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
주방에서
박성목
‘먹방’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요즘이다. ‘먹방’이란 ‘먹다+방송’ 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터넷이나 TV, 영화, 드라마, 유튜브 등에서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이 새로운 음식들을 소개하거나 맛있게 먹는 장면들을 심심찮게 보여준다. 이런 방송을 보게 되는 시청자들은 그 음식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와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자신의 식욕에 따른 대리만족을 경험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쿡방(cook+방송)’이 등장하여 다양하고 새로운 음식 조리법을 선보이며, 맛있게 요리하는 방법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런 먹방이나 쿡방 덕분에 유명해진 탤런트, 개그맨, 가수, 운동선수도 있고, 어떤 요리연구가는 방송 출연과 번창하는 자신의 외식 사업으로 큰 기업을 일구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먹방이나 쿡방에 관심을 보인다. 이는 누구에게나 식욕은 있기 마련이고 먹는 데서 소소한 행복과 즐거움을 찾으려 하는 마음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시대 흐름 때문인지 요즘은 관광객들이 스마트폰을 들고 전국의 이름난 맛집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또 직접 음식을 조리해서 먹는 일에도 적극적이다.
여자들이 음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야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으나, 요즘은 젊은 남자들도 여자 못지않게 열성적이다. 가족이나 동료들이 함께하는 야외행사에서도 이제 남자가 요리를 하는 모습이 꽤나 자연스럽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세상 참 많이 변하고 있구나 싶다.
나는 직장에서 퇴직하기 전까지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해 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퇴직 후에는 주방을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내가 주방 일을 자원해서가 아니라 처지에 따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형상이다. 아내는 늘그막에 외손자를 돌본다. 아침 일찍 직장으로 출근하는 딸을 대신해서 하루 종일 어린 것 뒷바라지에 바쁘다.
아내가 딸네 집으로 가고 나면 나는 아침 점심 끼니를 내 손으로 찾아 먹어야 한다. 만들어 놓은 반찬을 찾아 밥을 먹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구마나 감자를 삶아 먹기도 하고 만두나 떡을 데워 먹기도 한다. 요즘은 라면, 칼국수, 냉면, 햇반 등 인스턴트식품들이 많으니, 그 조리법을 읽고 따라 하기만 하면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 좋다.
퇴직 후 백수가 된 지도 십여 년이 지났다. 황혼의 나이에 육아로 고생하는 아내가 힘들겠다 싶어 주방 일을 하나둘 도와주다 보니, 이제는 설거지, 청소하기, 쓰레기 처리, 각종 세금납부, 화분 관리, 때로는 밥짓기 까지 가정주부가 하는 많은 일들이 시나브로 내 담당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일들을 못마땅해 하거나 귀찮게 여기지 않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하려고 한다. 나는 선심 쓰듯 하는 집 안 일이지만 아내는 그런 일들을 무척 고마워한다. 가끔 돌아오는 아내의 칭찬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기분이 좋다. 이런 일들이 남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아내의 작전일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나는 괘념치 않는다. 일없는 백수가 할 일이 생기니 좋고 바쁜 아내를 도와주는 일이니 보람도 있다.
부모님은 경상도 산골에서 농사일을 하셨다. 논밭 몇 뙈기로 칠 남매 뒷바라지에 힘들고 어렵게 지내셨다. 어머니는 몸이 허약하신 분이라 많은 가족 건사에도 힘이 부치는데 농사일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는 유교적 가풍이 몸에 밴 분이어서 가정에서 여자들이 해야 할 일에는 무관심하신 분이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거나 어머니를 돕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끼니때가 되면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들고 와서 아버지 앞에 놓아야 식사를 하셨다. 어머니가 우리들에게 몇 번 들려준 아버지에 대한 한 토막 일화는 우리 남매들에게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웃음보를 터뜨리게 한다.
하루는 아버지가 어디로 출타를 하셨다가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 배가 고파 밥을 먹어야겠는데 밥 차려 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고 했다. 집에서 오리 정도나 떨어진 산비탈 밭에 까지 찾아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점심 못 먹었는데 밥 차려 줘’ 했다는 것이다. 요즘 세태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참으로 어이없고 기가 막히는 남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주방 일을 한다. 전문 직업으로 하는 요리사가 아니라 가정에서 아내 일을 조금 도와주는 나이 많은 어설픈 남편이다. 조력자이긴 하지만 나는 이왕 하는 일이면 즐겁게 하자는 생각으로 주방 일을 한다.
나는 ‘생활의 달인’이란 TV프로를 즐겨 시청하고, 또 ‘달인’이라는 말에 묘한 매력을 느낀다. 나도 어느 한 분야에서는 달인이 되고 싶다. 그래서 설거지를 할 때는 자칭 ‘설거지 달인’이 되었다고 아내 앞에서 솜씨를 내보이며 설거지를 한다. 밥을 지어 놓고는 ‘나보다 밥 잘 짓는 사람 어디 있나 찾아보라’고 헛소리도 한다. 때로는 ‘밀양박씨 문중 남자들 중에서 주방 일 이렇게 열심히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라고 자기 공치사도 한다.
그런데 이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께서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싶다. ‘못난 놈!’ 하며 혀를 끌끌 차실지, 아니면 ‘잘 한다!’고 칭찬하실지 그게 궁금하다. (♠)
첫댓글 세상 흐름에 맞추어 적절하게 생활하시는 모습
하늘에 계신 아버님도 흐믓하게 여기실거예요
응원합니다 박성목기자님~
글 잘읽었습니다
현재 삶에 잘적응 하심이 좋아보여요
글 잘봤습니다~!^^
이영옥님, 박영자님, 강화평님, 댓글 감사합니다.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해 나가시는 모습이 아름다운 박성목 기자님
멋집니다 👍
김영희님, 댓글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읽었네요.
시대에 맞추어
아주 잘 하고계시는데요
멋찌셔여.
먼나라에서의
아버님은 뭐라하실까요?ㅎ
오정애님, 댓글 고맙습니다.
바로 이시대~
나이드신 남편들의 자화상을 보는듯... 담담하개 쓴 한편의 수필~/
잘 읽었습니다.
방경희님, 댓글 고맙습니다.
현대 흐름을 너무도 잘 타시고 계시는 모범생님 같아요.
한마디로 멋진 생각에 박수로 환호하고 싶습니다.
남자가 부엌 출입이 부끄럽게 여겼던 시대 양반과 남녀 평등을 몰랐던 시대 우리의 웃 어른시대는 (어머님) 그렇게 엄격한 부분이 너무도 많았기에 아내라는 사람들은 더 힘들고 고달팠지요.
박기자님은 그 경험하셨기에 지금 부담없이 주방일을 잘하고 계신듯합니다.정말 듣기 좋고 문화에 적응하시는 모습에 감탄사하네요.
꽃순이님, 댓글 감사합니다.