지전 구축의 밀알이 되는 것이다.
싸리빗자루를 보자. 싸리나무 가지 하나하나는 연약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것을 묶어 빗자루를 만들면 강력한 청소 도구로 변신한다. 이 책의 출판에 참여한 저자들은 싸리나무 가지에 불과할지언정 대한민국 국민과 지식인 사회에 고하고자 한다. 자 이제 함께 싸리빗자루를 만들어 우리의 아들 딸들이, 후배 세대가, 전 세계인의 대접을 받으면서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 되는 장애 요인을 제거하자고.
우리에게 좌파니 우파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적 구속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한 가지 가치, 자유와 민주라는 전 세계적으로 입증된 국가 발전의 대안에 기초해서 한국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후대의 소득분배상 최하위 계층까지도 지속적으로 선대보다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드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유일한 가치다. 이 책은 이러한 일련의 노력의 첫 번째 결실이다. 5년 단임 대통령제가 한국에 끼치는 해악, 발전하고 성장하는 자유 민주시민을 만들기 위한 교육의 붕괴, 시장경제 참여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도덕적 감성과 의무를 망각하는 ‘천민자본적’ 기업가, 비대해졌지만 무능한 행정부의 대개혁, 실질보다 이념 중시의 공론화에 빠진 국회 등 더 많은 주제가 우리의 후속 작업을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분의 참여와 격려, 지적을 기대해 본다. 끝으로 용기 있게 책의 발간에 동의해 준 정재훈 윤성사 대표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21년 봄
지은이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