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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 제1강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
말씀 / 잠언 1:1-33
요절 /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문제를 만납니다. 그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람의 경험과 머리에서 나오는 지혜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잠언은 이 하나님의 지혜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히브리어로 ‘미쉴레’인데 ‘비슷하다’, ‘비교하다’라는 의미의 어원을 가집니다. 삶의 원리를 빗대 설명하는 비유를 말합니다. 한마디로 잠언은 실제 삶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입니다. 또 잠언은 ‘바늘 잠(箴)’+‘말씀 언(言)’의 합성어로 ‘바늘로 찌르듯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란 의미를 가집니다. 나쁜 길을 가지 않으며 어리석음을 벗어나도록 경계하고 깨우쳐주는 말씀입니다. 또 일본어 성경은 잠언을 ‘지혜의 샘’이라고 번역합니다. 잠언을 읽는 이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해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 잠언은 인생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품을 사면 사용 설명서, 메뉴얼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잘 읽지 않고 그냥 사용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그때서야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우리 인생의 매뉴얼이요, 지혜의 핵심을 모아놓은 엑기스이기에 여러 번 읽고 묵상하고 순종해야겠습니다. 그럴 때 잠언은 우리를 더욱 깊은 지혜의 세계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세계로 우리 삶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백성이 되도록 가르치고 훈육하기 위해 잠언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혜를 담은 잠언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마리의 제물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는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섬기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날 밤,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구하는 것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무엇을 구했습니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솔로몬의 간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듣는 마음’을 ‘지혜’를 구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지혜자로 세워주셨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로 잠언 3,000가지를 말했고 1,000여 개의 노래를 읊었습니다. 동식물에 대해서도 박식했습니다. 스바 여왕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솔로몬의 잠언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받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6절은 잠언을 기록한 목적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잠언을 통해 제일 먼저 얻을 수 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분별력이며 지식은 ‘앎’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전문적인 기술이나 어떤 물건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능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출28:3). 적당한 시기에 올바른 선택을 취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을 말하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5-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간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신적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재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경험과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혜와 지식을 얻는 필수 조건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또 ‘훈계’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훈계라는 말은 짐승이나 이방 민족에게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사용한 용어입니다. 잠언 3장 11,12절은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여기 사용된 ‘징계’는 ‘훈계’와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징계나 훈계로 표현되는 신앙적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신앙적 훈련을 받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또 ‘명철’은 ‘통찰력’으로 문제의 핵심을 보는 혜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 이처럼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로 가득한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면 이런 지혜, 훈계,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잠언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머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일지라도 무슨 판단하는 것을 보면, 어리석을 때가 많습니다. 여기, 어리석은 자와 평행을 이루는 것이 ‘젊은 자’입니다. 잠언에서 젊은이 또는 자녀는 인생의 경험이 부족하고 교육과 훈련을 충분히 받지 못해 무지하여 잘못된 판단을 하기 쉬운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악한 자들의 꾀에 넘어가 죄를 짓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로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할 때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모는 가르치는 자요, 자녀는 가르침을 받는 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가르침을 받는 자녀가 부모의 가르침을 잔소리로 여기지 않고 신중하게 듣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점차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아도 받아들이지 않아서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리석은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를 미련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사실 사람은 다 어리석고 미숙합니다. 로마서 1장 21,22절에 보면 타락한 인간은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근본적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습니다. 그래서 지혜와 훈계, 명철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솔로몬이 잠언을 기록한 것입니다.
3절도 보십시오. 잠언 말씀이 사람을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한다고 했습니다. ‘공의(righteousness)’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정의(justice)’는 재판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정직(equity)’은 공평, 올바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올바로 사는 것이 공의, 정의, 정직입니다. 또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당장 눈앞에 실리적인 유익만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잠언은 지혜와 공의, 정의, 정직을 추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잠언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가 소유하도록 도와줍니다. 세상에 수많은 학교와 학원들이 있지만 이런 영적 교훈들은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잠언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의 지혜와 공의, 정의, 정직을 추구하도록 도와줍니다.
잠언은 어리석은 자에게만 유익과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 있는 자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의 지혜는 지혜 있는 자에게 더욱 큰 도움이 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의 가치를 잘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밭에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하고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사는 것처럼 시간과 돈과 수고를 들여서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는 잠언을 듣고 학식을 더할 것이며 명철한 자는 삶을 올바르게 계획해 살아갈 수 있는 지략을 얻게 됩니다. 지혜에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는 평생 지혜를 추구해야 합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지혜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은 배울 기회가 생길 때마다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우리가 지혜의 말씀인 잠언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기 ‘경외하는 것’은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깨닫고 놀라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께 내 인생의 생사화복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늘 그분을 의식하면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잠언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것을 알기에 힘써 잠언을 배우고 순종하고자 힘쓸 것입니다. 그로 인해 참된 지혜와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잠언에 약속된 대로 부와 명예와 장수도 겸하여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 영멸을 피할 수 있으며 생명으로 인도받고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여자들은 잠언 마지막 장에 기록된 현숙한 여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잠언을 통해 얻고자 하는 지혜와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분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영적 소원을 마음에 품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솔로몬은 이스라엘 젊은이들을 ‘내 아들아!’ 부르며 지혜로운 부모에게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가르칠 때 부모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서고 자녀들은 부모의 권위 아래에 서서 배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의 훈계나 어미의 법은 부모들이 세상에서 배운 것이나 인생 경험에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버지가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했습니다. 또 탈무드에 보면, 어머니는 하나님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세우셨다고 기록한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의 말씀, 지혜의 말씀을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가르침이 잠언입니다. 자녀들은 이런 부모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잔소리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듣고 멀리하지 않는 것이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목의 금 사슬이라고 했습니다. 머리의 아름다운 관과 목의 금 사슬은 명예와 고귀함이 주어짐을 의미합니다.
가정은 자녀들의 신앙과 인생을 사는 지혜를 배우는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겉으로 볼 때 자녀들에게 안정적인 소유를 물려주는 것도 필요할 수는 있지만 실제는 신앙적 가르침과 인생을 사는 지혜를 심어주는 것이 자녀들을 성공적인 인생으로 이끌어줍니다. 어릴 적 부모에게서 듣고 배운 지혜의 말씀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자녀들을 명예롭고 고귀한 인생 살게 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자녀들이 아무리 착하게 자라준다 할지라도 세상은 그들이 바른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만은 않습니다. 자녀들을 꾀어내 세상의 풍습을 따라 살도록 끊임없이 유혹할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가르침과 세상 풍습을 따라 살아가는 두 세계 속에 어떤 길을 갈 것인가? 고민할 것입니다. 악인들이 자녀들을 꾀어낼 때 ‘우리’라고 한 것을 보면(11,12) 그들은 자녀들의 또래입니다. 그들은 자녀에게 자기들의 악한 길에 동참하라고 유혹합니다. 악한 일이라도 같은 또래가 유혹할 때 벗어나기 힘듭니다.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미리 자녀에게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라고 예방주사를 놓습니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15,16)”하며 아예 그들과 상종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으로 달려가며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했는데 죄의 쾌락에는 자극과 중독성이 있기에 아예 그들과 가까이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아버지는 악인들의 우매함을 새의 총명함과 대비시킵니다. 악인들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은밀하게 행하기 때문에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음모는 사냥꾼이 새들이 보는 앞에서 그물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사냥꾼의 덫을 본 새들은 그것을 피해 달아납니다. 이처럼 악인들의 음모가 사람들의 눈을 피하거나 속일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그들의 음모를 헛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파놓은 덫에 그들 자신이 걸리게 하십니다.
에스더서에 보면 ‘하만’이라는 아말렉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왕 다음 가는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고 절하는데 ‘모르드개’라는 유대 사람만 무릎을 꿇지 않고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은 이런 모르드개를 보고 심히 분노했습니다. 음모를 꾸며 그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모르드개의 민족인 유대인들도 전멸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살펴보시고 하만이 쳐놓은 덫에 하만 스스로가 걸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매달고 죽이고자 만들어놓은 나무에 하만이 달려 죽게 하십니다. 악인들의 결국이 이와 같습니다. 불의한 이득과 불의한 영광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이와 같이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 유혹할지라도 지혜로운 부모의 훈계와 가르침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편 1절 말씀처럼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잠언에서 가장 중요한 ‘지혜’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여자로 의인화된 ‘지혜’입니다. 사람들은 지혜를 얻는 것을 어렵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길거리에도 있고 광장에도 있고 시끄러운 길목과 성문 어귀와 성 중에도 있습니다. 지혜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찾아 길거리와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과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길목과 관리들이 모이는 성문 어귀와 사람들이 사는 성 중에 서서 힘을 다해 소리 높여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는 힘껏 외치며 간청하고 책망도 해봅니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22,23).” 어리석은 자들은 부모에게서 훈육받을 때부터 오랫동안 지혜를 거부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고집대로 하기를 좋아합니다. 또 변화를 싫어합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안주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곳이 어리석고 미련한 장소일지라도 그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었기에 돌이켜야 합니다. 지혜의 소리를 듣고 돌이키면 지혜는 그들에게 자신의 영, 지혜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의 초청에 관심이 없습니다.
기회의 신인 ‘카이로스’는 이마에만 머리카락들이 있고 나머지는 대머리입니다. 앞머리만 있고 뒷머리는 없기에 한 번 주어진 기회를 놓치면 붙잡을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지혜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지혜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24,25). 지혜의 책망을 업신여겼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지혜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것과도 같습니다(29,30). 결국 지혜의 부름에 응답할 기회를 놓쳐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은 재앙을 만나고 무서운 징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27,28).
그러나 33절을 보십시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오직 지혜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환난 날에도 평안하게 됩니다.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수많은 위기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다윗을 직접 겨냥해 쏘아대는 화살이 빗발치는데도 이상하리만치 화살이 스스로 빗겨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방패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 4,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였을 때 하나님이 그를 지켜 주셔서 안전하고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눈앞에서 큰 승리의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지혜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이 지혜의 교훈을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7,29). 또 아버지의 권면과 지혜의 초청은 ‘내 말을 들으라’로 시작해 ‘내 말을 들으라’로 끝이 납니다(8,33). 여기 ‘들으라’는 것은 ‘순종함’을 내포합니다. 이를 볼 때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이라고 했습니다(딤후3:15). 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고(고전1:24)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골2:3). 그러므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지혜인 하나님의 말씀, 지혜인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 시간 우리를 뜨겁게 열정적으로 소리 지르며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잘 반응하고 '듣는 마음'으로 순종하므로 평강과 생명을 누리는 삶, 명예롭고 존귀한 삶, 진정한 지혜자의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