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알고 주를 믿더라!(행9:32-43)
갈등
1. 사도행전 이야기(내러티브) 17번째 시간입니다. 사도행전은 1장부터 5장까지 베드로 중심으로 기록되었습니다. 6장은 교회가 부흥하며 일군들이 부족해서 교회를 섬길 일곱 명을 뽑았고, 이어서 일곱 일군들 가운데 스데반과 빌립의 사역 이야기가 소개되었어요. 사도행전인데, 사도들이 아닌 하나님의 특별한 일군들 이야기가 세 장에 걸쳐 길게 기록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직분에 상관없이 사도들의 역할을 그들이 하도록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이 성령 행전인 이유입니다. 빌립의 전도 이야기 이후 바울의 회심과 소명, 첫 전도 활동 이야기를 지난 두 시간 나눴어요.
오늘 본문에 다시 베드로의 사역 이야기가 나옵니다. 12장까지요. 이후는 바울 이야기로 사도행전을 마칩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누가 한 사람이기에, 그가 보고 듣고 아는 이야기들만 편집했어요. 그가 사도들의 행적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까지는 베드로 중심으로, 이후 사도들이 각자 흩어져 복음을 전했고, 누가는 바울과 로마까지 동행했습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바울의 주치의로 섬기며 복음 전파에 참여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사도행전 기록이 왜 이런 식으로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어요.
2.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후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 온 지역으로 이어졌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곳은 룻다와 사론, 욥바 등입니다.(지도를 영상으로, 욥바-오늘날 텔아비브, 룻다-텔아비브 공항) 32절,“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베드로가 룻다에 가기 전에 이미 성도들이 있었어요. 이 성도들은 누가 전도한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빌립이 전도하였다, 또 어떤 이는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있은 후 흩어져 이곳에 정착을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 다 맞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소식을 듣고 요한과 함께 지원군으로 사마리아에 왔어요. 이후 사마리아에서 이곳까지 온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애니아라는 성도를 만났습니다. 애니아는 중풍병자였고, 베드로를 만나기 전 8년 동안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때 34절,“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야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스데반과 빌립도 그랬지만, 베드로가 가는 곳에서도 이적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불치병인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라고 선언하니 바로 일어났습니다. 이 일이 베드로를 통해서 그때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갈등 심화
3. 룻다에서 베드로를 통해서 일어난 이 일이 그 지역 일대에 소문이 났습니다. 베드로를 통한 기적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마리아, 룻다 지역으로 이어졌어요. 성령이 임하시면 이런 일은 지역을 넘어서 다양하게 이뤄집니다. 우리 교회도 국내에서만 아니라, 선교지 순회사역을 하며 아시아-유럽-아프리카에서 가는 곳마다 성령이 다양하게 일하십니다. 욥바는 룻다에서 15km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도보로 약 세 시간 거리였어요. 이곳에는 36절,“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여제자라는 말은 사도행전에 여기에서만 나옵니다. 박해 전에 예루살렘에서 있다가, 박해 후 이곳으로 와서 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르가는 영양이란 말이고, 선행과 구제를 잘하던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룻다에 베드로가 와 있었고, 애니아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어요. 욥바 사람들이 급하게 두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의 청을 거절하지 않고 즉시 욥바로 달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렇게 살아요. 기도의 도움을 청하는 손길을 뿌리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4. 베드로가 욥바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이 베드로를 데리고 다비다의 시신이 있는 방으로 갔어요. 마침 그곳에 다비다에게 섬김을 받았던 욥바의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울면서 베드로에게 다비다가 생전에 그들을 위해 지은 옷들을 내보였습니다. 아까운 인물이 죽었으나 살아날 수 있기를 그들이 울면서 소망하였습니다. 이때 40절,“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베드로는 다비다를 위해서 기도하기 전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이 다 나가도록 청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조용히 하는 것입니다.
애니아가 중풍병에서 낫는 것도, 다비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달렸어요. 베드로가 이때 기도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비다를 살리실 것인지요? 베드로나 어떤 은사자나 사람은 누구나 무능력합니다. 아무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이라 빈손입니다. 은사는 결과를 보고 말할 뿐이에요. 베드로가 다비다를 향하여 일어나라고 선언한 것을 보면, 성령께서 베드로가 알도록 하셨어요. 애니야의 일보다 더 놀라운 일입니다. 이 일이 베드로를 통해서 그때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마리
5.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세 가지 사역에 집중하셨습니다. 삼중사역이라 부르죠.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치유(기적)를 행하셨어요.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다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약)성경을 통해서 또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 실제를 보여주시기 위해 치유와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통치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셀 수 없이 많이 보여주셨어요.
사람들이 치유와 기적을 보면서, 이 분이 누구이기에 불치병이 고침을 받고 또 자연이 순종을 하는지 물었습니다.(바다야 잔잔하라!)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 기사는 오직 수단에 불과했어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알고 복음을 믿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치유와 기적에만 매달렸습니다. 어느 날도 주님께서 병자들을 많이 고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에 주님이 기도하러 한적한 곳에 가셨어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까지 기도의 본을 보여주섰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처럼 기도해야 앞으로 주님처럼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에.
6. 제자들이 일어나 보니 예수님이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찾기 시작했고 주님을 만났어요. 사람들이 주님을 찾는다고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주님이 이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관심이 현실 문제 해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을요. 주님은 제자들이 이것을 깨닫도록 다른 마을로 가자. 나는 병 고치러 이 땅에 오지 않고 전도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룻다와 욥바에서 베드로의 두 가지 기적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치유와 기적은 오늘도 셀 수 없이 많이 일어납니다. 금주에도 기적의 소식이 들렸습니다. 지난 3월 프랑스 순회사역 때 허리가 좋지 않아서 기도를 받은 분이 나았다고요. 저는 그분의 이름도 몰랐고, 기도한 것도 잊었어요. 선교사님이 남편 기도를 부탁하면서 화상 전화 기도(페이스톡)를 한 후에 감사의 인사와 더불어 이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사도행전의 관심은 기적과 치유가 아니었습니다. 35절,“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7. 애니아가 중풍병에서 나은 모습을 본 사람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또 죽었던 다비다가 살아난 것을 욥바 사람들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어요. 전도자들이 최고로 즐겁고 기쁠 때입니다. 기적과 치유를 경험하는 것과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별개입니다. 기적과 치유가 동기부여가 되지만 동기부여를 받고 실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복음서에는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어요.
복음 제시
8. 예수님께서 한 번은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을 한꺼번에 고쳐주셨습니다. 그중에 한 명만 주님께 돌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렸어요. 주님은 이 한 사람을 보고,“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8-19) 이 한 사람-이방인, 사마리아인만이 몸도 낫고(나병으로부터) 영혼도 구원받았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유대인들은 나병만 고침을 받았고 끝내 주께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35절과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기적은 중풍병이 낫고,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이 아니에요. 이런 일을 경험하거나 보지 않고도 주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제일 큰 기적입니다. 두 가지를 다 경험하면 최고이지만요. 지난 3월 프랑스에서 대상포진이 나은 할아버지처럼요.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러 오시지 않았고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그의 전도는 말씀 선포와 가르치심, 그리고 치유를 통해서였어요. 그리스도의 복음 전도의 클라이막스는 십자가였습니다. 그의 희생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기대
9.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사운동(charistamtic movement)을 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과 빌립과 베드로 모두, 그들은 주님이 가르치고 본을 보여주신 대로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했어요. 복음 전파가 우선이었습니다. 은사 운동만 지향하면 신비주의에 빠집니다. 말씀 훈련과 양육이 동반되지 않는 치유 운동은 위험합니다. 우리 교회는 주님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합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도움-기도의 도움을 요청할 때 외면하지 않습니다. 물질 후원을 요청하면 아직은 외면합니다.
우리 형편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콩고처럼 선교지의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요. 이런 경우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공급하시고요. 선교지 신학대학이나 해외 교회에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할 때도 외면하지 않습니다. 신분과 정체가 분명하고 서로 신뢰할 수 있을 때 선교지 순회사역이 이어집니다. 내년에는 남아공과 르완다에 처음으로 갑니다. 이 시간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치유와 기적이 계속 일어나게 하시고, 이것을 계기로 복음이 전파되게 하소서. 치유와 기적을 경험한 이들은 증인이 되어 복음 전도와 선교에 참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